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사잇길
호신술 교육 영상 편집은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도와주었다.
이튿날 윤아름이 그 영상을 인터넷 너튜브에 올렸다.
댓글이 곧바로 올라왔다.
- 영상 기다렸습니다.
- 오늘은 무슨 병맛 개그를 보여주실지….
- 어? 아이돌이다. 와. 게임 하는 여자 섭외능력 무엇?
- 인기 아이돌은 아니네요.
- 프프걸스랑 천사전사단이면 이제 듣보잡은 아니죠.
- 맞습니다. CF도 찍었고, 자연 체조 영상으로도 유명합니다.
- 내일 우리 학교 행사에 프프걸스 온다던데. 구경하러 가야겠다.
당황한 사람도 많았다.
- 아니, 왜 정식으로 가르쳐요?
- 진짜 호신술을 가르치네?
- 호신술 방송에서 호신술을 가르친다고 놀라시면, 저도 그렇습니다. 왜 진짜로 가르쳐요?
- 이거 개그 방송 아녔어요?
격투기 관련 게시판에도 영상 링크가 올라왔다. 여기는 반응이 또 달랐다.
-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가르치는 분의 움직임이 장난 아닙니다.
- 그러게요. 직접 만나서 한 수 배우고 싶네요.
빠르게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며 윤아름이 환성을 질렀다.
“뜬다! 뜬다! 내 방송이 뜬다아! 야. 봤어? 막 다른 게시판에도 퍼지고 있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피시방이다. 안성환이 말렸다.
“아름아. 남들이 쳐다본다.”
“넌 이런 내가 창피하니?”
“응.”
“생각해보니까 나도 그래.”
그녀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
이튿날 서울 시내에 있는 한국대학교에서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대학 축제가 아니다. 오히려 학술적인 성격이 제법 있었다. 그렇다고 무겁거나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행사장은 야외가 아니라 커다란 실내 강당이었다.
이 행사는 중간에 프프걸스의 공연 같은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재학생들은 물론이고 인근에 사는 주민들도 행사를 보러 왔다.
총권도 수강생 민영희도 공연을 보러 한국대학교에 왔다가 박순기를 발견했다.
“순기 네가 여긴 왜 왔냐?”
박순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비번인데 심심해서.”
“웃기시네. 프프걸스 보려고 왔겠지.”
박순기가 바로 받아쳤다.
“그러는 넌? 천사전사단이 목적이냐?”
“난 오늘 일이 없어서. 내가 평소에 공연 보러 다니는 거 몰랐냐?”
“웃기시네. 어딜 병아리들을 노리나?”
민영희가 발끈했다.
“노리다니! 너 지금 내 순수한 팬심을 무시하냐?”
“나야말로 순수한 팬심이다.”
오늘 행사에는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도 참석했다. 그가 학교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다닐 때는 저 시계탑 앞 잔디밭에서 술을 자주 마셨는데 말이야. 이젠 못 그러겠지.”
설계팀 차지희가 말했다.
“제가 다닐 때는 저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술집이 있는데 왜 저기서 마셔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싸니까. 나 때는 말이야. 학생은 돈이 없었거든. 그래서 술이랑 과자를 사다가 저기서 마셨지.”
차지희는 당황했다.
“네? 본부장님이 돈이 없으셨어요?”
이태성은 철인기공 사장의 아들이다.
“난 있었지. 내 친구들이 없었고.”
“와. 있는 사람이 더….”
“거기까지.”
이태성은 회사 안에서는 본부장이지만 회사 밖에서는 학교 선배다. 그것도 같은 과 선배다. 하지만 까마득한 선배라 재학생 때는 얼굴을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선을 많이 넘을 수는 없다.
“네. 사정이 있으셨겠죠.”
차지희는 이태성과 같이 온 게 아니다. 그녀는 오늘 학교 행사의 발표자 중 한 명으로 왔다가 이태성과 마주쳐서 붙잡혔다.
이태성이 제안했다.
“행사장에 같이 갈래?”
그녀는 퇴근해서까지 직장 상사와 같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저는 발표 준비 때문에 먼저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어. 그래.”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이 권수연과 함께 학교에 도착했다.
권동진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권수연은 케이타이거 증후군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았다.
“진통제를 더 썼어요. 지금은 별로 안 아파요.”
이연지와 권수연은 병명은 같은데 증상이 많이 달랐다.
