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일상
요원 다섯 명은 멧돼지 사냥 이야기의 다른 부분에 관심이 있었다.
“잠깐만. 그러니까 그 멧돼지를 때려잡는 영상 속의 그 사람이 나 사범님이었습니까?”
“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민영희가 자랑했다.
“난 짐작은 했어. 보통 사람은 대형 멧돼지를 공중에서 발로 밟아가면서 싸울 수 없잖아.”
“하긴. 나 사범님은 사람이 아니지.”
경찰이나 특수부대 요원이 맹수와 근거리에서 싸울 일은 없다. 그런데 쌍검술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경찰 요원 박순기가 물었다.
“나 사범님. 총권도에 쌍검술도 있는데, 왜 이름이 총권도입니까?”
나강인은 살짝 당황했다.
총권도라는 이름은 형사가 질문했을 때 둘러대려고 급히 지은 이름이다.
그는 강남 낙귀 사건 때는 총을 쏘거나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싸웠다. 장검은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무술 이름을 총권도라고 지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총권도라는 이름에 칼이나 검이라는 글자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나강인이 둘러댔다.
“총권도는 본질을 수련하는 무술입니다. 무술의 본질을 깊이 파고들다 보면 쌍검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무기도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신은하가 옆에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음음. 만류귀종. 원래 고수는 무기를 가리지 않지.”
나강인이 계속 말했다.
“다만 지금 시대에는 총과 맨손 격투가 중요하죠. 그래서 그 부분에 더 중점을 둔다는 의미로, 칼권도나 총칼도가 아니라 총권도가 된 겁니다.”
박순기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저희가 기초 단계를 넘어서면 쌍검술도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실전 검술을 배워서 어디 쓰게요?”
경찰 요원 박순기가 씩 웃었다.
“삼단봉 두 개를 들고 범인을 잡고 싶습니다.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니까…. 기초 훈련이 편한가 봅니다?”
“예?”
다른 요원 네 명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쌍검술은 안 배워도 됩니다.”
“순기 혼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럼 박순기 요원님만 훈련이 끝난 후에 추가로 좀 배우시죠.”
박순기가 당황한 얼굴로 다른 요원들을 돌아보았다. 다섯 명이 돌아가면서 배우는 것과 한 명이 집중적으로 배우는 건 힘든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
“다들 같이 쌍검술을….”
다른 요원들이 얼른 말했다.
“순기 넌 원래 사서 고생을 잘하더라.”
“난 총이 좋아. 기초 단계를 넘어서면 근접 사격술을 배울 거야.”
“나도.”
“나도.”
나강인은 아이돌 여덟 명과 요원 다섯 명의 훈련을 교대로 진행했다.
천사전사단 리더 남정석이 훈련받는 요원들을 보며 말했다.
“강인 형님한테 배우는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사문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 아냐?”
“무술 이름이 총권도니까, 문파 이음은 총권문인가?”
“와! 그럼 저 형님들이랑 누나가 우리 사형이나 사매인 거야?”
총권도 기초 훈련은 실전 같은 격투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일반 훈련생이 여덟 명이나 생기는 바람에 요원들이 받는 부담이 확 줄어들었다.
그날 훈련이 끝났다.
평소보다 덜 힘들게 훈련을 마친 요원들이 활짝 웃으며 아이돌 여덟 명에게 말했다.
“다음에 연습할 때도 꼭 우리가 훈련받는 날 해라. 아. 전화번호를 알아야 날짜를 물어보지?”
박순기가 명함을 주며 말했다.
“어려운 거 있으면 그냥 전화해. 형이 경찰이야.”
남자 아이돌들이 환성을 질렀다.
“우와! 경찰!”
다른 요원도 얼른 나섰다.
“난 특수부대.”
“우와아! 특수부대!”
정보기관 요원은 소속을 말해줄 수 없다.
“어…. 난 김 과장이야.”
“에이.”
“쩝.”
경호관 최남수가 말했다.
“난 청와대 경호처에 있는데….”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큰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최남수가 다른 요원들을 보며 씩 웃었다.
“억울하면 너희도 청와대 파견근무 지원하든가.”
민영희가 실실 웃으며 일어섰다.
“난 정부 일도 하지만 민간 일도 해. 연예인 경호도 가끔 맡는데, 너희도 유명해지면 나 부를 수 있다?”
막내 최지혜가 얼른 손을 들었다.
“앗. 저 언니 본 거 같아요! 몇 달 전에 한수지 선배님이 공격당했을 때, 미친놈을 업어치기 한 방으로 때려잡은 그 경호원 언니!”
“우와아아아아! 나도 그 영상 봤어! 그 경호원 누나가 누나예요?”
“누나! 누구누구 경호해봤어요?”
민영희가 다른 요원들을 보며 씩 웃었다.
“봤어? 너희는 공무원이라 이런 거 못 하지?”
