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32화 (132/411)

132. 피라미드

권수연은 몇 달 전부터 몸이 아팠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연구가 한창 성과를 내던 때라서 병원은 내과만 간단히 들렀을 뿐 정밀검사는 받지 않았다. 아플 때는 진통제를 먹으면 괜찮아졌다.

그러다 석 달 전에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연구실에서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다가 극심한 통증으로 쓰러질 뻔했다.

그 상황이 되어서야 심각한 걸 깨닫고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처음에는 증상만 알뿐 병의 이름도 몰랐다.

신체장기에 발생한 이상 기관을 수술로 제거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인 줄 알았다. 의사가 그렇게 판단했고 수술 계획이 잡히기도 했다.

그런데 병의 형태가 너무 특이했다. 의사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이 인맥을 동원해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그녀의 증상이 신종 희귀병인 케이타이거 증후군과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다.

권동진은 그때 일을 떠올렸다.

‘그 병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국내에 있다는 것에 안도했었는데.’

그는 이정호를 만난 후에 절망했다. 이정호가 권수연을 정밀검진한 후에 수술이 불가능한 중증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그 진단을 받은 날이 지금부터 딱 두 달 전이다. 지난 두 달간 권수연은 웃지 않았다.

그런 딸이 지금은 웃었다. 두 달 만에 웃는 모습을 보았다.

애틋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는 딸의 웃음을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었다.

권동진이 주먹을 쥐었다.

“우리 수연이를 살려줄 사람은 이정호 박사와 닥터 노네임밖에 없어.”

닥터 노네임이 누군지는 아직도 모른다. 이정호가 왜 그를 숨기는지는 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닥터 노네임을 찾아야 해. 만나서 설득해야 돼.”

그러기 위해선 뭐든 할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이정호를 너무 심하게 압박할 수도 없다. 그 수술을 하려면 두 사람이 필요한데, 그중 한 명이 이정호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없으니까 답답해 미치겠다.”

그의 눈에 권수연과 함께 대화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나강인과 민영희였다.

“누구지? 같은 연구실 사람인가?”

그는 딸이 웃게 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권동진은 다시 닥터 노네임을 찾을 궁리를 했다.

“주변에 물어본다고 해서 찾을 수는 없겠지. 그런 이름으로 활동할 리는 없니까. 역시 이 박사를 설득하는 수밖에….”

권수연이 권동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권동진도 고민을 멈추고 웃으며 손을 슬쩍 들었다.

권수연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오늘 행사에서 내가 주도한 연구를 발표할 거야. 난 그것 때문에 왔어. 아빠가 저기서 기다리시니까 가야겠다.”

“어. 그래. 발표 잘해라. 다음에 밥이나 먹자.”

나강인은 인사치레로 말한 게 아니다. 그는 진짜로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반면에 권수연은 나강인이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지난 석 달간 평범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물을 마실 때도 아주 조금씩 흘려 넣어야 했다.

그녀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으응.”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과 밥을 먹을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반응이 시큰둥한 걸 보고 나강인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번호 찍어라.”

“응? 내 번호는 그대로인데?”

“내가 휴대폰을 2년 전에 잃어버려서 연락처가 다 사라졌다.”

“그럼 그동안은?”

“휴대폰 없이 살았지.”

권수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서 지난 2년 동안 연락이 안 됐구나. 알았어.”

권수연이 번호를 찍어주고 그녀의 폰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그녀의 휴대폰에 나강인의 전화번호가 떴다.

그녀는 그 번호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 말했다.

“이제 진짜 가야 해. 아빠가 기다려.”

“가라.”

그녀가 손을 흔들고 권동진에게 돌아갔다.

민영희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강인에게 슬쩍 물었다.

“나 사범님. 혹시 방금 번호 따신 거예요?”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새로 받은 겁니다. 쟤랑 친구라니까요.”

“그냥 친구 맞아요?”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맞습니다.”

민영희의 휴대폰에 경찰 요원 박순기의 문자가 들어왔다.

“순기가 찾네요. 먼저 갈게요.”

민영희도 행사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강인은 권수연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말했다.

“이름이 뭘까?”

- 거점으로 돌아가면, 인터넷에서 이 대학 졸업생을 검색해서 누군지 알아내겠습니다.

“서류상의 나강인이 아니라 실제 나강인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걸 알아. 그것도 그냥 아는 게 아니라 상호 교류를 꽤 한 것 같지?”

- 대상자를 중요 정보 제공자로 등록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서 나에 대해 자연스럽게 물어보자. 식사 자리에서 일상 이야기하듯이 하면 되겠지. 술도 곁들일까?”

