97. 노벰버
나강인이 쫑파티 중인 퓨전 식당의 주방에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 필요한 재료를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그 식재료를 조금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따로 끓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 식당 주인과 주방장 모두 드라마 ‘푸른 하늘’을 좋아했다. 주방장이 흔쾌히 말했다.
“방송국에서 오늘 우리 식당을 통째로 빌렸으니까, 여기 있는 식재료는 다 갖다 써도 됩니다. 어차피 요리로 만들어드리려고 준비한 거니까요. 으하하하!”
그 재료를 다듬으려면 칼이 필요했다.
“아. 제 칼은 안 되고…. 저기 있는 공용이라도 괜찮으면 쓰시죠.”
나강인이 주방에 비치된 식칼과 도마를 빌려 식재료 몇 가지를 다듬었다. 그런 후에 다듬은 재료와 양념 몇 가지를 냄비에 넣고 뜨거운 물도 한 병 얻은 후에 주방을 나갔다.
식당 주인은 궁금했다.
“저 사람 말이야. 칼 쓰는 속도가 장난 아닌데? 나만 그렇게 본 거 아니지?”
주방장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어우. 속도만 대단한 게 아니죠. 칼질에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던데요?”
“연예인이 요리까지 잘하네.”
“연예인 맞아요? TV에서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요?”
“무명배우겠지. 알바로 식당에서 일하나 보다. 그냥 우리 식당으로 스카우트할까?”
나강인이 이보라의 테이블 위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올려놓았다.
이보라는 깜짝 놀랐다.
“앗! 강인 오빠?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나강인이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았다. 냄비에는 주방에서 다듬은 몇 가지 재료와 약간의 조미료가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탕을 끓일 수 없다.
신은하가 물었다.
“뭐하려고?”
“국물이 당겨서 뭐 좀 끓여보려고.”
이보라가 맞은편에서 눈을 반짝였다.
“앗! 혹시 저를 위해서요?”
“그냥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끓이는 겁니다만.”
“히히. 네! 그렇다고 칠게요!”
나강인은 식탁 위에 펼쳐진 요리에서 재료를 추가로 수급했다.
신은하가 다시 물었다.
“왜 회를 냄비에 넣어? 그냥 먹어야 맛있잖아.”
“회로 먹어도 될 만큼 고기 상태가 좋으니까 탕 재료로 딱이지.”
그는 다른 재료들도 적당히 냄비에 넣었다. 조미료를 넣을 때는 AI 전지인이 손의 움직임을 보조해 양을 조절했다.
피시방에서 요리를 팔 때는 조리과정 전체를 AI 전지인에게 맡긴다. 그런데 지금은 겨우 냄비 하나라 그렇게까지는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재료를 다 집어넣고 화력은 평소처럼 최대로 높였다.
야전 전술 조리법은 음식을 대량으로 빨리 만드는 게 특징이다. 지금은 소량을 만들지만 빨리 만드는 건 평소와 같았다.
그는 재료가 어느 정도 익은 후에 뜨거운 물을 붓고 마저 끓였다.
나강인이 이보라에게 말했다.
“더 끓이면 더 맛있지만, 지금 상태로도 먹을만할 겁니다.”
이보라가 생선살로 만든 맑은 탕 요리를 한 국자 퍼서 그녀의 그릇에 담았다. 그런 후에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맛을 보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머!”
숟가락이 빨라졌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칼칼하면서도 시원해서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인데, 국물맛이 감칠맛이 나서 더 좋아요. 게다가 이 생선살은!”
그녀가 원래는 회로 나왔던 익힌 생선살을 숟가락으로 떠서 국물과 함께 먹었다.
“맛이 깔끔해! 같이 먹은 국물은 매콤한 게 아니라 칼칼한 맛이 혀를 막 자극하고, 그리고 씹을수록 진한 맛이 나요. 몇 번 안 씹어도 입안에서 녹아버리지만요.”
신은하가 투덜댔다.
“아주 맛집 평가단 나셨네.”
이보라가 감탄하며 탕을 한 국자 더 펐다.
