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사냥꾼
나강인이 먼저 스마트폰으로 아이돌 그룹 천사전사단의 방송 영상을 검색했다.
“여기 나온 것처럼 해주면 될까?”
남자 아이돌 네 명은 깜짝 놀랐다.
“헉! 네!”
“그때 그 메이크업은 청담동 샵에서 받았는데!”
“이렇게 해주시면 진짜 감사하죠!”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말했다.
“하는 김에 쟤들 얼굴도 손봐주자.”
- 프프걸스를 대상으로 한 도색작업 중에 발견한 시행착오를 반영하여, 이번엔 더 잘 그리겠습니다.
“지인아. 너 혹시 남자 아이돌을 더 편애하냐?”
- 프프걸스를 더 편애하는 요원님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
나강인과 AI 전지인은 정식 화장법을 쓰는 게 아니다. 그들은 2082년식 군용 장비 도색 스킬로 아이돌의 얼굴에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했는데도 결과물은 겉보기에는 비슷했다.
게다가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아서, 겨우 20분 만에 네 명의 얼굴에 도색을 마쳤다.
“대박!”
“진짜 빨라!”
나강인이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단점이 쉽게 지워지는 거니까, 첫 번째 공연 후에 지워졌다 싶으면 당황하지 말고 고치러 와요.”
“넵!”
***
행사가 시작됐다. 두 아이돌 그룹이 번갈아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했다.
그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신나게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기분이 좋으니 노래도 더 잘 나왔다. 관객은 적지만, 오늘따라 반응도 평소보다 좋았다.
1차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들은 대기실로 쓰는 천막에 모였다.
“와아. 나 오늘 진짜 엄청 신나!”
“다음번 행사 때도 오늘 같으면 진짜 좋겠다.”
거울부터 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 화장 그대로야?”
“선생님! 여기 살짝 지워졌어요! 고쳐주세요!”
세 명의 화장에 조금 문제가 생겼다.
나강인은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틀어진 부분을 조금씩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도 점검하게 한 명씩 앉아봐요. 지금은 상태가 괜찮아도 정작 무대에 올라갈 때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막내 최지혜는 화장에 문제가 생긴 케이스라서 먼저 수정을 받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점검받는 동안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깜짝 놀랐다.
“앗! 우리 오늘 공연한 거 인터넷에 떴다!”
다른 아이돌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뭐? 벌써? 어디? 진짜?”
“여기 봐봐. 누가 찍어서 올렸어.”
최지혜가 스마트폰을 간이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여덟 명이 탁자 주변에 빙 둘러서서 그 작은 화면을 보았다.
인터넷에는 공연 동영상과 사진 몇 장이 올라와 있었다.
“와. 우리 팬이 여기까지 와서 찍은 거야?”
“아니야. 팬은 아닌데 축제에 왔다가 연예인이 보여서 그냥 찍었대.”
“이거 다른 데도 올라와 있을까?”
그들은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검색했다.
“어? 여기 게시판에 올라왔다. 제목 봐봐. 대박.”
[지방행사에 풀메이크업으로 출동한 생계형 아이돌]
“와! 우리 아는 사람인가 봐! 우리 팬이야?”
“우리가 생계형인 거 아는 거 보면 팬일지도 몰라.”
댓글도 줄줄이 붙었다.
- 나 얘들 안다. 프프걸스다.
- 아직 안 망했냐?
- 활동한다.
- 근데 이름이 왜 프프걸스이야?
- 프리티 프린세스 걸스.
- 작명 센스 실화냐?
- 이름을 프프 따위로 지으니까 인기가 없지.
- 얘들이 그래도 SAH 엔터 소속이다.
- 어? 거기 아이돌도 있었어?
- 남자팀 하나, 여자팀 하나 있다.
- SAH 엔터가 구멍가게는 아닌데, 걸그룹 이름을 어떻게 저렇게 지어놨냐?
- 보이그룹 이름은 천사전사단이다.
- 이름 짓는데 근본이 없구나. 버린 자식들인가?
천사전사단의 공연 영상도 올라왔다.
[풀메이크업 생계형 아이돌 2탄.]
- 와. 얘들도 메이크업에 힘 빡 줬네.
- 내가 덕질 좀 해봐서 아는데, 이건 대규모 공연이나 TV 방송에 나올 때나 하는 수준인데?
- 이쯤 되면 회사에서 버리진 않았다고 봐야지.
- 안 버렸다. 교통비에 기타 등등 하면 저런 소규모 행사는 뛰어봤자 생활비나 겨우 벌 텐데, 그런 공연을 풀메이크업으로 뛰는 거 봐라.
- 메이크업을 직접 했을 수도 있지.
- 나도 좀 아는데 저건 청담동 샵 스타일이다. 거기서 저런 메이크업 받으려면 돈 많이 든다. 그러니까 저 공연은 적자다. 아주 크게 적자다.
- 쟤들은 해체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구나.
- SAH는 예술 하는 사람들이 모인 회사라서 그런지, 투자 마인드가 특이하네.
