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03화 (103/411)

103. 생계형 아이돌 II

나강인이 말했다.

“총도 없는데 확인사살은 무슨. 저 멧돼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파이프 두 개는 살살 다뤘는데도 구겨지고 비틀어져 고철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 파이프를 바닥에 버리고 멧돼지의 돌진 공격 대상이었던 막내 최지혜에게 걸어갔다.

“괜찮아요?”

최지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네! 저 엄청 괜찮아요!”

- 빠른 적 제거 덕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그럴 나이잖아.”

나강인이 아이돌들에게 말했다.

“그럼 저놈은 행사 담당자들에게 맡기고, 우린 짬뽕 먹으러 갑시다.”

***

나강인은 AI 전지인이 추천한 중식당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그곳은 짬뽕이 제일 유명하지만 짜장면과 탕수육도 평이 좋았다.

한창 잘 먹을 나이인 아이돌 여덟 명이 그 음식들을 흡입했다.

“진짜 맛있어!”

최지혜가 입가에 짬뽕 국물을 묻힌 채로 말했다.

“아까 거기선 괜찮았는데요. 차 타고 여기 올 때는 멧돼지한테까지 쫓기면서 이 일을 해야 하나,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는데!”

그녀가 이번에는 탕수육을 먹으며 활짝 웃었다.

“맛있는 거 먹으니까 도로 힘이 나요! 이런 고생까지 했는데 포기할 순 없지!”

프프걸스의 다른 세 명도 외쳤다.

“맞아! 오늘은 인터넷에 우리 행사 영상도 올라갔잖아!”

“그거 막 퍼질지도 몰라!”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 공기밥 시켜도 돼요? 짬뽕에 말아 먹게요.”

나강인이 물었다.

“공깃밥 하나면 돼?”

여덟 명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저도요!”

나강인은 이 여덟 명과 전투를 같이 치르고 밥도 같이 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놓게 됐다.

그가 진심을 담아 물었다.

“너희들 말이야. 혹시 회사에서 굶겨?”

***

그들이 한참 밥을 먹느라 바쁜 그 시간에, 인터넷에 영상이 하나 떴다.

그 짧은 영상에는 아이돌 여덟 명이 멧돼지의 돌진에 놀라는 모습과, 최지혜가 멧돼지에게 공격당하는 모습, 그리고 나강인이 멧돼지를 때려잡는 모습이 모두 들어있었다.

이번 영상은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이라 화질이 그렇게 좋진 않았다. 그래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영상은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기절한 멧돼지의 다리를 끈으로 묶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도 그 영상이 올라왔다. 이번에도 이전과 비슷한 뉘앙스의 제목이 달렸다.

[생계형 아이돌과 헌터의 멧돼지 사냥]

- 와. 저걸 잡네.

- 이도류냐? 이도류야?

- 더블 아이언 파이프 스타일이라고 해줘.

- 아니, 텐트 폴대로 저 커다란 멧돼지가 왜 잡히지?

-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텐트에 쓰는 거니까 쇠파이프 아닐까요?

- 그래도 배관용 쇠파이프보다는 얇고 가볍겠죠.

- 손은 가볍게, 타점은 정확히, 무기의 탄성은 최대로 이용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 진짜요?

- 이것이 바로 계룡분광검법!

- 에이. 진짜인 줄 알았네.

멧돼지를 잡는 영상은 그것 하나만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날 아이돌들이 공연한 영상도 같이 올라오는 경우도 많았다.

- 같이 올린 영상은 멧돼지에게 습격당하기 전에 했던 공연을 찍은 것입니다.

- 잘하네요.

- 노래 꽤 괜찮은데?

- 지방에서 왕밤 판촉용 소규모 행사를 하는데 풀메이크업으로 간 거 실화냐?

- 저런 수준으로 메이크업하려면 돈 많이 드는데….

