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교환 II
납치범 두목이 말했다.
- 잘됐군.
나강인이 휴대폰에서 조금 물러난 후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보라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 해.”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보라랑 통화하게 해줘! 나도 보라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하잖아!”
- 기다려라.
잠시 후에 이보라가 우는 소리로 말했다.
- 은하야! 나 좀 살려줘!
“야! 넌 왜 또 납치를 당해서….”
- 이 사람들이 너 납치하려다가 실수로 날 납치한 거야!
“어? 그, 그래?”
- 살려줘! 드래곤인지 용가리인지 그거 줘버려!
“알았어. 그럴 거야. 나만 믿고 있어.”
목소리가 다시 두목의 것으로 바뀌었다.
- 이보라는 아직 살아있다. 하지만 네가 경찰에 신고하거나 누굴 데려오면, 이보라는 죽는다.
나강인이 옆에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작게 말했다.
“매니저와 간다고 해.”
신은하가 납치범에게 말했다.
“내가 뭘 믿고 나 혼자 가! 나도 누굴 좀 데려가야지!”
- 경찰은 안된다고 했을 텐데?
“경찰 아니야! 배우랑 매니저 한 명씩만 데려갈게! 그러면 되잖아! 배우는 얼굴만 봐도 경찰 아닌 거 알 수 있잖아!”
- 그건 그렇군.
“그럼 데려가도 되는 거다?”
- 아니. 배우만 허락하지. 매니저는 놔두고 와라.
“안돼! 저 배우는 사람이 너무 가벼워서 의지가 하나도 안 된단 말이야!”
김유찬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래도 의지가 하나도 안 되는 사람은 아닌데….”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그러겠다고 해. 그리고 인질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해.”
신은하가 얼른 말했다.
“알았어! 배우만 데려갈게! 그리고 드래곤 플레이트는 나한테 하나도 안 중요하니까, 보라만 안 다치고 돌아오면 이건 그냥 줄게. 대신에 보라가 다치면 드래곤 플레이트도 없는 거야! 알았어?”
- 흐흐. 협상할 줄 아는군. 시간과 장소는 우리가 통보하겠다
나강인이 말했다.
“지금 당장.”
“지금 당장! 시간 끌지 말고 당장!”
- 거래가 빨리 끝나면 우리도 좋지. 10분 후에 연락하지. 다시 말하지만, 그 배우 외에 한 명이라도 더 데려오면 이보라는 죽는다.
전화가 뚝 끊어졌다.
신은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하악. 나 잘한 거 맞지?”
나강인이 말했다.
“납치범과 처음 협상하는 사람치고는 괜찮았다.”
“예전에 영화에서 본 장면을 응용한 거야. 연기 연습할 때 그 대본을 썼거든.”
김유찬이 옆에서 말했다.
“보라야. 그런데 배우도 데려간다는 건 역시….”
“당연히 유찬 오빠죠. 설마 안 가려고 했어요? 보라는 유찬 오빠가 주최한 전시회 보러 왔다가 납치된 건데?”
“가려고 했지. 사람을 더 안 데려가도 되냐고 묻는 거야. 이를테면 강인 씨라든지.”
신은하가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놈들이 매니저든 누구든 더 데려오면 보라를….”
나강인이 말했다.
“나는 놈들과 접촉하기 훨씬 전에 차에서 내리면 돼.”
“맞다! 그러면 되겠네! 괜히 경찰이나 경호원을 여러 명 데려갔다가 놈들이 눈치채면 보라는 죽을지도 몰라. 강인 오빠가 같이 가자!”
김유찬이 마음을 놓았다.
“강인 씨만 같이 가면 그런 나쁜 놈들은 충분히 잡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안전한데….”
김유찬은 다른 게 불안했다.
“강인 씨 혼자서 우리를 지키면서 보라까지 구할 수 있나?”
신은하가 드래곤 플레이트로 보호되는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필요하면 우리도 싸워야지.”
김유찬이 말했다.
“강인 씨. 은하가 방탄조끼만 믿고 저러는 거 같으니까, 나중에 나도 저거 한 벌만….”
***
두목이 전화를 끊은 후에 말했다.
“신은하와 배우 한 명이 접선 장소로 오기로 했다.”
“배우요?”
“남자 목소리가 살짝 들렸다. 남자 배우겠지.”
“아! 그 그림 전시회 공동주최자가 김유찬입니다. 아까 이보라가 김유찬과 이야기하는 걸 봤습니다.”
“그럼 김유찬을 데려오겠군. 얼굴을 확인하기 편하겠어.”
다른 부하가 걱정했다.
“형님. 혹시 형사가 그 배우로 변장하고 오면 어떻게 하죠?”
“형사가 김유찬처럼 생겼으면 당장 그만두고 배우를 하겠지. 그리고 설사 비슷한 놈이 변장하고 온다고 해도,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데?”