막내 최지혜가 실실 웃었다.
“히히. 여기 봐봐. 우리보고 최선을 다한대.”
리더 소지영이 투덜댔다.
“그 앞에 해체할 때까지라고 써진 거 봐. 그 댓글은 칭찬이 아닌 거 같아.”
이 축제의 무대 공연은 한 시간 반짜리로 기획됐다. 두 아이돌 그룹이 먼저 공연을 하고 나서 다른 초대손님들이 무대에 올라왔다.
초대손님들은 주로 지역 아마추어 음악가나 음악 동호회 등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순서가 다 끝나갈 때쯤에 행사 스태프가 천막 입구를 열고 말했다.
“곧 여러분 공연입니다. 우리 행사 마지막 무대니까 신경 써주세요.”
최지혜가 얼른 대답했다.
“네에!”
잠시 후에 프프걸스가 먼저 무대에 올라갔다. 아까는 천사전사단이 먼저였다.
두 그룹 다 인터넷에 영상과 사진이 뜬 걸 보고 기분이 더 좋아졌다. 그들은 아까보다 더 신나게 공연했다.
공연 레퍼토리도 아까와 달랐다.
아까는 그들이 발표한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2차 공연도 같은 걸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잘 아는 트로트와 옛날 가요를 불렀다.
관객들도 신난 분위기에 휩쓸려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일어나서 박수를 치거나 춤을 추는 사람, 같이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신난 아이돌들은 교대로 무대에 올라가며 신청곡을 받아 앵콜송까지 불렀다.
결국 공연은 원래 예정보다 30분이나 더 이어졌다. 관객들도 좋아하고 진행자도 좋아하고 아이돌들도 좋아했다.
모두가 신나는 공연이지만 밤새도록 할 수는 없다. 마침내 공연이 끝났다.
무대에서 내려온 여덟 명은 밝게 웃으면서 짐을 정리했다.
“나 오늘 진짜 신났어.”
“나도.”
“나도.”
천사전사단 리더 남정석이 말했다.
“인터넷에 우리 영상 새로 떴다. 흐흐.”
사람들이 우르르 모였다.
“어디! 어디!”
남정석이 스마트폰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잘 노는 생계형 아이돌]
- 와. 진짜 잘 노네.
- 저거 진심으로 신나서 노는 거다.
- 영상만 보는데 내가 막 흐뭇하다.
남정석이 말했다.
“아까 그분이 또 찍어주셨나 봐.”
“자꾸 생계형 아이돌이래.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정확히 판단하지?”
“우리 팬인가?”
“어? 진짜 팬인가?”
프프걸스 리더 소지영이 현실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팬이었으면 영상 올릴 때 제목에 우리 이름도 적어줬겠지.”
“하긴. 우린 팬이 거의 없잖아.”
“그래도 누군지 찾아서 인사라도 하고 싶다.”
스크린샷이 첨부된 새 댓글이 올라왔다.
-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으면 화장이 무너진 애가 다 있냐?
소지영이 사진을 확대했다.
“어? 이거 누구야?”
“지혜네?”
“지혜야?”
막내 최지혜가 얼른 손뼉을 쳤다.
“자!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밥! 고속도로 휴게소 말고 이 근처에서 먹고 올라가야 더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강인이 이 근처를 지나간 건, 맛집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나강인이 제안했다.
“밥은 내가 살게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짬뽕 잘하는 곳이 있다니까, 거기서 짬뽕하고 탕수육 어때요?”
막내 최지혜가 외쳤다.
“앗! 메이크업도 다 해주셨는데 밥까지 사주시면,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진짜 많이 먹어요!”
아이돌 여덟 명은 정리한 짐을 회사 봉고차에 실었다. 1종 면허증이 있는 맴버들이 누가 운전할지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막내 최지혜는 아직 고등학생이고 면허증도 없다. 그러면 짐이나 옮겨야 한다.
그녀가 마지막 짐을 가지러 가며 실실 웃었다.
“내일도 오늘 같으면 좋겠다.”
갑자기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멧돼지다!”
AI 전지인이 즉시 보고했다.
- 야생동물을 발견했습니다. 멧돼지입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특징은?”
- 맛있습니다.
“야. 그런 거 말고.”
- 추정 무게 300kg입니다. 국내 멧돼지 중에서는 초대형급입니다. 돌진 공격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냥 산으로 쫓아버려야겠다.”
A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적이 민간인 최지혜를 발견했습니다.
막내 최지혜는 멧돼지를 보고 감탄했다.
“와아. 진짜 크다.”
멧돼지가 최지혜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 멧돼지가 방향을 틀었습니다. 직진 경로에 최지혜가 있습니다. 적, 돌진합니다!
갑자기 멧돼지가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최지혜는 당황했다.
“어? 어? 이, 이리로 오는 거야? 왜, 왜!”
그 멧돼지는 멀리서 봐도 컸는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보였다.