- 공연 영상 두 개에 앵콜 영상까지 다 봤습니다. 얘들이 진짜 신나게 노네요. 이렇게 잘하는데도 못 뜨다니. 저 업계는 진짜 레드 오션이네요.

데뷔 무대 영상을 찾아와서 비교하는 글도 올라왔다.

- 이건 프프걸스가 딱 한 번 방송에 출연했던 때의 영상인데, 이때 메이크업하고 오늘 영상 메이크업이 똑같은데요?

- 그러네요. 방송 출연하는 날이면 소속사에서 작정하고 돈을 들여서 꾸몄을 텐데, 그걸 지역 행사장 소규모 공연에서도 하네.

천사전사단의 공연 영상도 비교를 위해 올라왔다.

- 거기서 같이 공연한, 같은 소속사 남자 아이돌 천사전사단 영상입니다. 얘들도 풀메이크업 했는데요?

- 예전에 방송 출연했을 때 그 메이크업 그대로네요.

SAH 엔터 홍보팀은 소속 연예인의 인터넷 반응을 수시로 체크한다.

무명 아이돌인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은 원래는 수시 체크 대상이 아니다.

오늘은 홍보팀에서 그 두 팀의 반응을 체크할 예정이 없었다. 그런데 홍보팀 직원이 오늘 있었던 다른 가수들의 대규모 행사 반응을 살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그 영상을 발견했다.

“어? 이거 우리 애들인데?”

홍보팀장이 물었다.

“뭔데?”

“프프걸스랑 천사전사단이요.”

“걔들? 오늘 오랜만에 행사 뛰러 갔잖아. 아까 지혜가 나한테 인사하면서 얼마나 자랑을…. 헉!”

홍보팀장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설마 사고라도 터졌어? 교통사고야? 다쳤어? 얼마나!”

“아뇨. 교통사고가 아니라….”

“후우. 놀라라. 사고가 아니면 이름이 뜰 리가 없는 애들이라서…. 어?”

자리에 앉았던 홍보팀장이 다시 일어났다.

“그럼 누가 시비 걸었어? 걔들 오늘 매니저도 없이 갔잖아! 싸웠냐? 쳤어? 이겼냐? 아니지. 이겨도 문제지.”

“아뇨. 그게 아니라요. 300kg짜리 초대형 멧돼지가 지혜에게 돌진….”

홍보팀장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지혜가 죽었구나!”

“아뇨. 죽은 게 아니라….”

“중상이구나! 사장님 어디 계셔!”

홍보팀장이 더 듣지도 않고 사장실로 뛰어갔다.

홍보팀 직원이 다급히 쫓아갔다.

“팀장님! 그게 아니라요!”

***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은 갑자기 쳐들어온 홍보팀장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병원 어디야!”

뒤따라 달려온 홍보팀 직원이 외쳤다.

“안 다쳤어요! 무사해요!”

“누가 안 다쳤는지가 뭐가 중요해! 누가 다쳤는지가 중요하잖아!”

“아무도 안 다쳤습니다!”

서재현은 멈칫했다.

“어? 진짜야?”

“네. 지혜가 다치기 전에, 다른 사람이 그 멧돼지를 때려잡는 영상이 인터넷에 떴어요!”

서재현이 넥타이를 풀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후우. 시껍했다. 야. 박 팀장. 너 진짜 이럴래?”

홍보팀장이 시선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지혜가 멧돼지에게 들이받힌 줄 알고….”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홍보팀장이 직원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 무슨 일인데?”

홍보팀 직원의 스마트폰에는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의 링크가 있다. 그가 그 영상을 재생한 후에 사장실의 대형 TV에 띄웠다.

“이건데요.”

그 영상에는 멧돼지가 나타나 최지혜에게 돌격하는 장면부터 나강인이 때려잡는 장면이 모두 들어있었다.

멀리서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이라 나강인의 얼굴까지 알아보긴 어려웠다. 그래도 어떤 수준으로 싸우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서재현이 그 영상을 보면서 말했다.

