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수술실
이연지가 마취된 후에 나강인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이정호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배에 칼을 대면 한 시간 안에 모든 수술을 끝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넘기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마취를 맡은 손성현이 말했다.
“원래는 여섯 시간은 걸리는 수술을 겨우 한 시간에…. 이 수술을 교육 영상으로 남길 수 없는 게 너무 아쉽다.”
영상을 남기면 증거도 남는다. 그래서 이 수술은 영상이 없다.
이정호가 이연지의 배에 칼을 대면서 수술이 시작됐다.
이정호는 병의 원인을 잘라내고 필요한 부분은 성형했다. 그러고 나면 나강인이 즉시 해당 부위를 봉합했다.
AI 전지인이 제어하는 나강인의 손놀림은 완벽하고 기계처럼 빨랐다. 출혈이 이정호의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수술진행도 빨랐다.
이정호는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 수술 성공할 수 있어요!”
손미연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그 희망이 깨지는 데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폭발 경고!
나강인의 눈동자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구석에 있던 장비에서 불꽃이 튀었다.
나강인은 지금은 봉합 중이라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다. 그가 이정호에게 경고했다.
“뒤쪽에 장비 터집니다!”
두 손을 든 채로 나강인의 봉합을 보고 있던 이정호가 뒤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억!”
이정호의 눈에도 장비의 표면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보였다. 여기서 뭔가 터지면 이 수술은 끝장이다.
그가 장비의 전원을 끄기 위해 얼른 손을 뻗었다.
전원은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꺼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흘러나온 전기가 생각보다 강했다. 그 전기가 수술용 장갑을 뚫고 그의 손가락을 때렸다.
“큭!”
손미연이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괜찮….”
괜찮지 않았다. 이정호는 사색이 됐다.
“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아! 마비됐어!”
“안돼! 손성현! 여기 네 수술실이잖아! 저 장비 뭐야!”
마취를 맡은 손성현도 당황했다.
“아니, 저 장비는 중고로 샀는데, 그동안 쓸 일이 없어서 처음 살 때 한 번만 켜보고 놔뒀….”
“너 이 새끼….”
나강인이 그가 맡은 봉합을 마무리며 말했다.
“수술을 계속해야 하잖습니까?”
이정호가 오른손을 들었다. 손가락 두 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면 메스를 잡을 수 없다.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중석아. 너 그동안 내 옆에서 봤잖아. 할 수 있지?”
외과 의사 김중석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한테는 아직 무리입니다.”
“너밖에 없다.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내가 옆에서 가르쳐줄 테니까, 네가 해.”
그렇게 하면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제한시간 안에 끝낼 수 없습니다. 이 수술은 시간이 생명이잖습니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것과 똑같이만 하면 돼!”
“하지만….”
김중석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안다.
‘이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은 지푸라기 몇 개 잡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구명조끼가 필요하다. 그런데 구명조끼가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저 절개와 성형, 지금까지 본 걸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냐?”
- 야전 응급 수술 스킬은 부상자가 야전병원에 후송될 때까지 생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 스킬에는 절개 기능도 있습니다. 이정호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똑같은 동작을 재현하는 건 가능합니다.
“네가 할 수 있다는 거지?”
- 어디를 어떻게 절개하고 성형해야 하는지는 이정호가 정확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제안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예?”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된다면서요.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시죠.”
이정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강인은 원래 봉합만 맡기로 했다. 그 실력은 미리 확인했다. 하지만 메스를 다루는 실력은 확인하지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손성현은 나강인에 대해 잘 모른다. 그가 얼른 말했다.
“봉합 실력을 보면 메스도 잡아본 적 있겠지! 매형! 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정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리 말하지만, 저는 오늘 아버님이 수술하면서 보여주신 그대로만 할 수 있습니다.”
“예. 남은 부분은 그거면 됩니다.”
수술이 재개됐다.
어려운 부분은 이미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 부분을 반복해서 제거하고 혈관을 성형하는 것이다. 어디를 손대야 하는지는 이정호가 가르쳐주었다.
나강인의 손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게다가 빨랐다.
이정호는 어쩔 수 없이 나강인에게 메스를 맡겼다가 경악했다.
