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닥터
화장품 회사 백한수려는 이 CF를 저예산으로 만들었다. 광고는 원래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에만 내보내려고 했다. 그게 광고 단가가 싸기 때문이다.
처음 계획은 그랬는데 상황이 바뀌었다. 경영진은 CF 영상과 건강 체조 보급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했다.
사장 백선철이 지시했다.
“결과를 빨리 보고 싶군. 가끔은 공중파에도 내보내면 더 좋겠어.”
사장만 그렇게 말한 게 아니다. 이사들도 같은 생각이다.
회사 홍보부서에 방송을 서두르라는 압력이 들어갔다. 홍보팀은 다시 CF 제작사를 독촉했다.
그렇다고 채찍만 휘두른 건 아니다. 기간을 단축하는 조건으로 추가 예산이 제공됐다.
CF 제작사는 인원을 더 투입하고 수당을 뿌려가면서 제작 기간을 당겼다.
CF를 날림으로 만들면 제작 기간을 확실히 줄일 수 있다. 그런데 백한수려는 기간은 줄이되 퀄리티는 높이길 원했다.
CF 제작사는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3일 만에 모든 작업을 완전히 끝냈다.
피디가 퀭한 얼굴로 백미소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만족하셨죠? 이제 집에 자러 가도 되지요? 그치요?”
나강인과 아이돌들이 영상을 촬영한 날부터 겨우 일주일 만에 CF가 방송을 탔다. 첫 방송은 기념 삼아 공중파로 내보냈다.
이 CF는 원래 저예산으로 기획됐다. 중간에 방향이 바뀌긴 했지만, 추가 예산을 고려해도 공중파는 너무 비쌌다.
처음 공중파로 나간 CF은 30초짜리였다. 그 후에는 예산 문제로 가끔 한 번씩 15초짜리를 띄웠다.
대신에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으로는 광고가 자주 나갔다.
나강인이 알려준 자연 체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려면 10분이 걸린다. 그렇게 긴 건 공중파 방송으로는 내보낼 수 없다. 그건 인터넷에만 공개됐다.
SAH 엔터의 아이돌 여덟 명에게는 CF 모델료가 지급됐다.
백한수려가 먼저 SAH엔터에 모델료를 보냈다. 거기서 회사 몫을 제하고 나머지가 아이돌에게 돌아갔다. 그 금액이 사천만 원이었다.
그걸 다시 아이돌 여덟 명이 똑같이 나누었다.
막내 최지혜가 오백만 원이 들어온 현금카드를 머리 위로 들고 흔들며 외쳤다.
“오늘은 내가 쏜다!”
프프걸스 리더 소지영이 물었다.
“뭐든 다 쏘게?”
“치킨만 쏜다! 피자나 다른 건 언니나 오빠들이 쏴!”
소지영은 리더의 책임감 때문에 물었다.
“우리가 그래도 아이돌인데, 치킨이나 피자는 칼로리가 너무 높지 않아?”
최지혜는 당당했다.
“안 들키면 0칼로리!”
“그래도 양심에….”
“싫으면 언니는 빠지시던가! 우리는 치킨 피자 파티다!”
소지영이 프프걸스의 리더이기는 하지만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다. 그녀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피자는 내가 쏜다! 먹고 죽자! 우리가 뭐 매일 방송 나가는 스타도 아니고, 언제 또 행사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술도 마시자!”
“그래! 마시자! 근데 지혜는 사이다 마셔라!”
“왜 나만!”
“넌 아직 고딩이니까!”
***
작곡가 곽찬석이 만들고 나강인이 부른 노래 ‘오늘도 걷는다’는 원래 음원 인기 순위가 10위권을 오르내릴 정도로 높았다.
그러던 노래가 CF의 배경음악으로 나가면서 좀 더 알려졌다. 자연 체조와 그 노래도 무척 잘 어울렸다.
자연 체조는 보고 있으면 뭔가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터넷에 그런 반응이 속속 올라왔다.
- 되게 좋아 보여서 영상 보고 따라 해봤는데, 진짜 몸이 편해졌어.
- 저는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목이 자주 아팠는데요. 저 체조를 며칠 따라 했더니 확실히 덜 아파요.
- 30초짜리 체조를 했다고 그런 효과가 나올 리가.
- 인터넷에 10분짜리 풀코스 영상 있어요. 당연히 그걸 따라 했죠.
- 어? 진짜요?
- 진짜 효과 확실합니다. 난 허리가 좀 아팠는데, 요즘은 괜찮거든요.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를 통해 그 이야기가 빠르게 퍼졌다. 인터넷에 공개된 광고 영상을 보면서 자연 체조를 따라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 이게 영상을 보면 요가 느낌도 살짝 나고, 필라테스 느낌도 살짝 나는데, 동작은 많이 다르단 말이죠.