그녀는 너무 놀라서 피하지도 못했다. 옆으로 움직여봤자 멧돼지가 방향을 조금만 틀면 결국 들이받힌다.
다른 아이돌들도 당황해서 몸이 굳었다. 게다가 그들은 봉고차 근처에 모여 있었다. 멧돼지가 너무 빨라서, 그 위치에서는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혜야!”
“꺄악!”
나강인이 움직였다.
AI 전지인이 멧돼지의 돌진 경로와 나강인이 달리는 속도를 계산했다.
앞쪽에 최적의 점프 위치가 표시됐다.
나강인이 그 지점을 밟으며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그는 공중에서 몸을 회전하며 옆차기를 날렸다.
거대한 멧돼지의 몸통에 나강인의 공중 발차기가 콱 꽂혔다. 타격 지점의 가죽이 동심원을 그리며 크게 출렁였다.
“꿰에엑!”
최지혜의 근처까지 돌진했던 멧돼지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쭉 밀려났다. 거대한 멧돼지의 몸통이 그녀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강인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최지혜를 옆으로 밀었다.
“피해!”
그녀는 밀려나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옆으로 연달아 디뎠다.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원래 서 있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그쪽에는 동료들과 봉고차가 있었다.
프프걸스 리더 소지영이 얼른 달려와 그녀의 팔을 잡고 봉고차를 향해 뛰었다.
나강인이 천사전사단 리더 남정석에게 외쳤다.
“옆에 그 파이프 던져!”
남정석의 옆에는 대형 텐트를 칠 때 쓰고 남은 파이프가 몇 개 쌓여 있었다. 그는 얼른 그 파이프 하나를 주워 나강인에게 던졌다.
“여기요!”
나강인에게 걷어차인 멧돼지는 옆으로 자빠졌다가 금방 일어났다.
멧돼지가 이번에는 나강인을 보며 콧김을 뿜었다.
나강인은 날아온 파이프를 한 손으로 잡으며 불평했다.
“저놈을 잡으려고 작정하고 찼는데, 한 방에는 안 잡히네.”
- 국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초대형 멧돼지라, 맷집이 좋습니다.
“내가 어그로를 끌어야겠지?”
나강인이 파이프를 멧돼지 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달려들지 말고 그냥 나한테 와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멧돼지가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멧돼지의 덩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컸다. 마치 장갑차가 돌진하는 것 같았다.
아이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피해요!”
나강인은 옆으로 가볍게 점프해 멧돼지의 돌진 공격을 피하며 파이프를 휘둘렀다. 파이프가 멧돼지의 머리를 정확히 때렸다.
“꿰액!”
문제가 생겼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무기가 파손됐습니다. 적의 전투 의지가 더 강해졌습니다.
나강인의 파이프가 반으로 접혀버렸다.
나강인이 그 파이프를 버리며 외쳤다.
“다른 파이프!”
남정석이 얼른 파이프를 주워 던졌다. 하나로 모자랄까 봐 두 개를 연달아 던졌다.
“여기 있어요!”
나강인이 파이프를 한 손에 하나씩 잡았다.
“텐트용 파이프라 그런지 재질이 약해. 한 방에 잡는 건 어렵겠다.”
- 잡힐 때까지 힘을 조절해 패십시오. 전투 동선을 제안합니다.
허공에 멧돼지의 공격 경로와 회피 방향, 유효 타격 지점이 연달아 표시됐다.
머리를 맞고 구른 멧돼지가 다시 일어나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나강인이 이번에는 위로 점프하며 멧돼지의 머리를 발로 꾹 밟았다.
“꿰액?”
나강인이 머리를 밟은 채로 균형을 유지하며 파이프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파이프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힘만 썼다. 대신에 연속으로 때렸다.
“꾸에엑!”
두들겨 맞은 멧돼지가 발광했다.
나강인은 가볍게 점프해 땅을 밟으며 다시 파이프를 뻗었다. 이번에는 멧돼지의 머리만 노렸다.
나강인은 멧돼지의 머리를 파이프 두 개로 드럼을 치듯이 빠르게 때렸다. 아이돌들은 순식간에 십여 대를 때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와….”
“쌍검술이다.”
“멧돼지가 막 불쌍해 보인다.”
멧돼지는 두들겨 맞을 때마다 뒤로 물러나다가 바닥을 굴렀다.
“꾸에엑!”
쓰러진 멧돼지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겨우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방향이 나강인의 반대쪽이었다.
- 적이 전투를 포기했습니다. 적이 도주합니다.
멧돼지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나강인은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을 공격한 맹수를 풀어주면 나중에 다른 사람이 다칠 수 있다.
나강인이 막 일어난 멧돼지를 향해 점프했다.
멧돼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강인을 향해 펄쩍 뛰었다.
“꾸엑!”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멧돼지의 머리를 발로 콱 밟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마치 허공을 밟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걸음을 걸은 후에 땅에 착지했다.
멧돼지는 머리부터 땅에 처박았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적이 완전히 무력화됐습니다. 확인사살을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