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이연지가 달린다
이보라는 천만 돌파 파티 참석자 중에 의사가 있었는지 물었다.
배우 김유찬이 대답했다.
- 나야 모르지.
이보라가 다시 물었다.
“역시 그렇죠? 그럼 알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 글쎄? 그날 의사 가운을 입고 온 사람은 없었어. 의사도 평상복을 입으면 얼굴만 보고 구분할 방법이 없지 않나?
“그렇구나.”
- 의사는 왜 찾는데?
“손태민 감독님 팔 다친 거, 누가 치료했는지 알고 싶어서요.”
- 어? 그때는 그냥 붕대로 지혈만 한 거 아냐?
“네?”
-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때 나강인이 상처를 꿰매는 모습은 신은하와 조연출 변형찬, 그리고 당사자인 손태민 세 명만 봤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가 단순히 지혈만 한 줄 알았다.
“아닌데. 감독님 상처를 의사가 꿰맸다고 들었는데. 그럼 그 지혈은 누가 했는데요?”
나강인이 했다.
김유찬은 이보라의 질문에 담긴 위험을 깨달았다.
- 어? 어?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 하하. 어? 나한테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
전화가 뚝 끊겼다.
“어? 이 오빠가 여자 전화를 이렇게 막 끊는 사람이 아닌데….”
김중석이 물었다.
“왜? 뭐라는데?”
“모른대. 설사 의사가 그날 왔어도 가운 입고 온 게 아니면 몰랐을 거래. 의사라고 소개받은 사람도 없나 봐.”
김중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렇구나.”
“그런데 상처를 그 장소에서 꿰맨 건 확실해? 이 오빠 말로는 거기서는 붕대로 지혈만 했다는데?”
“어…. 나도 직접 본 건 아니라서….”
김중석도 동창 의사에게 그랬다는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런데 그 동창 의사도 누가 어디서 꿰맸는지 직접 본 건 아니다.
“뭐야. 그럼 확실한 것도 아니네. 나중에 밖에서 다른 사람이 꿰맸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렇지.”
김중석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언제 누가 꿰맸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겠어.”
“누구?”
“손태민 감독. 직접 봤을 테니까.”
“아. 하긴.”
김중석이 부탁했다.
“보라야. 손태민 감독과 자리 한 번만 마련해주라. 내가 직접 물어볼 테니까.”
이보라가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미쳤어? 내가 그런 급이 되는 줄 알아?”
“너 유명한 배우잖아.”
“손 감독님은 나보다 훨씬 더 하이 클래스인 천상계 사람이거든? 내가 얼마나 잘 보여야 하는데! 급이 다르다고! 급이!”
“어…. 그럼 누구 급이 되는 사람을 알아?”
안다.
‘강인 오빠는 될 텐데?’
하지만 그런 부탁을 함부로 하면 나강인과 손태민 양쪽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안돼. 몰라.”
“그럼 연락처나 집 주소라도. 내가 진짜 꼭 필요해서 그런다.”
“웅….”
이보라가 한참 고민하다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절대로 내가 가르쳐줬다고 하지 마. 절대로.”
“알았어. 네 이름만 말하지 않으면 되지?”
“그냥 분위기 좋아질 때까지는 오빠 이름도 말하지 마. 그리고 괜히 나까지 말려들기 싫으니까, 난 무슨 일인지 안 들을래.”
***
외과 의사 김중석이 과장 이정호와 다시 만나 이보라와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이정호가 물었다.
“손태민 감독을 찾아가면 바로 만날 수 있어?”
“요즘은 다음 영화 준비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답니다. 집에 자주 돌아오긴 한다는데, 갑자기 찾아가면 경계할 수 있다네요. 전화를 먼저 해보시죠.”
“그럴까?”
이정호가 손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
손태민은 모르는 번호를 잘 받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다리는 전화가 있어서 바로 받았다.
“여보세요.”
- 손태민 감독님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드론 폭발 사고로 팔을 다치셨을 때 현장에서 치료한 의사를 찾고 싶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손태민은 당황했다.
“예?”
- 그때 감독님 팔의 상처를 봉합한 의사 말입니다.
손태민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저도 의사입니다. 기자가 아닙니다. 그 의사를 꼭 찾고 싶습니다.
그는 전화를 건 사람이 의사라고 하니까 더 걱정이 들었다.
‘강인 씨는 의사가 아닌데 그날 내 상처를 치료했잖아.’
그는 일단 잡아뗐다.
“저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 그러시지 마시고 좀 알려주십시오. 현장에서는 지혈만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따로 처치 받은 곳이 있을 것 아닙니까?
