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07화 (107/411)

107. 자연 체조

며칠 뒤에 나강인은 백한수려의 스포츠 화장품 CF를 찍으러 갔다.

그는 CF를 찍기 전에 아이돌 여덟 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며칠 전보다 몸의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나강인이나 AI 전지인의 기준에는 한참 못 미쳤다.

- 이 병아리들은 전장에 투입해봤자 쓸모가 없습니다. 아군의 발목이나 잡을 겁니다.

“그러게 말이다. 그냥 내가 가면 쓰고 들어가서 재들을 다 날려버리는 걸 찍자고 할 걸 그랬나?”

- 화장품을 가면 위에 바르면, 팔릴 리가 없습니다.

“아. 이거 화장품 CF지.”

신은하는 요즘 영화나 드라마는 따로 준비하는 게 없다. 손태민 감독이 준비하는 영화는 시나리오가 완성되길 기다리고 있지만, 다른 건 당분간 생각이 없다.

시간이 남는 그녀는 나강인이 CF를 찍는 곳에 따라왔다.

그런데 오늘은 이보라도 그곳에 있었다.

신은하가 이보라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평가했다.

‘가볍게 대충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시간은 했을 것 같은 은은한 화장. 일상복처럼 보이지만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

“아주 작정을 했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보라가 배시시 웃었다.

“강인 오빠가 오늘 CF 찍는다길래 응원 왔지.”

“넌 응원하지 마.”

“생명의 은인이신대 왜애?”

신은하가 주먹을 쥐었다.

“이게 지금 어디서 귀여운 척을. 강인 오빠가 지금은 네 목소리 못 듣거든?”

이보라가 귀여운 표정을 풀며 평소 목소리로 말했다.

“야. 연기 연습한 거야. 연기 연습.”

“그리고 강인 오빠는 내 생명을 너보다 훨씬 더 많이 구해줬거든? 그러니까 겨우 한 번 가지고 들이밀지 말지?”

이보라는 강남 자칼 사건이나 낙귀 해적단 사건의 내막은 모른다. 그녀가 아는 건 강원도 세트장에서 나강인이 신은하를 구해줬다는 것 정도다.

이보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슨 이야기야? 가르쳐주면 안 돼?”

신은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응. 안돼.”

나강인은 결국 얼굴까지 뒤집어쓰는 녹색 전신 쫄쫄이를 다시 입었다.

나강인이 불평했다.

“내가 쫄쫄이 이거 다시 안 입으려고 쟤들에게 체조도 가르쳐주고 훈련까지 시켰는데 말이야.”

신은하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활짝 웃었다.

“와아! 그거 절대로 안 입는다더니 다시 입었네?”

“넌 웃지 마라.”

“안 웃을게. 흐흐.”

“그렇게 웃지도 마라. 비웃는 거 같잖아.”

“에이. 아니야.”

이보라가 슬쩍 끼어들었다.

“어머. 강인 오빠는 쫄쫄이도 멋있다.”

신은하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보라야. 너 드디어 미쳤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싸. 난 멋있게 보이니까 내가 이겼다!”

“이런 이상한 거로 이기지 마!”

나강인이 손을 흔들었다.

“하나는 대놓고 놀리고, 다른 하나는 편드는 척하면서 놀리고. 둘 다 가! 가란 말이야!”

백한수려에서는 사장 딸이면서 홍보실 직원인 백미소가 촬영장에 찾아왔다.

그녀는 나강인이 아이돌들을 동원해 이 CF를 찍자고 제안했을 때 바로 찬성했다. 그녀의 생각으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강인이 대단한 화학자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진짜 천재는 저 나이에도 놀라운 업적을 만들 수 있다지만….’

녹색 쫄쫄이를 입고 촬영장을 돌아다니는 나강인이 천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매드 사이언티스트인가?’

촬영은 순조로웠다.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 여덟 명은 가상의 맹수를 상대로 싸우는 연기를 열심히 했다.

사람끼리 치고받는 전투가 아니라 나강인이 자주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일부 동작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강인은 필요할 때마다 아이돌의 동작을 크게 보이게 만들거나, 점프를 높게 하는 걸 도와주었다.

휴식시간에 막내 최지혜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우리 어땠어요? 잘했어요?”

나강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CG 하는 분들이 욕 많이 하겠다. 어떻게 동작이나 타이밍이 이렇게 안 맞냐? 저기 맹수가 있다고 상상하면서 싸우는 게 그렇게 어렵나?”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은 지금 AR 렌즈를 통해 홀로그램 맹수를 보고 계십니다. 상상하시는 게 아닙니다.

나강인은 홀로그램 맹수 덕분에 아이돌들이 얼마나 헛손질이나 헛발질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그 동작을 교정해줘도, 어느 정도의 이질감은 여전히 남았다.

