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창고
신은하가 말했다.
“유찬 오빠는 확실히 얼굴이 아깝긴 해.”
이보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맞아. 얼굴만 잘생겼어.”
조수석에 앉은 김유찬이 항의했다.
“지금 여기서 나만 정상이야? 그리고 말이야. 나도 보라를 위해서 납치범도 만나고, 지금도 이렇게 같이 가고 있…. 아니, 강인 씨. 속도 좀 줄이자니까요!”
나강인이 브레이크를 밟아 차의 속도를 줄였다. 시속 200km를 넘던 속도가 순식간에 100km로 줄어들었다.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이야아. 이 차에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강인 씨밖에 없다니까.”
나강인이 말했다.
“찾았다.”
“어? 찾다니요? 뭘….”
나강인이 오른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보라를 납치했던 차.”
신은하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 아닌데? 아까 그 차는 번호가 4884였는데? 너무 멀어서 읽기는 어렵지만 번호 모양이 조금 다르지 않나?”
“중간에 번호판 갈아끼더라. 자전거로 따라가면서 봤다.”
김유찬이 물었다.
“진짜 자전거로 저 차를 따라간 겁니까?”
“비포장도로에서는 쫓아갈 만해요.”
앞차와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신은하가 외쳤다.
“어? 저거 도망친다! 빨리 쫓아가!”
상대가 빨라진 게 아니다. 나강인이 차의 속도를 더 줄였다.
“너무 달라붙으면 눈치챈다. 저놈들도 이 차 번호판을 봤으니까.”
“아하!”
신은하가 시트에 등을 붙이며 물었다.
“강인 오빠는 운전도 잘하고 자전거도 잘 타고 하다 하다 미행도 잘하네? 못하는 게 뭐야?”
김유찬이 반격했다.
“연애 같은 거?”
신은하가 김유찬을 째려보았다.
“유찬 오빠는 그걸 꼭 말해야 했어요?”
***
납치범들의 차가 낡은 창고에 도착했다.
그 창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많이 낡았지만, 내부에는 합숙생활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의 집기가 있었다.
무기도 충분했다.
장검처럼 날이 있는 무기는 캐비닛에 들어있었다. 대신에 휘두르기 좋은 크기의 쇠파이프는 보이는 곳에 아예 쌓아놨다.
두목이 소파에 앉아서 물었다.
“가져왔냐?”
조장이 손짓했다. 그의 부하가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왔다.
조장이 트렁크를 활짝 열며 말했다.
“아주 잘 모셔왔지요.”
철인기공 개발팀이 직접 만든 드래곤 플레이트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두목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그거란 말이지?”
“예. 총알도 막는 방탄조끼입니다.”
다른 부하가 물었다.
“방탄조끼가 총알을 막는 건 원래 당연한 거 아닙니까?”
두목이 실실 웃었다.
“동수야. 이건 그냥 방탄조끼가 아니야. 두께도 얇고 가볍고 하여간 방어력이 장난 아니라더라.”
두목이 옷을 슬쩍 들쳤다. 겨드랑이에 찬 권총이 보였다.
“오죽하면 손님이 이런 좋은 걸 선금으로 주면서 구해오라고 했겠냐?”
두목이 권총을 뽑아 드래곤 플레이트를 겨누었다.
“그러니까 이 총으로 쏴도 저 조끼가 팍 튕겨낸다는 말이지.”
조장이 옆으로 슬금슬금 피하며 말했다.
“형님. 이 물건은 고객한테 넘겨야 하는데, 그러다 기스라도 나면….”
“하하하. 이 새끼. 총알이 너한테 튈까 봐 그러냐? 그렇게 겁이 많아서 깡패를 어떻게 할래? 안 쏴. 이 새끼야. 총알 아까워.”
한국에서는 권총만 살 수 없는 게 아니다. 한국 마트나 총포상은 권총용 실탄을 팔지 않는다.
다른 부하가 물었다.
“형님. 진품인지 확인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보면 알아?”
“어…. 아뇨. 그래도 사진이 있으니까….”
두목이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신은하가 청평호수에서 찍은, 드래곤 플레이트가 조금 노출된 사진이었다.
그가 그 사진을 툭 던져주면서 말했다.
“네가 보고 비교해.”
부하가 사진과 실물을 비교해 보았다. 사진에 드러난 부분은 조금밖에 없지만 표면의 무늬가 비슷했다.
“맞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맞겠지.”
두목이 조장에게 물었다.
“안 들키게 잘 왔지?”
조장이 큰소리쳤다.
“CCTV가 없는 길만 골라서 오다가 도로를 탔습니다. 귀신도 모를 겁니다.”
“그럼 됐네.”