손태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거다!’
상대가 알아서 변명거리를 만들어주었다.
“맞습니다. 거기선 지혈만 했습니다. 이건 밖에서 따로 치료받은 겁니다.”
- 그러니까 그게 어느 병원인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아. 이런.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끊겠습니다.”
손태민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후우. 놀라라. 그때 일이 의료법 위반이 맞긴 맞나 봐. 그러니까 의사들이 나서서 조사를 하지.”
곧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손태민이 얼른 전화기를 뒤집어 놓았다. 그러면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거 진짜 너무하네. 강인 씨가 병원을 차리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다쳐서 잠깐 몇 바늘 꿰맨 건데 말이야.”
***
이정호는 손태민에게 몇 번 더 전화를 걸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안 받는다.”
김중석이 답답해했다.
“도대체 왜 과장님 전화를 피하는 거죠? 우리가 이상한 걸 물어본 건 아니잖아요.”
“그 의사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거 아닐까?”
“혹시 면허취소라도 된 걸까요?”
“취소된 면허는 시간 지나면 살릴 수 있잖아. 아닐 거야.”
“그럼 혹시 죄를 짓고 수배 중이거나….”
이정호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 그런 의사가 몇 명이나 있지? 다 찾아볼까?”
“한국 의사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럼 못 찾을 텐데요.”
두 사람 다 그런 방법으로는 찾기 어렵다는 걸 안다.
이정호가 말했다.
“중석아. 손태민 감독이 지금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
“이미 물어봤는데요. 보라가 자기도 알아볼 방법이 없지만, 저랑 엮이면 안 된다면서 거절하던데요.”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자. 우리 연지를 수술하려면 그 의사가 꼭 필요해. 이건 내 느낌인데, 손태민 감독이 뭔가 아는 것 같았어.”
***
나강인이 그 동네 교차로 사거리에서 말했다.
“우리 기억은 여기부터 시작인데….”
그는 지구연합 전략특수군 군복을 입고 이곳에 서 있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때부터는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이전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넌 뭐 생각나는 거 없지?”
- 없습니다.
AI 전지인도 초기 설정 메모리에 저장된 것 외에는 이전 활동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이 사거리의 신호등이 전부 다 고장 나서 깜빡이고 있었잖아. 왜 그랬을까? 혹시 우리 때문일까?”
그가 두 팔을 양쪽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 여기서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신호등이 고장 났던 건 아닐까?”
- 어떤 현상 말입니까?
“나야 모르지.”
-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때 난 지구연합군 군복을 입고 있었잖아. 넌 2082년식 전투지원 AI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어?”
-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는 교통사고가 나면서 도로에 쌓여 있던 물건이 날아갔었는데 말이야. 그러다 다친 사람도 있었고. 오늘은 그런 일이 없….”
도로를 달리는 트럭의 짐칸에 얹어져 있던 폐타이어가 툭 떨어졌다.
떨어진 타이어는 도로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뭐냐. 여기 수맥이라도 흐르나? 왜 사고가 또 생겨?”
- 우연입니다.
“그러니까 그 우연이 왜 하필 내가 있을 때….”
타이어는 도로 건너편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그 건너편 인도 위를 꼬마가 빠른 속도로 뛰어다녔다.
“어?”
AI 전지인이 허공에 예상 진행 경로를 그렸다. 아이의 진행방향과 타이어가 굴러가는 방향을 그린 선이 중간에 교차했다.
- 충돌코스입니다! 아이의 체중이 너무 가볍습니다. 심각한 부상이 예상됩니다!
나강인이 지금부터 전력으로 뛰어가면 늦지 않게 타이어를 붙잡을 수는 있다.
그런데 타이어가 굴러가는 곳은 도로 건너편이다. 그 도로는 지금 지나가는 차가 너무 많았다. 그가 도로를 뛰어서 가로지르면, 다른 교통사고를 유발할 위험이 너무 컸다.
나강인이 주변을 재빨리 훑어보며 말했다.
“던져서 저지할 수 있는 도구를 찾아!”
그의 오른쪽에 가로수를 지지하는 데 사용된 나무 막대기가 있었다. 나강인이 그곳으로 달려가 막대기를 뜯어냈다.
그가 막대기를 창처럼 들며 지시했다.
“각도 계산해!”
- 요격 궤도를 제안합니다.
AI 전지인이 허공에 두 개의 반투명한 선을 그렸다. 그 두 개의 선에는 막대기를 창처럼 던졌을 때의 명중 확률과 명중했을 때 저지할 확률이 같이 표시되었다.