“한 일주일쯤 더 그 체조를 가르치면서 굴려야 하나?”

근처에 있던 백미소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돌 여덟 명이 촬영 전에 하던 체조가 생각났다.

‘나강인 씨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쫄쫄이를 입겠다고 했지?’

그녀가 CF 감독에게 제안했다.

“아까 그것도 찍는 게 어때요?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이 촬영 전에 몸을 풀던 그 동작이요.”

“아. 그거요? 느낌이 괜찮았죠.”

CF 감독이 아이돌들에게 그 체조에 관해 물었다.

막내 최지혜가 나강인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건데요?”

“나강인 씨가?”

감독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클라이언트가 그 체조도 CF에 쓰자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나강인이 고민하는 척하며 AI 전지인에게 물었다.

“이 체조는 원래 병사 훈련용이잖아. CF로 이걸 본 민간인이 따라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은?”

- 일반인이 단순히 영상만 보고 따라 하면, 다칠 수 있습니다.

“안 다치게 하려면?”

- 예비군 부상자 재활 운동을 위해 쉬운 동작만 남긴 기초 체조가 있습니다. 부상 위험이 없는 게 장점입니다.

“그거 딱 좋다.”

- 훈련 효과가 매우 작습니다.

“그 말은 자세교정 효과가 있긴 있는 거잖아. 그거로 가자.”

나강인이 CF 피디에게 말했다.

“얘들이 배운 운동을 시청자가 함부로 따라 하면 다칩니다.”

“아쉽네요. 그림이 잘 나올 거 같았는데.”

“대신에 위험한 동작은 모두 뺀 간단한 버전이 있습니다만.”

“아. 그거라도 찍을까요?”

나강인이 아이돌 여덟을 모았다.

“쉬운 거 가르쳐줄게. 원래 체조에서 힘든 동작만 뺀 거니까 이건 금방 배울 거다.”

막내 최지혜가 원망했다.

“너무해요! 그런 쉬운 게 있으면 처음부터 그걸로 하지!”

“그럼 지혜 혼자만 정식 체조를 하자.”

“죄송합니다아! 살려주세요!”

아이돌들은 지난 며칠간 정식 버전의 교정 체조를 연습했다. 게다가 원래 댄스 연습을 많이 해서 몸을 쓰는 건 익숙하다.

그들은 쉬운 버전의 교정 체조를 순식간에 배웠다.

정식 체조는 보기엔 화려하지만 어려운 동작이 많았다. 그런데 간단한 버전의 체조는 화려한 맛은 없지만 움직임이 자연스러웠다.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CF 감독이 감탄했다.

“이야아. 가상의 맹수를 상대로 치고받고 싸우던 것도 좋지만, 난 이게 더 느낌이 좋은데?”

감독은 다양한 조합으로 체조하는 아이돌들을 찍었다. 한 명, 두 명, 네 명, 남자끼리, 여자끼리, 여덟 명 단체 등등 조합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이제 알아서 찍는 단계로 들어갔다.

덕분에 나강인은 쫄쫄이를 입을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아예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카메라 앵글 밖에서 신은하와 이보라가 그 체조를 따라 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여기서 허리를 더 돌려야 하지 않나?”

신은하가 말했다.

“강인 오빠한테 나중에 제대로 가르쳐달라고 해야겠다. 둘이서. 따로.”

“나도 같이 하자. 셋이서.”

“너는 빠지세요. 어딜 눈치 없이 끼니?”

“눈치가 있으니까 낀다는 생각은 왜 못해?”

나강인은 알아서 돌아가는 촬영장을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저걸 찍자고 할걸. 그럼 이렇게 편한데.”

- 저런 수준의 훈련으로는 예비군 최하급 병사조차 될 수 없습니다.

“저 중에 넷은 어차피 군대에 갔다 오면 예비군이 돼.”

백한수려 홍보팀 백미소가 다가왔다.

“저 체조는 보고 있으면 뭔가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저도 요가나 필라테스를 꽤 오래 했는데, 느낌만 비슷하지 동작이 많이 다르네요?”

“몸의 균형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는 동작들을 모은 거니까, 매일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그렇군요. 저 운동의 이름이 뭐죠?”

나강인은 멈칫했다.

‘고립된 전장에서 민간인의 생존율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민간인을 예비군 최하급 병사로 만드는 데 쓰는 훈련 과정 중 일부?’

그렇게 설명할 순 없다. 총권도 체조라고 할 수도 없다. 알파벳과 숫자로 표기되는 정식 명칭은 더 어색하다.

나강인이 적당히 둘러댔다.

“자연 체조입니다.”

“네? 자연이요? 대자연 같은 거요?”