이연지는 아무런 통증 없이 평소처럼 살아도 괜찮았다. 대신에 수술 전의 이연지는 전조증상 없이 갑자기 죽을 수도 있었다.
권수연은 반대로 심한 통증을 달고 살았다. 대신에 갑자기 위독해질 위험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녀가 진통제를 두 배로 쓰면서까지 오늘 학교에 온 건, 박사과정인 그녀가 주도해서 진행한 연구를 오늘 행사에서 발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권동진이 말했다.
“수연아. 내가 어떻게든 치료할 방법을 찾을 테니까 조금만 더 힘내.”
권수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다니까요.”
권동진은 괜찮지 않았다.
‘세상 좋은 거 다 하고 다녀야 할 나이에…. 왜 하필 내 딸이….’
며칠 전까지는 희망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 동아줄은 아니지만 가느다란 구명줄 하나는 생겼다.
‘이정호 과장과 닥터 노네임을 설득해서 수술만 하면, 내 딸은 살 수 있을 거야.’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권수연에게 말하지는 못했다. 수술 과정 자체가 비밀인 데다가, 말했다가 수술을 못 하게 되면 너무 크게 실망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만 믿어. 내가 어떻게든 널 살릴 테니까.”
지금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프프걸스의 무대는 행사 중간으로 잡혔다. 행사 시작할 때 처음으로 잡으면 사람들이 공연만 보고 사라질까 봐, 학교에서 일부러 그렇게 잡았다.
고등학생인 막내 최지혜가 대기실에서 말했다.
“오늘 보니까 이 학교 되게 좋아 보여. 나도 대학은 여기로 가고 싶다.”
리더 소지영이 놀렸다.
“우리 막내가 인서울이 장난인 줄 아네? 너 공부 잘해?”
“어…. 내 친구가 전교 1등인데 남는 점수 있으면 달라고 졸라볼까?”
“그게 되겠니?”
나강인도 한국대에 도착했다.
“내가 여기를 졸업했단 말이지. 나 공부 좀 했구나.”
- 서류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요원님은 지구연합 전략특수군 소속입니다.
“지구연합군이 아닐 가능성도 약간은 있잖아?”
- 희박합니다.
“우리 지인이는 이럴 땐 참 단호해.”
나강인도 그가 지구연합과 상관없을 리 없다는 건 안다.
신체삽입형 AI 전지인은 지금 시대의 기술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다. 게다가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략특수군 군복을 입고 있었다.
“얘들 공연이나 보러 가자.”
나강인이 행사장 쪽으로 걸어갔다.
AI 전지인이 길을 표시했다.
-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선택한 길은 달랐다.
“아니야. 이쪽으로 가면 사잇길이 있는데, 거기가 지름길이야.”
- 요원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 그냥?”
나강인이 조금 더 걸어갔다. 건물 사이에서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 지도상으로는 이 위치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빠르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러게.”
- 뭔가 기억나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 딱히 없어. 그런데 말이야.”
그가 조금 전에 희박한 확률 이야기를 한 건 이유가 있어서다.
“오늘 여기 와서 계속 느끼는 건데 말이야. 이 학교가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어.”
- 서류상의 재학 기록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60년의 시차는 어떻게 된 건데?”
-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그가 사잇길을 걸어가며 말했다.
“나도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사잇길 중간에 모퉁이가 있었다.
갑자기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모퉁이 너머에 사람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충돌합니다.
그 경고는 모퉁이를 돌기 직전에 나왔다.
나강인은 모퉁이를 지나가자마자 다른 방향에서 걸어온 권수연과 딱 마주쳤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놀란 그녀가 비틀거렸다. 그대로 두면 넘어진다.
나강인이 그녀의 팔과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해주었다.
‘너무 가벼운데?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나?’
그녀가 겨우 중심을 잡은 후에 손을 가슴에 대며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아.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그녀는 나강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나강인?”
나강인은 당황했다. 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내가 만난 적 있는 사람이냐?”
나강인이 말 한마디라도 나눠본 사람은 AI 전지인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자칼이나 낙귀 사건처럼 특별한 상황에서 본 사람은 대화를 하지 않았어도 얼굴 정보를 갖고 있다.
- 직접 접촉한 적은 없습니다. 지나가다 얼굴을 봤을 수는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요원님의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아가씨가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내 주변 인물 정보는?”
- 요원님은 남아있는 개인정보가 별로 없습니다.
일단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겨야 한다. 나강인이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야? 반말하는 사이야? 아니면 존댓말을 하는 사이야?’