“A 경로!”
선 하나가 즉시 사라지고 하나만 남았다. 나강인이 투창을 던지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새로운 인물 출현! 이 막대기는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없습니다. 오인사격 위험이 높습니다!”
나강인이 앞으로 뻗으려던 팔을 멈췄다. 그는 누가 나타났는지 확인했다. 병원에서 만난 여고생이 보였다.
“연지?”
- 이연지를 확인했습니다. 타이어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연지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서 두 손으로 타이어를 붙잡았다.
- 잡았습니다! 이연지가 끌려갑니다!
타이어가 워낙 무거워서 이연지가 오히려 질질 끌려갔다.
- 속도 감소합니다! 예상 진행 경로가 변했습니다!
이연지는 타이어가 굴러가는 속도를 조금 줄이는 데 성공했다.
앞만 보고 뛰던 아이가 타이어보다 빨리 충돌 예상 지점을 지나갔다.
이연지는 그걸 확인한 후에 타이어에서 손을 놓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녀가 보도블록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살았다!”
데굴데굴 구르던 타이어는 건물 벽에 충돌한 후에 옆으로 넘어지며 정지했다.
꼬마는 타이어가 등 뒤로 지나간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꼬마는 깜짝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이연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꼬마를 향해 오른손을 뻗으며 손가락으로 V를 만들었다. 왼손은 허리를 짚었다.
이연지가 씩 웃었다.
“누나 멋지지?”
꼬마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누나 최고!”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나강인이 창으로 쓰려던 막대기를 내려놓고 도로를 건너갔다.
이연지는 엉덩이를 턴 후에 돌아섰다가 나강인과 마주쳤다.
“앗!”
나강인이 말했다.
“우리 몇 번 봤지?”
“그럼요! 보라 언니 병실에 문병 오셨던 아저씨잖아요. 요리 엄청 잘하는 아저씨. 그리고 무술감독!”
나강인이 이연지의 손을 보았다.
그녀는 맨손으로 타이어를 잡은 게 아니다. 소매를 내려 장갑 대신에 손을 보호하면서 타이어를 잡았다.
그런데 그 소매가 찢어져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손 좀 보자. 다쳤을 수 있어.”
“에이. 아니에요. 다치진 않았어요.”
그녀는 가방에서 손소독제를 꺼내서 손을 닦았다. 소독제는 조금 쓰는 게 아니라 넉넉하게 부어서 닦았다.
“넌 다치지 않았다면서 손소독제를 많이 쓰네?”
“이거 집에 많아요. 아빠랑 엄마가 많이 쓰래요.”
꼬마가 자기 엄마를 찾아 다시 뛰어갔다.
나강인이 그런 꼬마를 보며 말했다.
“쟤는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그냥 가네?”
“꼬맹이가 다 그렇죠.”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디 다친 건 아니지?”
- 꼬마에게서 부상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연지 말이야.”
- 역시 부상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강인이 이연지에게 말했다.
“앞으론 그렇게 대책 없이 뛰어들지 마. 그러다 다친다.”
이연지가 실실 웃었다.
“에이. 아저씨는 저한테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닐 텐데요?”
“응?”
“저랑 이름이 비슷한 아역배우가 납치됐을 때, 아저씨는 달리는 차에 뛰어드셨잖아요. 저는 겨우 타이어 하나였는데요, 뭐.”
그때는 이민지가 납치됐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인터넷에 동영상이 있더라고요. 전에 보라 언니 병실에서 아저씨 만나고 나서 다시 찾아봤죠.”
“어…. 그러냐. 그래도 몸 사려가면서 해라.”
“넷! 근데 어디 가세요?”
“밥 먹으러.”
나강인은 피시방에서 가끔 밥을 판다. 오늘은 그날이 아니다.
나강인은 평소에는 밥을 사 먹는다. AI 전지인은 직접 만든 요리보다 남이 끓여준 라면을 더 좋아한다.
이 사거리는 밥 먹으러 가는 길에 처음 이곳에 온 날이 생각나서 들렀다.
이연지가 물었다.
“어디 좋은 데 가세요?”
“저기 저 분식집?”
“나도 분식 엄청 좋아하는데.”
나강인이 이연지의 소매를 보았다. 타이어를 붙잡느라 소매가 다 뜯어져 있었다.
“사줄까?”
“네!”
이연지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모르는 사람이 까까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된다는 말씀 안 하셨냐?”
“그거야 저런 꼬맹이 때 이야기고요. 그리고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알았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