두목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야. 그거 좀 닦아놔라. 물건을 좋은 값에 넘기려면 광은 좀 내야 할 거 아냐?”
***
나강인 일행은 그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 풀숲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차는 언덕 뒤쪽에 숨겨놓았다. 그러면 창고에서는 차가 보이지 않는다.
나강인이 쌍안경으로 창고를 보며 말했다.
“그놈들이 저 창고로 들어갔다. 안쪽에 놈들이 더 있겠지.”
신은하가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보여줘.”
나강인이 쌍안경을 넘겼다. 신은하는 쌍안경으로 창고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뭐야! 뭐가 이렇게 가깝게 보여? 나 전에 영화 찍으면서 쌍안경 써본 적 있는데, 원래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아?”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고립된 전장에서나 급히 만들어 쓰는 물건입니다. 디지털 쌍안경을 만들어 쓸 수 없는 환경에서나 씁니다.
“저거 네가 만들었잖아.”
- 그런 하찮은 걸 만들었는데도 신은하가 저렇게 감탄합니다.
“자랑하는 거였구나.”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좋아 보여?”
“대박! 이거 어디서 팔아?”
“만들었어.”
“대바악! 이것도 직접 만든 거구나! 이거 혹시 막 벽 뚫고 투시도 되고 그래?”
“그러겠냐?”
AI 전지인이 말했다.
- 가까이 접근하면 소음 정보를 수집해 벽 뒤의 적 위치를 홀로그램으로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투시와 비슷한 효과가 나온다.
그런데 그건 이 쌍안경의 기능이 아니다. AI 전지인이 AR 렌즈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따라 자랑이 많아.”
김유찬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머리 위에 풀까지 덮었다. 그가 말했다.
“저 안에 몇 놈이나 있을까요?”
나강인이 말했다.
“열 명쯤?”
“어떻게 알아요?”
“저 앞에 주차된 차가 세 대잖아요. 그중 한 대는 세 명이 탄 걸 확인했으니까, 원래 주차된 차에 한 명씩 탔으면 최소 다섯 명. 네 명씩 탔으면 열한 명.”
“그런데 왜 다섯 명이 아니라 열 명쯤인데요?”
나강인이 신은하가 보던 쌍안경을 돌려받아 김유찬에게 넘겨주었다.
“차에서 내릴 때 새로 생긴 발자국이 많아서요. 한 명씩 내렸으면 저럴 리가 없지.”
“어? 보인다! 진짜 발자국 같은 게 많이 보여!”
이보라가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을 잡으며 말했다.
“겨우 열 명이면, 쳐들어가서 다 잡으면 되는 거 아녜요? 우리에게는 강인 오빠가 있잖아요. 4대10 정도면 우리가 이길 것 같은데요.”
나강인이 말했다.
“돌 내려놔. 초보자가 그걸로 찍으면 네 손을 다칠 수도 있다.”
“네에!”
“대답만 잘하고 그걸 왜 주머니에 넣는데?”
***
두목이 창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물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에 전화기에서 영어가 튀어나왔다.
두목이 인상을 쓰며 불평했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헤이. 한국말 오케이?”
잠시 후에 다른 사람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이번에는 한국어가 나왔다.
상대가 물었다.
- 물건은?
“당연히 구했지.”
- 생각보다 빠르군. 직거래한 보람이 있어.
“나한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앞으로도 종종 이용하라고.”
- 곧 사람을 보내지.
“성질도 급하긴. 그전에 잔금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고.”
상대의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묻어났다.
- 음? 이미 합의가 끝났을 텐데? 반자동권총 세 자루. 총알 마흔네 발.
“그거야 일이 쉽게 끝났을 때의 이야기였는데, 우리도 물건을 어렵게 구했단 말이지.”
- 물건을 구할 때 귀찮은 일을 만든 건가?
두목이 피식거렸다.
“에이. 우리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잘 마무리하긴 했는데, 그러느라 고생을 좀 했거든. 그래서 좀 더 챙겨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 뭘 원하지?
두목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잔금으로 권총 다섯 자루. 총알 백 발.”
전화기 너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 훗. 그러지.
두목이 급히 조건을 추가했다.
“소음기도. 쏠 때 총소리 대신 퓩퓩 소리 나는 거 말이야.”
- 소음기는 하나. 거기까지 하지.
두목이 활짝 웃었다.
“오케이. 그럼 거래장소는 내가 따로 보내줄 테니까, 거기서 보자고.”
- 물건을 제대로 가져왔는지 알아야겠는데.
“우리가 다 확인했는데 의심 많기는. 내가 금방 사진 찍어서 보내줄게. 오케이?”
- 그러지.
상대가 전화를 끊었다.