나강인은 지구연합 예비군 최하급 병사를 위한 기초 체조 훈련을 그날만 가르치고 끝냈다.
CF 촬영은 나흘 뒤다.
나강인은 아이돌들에게 당부했다.
“너희는 몸 균형 틀어진 것부터 잡아놔야 해. 그게 안 잡히면 CF 찍을 때 망한다. 그때까지 오늘 배운 거 열심히 연습해라.”
“넵! 하루에 두 번씩 할게요!”
“더 많이 해라.”
***
이튿날 신은하가 나강인의 제작 거점을 찾아왔다.
“여기 메이크업용 화장 도구를 풀세트로 가져왔어. 이건 아예 여기 보관할게.”
나강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 한 번이 끝이 아니구나?”
“히히.”
“맘대로 해라. 네 얼굴이지 내 얼굴이냐. 화장은 뭐로 할래?”
신은하가 나강인의 컴퓨터로 인터넷을 검색해 영상을 하나 찾았다.
“재작년에 상 받을 때 찍은 영상인데, 난 이때 메이크업이 참 마음에 들어. 그 샵에 다시 가봤는데, 그날 어쩌다 평소보다 잘 나온 거라서 똑같이는 못 해주더라고.”
“그게 아니라 그때는 지금보다 2년 더 젊….”
“메이야?”
“아니다. 앉아라.”
나강인이 하는 건 기초부터 탄탄하게 쌓는 화장이 아니다. 지형지물 정밀 묘사 스킬과 군용 장비 도색 스킬을 사용해 그리는 그림이다.
나강인이 영상에 나온 메이크업과 거의 똑같은 그림을 신은하의 얼굴에 그리면서 말했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정식 화장보다 쉽게 무너진다. 그러니까 이 화장 했을 때는 험한 일은 하지 마라.”
“응.”
“이제부터는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AI 전지인의 나강인의 손을 보조해 움직인 덕분에 화장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영상과 95% 유사한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끝났다.”
신은하가 거울을 천천히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녀가 곧바로 활짝 웃었다.
“어머. 이거야! 내가 원한 게 바로 이거라고!”
“다 됐으면 가라.”
신은하가 배시시 웃었다.
“혹시 바빠?”
신은하가 제대로 화장하고 웃으니까 평소보다 더 예뻤다.
“왜?”
“아니. 오늘 가는 시사회 초대권은 원래 두 장을 받았거든. 그리고 메이크업에 문제 생기면 고쳐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영화 같이 보자고.”
“음…. 그 영화 재미있나?”
“그럴걸?”
“알았다. 가자.”
“아싸!”
***
시사회가 열리는 영화관 앞에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연예인들이 한 명씩 포토존에 올라가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한 대화도 주고받았다.
포토존에는 이미 다른 연예인이 있었다. 신은하는 한쪽에서 그녀의 순서를 기다렸다.
오세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 은하도 왔구나?”
“네. 언니도 왔어요?”
이보라가 신은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메이크업 어디서 했니?”
“잘 나왔죠?”
“나쁘진 않네. 청담동에 있는 샵이지? 딱 그 스타일인데?”
“아니. 강인 오빠가 직접 해줬어요.”
오세나는 당황했다.
“응?”
신은하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키며 대놓고 자랑했다.
“이거 강인 오빠가 한땀 한땀 손으로 직접 해준 거예요.”
오세나는 믿지 않았다.
“얘가 지금 약을 파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무술감독이 어떻게 메이크업을 이렇게 잘해?”
“강인 오빠는 다 잘해요.”
“응?”
신은하가 씩 웃었다.
“언니처럼 강인 오빠하고 친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그런 게 있어요.”
“야. 나도 곧 친해질 거거든?”
“네네.”
나강인이 신은하와 같이 기자들 앞을 지나가면 스캔들이 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부러 이 극장 시설관리 직원과 비슷한 옷을 입고 왔다. 그래야 기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완벽한 위장이지.”
- 점퍼가 비슷해 얼핏 보면 직원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아닌 걸 알 수 있습니다. 어설픈 위장입니다.
배우 김연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극장 로비 뒤쪽을 지나가는 나강인을 발견했다.
김연근이 손을 들었다.
“어이. 거기.”
나강인이 김연근을 돌아보았다.
“봐라. 날 직원인 줄 알잖아.”
김연근이 손짓했다.
“그래. 당신 말이야.”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누구야? 여기 사장이야?”
- 배우 김연근입니다.
“배우가 왜 초면에 반말이야?”
김연근이 나강인을 향해 인상을 썼다.
“대답할 줄 몰라? 아, 됐고. 여기 담배 피울 만한 곳이 어디야? 기자들이 못 보는 그런 곳 말이야.”
나강인이 투덜댔다.