나이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 가벼운 인사를 던져보았다.
“하하. 안녕?”
권수연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오랜만이다. 2년이 넘었지?”
나강인도 일단 아는 척을 계속했다.
“그러게. 그동안 잘 지냈….”
권수연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이 아가씨, 다이어트라고 하기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이는데?”
AI 전지인에게 병을 진단하는 기능은 없다. 대신에 병사들의 부상이나 컨디션을 추측하는 기능 정도는 있다.
- 건강이 나빠 보입니다. 영양실조가 의심됩니다.
나강인이 권수연에게 물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권수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다. 케이타이거 증후군이 생긴 곳 중 하나가 위장이다. 진통제 없이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
“그냥 잘 지내.”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아. 일단 말은 놓는 사이 같지?”
- 물론입니다. 반응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얘가 누군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일단 이 장소를 벗어나십시오. 단둘이 있으면 계속 대화해야 합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나강인과 권수연이 사잇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갔다. 앞쪽에 오늘 행사가 치러지는 강당 건물이 보였다.
총권도 수련생 민영희가 나강인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머. 여기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권수연을 재빨리 스캔했다.
“그런데 누구? 어떻게 아시는 분?”
권수연이 대답했다.
“강인이 친구예요.”
“아아. 친구시구나.”
나강인도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친구란다.”
- 반응을 보면 그렇게 예상됐습니다.
“조금 전에는 전혀 모르겠다더니?”
- 분석중이었습니다.
“그러셨겠지.”
민영희는 나강인이 총권도의 창시자인 건 알지만, 개인정보까지는 모른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이 학교 나오셨나 보다.”
권수연은 민영희의 눈빛에서 경쟁자를 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강인이와는 어떤 사이…. 혹시 여자친구세요?”
민영희가 활짝 웃었다.
“어머. 그렇게 보여요?”
나강인이 잘라 말했다.
“아니. 절대 아냐.”
민영희가 혀를 가볍게 찬 후에 설명했다.
“쳇. 나 사범님한테 뭘 좀 배우고 있어요.”
“네? 사범요?”
“그러니까….”
총권도는 아는 사람만 안다.
그녀가 머뭇거렸다.
권수연이 먼저 물었다.
“사범이면, 혹시 내공 수련법을 배우는 거예요?”
“네? 내공이요?”
“저도 옛날에 강인이한테 잠깐 배워봤거든요.”
나강인은 오늘 권수연을 보고 당황할 일이 많았다.
그가 AI 전지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내가 내공을 수련했나?”
- 모릅니다.
“지구연합군에 내공 수련법이 있어?”
-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습니까?
“그렇지? 근데 나 되게 세잖아.”
- 내공이 아니라 지구연합의 군용 신체 강화 기술 덕분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제가 요원님의 전투를 지원합니다. 강한 게 당연합니다.
“그럼 내공 이야기는 뭐야?”
민영희가 그 질문을 대신 해주었다.
“혹시 나 사범님이 내공을 수련하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강한가?”
권수연이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강인이가 시키는 대로 해봤는데 하나도 효과 없었어요.”
“아. 역시 그렇죠?”
“그땐 나 꼬시려고 내공 같은 거 핑계로 작업 거는 줄 알았어요.”
“어머. 작업 수단으로 내공은 좀 아니다.”
“강인이는 내공만 실험한 게 아니에요. 어느 날은 운동장에 하얀 가루로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더라고요.”
민영희는 놀라지 않았다. 내공 수련이 효과가 없었다는 말은 이미 들었다. 마법진이라고 다를 리 없다.
“네에. 마법진까지. 효과는요?”
“당연히 없었죠. 마법진 그릴 때는 나도 도와줬는데.”
“혹시 그런 일이 더 있었어요?”
“파이프를 모아서 피라미드를 만들었어요. 그걸로 태양에너지를 모으려고 했거든요. 진짜 사람이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피라미드였어요.”
“태양의 에너지는 돋보기나 태양전지로 모으는 거 아녜요?”
“당연히 그게 상식이죠.”
권수연은 추억이 계속 생각났다.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즐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강인이가 또 말이죠. 수맥을 찾는다고….”
권동진은 권수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디 간 거야? 몸도 성치 않으면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잇길에 들어갔다가 도로 나온 권수연을 발견했다.
그런데 권수연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웃고 있었다.
권동진이 그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우리 딸이 웃는 모습 보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