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30화 (130/411)

130. 닥터 노네임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이 서울 외곽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술집을 통째로 빌렸다.

이정호는 이제 절박하지 않았다. 설사 문제가 생겨도 이미 살아난 이연지가 죽을 일은 없다.

지금 간절한 건 이정호가 아니라 권동진이다.

그는 다른 장소를 구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술집을 골랐다. 꽤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면 감정 호소에 약해지고 허락도 조금 더 쉽게 한다.

약속장소가 술집이라 이정호는 택시를 타고 왔다. 그런데 권동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서도 데려오지 않았고, 대리기사를 부를 생각도 없었다.

술집 주인은 술과 안주를 준비해놓고 밖으로 나갔다.

술집에 단 두 명만 남았다. 권동진이 독한 술을 삼키고 술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정호 박사님. 이제 이야기해보시죠. 따님 수술에 성공하셨죠?”

이정호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예.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제 딸은 특수한 경우라 가능….”

권동진이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다급히 말했다.

“그럼 우리 수연이도 수술해 주십시오!”

이정호가 딱 잘라 말했다.

“안 됩니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따님 수술이 성공했으면 제 딸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제 딸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습니다. 권 사장님 따님은 그럴 확률은 낮으니까 아직 시간이 있잖습니까?”

권동진이 버럭 화를 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백 일도 안 남았다면서요!”

“운이 좋으면 좀 더 오래….”

“그리고 이 박사님 따님은 그동안 평소처럼 생활하기라도 했지, 제 딸은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단 말입니다! 진통제가 없으면 잠도 못 자요!”

이정호가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따님이 이 수술을 받으면 법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권동진이 큰소리쳤다.

“법적인 문제? 금지약물입니까? 아니면 실험 중인 걸 썼습니까? 약이 허가를 못 받았어요? 뭐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이정호는 고민했다.

‘나강인 씨는 이미 연예계에서 유명하다던데. 법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도 이미지에는 치명타를 입겠지.’

나강인만 치명타를 입는 게 아니다. 그 문제는 권동진에게도 적용된다.

“권 사장님이 의사 단체의 공격이라도 받게 되면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예?

“병원에서 율명바이오의 약을 거부하면 회사가 망할 수도 있잖습니까? 율명바이오의 약이 대체 약품이 없는 것도 아닌데요.”

율명바이오가 제법 알려진 제약회사이긴 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치료제를 만드는 건 아니다.

권동진은 그 경고를 믿지 않았다.

“의사 단체가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이상한 핑계 대지 마십시오.”

“제 이야기를 듣고 나면, 후회하실 수 있습니다.”

“후회 안 합니다.”

“만약 따님을 수술하면 권 사장님과 저는 같이 손잡고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만 감옥에 가고 사장님은 회사가 망하는 선에서 끝나겠죠.”

권동진이 장담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 감수하겠습니다. 내 딸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이정호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나강인의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가명이 필요했다.

이정호가 미리 준비해온 이름을 말했다.

“닥터 노네임.”

“예?”

“본명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와 닥터 노네임이 같이 수술해서 우리 연지를 살렸습니다.”

권동진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니까 내 딸도!”

“닥터 노네임은 수술할 수 있는 면허가 없습니다.”

“예. 면허가 없…. 예? 뭐라고요?”

이정호가 얼른 말했다.

“왜 그런지는 알려드릴 수 없으니까 묻지 마십시오. 어쨌든, 왜 이 수술을 하면 위험한지 아시겠지요?”

“아니, 지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거기다 약품이나 혈액을 빼돌리고 서류를 조작하는 등등, 이 수술을 하려면 불법이란 불법은 다 저질러야 합니다. 발각되면 체포될 겁니다.”

권동진은 이제야 왜 이정호가 딸을 어떻게 수술했는지 비밀로 하는지 깨달았다.

“아….”

그는 닥터 노네임에게 왜 면허가 없는지 나름대로 추측했다.

‘의사 면허가 취소됐나? 아니면 무슨 이유로 정체를 숨겨야 하나? 혹시 수배자인가?’

궁금했다.

그렇지만 그는 적어도 한 가지는 단 한 순간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와이프나 아들놈들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딸도 모르게 할 겁니다. 저 혼자만 알겠습니다.”

권동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이제 우리 수연이도 수술할 수 있지요?”

“따님 증상은 원래는 수술이 불가능한데….”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 그래서 가능합니까?”

이정호가 예전에 준비한 방식으로는 나강인과 협업해도 한 시간 안에 권수연의 수술을 끝내는 건 어렵다.