“얘들한테 전화해서 지금 상태 어떤지 확인해봐.”

홍보팀장이 프프걸스 리더 소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 질문과 간단한 대답이 오간 후에 홍보팀장이 서재현에게 보고했다.

“얘들은 지금….”

“많이 놀랐지?”

“짬뽕이랑 짜장면이랑 탕수육을 먹고 있다고….”

“어?”

“너무 많이 먹는 거 같은 눈치인데, 얘들이 오늘 같은 날은 먹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서재현은 당황했다.

“머, 먹어야지. 놀랐을 텐데 먹어야지. 하, 하하. 그런데 멧돼지를 잡은 저 사람은 누구래? 혹시 아는 사람이래?”

“예. 나강인 씨라는데요?”

“어? 뭐? 뭐!”

“옆에서 지혜 목소리도 들렸는데요. 밥도 나강인 씨가 사줬다고, 그러니까 되게 좋은 사람이라고….”

서재현이 모니터를 다시 보았다. 거대한 멧돼지를 파이프 두 개로 때려잡는 사람이 보였다.

“그, 그렇지? 저렇게 날아다니면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강인 씨밖에 없지? 그런데 나강인 씨가 왜 저기 있어?”

“지나가다 우연히 만났답니다. 지혜가 나강인 씨를 전에 구내식당에서 봐서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도 했답니다.”

서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늘이 애들을 도왔구나.”

“하늘이 아니라 나강인 씨가….”

***

나강인이 최지혜를 지키면서 멧돼지를 잡는 영상이 인터넷에 퍼졌다.

그 영상을 의심하는 사람도 생겼다.

- 이거 혹시 다 짜고 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작은 행사에 여덟 명 다 그 비싼 청담동 메이크업을 하고 가는 게 말이 됩니까? 위험한 순간에 멧돼지를 때려잡는 고수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요.

곧바로 댓글이 붙었다.

- 네. 저 멧돼지를 섭외해서 짜고 쳤겠죠.

- 그 회사에 저런 대형 멧돼지랑 출연 협상한 분이 있다더군요. 멧돼지가 안 나오려고 해서 웃돈도 줬대요.

- 출연료는 돈이 아니라 고구마로 준 거 아닌가요?

- 제2외국어로 돼지 나라의 말을 배웠을 듯.

- SAH 엔터에 오크랑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두둥!

- 취익! 취이익!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욕이 아닙니다.

처음 의심한 사람이 다시 글을 썼다.

- 그럼 멧돼지는 우연이었다 치고요. 그 쌍검술 고수는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답니까? 계룡산에서 수련하다가 멧돼지 잡으러 왔답니까? 아주 날아다니던데!

SAH 엔터 직원이 익명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 그분은 ‘햇살 좋은 날’ 무술감독님이세요. 원래 날아다니세요.

- 어? 나 그 영화 봤는데.

- 명품 액션 영화죠.

- 그 무술감독이 드라마도 참여했잖아요. ‘푸른 하늘’이요.

- 맞다. 그래서 그 드라마도 중반부터 액션이 쩔었죠.

처음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 그럼 무술감독이 거기 왜 나타납니까? 아이돌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 그분이 이번에 SAH 엔터에서 디지털 싱글 음반을 발표했거든요. ‘오늘도 걷는다’요. 그러니까 소속 아이돌과 모르는 사이는 아니죠.

- 어? 잠깐만요. 그럼 가수 댕댕이 그 무술감독입니까?

SAH 엔터 직원이 슬그머니 발을 뺐다.

- 저도 잘 모르는데, 그런 말을 친구한테 들었어요.

의심하는 글을 쓰던 사람이 결국 항복했다.

- 제가 착각했습니다. 어떻게 봐도 조작은 아니네요.