- 일단 속도가 다르잖아요.
- 맞아요. 요가는 정적이면 이건 동적이잖아요.
- 마치 에어로빅과 요가를 섞은 느낌?
- 그렇다고 막 뛰어다니는 건 아니라서 집에서 하기 좋더라고요.
- 하루 10분만 하면 되니까 시간 내기도 좋고요.
- 저는 일하다 졸리면 옥상에 올라가서 스마트폰에 CF 영상 켜놓고 10분간 하고 옵니다.
- 저는 점심시간에 해요.
그 영상의 배경음악은 댕댕이 부른 ‘오늘도 걷는다’이다.
건강을 위해 그 체조를 하는 사람들은 가수에 대해 궁금해했다.
- 작곡가 곽찬석은 아는데, 가수 댕댕은 도대체 누구죠?
- 저도 궁금한데 검색해도 안 나와요.
- 얼굴 없는 가수인가 본데, 그런 사람들도 나중에는 결국 방송에 나오더라고요.
- 그러면 언젠가는 누군지 알 수 있겠네요.
***
외과 의사 김중석이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다른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창 의사를 만났다.
“이야아. 중석아. 오랜만이다.”
“어. 너도 잘 지내지?”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결혼식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김중석이 백한수려의 CF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거 봤어? 우리 과장님 딸이 나한테 보내줬는데, 보다 보니까 효과가 있을 수밖에 없더라. 10분짜리 체조에 스포츠 의학의 정수가 깃들어 있어.”
“그래? 나한테도 링크 좀 보내줘.”
“그냥 인터넷에서 이 CF 검색하면 바로 나온다.”
“그런데 이건 누가 만들었대?”
“아마 의사겠지?”
둘 다 외과 전문의라서 수술 이야기도 나왔다.
동창 의사가 말했다.
“아. 맞다. 내가 얼마 전에 말이야. 재봉틀로 박은 것 같은 봉합을 봤다.”
영상을 보며 밥을 먹던 김중석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 뭐?”
“난 그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똑같이 꿰맨 거 진짜 처음 봤어. 간격만 같은 게 아니야. 매듭까지 다 똑같아.”
김중석은 교차로 사고에서 구급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다친 사람의 상처를 봉합하고 사라진 사람을 지금까지 찾아왔다.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야. 확실해? 진짜 재봉틀이었어?”
“설마 진짜 재봉틀이겠냐?”
“그게 아니라, 그 정도로 모양과 간격이 똑같았냐고.”
“어. 진짜 똑같았어. 근데 몇 바늘만 꿰맸으니까 우연히 그런 간격과 모양이 나온 거겠지.”
김중석은 아직 긴가민가했다. 그의 동창 말처럼 우연일 수도 있다.
“사진은? 사진 있어?”
“아니. 마음 같아서야 찍고 싶었지만, 수술실도 아니고 환자가 빤히 쳐다보는데 어떻게 그걸 찍냐.”
김중석이 앞에 놓인 잔을 들고 벌컥 마셨다. 독한 소주가 입안을 채우다가 목으로 넘어갔다.
그는 차를 가져와서 술은 따라만 놓고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긴장해서 그걸 따질 정신이 없었다.
‘진짜 그 의사가 나타난 건가?’
그가 확인을 위해 물었다.
“그럼 혹시 말이야. 봉합사가 아니라 재봉틀에 쓰는 실로 상처를 꿰맸어?”
동창 의사가 웃었다.
“하하하. 야. 재봉틀은 그냥 비유한 거라니까? 진짜 재봉틀로 상처를 박는 사람이 어디 있냐?”
“아니야? 아니, 재봉틀용 실이 아니라도 괜찮아. 혹시 그냥 단추 다는 실로 꿰맸어?”
“당연히 봉합사를 썼지.”
김중석은 실망했다. 그가 예전에 본 환자는 평범한 실로 상처가 봉합되어 있었다.
‘봉합사를 썼으면 우리가 찾는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포기할 순 없다.
김중석과 외과 과장 이정호는 그 사람을 오래 찾아다녔다.
이전에 외국인이 팔에 입은 총상에서도 같은 걸 보긴 했지만, 그때는 상대가 외국인이라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적어도 지푸라기는 떠다녔다. 그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면 정보가 더 필요했다.
“그럼 그 봉합을 한 의사가 누구야?”
‘이름만 알면 돼. 직접 찾아가서 그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되니까.’
동창 의사가 음식을 집어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김중석은 당황했다.