‘사람의 손이 이렇게 빠를 수 있나?’
빠른 속도 외에도 놀라운 건 또 있었다.
‘손놀림이 나와 완전히 똑같아. 마치 내 손을 보는 것 같아.’
AI 전지인은 이정호의 손동작을 그대로 카피해서 움직였다.
이정호의 손가락 마비가 서서히 풀렸다. 하지만 그는 메스를 잡지 않았다.
‘계속 나강인 씨에게 맡기자.’
그가 시계를 보았다. 수술이 예상 시간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살릴 수 있어!’
***
이보라는 야외 그림 전시장에 도착했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은하 요것이 어디 있지?”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김유찬이 다가왔다.
“보라야! 너라도 와줬구나!”
“네? ‘너라도’라니요?”
“아니, 다들 일이 생겼다고 늦는다고 해서.”
“제가 원래 약속을 잘 지키는…. 어? 그러면 은하는요?”
“늦잠 자서 늦는다는데?”
그녀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물었다.
“아싸아! 그럼 강인 오빠만 먼저 온 거예요?”
“강인 씨? 강인 씨가 여기를 왜 와?”
“네? 초대 안 했어요?”
“강인 씨는 공개 행사에는 어지간하면 참석 안 하잖아.”
“은하가 데려올 수 있잖아요.”
“안 그래도 은하가 말해봤는데, 강인 씨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다던데?”
이보라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갔다.
‘은하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약한데? 썸이라도 타는 것처럼 굴더니? 강인 오빠는 은하를 그냥 친한 여사친으로 생각하나? 여사친 맞는 거 같은데?’
기분이 좋아진 이보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림 좋은 거 있어요? 벽에 걸어놓을 게 필요한데.”
“있지! 기왕 왔으니까 하나 사줘. 두 개 사주면 더 좋고. 그 돈이 다 좋은 데 쓰일 거야. 그리고 네가 산 그림은 꼭 SNS에 올려라. 기왕이면 사자마자 바로.”
“왜 바로 올려요?”
“오늘 여기 오는 연예인들이 그렇게 해줘야 팬인 분들이 와서 다른 그림도 사주지.”
“아….”
김유찬이 제안했다.
“그림 보러 다닐 때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래야 사람들이 네가 온 걸 알고 소문이 더 크게 나지.”
이보라는 거절했다.
“오늘은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감상해야 하니까 그냥 이러고 있을래요. SNS에는 꼭 올릴게요.”
***
야외 그림 전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차에서,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 전시장을 감시하던 남자가 말했다.
“주최측 남자 배우와 접촉한 여자가 있습니다.”
“타깃인가?”
“얼굴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리고 모자까지 써서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몸매는 연예인 같습니다.”
“사진.”
남자가 카메라를 조작했다. 이보라의 사진이 모니터에 떴다.
우두머리가 그의 스마트폰에 사진을 하나 띄웠다. 그 사진은 신은하가 청평호수에서 마약조직과 싸울 때 찍힌 사진이다. 그때는 화살을 맞은 후라서 옷에 구멍이 나 있었다.
우두머리가 이보라와 신은하의 사진을 비교했다.
“비슷한 것 같은…. 특이한 디자인의 구두가 똑같아. 타깃이 확실하다.”
“준비할까요?”
우두머리가 공원 입구에서 나눠주는 지도를 펼치고 그중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장소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다. 타깃이 그림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도착하면, 바로 작업 들어간다.”
***
김유찬이 이보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네 구두 말이야. 은하가 똑같은 구두를 신은 걸 본 것 같다? 친구끼리 같은 걸 산 거야?”
이보라가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이거 우리 동네 수제 구둣가게에서 산 거거든요? 은하도 같은 가게에서 산 것뿐이거든요? 그리고! 제가 은하보다 먼저 샀거든요!”
“알았다. 알았어. 왜 화는 내고 그래?”
***
수술이 끝났다.
이곳에는 수술 환자를 위한 회복실이 있었다. 이연지는 회복실로 옮겨졌다.
이정호가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제 딸이 살았습니다.”
“수술이 잘 됐나 보네요.”
“직접 하셨으니까 더 잘 아시잖습니까?”