- 정보 제공자의 건강 상태가 나쁩니다. 술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럼 커피라도 마시지 뭐.”

***

권동진이 권수연에게 물었다.

“어디 갔었어?”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사잇길에 가봤어.”

권동진이 행사장으로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방금은 누구랑 이야기한 거야?”

“학교 친구.”

“같은 연구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니.”

권수연이 옛날 일을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옛날에 수업에 늦어서 뛰어가다 마주친 사잇길이 생각나서 가봤는데, 오늘도 거기서 딱 만났어. 그것도 2년 만에. 참 신기하지?”

“같은 과? 동아리?”

“아니야. 그런 거.”

권동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지?’

궁금했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그는 오랜만에 딸의 웃는 모습을 보았다. 지금은 그걸로 됐고 생각했다.

권동진은 나강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해가 이미 떨어져서 주변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권동진이 말했다.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얼굴이 궁금하네.”

***

한국대학교의 행사가 시작됐다.

흔히 있는 인사말이 잠깐 나온 후에, 발표자가 단상에 올라왔다.

이 강당의 단상은 공연할 때는 무대로 쓰는 곳이라 상당히 넓었다. 뒤쪽에는 영화 상영이 가능한 대형 스크린도 있었다.

첫 번째 발표자가 연구 성과를 설명했다.

스크린에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도표가 나타났다. 복잡한 수식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발표 시간도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권수연은 세 번째 발표자였다. 그녀가 미리 준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통제를 정량의 두 배나 쓴 덕분에 지금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권동진이 물었다.

“네 노트북은 안 가져가?”

“오늘 발표에 필요한 자료는 이미 다 행사 진행용 노트북에 옮겨놨어.”

***

권수연이 세 번째 발표자로 단상에 올라갔다.

지난 석 달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몸이 너무 말라 있었다. 그 마른 몸은 옷으로 적당히 가렸다. 남들의 눈에는 날씬한 몸처럼 보였다.

창백한 혈색도 화장과 조명 덕분에 백옥처럼 하얀 피부처럼 보였다.

권수연이 발표용 테이블 앞에 섰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연구 발표 진행용 노트북은 그녀의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그런데 이 노트북은 상판에 예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학교 직원이 붙인 건가?’

진행요원이 세팅은 이미 해놓았다.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키보드를 눌렀다.

권수연의 뒤쪽 대형 스크린에 사진이 한 장 올라왔다. 노트에 볼펜으로 그린 그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찍은 사진이었다.

“피라미드. 고대의 경이적인 건축물이죠.”

사진 속 종이에는 볼펜으로 그린 피라미드 그림이 있었다. 그런데 그건 돌로 만든 피라미드가 아니라 파이프를 이어서 만든 피라미드였다.

권수연이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에 이런 피라미드를 만들어서 태양에너지를 모으려던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는 우리 학교 공터에서 실제로 실험도 했죠.”

사람들이 웃었다.

“하하하.”

민영희가 나강인의 옆에서 권수연의 발표를 보다가, 그 친구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녀는 어제 검술을 배우면서 먼지가 나도록 맞은 걸 잊지 않았다.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머. 나 사범님. 한국대는 공부 잘하는 사람만 오는 줄 알았는데 또라이도 오나 봐요.”

“어….”

권수연이 행사장 밖에서 해준 이야기 중에는 피라미드도 있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저 종이에 그린 피라미드, 혹시 내가 그린 건가? 실험도 내가 하고?”

- 요원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도 또라이라고 놀리는 거냐?”

- 오해이십니다.

민영희가 계속 놀렸다.

“설마 나 사범님이 그리신 건 아니죠?”

기억이 나지 않았다.

권수연이 계속 설명했다.

“그런데 이 구조물이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클 때는 아무 효과가 없었지만, 아주 작은 크기로 줄이면 이야기가 달라져요.”

스크린의 내용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이미지였다. 아주 작은 피라미드가 바닥에 수없이 많이 깔리고, 그 위를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여드린 피라이드와 완전히 똑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확대해 보면 상당히 비슷한 구조입니다.”

권수연이 키보드를 눌렀다. 처음 보여준 노트의 손그림과 CG 이미지가 한 화면에 겹쳐졌다.

“심지어 피라미드의 높이와 각도까지 비슷해요.”

두 장의 사진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그래프가 주르륵 떴다.

“이 구조로 태양전지를 만들면, 효율이 기존 제품보다 크게 높아지는 걸 확인했습니다.”

현재 판매되는 태양전지와 지금 발표한 방식의 에너지 효율을 비교한 그래프가 스크린에 크게 표시됐다. 그래프만 보면 혁명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효율 차이가 컸다.