“진짜 맛있다. 이 탕 이름이 뭐예요?”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야전 취사형 복합 전투식량 2077-C형입니다.
그건 지구연합군에서 쓰는 정식 명칭이다. 나강인이 대답했다.
“잡탕입니다.”
“네?”
“그때그때 있는 재료를 넣고 끓이는 탕이라서 잡탕입니다. 이건 해산물이 많으니까 해물 잡탕.”
“아. 해물 잡탕.”
신은하가 손을 내밀었다.
“어디 나도 맛을….”
이보라가 국자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 건데?”
“양 많잖아! 너 혼자 이거 다 못 먹어!”
“쳇.”
이보라가 신은하에게 딱 반 국자만 떠주었다. 신은하가 그걸 보고 툴툴댔다.
“쪼잔하게 겨우 이거야?”
“먹기 싫으면 내놓든가.”
“먹을 거야.”
신은하가 해물 잡탕의 맛을 살짝 보았다. 그런 후에 나강인을 휙 돌아보았다.
“이런 맛있는 게 있었으면서 그동안 왜 안 만들어줬는데!”
“만들어달란 적이 없잖아.”
“아. 그런가?”
최진욱 피디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나강인 씨 요리 솜씨는 소문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 맛을 좀….”
이번 드라마가 잘된 덕분에 방송국이 최진욱에게 차기작도 빨리 만들자고 조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보라가 얼른 한 국자를 떠주었다.
“여기요. 최 피디님. 이거 드시고 다음 드라마에도 저 꼭 불러주세요.”
“아유. 그럼. 당연하지. 내가 이번에 보라 씨 덕 많이 봤잖아.”
드라마 작가 도주희도 슬그머니 그릇을 내밀었다.
“차기작 대본은 내가 쓰는데….”
“어머. 도 작가님도 드셔야죠.”
“국자 줘. 내가 뜰게.”
도주희가 국자를 받아서 건더기를 듬뿍 펐다.
두 사람은 해물 잡탕의 맛을 본 후에 활짝 웃었다.
“우와. 진짜 맛있어!”
“그러게. 딱 내 취향이야.”
두 사람이 워낙 큰소리로 감탄하는 바람에, 그걸 들은 배우와 스태프 몇 명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도주희가 그 사람들에게 국자를 넘겨주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어.”
다가온 사람들이 해물 잡탕을 한 국자씩 떴다. 다들 반응이 좋았다.
냄비에 남은 탕이 너무 빨리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그릇을 들고 눈치를 보는 배우나 스태프가 아직 많았다.
이보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거 내 건데….”
나강인이 제안했다.
“이건 이보라 씨 주고, 여러분이 드실 건 아예 솥으로 끓입시다. 주방에 빈 솥 있던데요.”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찬성! 그래야 나도 실컷 먹지.”
나강인은 주방에서 솥을 빌려 재료를 잔뜩 넣고 탕을 끓였다.
식당 주인이 주방장에게 물었다.
“본격적으로 요리하는 거 보니까 말이야. 진짜 칼 쓰는 솜씨가 장난 아니다.”
주방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질만 놓고 보면 저보다 나은데요?”
“재료 미리 볶는 저 기술은 어때? 할 수 있겠어?”
“아뇨. 저 많은 재료를 솥에 넣었는데도 가볍게 흔들면서 조리하잖아요. 보통 사람이 저러면 솥을 엎거나 팔이 빠질 걸요?”
“진짜 우리 식당으로 스카우트할까?”
“제 밑에서 일할 실력이 아닙니다. 호텔 일식당 주방장이라고 해도 믿겠던데요.”
나강인이 사람들이 쫑파티를 하는 홀로 돌아왔다.
“지금 드셔도 먹을만합니다. 더 끓이면 더 맛있지만요.”
성급한 몇 사람이 주방으로 몰려갔다.
나강인은 두 사람의 앞에 앉았다.
“이제 보라 씨 밥그릇에 손대는 사람은 없겠지.”
이보라는 잡탕을 아껴먹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럼 저 솥으로 끓이는 거랑 이거랑 같은 거예요?”