“어? 봉합한 모양이 신기했다며? 그런데도 환자한테 어느 병원에서 치료받았는지 안 물어봤어?”
“물어봤지. 근데 안 가르쳐주더라고. 그리고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받은 것도 아니고.”
“그럼?”
“영화 햇살 좋은 날 천만 돌파 기념 파티 현장에서 드론이 추락해 폭발한 사건 알아?”
“어. 저번에 뉴스에서 봤다.”
“그때 손태민 감독이 팔을 다쳤는데, 그 양반을 내가 맡았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현장에서 이미 의사가 상처를 꿰매 지혈을 해놨더라.”
동창 의사가 툴툴댔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 과장님이 VIP가 오셨다면서 채가셨지.”
“그러니까 그 의사 이름을 손태민 감독이 안 가르쳐줬다고?”
“어. 분명히 그 파티에 있던 사람 중 한 명일 텐데.”
김중석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우리 병원에 실려 왔던 부상자도 병원이 아니라 사고 현장에서 치료받았어. 손태민 감독도 밖에서 치료받았는데, 봉합법이 비슷해? 이건 우연이 아닐 거야.’
차이점도 있긴 했다.
‘왜 이번에는 봉합사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어!’
김중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나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
김중석은 택시를 타고 외과 과장 이정호를 찾아갔다.
그는 오늘 동창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이정호도 흥분했다.
“그러면 그 영화사 파티 현장에 있던 의사가 누군지만 알아내면 되잖아!”
“그렇죠!”
“누가 알지? 어디에 연락해야 하지?”
“그 영화사에 물어볼까요?”
“맞아. 그러자!”
김중석이 인터넷으로 THO 엔터를 검색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이정호가 말했다.
“내가 전화하지.”
그는 직접 영화사에 전화해 그 의사를 찾았다.
전화를 받은 홍보팀 직원이 물었다.
- 그러니까 그 파티에 참석한 의사 선생님을 찾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예. 맞습니다.”
- 죄송합니다. 참석자 명단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정호가 다급히 말했다.
“아니, 나도 의사입니다. 동료 의사를 찾는 건데 왜 알려줄 수 없다는 겁니까?”
- 개인정보라서요. 그리고 신분을 사칭해서 참석자 정보를 알아내려는 기자분이 이미 여럿 계셔서요.
“잠깐만요. 그럼 THO 엔터로 직접 찾아가서 내가 의사라는 걸 증명하면 되는 겁니까?”
-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안 됩니다.
홍보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정호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기자가 물어봐도 못 가르쳐준다는데? 아니,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그 폭발 사고는 파파라치가 날린 드론이 폭죽이 담긴 상자에 떨어져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 드론을 술잔으로 격추한 사람이 손태민이다.
다친 사람도 손태민이라서 형사 사건이 되지는 않았지만, 손태민과 THO 엔터는 그 일이 기사화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회사는 설사 기자가 전화해도 참석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자가 명단을 알아내고 싶으면 직접 발로 뛰어서 찾아내야 했다.
외과 과장 이정호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하지? 너 개인적으로 아는 기자 없냐?”
“제가 환자만 열심히 치료하느라 바빠서 기자는 잘….”
“나도 없는데. 아니지. 기자가 물어봐도 안 가르쳐준다니까 알아도 소용없지. 이제 어떻게….”
이정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잠깐만. 네 사촌 동생이 배우잖아. 우리 병원에도 그래서 입원했었고.”
“정확히는 외사촌 동생입니다. 이모 딸인데요.”
“어쨌든 연예계 사람이잖아!”
“하지만 보라는 그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는데요?”
“그래도 그 바닥에 있으니까, 그날 그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있겠지!”
“아! 그렇겠네요!”
김중석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당장 보라에게 연락해서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부탁한다. 중석아.”
***
이보라는 부모님 집에 와 있었다. 김중석이 근무하는 병원은 그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김중석이 이보라를 불러내 상황설명은 하지 않고 사람을 찾아달라는 부탁부터 했다.
이보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그 파티에 참석한 사람 중에, 의사를 찾고 있다고?”
“어. 이름만 알려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보라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웅…. 누구한테 물어보지?”
그날 참석자 중에서 만만한 건 신은하인데,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강인 오빠? 아니야. 사람 찾는 걸 부탁하면 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몰라. 그럼 유찬 오빠?’
이보라가 일단 배우 김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유찬은 벨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받았다.
- 어. 보라야. 오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설마요.”
- 그치? 네가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왜?
“햇살 좋은 날 천만 돌파 파티 말이에요.”
- 그날 파티가 참 화려하게 폭발했지? 하하.
“그날 참석자 중에 의사가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