사람들이 감탄했다.

“우와.”

“저거 진짜야?”

나강인이 씩 웃으며 민영희에게 자랑했다.

“제가 대충 낙서한 걸 가져가서 저렇게 좋은 걸 만들었군요.”

민영희는 나강인을 놀리려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와…. 그 그림이 어떻게 저렇게…. 졌어요.”

강단에서 권수연이 단서를 달았다.

“물론, 아직은 실험실 환경에서만 이런 효율이 나왔습니다. 실험에 성공한 태양전지의 크기도 무척 작아요. 양산까지 가려면 해결할 문제가 참 많죠. 지금은 양산 문제도 해결할 수 있고 효율도 더 높은 소재를 연구하고 있어요.”

그녀는 아까부터 기분이 좋았다. 가벼운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그 소재가 뭔지 여기서 발표할 순 없지만요. 제 박사학위 논문에 쓸 거라서요.”

참석자들이 웃었다.

지금 이 행사는 정식으로 논문을 발표하는 곳이 아니다. 이 행사는 한국대학교에서 요즘 이런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랑하는 자리다. 반응이 좋으면 연구비를 투자받을 수도 있다.

참석자들이 말했다.

“저거 대단한 거 아냐?”

“양산이 되어야 대단한 거지. 실험실에서는 성공했는데 양산에 실패한 연구가 어디 한두 개인 줄 알아?”

“하긴. 기적의 암 치료제나 용량이 수십 배나 큰 배터리 기술 같은 건 수시로 발표되지. 정작 제품으로 나오는 건 없는데 말이야.”

“박사과정이 발표하는 연구에서 대기업 연구소도 해내기 어려운 성과를 기대하는 건 오버지. 저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나강인이 눈앞에 홀로그램 정보가 주르륵 떴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원형을 발견했습니다.

“원형? 그럼 저 태양전지 기술이 더 발전한다는 거야?”

- 이라미드는 2082년에 사용되는 모든 태양전지의 핵심 구조입니다. 성능이 계속 개선되고 양산 기술도 다양하게 발전했지만, 기본 구조는 원형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나강인이 감탄했다.

“이야아. 쟤가 대단한 걸 만들었네. 저거 언제 양산되냐?”

- 2052년입니다.

나강인은 살짝 당황했다.

“응? 30년 뒤? 그때까지 연구해야 한다고? 앞으로도 고생길이 열렸구나.”

-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연구를 도맡은 핵심 인물의 사망으로 연구가 장기간 중단되었습니다.

“어? 야. 잠깐. 30년 뒤에는 생산된다며?”

- 다른 연구자가 과거 중단된 연구 기록을 발견, 추가 연구 후 2050년대의 기술로 양산에 성공했습니다.

“어…. 저건 그러면 그 시대의 기술이어야 양산이 가능한 건가?”

- 핵심 연구자가 살아있었으면 그 30년을 크게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강인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그 핵심 연구자 이름이?”

- 권수연입니다.

나강인이 발표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권수연이었다.

AI 전지인의 말대로라면, 권수연은 사망한다.

- 사망 이유는?

“인적사항은 기록에 없습니다. 이름만 있습니다.”

“사망일은 언제야?

- 올해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 기록에 없습니다.

“이러면 곤란한데. 교통사고라도 당하나?”

그는 그녀가 어떤 이유로 조만간 사망하는지 생각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지인아. 네 초기 데이터에 이런 기록이 왜 남아있지? 그 데이터에는 과학기술의 역사 같은 건 원래 없잖아.”

-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2082년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이런 지식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너도 상식이 있구나. 난 네가 몰상식한 줄 알았다.”

- 요원님도 비슷하시잖습니까?

“이라미드 태양전지에 관한 다른 상식도 좀 있냐?”

- 상식 수준의 정보는 더 있습니다.

나강인이 권수연이 설명하고 있는 스크린을 다시 보았다.

“저 연구가 2052년보다 일찍 완성되면, 그러니까 지금부터 몇 년 안에 완성되면 인류의 미래에 좋은 쪽으로 영향을 끼칠까?”

- 물론입니다. 태양에너지 기술이 발전하면 일단 미세먼지 발생량이 줄어듭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 저거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

AI 전지인은 핵심 연구자 권수연의 사망을 예측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면 저 연구는 앞으로 30년간 묻힌다.

나강인이 강단을 보았다. 권수연이 발표를 마쳤다. 사람들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내일이라도 쟤를 좀 만나봐야겠다. 휴대폰 번호를 아니까 연락하면 되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