“아뇨. 잡탕은 원래 있는 재료를 적당히 넣어서 끓이는데, 재료가 좀 다르니까 맛도 좀 다릅니다.”
그래서 조리법도 다른 걸 사용했다.
“그럼 어느 게 더 맛있어요?”
AI 전지인이 대답했다.
- 병사들의 선호도는 이보라가 먹고 있는 2077-C형이 더 높습니다. 전투 스트레스 해소에 더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맛은 이게 낫죠.”
이보라가 활짝 웃었다.
주방에서 솥으로 끓인 해물 잡탕이 아예 밖으로 나왔다. 식당 종업원들이 그 탕을 그릇에 담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캬아. 맛있네.”
“나강인표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더니, 탕 하나만 먹어봐도 알겠어. 소문이 진짜였어.”
최진욱과 도주희도 솥으로 끓인 해물 잡탕을 먹었다.
최진욱이 말했다.
“이것도 엄청 맛있지만 그래도 보라 씨의 탕이 더 맛있는데?”
“이건 대량으로 끓여서 그렇겠지. 저건 정성을 다해 한 냄비만 끓인 거고.”
“그래서 그런가?”
야전 전술 레시피는 원래 대용량 조리용이다. 그래서 보통은 한 번에 많이 만들 때가 더 맛있다.
이보라에게 끓여준 탕이 더 맛있는 건, 특별히 신경 써서가 아니라 원래 그 요리가 더 맛있기 때문이다.
도주희가 물었다.
“내가 보라 씨한테 가서 좀 더 얻어올까?”
최진욱이 이보라를 돌아보았다.
“어…. 조금 전에는 내가 생각이 없어서 막 얻어먹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뜨끈하고 맛있는 국물 요리까지 나온 덕분에 사람들이 술을 더 마셨다. 피디와 작가도 상당히 취했다.
술에 취한 배우가 말했다.
“피디님. 우리는 설마 폭발 사고 같은 거 안 나겠죠?”
영화 햇살 좋은 날 천만 돌파 기념 파티 때는 드론 추락으로 인한 폭발 사고가 있었다.
최진욱이 웃었다.
“그래서 내가 지붕이 있는 곳을 빌렸잖아. 하하하.”
신은하가 그 대화를 듣고 살짝 걱정했다.
“손태민 감독님이 여기서 저런 소리가 나왔다는 걸 알면, 화 많이 내실 텐데.”
손태민은 그때 파편에 맞아 팔을 다쳤다.
이보라가 맞장구쳤다.
“세나 언니가 여기 있었으면 식탁 엎을걸? 그 언니도 그때 엄청 위험했었다며.”
오세나는 얼굴에 작업용 칼을 맞을 뻔했다.
“사람들이 남의 일이라고 말을 좀 막 하네.”
“다들 많이 취해서 그래.”
최진욱 피디가 술이 꽤 올라온 얼굴로 다가왔다.
“강인 씨! 우리 다음 드라마 같이해야죠! 내가 주연은 못 드려도, 진짜 비중 있는 배역 드릴게! 우리 도 작가가 이미 강인 씨 배역 다 생각해놨어요!”
나강인이 거절했다.
“제가 연기가 안 돼서요.”
“에이. 연기 잘한다는 소문 들었는데! 카메라 테스트부터 해봅시다! 연기를 소문처럼 잘하면 비중 더 높여드릴게! 아니, 연기 못해도 괜찮아요! 몸 쓰는 연기는 탁월하니까 대사만 거의 없게 하면 돼요!”
“많이 취하셨네요.”
최진욱이 웃었다.
“하하하. 오늘 기분 진짜 좋은 날이잖아요.”
퓨전 횟집의 쫑파티는 좋은 분위기로 진행됐다. 대신에 술에 취한 사람도 늘어났다.
경호원으로 온 민영희는 한쪽에서 나강인이 만든 해물 잡탕을 먹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맛있어? 싸움 잘하고 요리도 잘하는 남자가 내 이상형인 건 어떻게 알았데?”