그런데 그는 이연지를 수술하는 날 나강인의 카피 능력을 보았다.

‘내가 먼저 보여준 수술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천재적인 능력.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수술시간을 더 줄일 수 있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데….’

이론이 항상 현실에서도 통하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다.

권동진이 고민하는 이정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과장님. 제발 우리 수연이 좀 살려주십시오.”

이정호는 난감했다.

“저야 그러고 싶지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그럼 누가 결정합니까? 닥터 노네임입니까?”

***

며칠 뒤에 동네 체육관에 요원 다섯 명이 총권도를 배우러 왔다.

나강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번에 같이 훈련한 애들 있잖습니까? 걔들도 이따가 와서 같이 운동할 겁니다.”

요원들이 활짝 웃었다.

“우리야 적극 환영이지요!”

아이돌들과 같이 훈련하면 나강인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면 훈련 강도가 좀 낮아진다. 그래서 다들 환영했다.

경찰 요원 박순기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요. 나 사범님. 이번에 연예인 납치 사건을 일으킨 그놈들 말입니다. 나 사범님이 잡으셨다면서요?”

“비공개로 처리한다고 들었는데, 잘 아시네요?”

“제가 그런 소식을 많이 듣는 부서에 있어서요. 그렇다고 뭐 확실한 이야기만 듣는 건 아닙니다. 황당한 이야기가 들릴 때도 많거든요.”

박순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만 해도, 나 사범님이 날아오는 총탄을 쇠파이프로 쳐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

“하하하. 당연히 헛소문이겠죠? 아하하하.”

신은하는 오늘 호신술 촬영을 구경하려고 이곳에 와 있다. 그녀가 말했다.

“맞는데요? 강인 오빠가 총알을 쳐내는 거 내가 분명히 봤는데요? 난 무슨 천하제일검인 줄 알았어요.”

“예?”

요원 다섯 명이 나강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강인이 둘러댔다.

“마침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서 그냥 해봤는데, 어쩌다 운이 좋아서 된 겁니다.”

박순기가 감탄했다.

“와…. 그게 되는구나.”

그는 지난번에 쌍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했다가, 박순기만 따로 굴리겠다는 말에 사정사정해서 없던 일로 만들었다.

그런데 총탄을 파이프로 쳐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다시 욕심이 났다.

“저기, 저번에 쌍검술 말입니다. 쌍검술은 무리지만 그냥 검술이라도….”

경호관 최남수가 끼어들었다.

“나 사범님이 총탄을 쳐낼 때 쇠파이프를 쓰셨다면서요. 멧돼지 잡을 때도 파이프였고요. 이거 삼단봉으로 하면 딱이겠는데요?”

다른 요원들도 맞장구를 쳤다.

“맞지. 딱이지.”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럼 다음에는 가볍게 그걸 배워볼까요? 지금은 삼단봉이 없으니까 어렵지만….”

요원 다섯 명이 거의 동시에 삼단봉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저는 나 사범님 것까지 준비해 왔습니다.”

“어머. 나도 그랬는데.”

나강인이 물었다.

“아니, 그걸 왜 다들 가지고 계세요?”

“저희도 소문을 들어서…. 하, 하하.”

나강인이 투덜댔다.

“사건을 비공개로 처리할 거라고 큰소리치더니,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없네.”

정보기관 요원이 말했다.

“비공개로 한 건 맞습니다. 그냥 저희가 잘 아는 겁니다. 저희가 원래 정보 습득이 빠르거든요.”

그들이 지금 여기 있는 건, 총권도가 뭔지 알 정도로 정보 수집 능력이 좋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총권도의 이름 정도는 아는 사람도 어디서 배울 수 있는지는 모른다. 뒤늦게 어디서 배우는지 알게 된 사람도 있지만, 이미 수강생은 다섯 명을 다 채웠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올빼미들이 원하는 대로 단봉술을 이용해 굴리십시오.

“뭐, 그럽시다.”

나강인이 삼단봉을 받아 쭉 뻗은 후에 말했다.

“일단 기본 동작 몇 개로 시작하죠.”

나강인은 AI 전지인의 도움을 받아 다섯 명에게 단봉술을 가르쳤다.

기술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현재 존재하는 단봉술과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다들 기본 동작은 쉽게 배웠다.

“잘하시네요.”

박순기가 자랑했다.

“저희가 원래 몸 쓰는 건 잘합니다. 하하하.”

“그럼 이게 본격적으로 시작합시다. 들어오세요.”

“예?”

“실전만큼 좋은 훈련이 없죠.”