“자연스럽게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체조라서 자연 체조입니다.”

“아아. 저건 어디 가면 배울 수 있어요?”

“가르치는 곳이 없습니다.”

“네?”

“내가 만든 거라서.”

백미소가 당황한 얼굴로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농담…이 아니군요?”

‘화학 천재의 재능으로 스포츠 의학에서도 성과를 낸 걸까? 신기한 사람이네.’

나강인이 녹색 쫄쫄이를 입고 있을 때는 화학 천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평상복을 입고 있다.

‘아직 있지도 않은 폭탄의 이름까지 벌써 정해놓았다길래,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체조를 직접 만들었다는 말을 들으니 의심이 좀 풀렸다.

그녀가 CF 촬영 현장을 보며 말했다.

“정부와 합동으로 감지 테스트를 했어요. 쉽게 살 수 있는 냄새 감지기가 노벰버 B의 냄새에 반응했어요.”

나강인이 총권도를 배우는 요원 다섯 명에게 그 감지기를 가르쳐주었다. 노벰버 B라는 이름도 나강인이 알려주었다.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공개된 화학식만 봐도 알겠던데요. 아. 이걸로 만든 폭탄은 냄새가 좀 나겠구나. 그럼 냄새 감지기에 걸리겠구나.”

전투지원 AI인 전지인이 노벰버 B의 제조법을 알고 있는 건, 보급품이 떨어졌을 때 현장에서 재료를 구해 만들 수 있는 폭탄이기 때문이다.

그 폭탄은 현장에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제조법이 간단해서, 그 정보가 유출되면 테러리스트나 범죄자가 폭탄 제조에 사용할 수도 있다.

백미소가 말했다.

“노벰버 B의 폭발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외부로 나간 건 모두 회수할 거예요. 그때까지 공항이나 항만, 중요 시설에는 냄새 감지기를 켜놓기로 했어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노벰버 B의 핵심 재료인 VTX-13은 회장품 회사 백한수려의 연구소가 개발했다. 제조법은 백한수려만 알고 있다. 외부로 나간 것만 모두 회수하고 앞으로 생산하는 건 철저히 관리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생산 금지는 하지 않기로 결정됐다. 다이너마이트의 재료인 니트로글리세린도 강력한 폭발력을 갖고 있지만 약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VTX-13은 백한수려의 화장품에 쓰인다.

백미소가 물었다.

“그런데요. 정말 화학식만 보고 냄새가 난다는 걸 아신 거예요?”

“폭발한다는 것도 예상했는데 냄새라고 해서 예상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백미소가 나강인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 진짜 같은데?’

CF 촬영은 그날 하루에 끝났다.

내용도 바뀌었다. 맹수와 싸우는 영상은 삭제됐다. 대신에 자연 체조가 다양한 형태로 사용됐다.

백미소는 백한수려 경영진 앞에서 가편집된 CF 영상을 보여준 후에 말했다.

“이 ‘자연 체조’를 매일 하면 신체의 불균형을 바로잡아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 CF를 내보내면서 자연 체조를 홍보하면 시너지 효과가 클 겁니다.”

백선철이 물었다.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건, 검증된 건가?”

“아뇨. 이건 나강인 씨가 직접 만든 체조라서 이전에는 외부 검증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 효과를 어떻게 믿지?”

“정형외과 의사 세 명, 프로 선수단의 전직 닥터 두 명, 그 외 건강 관련 전문가 여러 명에게 이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그랬더니 뭐래?”

“모든 전문가가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뭐, 설사 효과가 없다 해도 나중에 욕먹을 일은 없겠네.”

“물론입니다.”

“저 체조를 고객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은?”

“아직은 나강인 씨밖에 없습니다.”

“나강인 씨를 강사로 초빙하는 건가?”

“아뇨. 제안을 했지만 강사가 될 생각은 없다더군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누구든 이 체조를 배우고 싶으면 우리 CF를 열심히 봐야 합니다. TV에서는 15초와 30초짜리 단축 버전을 내보내고, 인터넷에는 전체 동작이 들어간 CF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백선철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 CF가 저 건강 체조의 유일한 교육 영상이다?”

“예.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교육 영상을 만든다 해도 모두 우리 CF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백선철이 손뼉을 치며 이사들에게 자랑했다.

“좋구나. 좋아. 다들 봤어? 우리 딸이 일을 이렇게 잘해.”

회의에 참석한 이사가 물었다.

“그런데 나강인 씨가 그 체조를 만들었으면, 나중에 저작권 문제가 안 생길까?”

“인터넷에 공개한 CF 영상을 통해 들어오는 수익은 모두 나강인 씨에게 주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면 뭐 문제는 없겠네. 그게 몇 푼이나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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