- 당연합니다. 대형 멧돼지가 쳐들어오는 걸 조작하려면 CG밖에 없는데, CG를 이렇게 빨리 만들 수는 없잖아요.

SAH 엔터 직원이 말했다.

“팀장님. 시키신 대로 ‘오늘도 걷는다’ 이야기를 슬쩍 끼워 넣었어요.”

홍보팀장이 칭찬했다.

“잘했어. 자연스러웠어.”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노래 홍보가 될까요?”

“그 노래는 이미 연예인들이 알아서 홍보 많이 해줬잖아. CF 협의도 내일 하는데, 거의 확정적이라더라. 거기에 이런 이슈를 장작으로 넣으면.”

홍보팀장이 음원 차트를 확인했다. ‘오늘도 걷는다’는 10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잘하면 뮤직쇼에 나갈지도 몰라.”

나강인은 공연이나 방송출연을 안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 가수가 꼭 출연해야 하는 음악방송에는 그 노래가 나오기 어렵다.

그런데 홍보팀장이 말한 뮤직쇼에는 한 주에 가장 순위가 높은 3곡을 후보로 올린 후에, 1등을 뽑는 코너가 있다. 거기서 선정된 곡이 뮤직쇼의 그 주 1등이 된다.

그 코너는 가수가 출연하지 않아도 순위만 높으면 방송에 내보내 준다.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가 있어? 아니면 다른 거라도 있어?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음악방송 한 번 타봐야지.”

***

신은하는 방송국 리포터와 인터뷰를 하다가 중간 휴식시간에 그 영상을 보았다.

그녀는 나강인이 오늘 프프걸스와 만났다는 걸 안다. 그래서 영상을 보자마자 누가 멧돼지를 잡았는지 눈치챘다.

“하다 하다 이젠 사냥까지 잘해. 헌터네. 헌터.”

그녀가 관련 영상을 더 찾아보았다.

그러다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의 메이크업 비교 영상도 보게 되었다.

“어?”

그녀가 보기에도 메이크업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누가 해준 거야? 우리 회사는 얘들한테 이렇게 지원하지 않는데?”

그녀가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왜?

“아직 애들하고 같이 있어?”

- 어. 내가 밥 샀다.

“잘했어. 걔들은 잘 먹어야 돼. 근데 멧돼지는 뭐야?”

- 근처 산에서 내려왔겠지. 그래서 잡았어.

“진짜 설명이 간단하네?”

- 뭐가 더 있겠냐.

“자세한 건 올라오면 이야기해줘. 돼지고기 요리랑 소주 마시면서 듣고 싶어.”

- 그러든가.

“근데 말이야. 얘들 메이크업는 누가 해주신 거야?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인가?”

- 나야.

“응?”

- 내가 했다고.

신은하가 잠시 당황하다가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애들 좀 보여줘 봐.”

나강인이 스마트폰의 방향을 돌려주었다.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의 앞에는 음식 그릇이 많았다.

- 앗! 안녕하세요!

- 언니! 사랑해요! 오늘 언니 덕분에 우리 진짜 최고로 좋아요!

“안녕. 혹시 술 마신 거 아니지?”

- 막내랑 운전할 애 빼고 쪼금 마셨어요.

“어…. 먹어. 많이 먹어. 오늘 고생했는데 좀 먹고 마셔야지.”

- 네!

“근데 말이야. 진짜 강인 오빠가 너희들 메이크업을 해줬어?”

아이돌 여덟 명이 앞다투어 말했다.

- 네!

- 너무 잘 나와서 안 지우고 있어요!

- 진짜 잘하세요!

“너희 거기 여덟 명이나 갔잖아. 어떻게 강인 오빠 혼자 그걸 다 했다는 거야? 그건 불가능하잖아.”

- 순식간에 하시던데요?

“어?”

- 한 명 하는데 5분밖에 안 걸렸어요.

신은하가 영상통화로 보이는 아이돌들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5분? 그게 말이 돼?”

- 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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