“저야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이정호는 이연지의 수술이 성공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는 수술 내내 궁금해한 걸 물었다.
“저기…. 그런데 어떻게 저와 같은 수술 습관을 갖고 계신 겁니까? 기술은 몰라도 습관까지 같기는 어려운데….”
“봤으니까요.”
“예?”
“오늘 수술하시는 거 보고 배웠으니까요. 저는 아버님이 하신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되는….”
그 말이 안 되는 일을 조금 전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정호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중요한 건 딸이 살았다는 것이다.
그가 나강인을 보며 유일하게 설명 가능한 이유를 떠올렸다.
‘천재인가?’
이연지가 깨어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강인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그때까지 병원에서 기다렸다.
휴대폰은 꺼놓은 상태였다. 수술 영상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그가 온종일 이 병원에 있었다는 증거도 남기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성형외과 원장 이성현이 노트북을 빌려주었다. 나강인은 평소처럼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며 시간을 보냈다.
***
이연지가 깨어났다.
“아파. 진짜 아파.”
진통제를 맞아도 아팠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정호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수술은 잘됐다. 대성공이야! 넌 이제 살았어!”
이연지가 고통 때문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뭔가 속은 거 같아. 아빠. 나 간단한 병 아녔어?”
그녀는 몸에 병이 있다는 건 알았다. 몇 달 전부터 검사받으러 입원한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따로 치료받는 건 없었고, 먹는 약도 없었다. 별것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큰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수술을 받았다.
“엄마. 아빠. 나 무슨 병이었어? 수술이 끝났으니까 솔직히 말해줘도 되잖아.”
“그래. 너도 이제 알아야지. 그런데 이건 너만 알아야 한다.”
이정호가 케이타이거 증후군에 대해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에 이연지가 말했다.
“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한부 생명이었다가 살아났구나. 미리 알았으면 나중에 배우가 돼서 연기할 때 도움이 됐을 텐데.”
옆에서 손성현이 말했다.
“방금 들었다시피 이건 의료법을 대놓고 어긴 수술이야. 이거 완전 비밀이다. 네가 실수로라도 남에게 알리면 우리 모두 체포돼. 나중에 연기 연습할 때도 이런 쪽은 언급도 하지 마.”
“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어. 그 누구에게도.”
“지금 이걸 누구누구 아는데?”
“네 부모님이랑 나. 김중석 선생.”
“네 명이 다야?”
“어…. 수술을 같이 한 분의 이름이 알려지면 그분도 곤란해지잖아? 그러니까 너는 모르는 게 나아.”
그들은 나강인의 이름을 이연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만약 이번 일이 걸려서 법적 처벌을 받게 되면, 이 네 사람은 나강인만이라도 빠져나가게 하기로 따로 합의했다.
그래야 한다는 건 손미연이 주장했다.
‘연지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까 우리가 보호해드려야지.’
이연지가 말했다.
“알았어요.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다 이유가 있으니까 누군지 나한테 숨기는 거겠지.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이정호가 말했다.
“내일은 우리 병원 입원실로 옮길 테니까 오늘은 푹 자라.”
그들은 이연지를 재우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병실에는 손미연만 남았다.
병원 로비에서 작업하던 나강인이 노트북을 닫았다.
“이야기는 다 끝났습니까?”
“예. 연지도 상황을 이해했습니다.”
이정호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연지는 이 병원에서 하루만 안정시키고, 내일부터는 제가 있는 병원으로 보내서 입원시킬 겁니다.”
성형외과 원장 이성현이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매형네 병원에 입원했다가 우리가 여기서 뭘 했는지 들키면 다 같이 수갑 차는 거 아냐?”
“어디서 수술했는지만 모르게 하면 돼. 서류나 절차상의 문제는 나와 중석이, 그리고 네 누나가 해결할 수 있어.”
이정호는 그 병원 외과 과장이고 김중석은 외과 의사다. 손미연은 외과를 꽉 잡고 있는 간호사다. 행정직원도 있으면 더 좋지만, 없어도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
손성현이 말했다.
“와. 수술이 끝났는데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계속 불법이네? 하나라도 걸리면 줄줄이 박살 나겠다.”
“대신에 연지를 살렸잖아.”
손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러네. 그럼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