신은하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슬슬 일어나야겠다.”
이보라도 가방을 챙겼다.
“나도 다 먹었으니까 집에 가야지.”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민영희가 숟가락을 던지며 이보라의 곁으로 달려왔다.
내부가 워낙 시끄럽고 술까지 취해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이 많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어디서 사고라도 난 거 아냐?”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차량의 충돌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추정됩니다.
창가 쪽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어? 저기서 교통사고 났는데요? 와. 트럭이 완전히 박살 났네.”
몇 사람이 구경하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그중에는 배우도 있었다.
“야. 오늘 음식도 맛있고 술도 맛있는데, SNS에 올릴 사진까지 얻겠네?”
“교통사고가 났는데 인성 좀 보소. 욕먹는 거 좋아하냐?”
“아…. 사진 찍으면 안 되겠구나.”
나강인도 퓨전 횟집 밖으로 나갔다.
1톤 트럭이 완전히 박살 난 상태로 기둥에 처박혀 있었다. 짐칸도 부서져서 화물 일부가 도로에 쏟아진 상태였다.
나강인이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운전석이 심하게 찌그러지고 운전사는 그 안에 끼어 있었다.
“상태는?”
- 부상자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꺼낼 수 있을까?”
- 차체 부품 일부가 신체를 관통한 상태입니다. 구조에 필요한 장비가 없습니다. 무리해서 꺼내면 부상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119구급대를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AI 전지인은 예전에는 부상자의 생명이 위독하다며 119구급대를 기다리지 않고 야전 응급 수술을 제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다리라고 했다.
“이 사람은 병원에 가서 수술할 때까지 버틸 수 있나 보네.”
- 그렇습니다.
나강인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부상자를 운전석에서 억지로 꺼내면 더 위험하니까 119를 기다리시죠.”
외과 의사 김중석이 달려오면서 외쳤다.
“제가 의사입니다! 제가 좀 보겠습니다.”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김중석. 이보라가 입원한 병원의 외과 의사이며, 이보라의 외사촌입니다. 문병 갔을 때 만났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보라 사촌오빠시네요?”
“아. 그때 그분이시군요. 일단 비키시죠. 제가 좀 보겠습니다.”
나강인이 뒤로 물러났다.
김중석이 환자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했다.
“와. 저게 하필 저길…. 부상자를 억지로 꺼내면 큰일 납니다. 119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김중석이 운전석에서 뒤로 물러났다. 구조 장비가 없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보라가 다가와 물었다.
“어? 중석이 오빠가 여기 왜 있어?”
“왜겠냐? 이모가 너 걱정된다고 하셔서 왔지.”
이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쫑파티 위치도 알게 됐고 핑곗거리도 생겼으니까, 나 보러 온 척하면서 여자 연예인 구경하려던 거 아니고?”
“어? 그게….”
“맞구나?”
김중석이 버럭 외쳤다.
“환자가 눈앞에 있으니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의사다!”
몇 사람이 그 말만 듣고 박수를 쳤다.
“와. 저 사람 의사래.”
“멋지다.”
이보라가 작게 말했다.
“창피하니까 좀 닥쳐.”
나강인은 두 사람이 떠들게 놔두고 화물차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화물칸은 뒤쪽이 심하게 부서진 상태였다. 화물 중 일부도 도로에 쏟아져 있었다.
“뭘 싣고가던 거지? 냉동식품 같은 거면 다 버려야겠다.”
나강인이 화물칸을 보았다. 찢어진 종이박스 안쪽에 커다란 통이 보였다. 나강인이 그 통 표면에 적힌 글씨를 읽었다.
“이게 뭐야? VTX?”
AI 전지인이 다급히 보고했다.
- 긴급 상황입니다! VTX-13을 발견했습니다!
“그게 뭔데?”
- 단독으로 존재할 땐 괜찮지만, 특정 물질과 조합하면 노벰버 B가 됩니다.
“노벰버? 그건 또 뭐고?”
- 강력한 폭탄입니다.
나강인은 당황했다.
“아니, 폭탄이 왜 탑차에 실려서 돌아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