“아.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 참지 마십시오. 담배를 잡을 손가락 두 개를 똑 분지르는 걸 추천합니다.
김연근이 나강인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뭐야? 내 말이 안 들려? 너 이 극장이 나 같은 배우 덕에 먹고 사는 거 몰라? 그리고 여기 홍 이사님하고 내가 같이 술도 먹는 사이야! 왜 태도가 이렇게 삐딱해?”
- 저 건방진 손가락을 당장 분지르십시오.
나강인이 김연근 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천천히 들어 앞으로 뻗었다.
갑자기 배우 김유찬이 쓱 다가왔다.
“이야아. 강인 씨. 영화 보러 왔나 봐요?”
나강인이 여전히 김연근을 보며 짧게 대답했다.
“초대권이 생겨서.”
“초대권 필요하시면 저한테 말하시지! 제가 다 구해드렸을 텐데.”
김연근은 당황했다.
‘어? 뭐지? 김유찬이 왜 저 사람 이름을 알아? 이 극장 직원이 아닌 건가?’
그는 나강인이 젊어 보이고 직원과 비슷한 옷까지 입고 있어서, 당연히 이 극장의 말단 직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김유찬이 평범한 극장 직원에게 먼저 초대권을 구해주겠다고 제안할 리 없다.
김연근이 나강인의 옷을 다시 보았다.
‘어? 여기 직원 옷하고 조금 다른 거 같은데?’
그가 삿대질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혹시 기자나 영화 관계자인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누구신지….”
손태민 감독이 마침 그곳을 지나가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어!”
김연근도 손태민을 발견했다. 그는 얼른 뛰어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김연근입니다!”
“아. 반가워요. 내가 지금….”
“햇살 좋은 날 정말 감명 깊게 봤습니다. 다음 영화 만드실 때 저를 꼭 불러주십시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 내가 바빠서.”
손태민이 나강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김연근은 손태민을 졸졸 뒤따라갔다.
손태민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강인 씨도 왔네?”
“초대권이 생겨서요.”
“앞으로 초대권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가 싹 다 구해줄게!”
“유찬 씨도 같은 말을 하던데요.”
“하하하.”
배우 김연근은 크게 당황했다.
‘저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손 감독님이 기자를 보고 이렇게까지 반가워할 리가 없는데?’
손태민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강인 씨. 내가 시나리오 빨리 쓰는 거 알지? 지금 초고는 거의 다 썼는데 볼래?”
“다 쓰면 보여주시죠.”
“그럴까? 흐흐. 그럼 내 영화에 꼭 나오는 거다? 나 이거 강인 씨가 도와준다고 믿고 쓰는 거야. 강인 씨가 빠지면 이 시나리오 바로 폐기야. 폐기.”
“봐서요.”
김연근은 이제 혼란상태에 빠졌다.
‘설마 배우야? 손 감독님이 매달릴 정도로 대단한 배우를 난 왜 처음 봐?’
그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 계속 있으면 난 엿 되겠다.’
김연근이 눈치를 보면서 뒷걸음치다가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김유찬이 도망치는 김연근을 보며 말했다.
“강인 씨한테 시비 거는 사람이 다 있네요.”
손태민이 물었다.
“무슨 소리야? 김연근이 강인 씨한테 시비를 걸었어? 아니, 그러다 잘못 맞으면 죽을 텐데?”
“그래서 제가 얼른 나섰죠. 저 사람은 내가 살려준 거 알려나 몰라.”
나강인이 말했다.
“제가 사람을 막 죽이고 그러진 않습니다.”
“참지도 않을 것 같았는데요.”
“그냥 손가락 두어 개만 부러뜨리려고 했죠.”
“하하하.”
김유찬이 제안했다.
“그러니까 나랑 사진 한 방만 같이 찍어서 SNS에 올리자니까요. 얼굴이 널리 알려지면 저런 사람은 싹 사라질 겁니다.”
“됐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기자들도 많이 왔다. 나강인은 김유찬과 앉았다.
신은하는 두 칸 떨어진 자리에서 영화를 봤다.
김연근은 일찌감치 사라져서 시사회를 할 때는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서 신은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김연근? 성격에 문제 많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였네.”
오세나가 슬그머니 다가와 말했다.
“어머. 나 걔랑 영화 한 적 있는데. 다음에 걔 보면 내가 따끔하게 혼내야겠다.”
“언니 아직 안 갔어요?”
“우리 햇살 좋은 날 팀만 따로 뒤풀이 가는 거 맞지? 그래서 안 갔어.”
손태민이 활짝 웃었다.
“그래! 우리 다 같이 가서 한잔하자고. 내가 살게!”
분위기가 순식간에 회식 비슷하게 변했다.
신은하가 작게 투덜댔다.
“아이 씨. 이게 아닌데. 단둘이 오붓하게 마시고 싶었는데, 요즘 날파리가 너무 많이 꼬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