두목이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이 새끼가 잔금을 올려도 웃네? 너네 나라에서나 권총이 구하기 쉽지 여기서도 그런 줄 아냐? 여기서 그거 하나면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두목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창고로 들어갔다.
“총알은 이백 발쯤 부를걸.”
***
신은하가 언덕 위 수풀 사이에서 두목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놈이 어디로 전화한 걸까?”
이보라가 대답했다.
“다른 일당을 부른 거 아냐?”
나강인이 설명했다.
“저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드래곤 플레이트였어. 그걸 저놈이 입고 싶어서 연예인을 습격한 건 아니겠지.”
이보라가 물었다.
“그럼요?”
“그걸 원하는 놈이 따로 있겠지. 저놈은 물건을 구했으니까 그놈하고 통화한 거고.”
“그럼 저놈이 밖에 나온 이유는요?”
“부하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고. 부하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통화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밖으로 나온 건 부하들에게 지금 뭔가 일을 시켰기 때문이겠지.”
이보라가 감탄했다.
“우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그냥 추측이야.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된 거면.”
나강인은 두목이 통화한 상대편도 잡고 싶다. 그러려면 놈들이 움직일 때 뒤를 따라가서 누구와 만나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들을 데리고 그렇게까지 하는 건 위험하다.
‘이번엔 여기까지군.’
그가 이보라에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해.”
“앗! 이제 해도 돼요?”
“두목처럼 보이는 놈도 있고 부하들도 저 창고에 있으니까, 다 잡자. 경찰에 연락해.”
“네에!”
이보라가 신은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대폰 좀 빌려줘.”
“네 거 써.”
“내건 그놈들이 빼앗아갔단 말이야!”
“어? 어…. 자.”
이보라가 112를 눌렀다.
나강인이 조언했다.
“거기 말고, 박기정 형사에게 전화해.”
“우리 동네 박 형사님?”
“그래야 조용히 처리해줄 거다. 기자들이 알면 네가 조금 곤란해지잖아.”
“네에!”
신은하의 휴대폰에는 박기정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보라가 박기정에게 전화했다.
박기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신은하 씨?
“저 보라인데요. 이보라.”
- 아! 이보라 씨! 그런데 왜 신은하 씨 휴대폰으로….
“제가요. 또 납치를 당했거든요?”
의자가 와당탕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 거기 어디입니까? 지금 갇혀 있습니까? 주변에 뭐가 보입니까?
“아뇨. 강인 오빠가 구해줘서 지금은 괜찮아요.”
- 아. 나강인 씨가 또….
“우리가 그놈들의 소굴을 알아냈어요. 경찰이 와서 싹 다 잡아주면 안 될까요?”
- 됩니다! 되요! 당장 출동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여기가요….”
나강인이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보라가 그 주소를 그대로 불러주었다.
박기정이 말했다.
- 그 지역 관할 경찰서에 바로 출동해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저도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안전한 곳에 계십시오.
“네. 근데요. 제 이름으로 기사로 나가면 제가 좀….”
- 보라 씨 이름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박 형사님에게 전화하길 잘했네요.”
- 천만에요. 팬으로서 당연, 아니, 경찰이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보라는 상황을 조금 더 설명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그런 후에 자랑했다.
“은하야? 봤어? 너인 줄 알았을 때랑 나인 줄 알았을 때의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
신은하가 툴툴댔다.
“야. 박 형사님은 내 팬클럽도 회원이거든?”
“박 형사님에게는 내 팬클럽이 더 위에 있다는 거 아니겠니?”
나강인이 말했다.
“은서가 쟤들은 중학교 때부터 경쟁하면서 싸웠다더니, 그게 이런 거였구나.”
배우 김유찬은 아까부터 언덕 위에 계속 엎드려 있었다. 엎드려 있던 사람은 김유찬뿐이다.
“어우. 땅에서 찬 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추워서 더 못 버티겠다.”
김유찬은 이보라가 경찰에게 신고하는 걸 보고 마음을 조금 놓았다. 게다가 지금 창고 밖에는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옷을 슬쩍 털었다.
“형사들이 왔을 때 흙투성이 모습을 보여줄 순 없….”
문제가 생겼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언덕이다. 김유찬은 차가운 땅에 너무 오래 엎드려 있어서 몸이 조금 굳었다. 그가 그 상태로 일어나다가, 실수로 발이 미끄러졌다.
“어어?”
나강인이 잡아줄 틈도 없었다. 그는 언덕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김유찬은 몸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이미 몸의 중심이 언덕 아래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김유찬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여전히 중심은 아래쪽이었다.
김유찬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계속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 방향은 언덕 아래쪽이었다. 속도가 금방 빨라져서 뜀박질로 변했다. 뛰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김유찬이 뛰는 방향에 놈들의 아지트인 낡은 창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