두목의 주변에는 열 명쯤 되는 부하가 서 있었다.
“형사가 권총을 가져온다고 해도.”
두목이 허리를 툭 쳤다.
“우리도 선금으로 받은 총이 있잖아. 우리 총이 더 많은데 그놈이 권총 한 자루로 뭘 할 수 있겠어?”
또 다른 부하가 다가왔다.
“형님. 이보라는 트렁크에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이 장소는 추적당할 수 있으니까, 장소를 옮기는 도중에 접선지점을 문자로 보내야겠어. 출발하자.”
***
신은하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그녀가 얼른 문자를 확인했다.
주소와 접선시각이 적혀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경기도네?”
나강인의 그의 휴대폰으로 지도 어플을 실행한 후에 그 주소를 입력했다. 곧바로 해당 지역의 지도가 떴다.
“놈들이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장소를 골랐다.”
신은하가 시계를 확인했다.
“빨리 가자. 그놈들이 시간을 별로 안 줬어. 늦으면 보라가 위험해.”
김유찬이 말렸다.
“잠깐. 그놈들은 왜 사람이 많은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경기도 외진 곳으로 오라고 했지? 수상하지 않아?”
“우리가 경찰에 신고했을까 봐 그랬겠지! 도시는 사람이 많아서 경찰이 잠복해도 알아보기 어렵잖아. 거기는 아무도 없으니까 경찰이 따라올 수 없고.”
“그런가?”
나강인이 지도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여기로 가려면, 내 제작 거점을 지나서 가도 되겠어.”
신은하도 지도를 확인했다.
“아닌데? 강인 오빠 공작실을 들르려면 조금 돌아가야 하지 않아?”
***
세 사람은 신은하의 차를 탔다. 그녀의 차는 후륜구동 수입차였다. 운전은 나강인이 맡았다.
나강인이 처음부터 가속페달을 깊게 밟았다.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조수석에 탄 김유찬이 당황했다.
“왜, 왜 이렇게 막 밟아요? 아무리 보라 씨가 걱정돼도 그렇지! 과속하지 않아도 시간 안에 갈 수 있잖아요!”
“놈들이 내비게이션 앱으로 예상 시간을 계산해서 문자를 보냈을 테니까, 정상 속도로 가면 그렇겠지요.”
나강인이 운전대를 급격히 꺾었다. 차가 미끄러지면서 타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왜…. 으아아! 방금 가로등을 받을 뻔했어!”
차가 다시 앞으로 튀어나갔다.
“놈들 모르게 어디 좀 들러야 해서.”
신은하가 뒷좌석에서 물었다.
“어디?”
“내 제작실.”
“거기 가려면 좀 돌아가야 하는데?”
“그래서 밟고 있잖아. 과속 범칙금 고지서 나오면 보라한테 대신 내라고 해야겠다.”
“아니, 제작실을 왜 지금 가냐고!”
“가는 길에 들러서 뭘 좀 가져가려고.”
***
그들은 나강인의 제작실에 들른 후에 접선지점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나강인이 차에서 내렸다.
김유찬이 걱정했다.
“강인 씨. 진짜 우리끼리만 가도 됩니까?”
“따라갈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자전거로 우리 차를 따라온다는 거잖아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나강인은 제작 거점에서 산악자전거를 가져왔다. 그 산악자전거는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개조에 사용한 부품 중 일부는 제작실에 있는 금속 가공 장비로 직접 만들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군용으로 개조한 고기동 산악자전거입니다. 지구연합군 표준 사양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오늘 작전 정도는 버텨줄 겁니다.
“제가 자전거를 좀 탑니다.”
신은하가 운전석에서 머리를 내밀고 말했다.
“유찬 오빠! 빨리 타기나 해요! 강인 오빠가 뭐든 잘하는 거 한두 번 봤어요?”
“아니, 그래도 우리는 차를 타고 가는데 자전거로….”
“좀 타라고!”
두 사람이 탄 차가 먼저 출발했다.
나강인은 도로를 달리지 않았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산으로 들어갔다.
나강인이 보통 사람의 몇 배나 되는 다리 힘으로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개조된 전술 자전거가 산길을 오토바이처럼 날아다녔다.
***
이보라를 납치한 놈들은 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 접선장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형님. 차가 도착했습니다. 외제차인데요?”
조장이 물었다.
“누가 타고 있지?”
“운전석에서 신은하가 내렸습니다. 조수석에서는 남자가 내렸는데…. 행사장에 있던 그 배우입니다.”
“김유찬?”
“예. 김유찬입니다.”
“뒤를 따라오는 다른 차는?”
“없습니다.”
조장이 휴대폰으로 다른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서는 뭐 보이는 거 있냐?”
산에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주변을 감시하던 부하가 대답했다.
- 깨끗합니다. 뒤따라오는 차는 한 대도 없습니다.
조장이 실실 웃었다.
“흐흐. 말을 잘 듣는 고객이군. 우리도 가자.”