곧바로 실전 수준의 훈련이 시작됐다. 다섯 명이 번갈아가며 나강인에게 덤볐다. 나강인은 그들을 사정 봐주지 않고 두들겨 팼다.

“으악! 아니, 이게 아니라!”

“역시 기본은 하는 분들이라 다르네요.”

“계속 맞고 있는데 뭐가 다르…. 컥!”

“더 열심히 피하고 막아보세요.”

“악! 제가 배우고 싶은 건 총탄을 베는 검…. 악!”

“그때는 그냥 운이 좋았다니까요.”

“꺄악! 나 사범님! 여자 때리는 남자였어요?”

“영희 씨는 남녀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패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약한 척입니까?”

요원들은 1대1로 돌아가면서 실전 수준으로 나강인과 싸워야 했다.

평소에 이렇게 작정하고 싸우면 누구 하나 다치기 쉽다. 다치지 않게 하려면 힘을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나강인은 요원들이 아무리 전력을 다해 덤벼도, 멍은 들어도 다치지는 않는 선을 정확히 지키며 요원들을 팼다.

덕분에 요원들은 삼단봉을 들고 실전과 같은 수준으로 싸우는 경험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대신에 체력도 쭉쭉 빠지고 멍도 점점 늘어났다.

요원들이 이러다 맞아 죽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에 아이돌 여덟 명이 도착했다.

나강인이 삼단봉을 접으며 말했다.

“아. 병아리들이 왔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 여덟 명이 체육관에 들어오자마자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한 시간 동안 돌아가면서 두들겨 맞은 요원 다섯 명이 그들을 격하게 환영했다.

“어서 와!”

“진짜 기다렸다!”

“더 일찍 와도 되는데!”

피시방 삼인방도 도착했다.

촬영용 장비는 윤아름이 가져왔다.

SAH 엔터는 자체 촬영팀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나강인이 거절했다.

영상은 윤아름의 너튜브 계정을 통해서 서비스하기로 했다.

SAH 엔터도 이 영상으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 이 영상이 유명해져 아이돌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그 조건에 동의했다.

차은서와 대학생 해커 안성환은 윤아름의 인터넷 방송 고정 출연자 자격으로 왔다.

윤아름이 로봇 가면을 쓰고 카메라 앞에 서서 오른팔을 쭉 펴며 말했다.

“자자.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하겠습니다. 프프걸스!”

프프걸스 네 명이 그녀의 오른쪽으로 이동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프프걸스입니다!”

“여자들만 호신술이 필요할까요? 아니죠. 천사전사단!”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천사전사단입니다!”

천사전사단 네 명은 왼쪽에 나타났다.

피시방 삼인방과 나강인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얼굴이 공개된 건 게스트로 출연한 아이돌 여덟 명뿐이다.

촬영은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나강인은 두 시간 동안 아이돌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쳤다. 어려운 동작 여러 개가 아니라 간단한 동작 하나만 골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요원들이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렇게 하려면 힘보다 기술이 중요하겠어.”

“나 저런 거 잘하는데. 나한테 배우지.”

“우리는 방송에 얼굴 까면 안 되잖아.”

“마스크 쓰고 할까?”

“그러다 걸리면 시말서로 끝날까?”

“구경이나 해야겠다.”

경호관 최남수가 말했다.

“쉬는 시간에 얘들한테 조언이나 해주자고.”

***

호신술 교육 영상 촬영은 두 시간이 걸렸다. 기본 동작은 하나뿐이지만, 여덟 명의 아이돌이 다양한 상황을 연출하며 응용 동작을 촬영했다.

촬영이 끝난 후에 나강인이 말했다.

“기왕 온 김에 자연 체조 2단계 수업을 시작하자.”

아이돌들은 당황했다. 호신술 교육 영상 촬영이 너무 힘들어서 남아있는 체력이 별로 없었다.

완전히 지친 막내 최지혜가 눈치를 살살 보다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팔다리를 흔들었다.

“속았어! 오늘은 호신술만 배우는 줄 알았는데! 이러다 죽어요. 아니다. 나는 이미 죽어있다!”

“오늘은 이론 교육인데 말이야. 교육 끝나면 뭘 좀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이미 죽었으면 안 되겠네.”

최지혜가 벌떡 일어났다.

“저 아직 안 죽었어요! 더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론 교육을 말만 가지고 할 수는 없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으로 봐야 이해하기 쉽잖아? 요령 잘 피우는 지혜가 교보재, 아니, 조교 하면 되겠다.”

“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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