***
신은하가 차에서 내린 후에 외쳤다.
“나 신은하야! 약속대로 내가 왔다! 나와!”
아까 신은하를 납치한 사람은 셋이다. 그중 두 명이 차를 타고 왔다. 나머지 한 명은 산에 올라가서 주변을 감시 중이다.
납치범들이 차에서 내렸다. 둘 다 얼굴을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로 가렸다.
신은하가 외쳤다.
“보라는 어디 있냐!”
조장이 손짓했다. 부하가 차 트렁크를 열었다.
이보라는 이번에도 트렁크에 갇혀 있었다. 두 손은 끈으로 묶여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봉투를 뒤집어쓴 상태였다.
놈들이 이보라를 차 앞으로 데리고 가서 검은색 봉투를 벗겼다.
이보라는 눈이 부셔서 처음에는 앞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신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라야!”
“으, 은하야!”
김유찬도 외쳤다.
“보라야! 나도 왔다!”
“눈부셔서 안보여요!”
“어…. 내 목소리는 모르겠냐?”
조장이 신은하를 향해 말했다.
“물건부터 보자.”
신은하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금속 부품을 조립해 만든 드래곤 플레이트 방탄조끼를 꺼냈다. 그녀가 그걸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 있다! 이제 보라를 보내라!”
조장이 이보라의 옆구리에 칼을 댔다.
“아니지.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까.”
이보라가 비명을 질렀다.
“히익!”
조장이 지시했다.
“물건을 중간에 놓고 뒤로 물러나. 물건부터 확인해야겠다.”
양측의 거리는 50미터 정도였다.
신은하가 드래곤 플레이트 방탄조끼를 중간 공터에 가져다 놓고 뒤로 물러났다.
조장이 부하에게 지시했다.
“가져와.”
부하가 얼른 달려가 방탄조끼를 가져왔다. 조장은 드래곤 플레이트 특유의 조립 형태를 보고 씩 웃었다.
“물건은 확실하군.”
신은하가 외쳤다.
“이제 보내줘!”
조장이 이보라의 등을 툭 쳤다.
“이봐. 아가씨. 친구한테 가라고.”
이보라가 신은하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두 손이 묶인 채로 뛰느라 몸의 균형을 잡기 어려웠다. 그녀가 뛰다가 앞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꺅!”
신은하가 얼른 뛰어나가 이보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조장이 실실 웃으며 신은하에게 경고했다.
“이 거래는 모두 내 차 블랙박스에 찍히고 있다. 네가 우리와 거래한 게 알려지면 너도 좋을 건 없겠지? 이보라도 털끝 하나 안 다치고 돌려보냈으니, 신고는 하지 말자고.”
“내 방탄조끼를 빼앗아갔잖아!”
“이건 거래니까. 그리고 말이야. 우리가 너희를 순순히 보내주는 건 일을 키우기 싫어서야. 아무도 안 다쳤으니까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잖아?”
“이 새….”
김유찬이 뛰어왔다.
“은하야.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야. 일단 가자.”
납치범들은 차를 타고 떠났다.
부하가 운전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형님. 저렇게 보내줘도 됩니까?”
“그럼 어떻게 하게? 쟤들도 납치할까?”
“그게 낫지 싶습니다. 돌아가서 신고하면 어떻게 합니까?”
“쟤들이 직접 신고하면, 우리를 찾으려고 수사팀이 하나쯤 투입될까? 아니다. 기존 수사팀에 그냥 일 하나 더 던져주겠네.”
“그러면 우리는 큰일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쟤들을 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쟤들 연예인이야. 게다가 김유찬은 영화든 드라마든 주연만 하는 유명한 배우잖아.”
“그, 그렇죠?”
“쟤들 셋이 실종되면 하루만 지나도 이 나라 모든 경찰이 쟤들 찾는다고 들쑤시고 다닐 거다. 그러면 쟤들이 살아서 신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해져.”
“아…. 일반인은 잡아다 처리하면 되지만, 인기 연예인은 그러면 안 되는군요.”
“그리고 쟤들도 연예인이니까 시끄러워지는 게 싫으면 신고를 안 하겠지. 어쨌든 이보라는 무사히 풀려났잖아?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하는 게 우리에게 이익이다.”
***
신은하와 이보라는 아직 차에 타지 않았다. 이보라는 울어서 화장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사과했다.
“은하야.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방금 빼앗긴 그 방탄조끼 말이야. 강인 오빠가 만들어준 그거지? 나 때문에 빼앗겨서 미안해.”
신은하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거 가짜야.”
“응?”
“오는 길에 강인 오빠 공방에 들러서 가져온 거야. 철인기공이란 회사에서 자기네가 이해한 방식으로 시제품을 만들었는데, 강인 오빠한테 평가를 부탁했대.”
“그럼 더 중요한 거 아니야?”
“아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을 만들어왔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