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33화 (133/411)

133. 노트북

한국대학교의 이 행사에서는 연구 성과만 발표하는 게 아니다. 가벼운 분위기의 행사에서 그러면 관객이 모이지 않는다.

권수연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행사 분위기가 바뀌었다.

발표용 테이블과 노트북이 치워지고 조명이 화려하게 바뀌었다.

프프걸스가 무대 위에 올라갔다. 알아보는 사람도 꽤 있었다.

“쟤들 그 걸그룹 아냐? 자연 체조.”

“맞네. 노래도 괜찮은데?”

프프걸스는 인기 걸그룹 못지않게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예쁘다. 춤도 잘 춘다.

그런데 부족한 것이 있었다. 프프걸스가 발표한 노래 중에 관객들이 어디서 들어본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그 약점을 행사 참석자들이 좋아할 옛날 히트곡을 부르는 것으로 해결했다.

권수연은 무대 뒤로 내려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숨이 조금 가빴다.

“하아. 힘들어.”

그녀가 무대를 보았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네 사람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녀도 비슷한 나이일 때는 저러고 놀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체력에 문제는 없었다.

이제는 그럴 힘이 없었다. 겨우 몇 달 만에 몸이 너무 약해졌다.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멀쩡한 척했지만, 그러느라 체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숨만 가빠진 게 아니라 통증도 조금 더 심해졌다.

그녀는 대기실로 간 후에, 주머니에서 작은 진통제 주사기를 꺼냈다.

그녀의 병은 진통제를 입으로 삼키기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주사로 해결해야 한다.

그녀가 가느다란 팔에 스스로 진통제 주사를 놓은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권동진은 아직 그녀에게 이연지의 수술 성공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수술을 권수연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진통제의 약효가 도는 것을 기다리며 의자에 그냥 앉아 있었다. 행사장 관객석까지 걸어갈 힘이 없었다.

프프걸스의 무대가 끝났다. 네 사람은 열화와 같은 환성과 박수를 즐기며 무대에서 내려갔다.

나강인이 관객석 뒤쪽에서 민영희에게 말했다.

“대기실로 애들 보러 가야겠네. 같이 갈 겁니까?”

민영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병아리들을 응원하러 온 건데 당연히 가야죠. 그런데 순기는 어디 간 거야?”

나강인이 강당을 나가 뒤쪽으로 걸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AI 전지인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민영희가 말했다.

“나 사범님이 이 학교 나왔다고 해서 놀랐는데 진짜인가 보다. 길을 잘 아시네요?”

“그러게요. 내가 이 학교를 다니긴 다녔나 봅니다.”

***

프프걸스 막내 최지혜가 권수연에게 다가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네?”

“힘들어 보이셔서요. 히히.”

“아. 고마워요.”

권수연은 고마운 마음에 음료수를 받았다. 하지만 마실 수는 없다. 이미 진통제를 평소의 세 배나 사용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자극이 강한 음료를 마시면 뒷감당이 되지 않는다.

권수연이 병을 멍하니 보다가 마케팅용 비매품이라고 쓰여 있는 글씨를 발견했다.

“어머. 이거 혹시?”

최지혜가 병에 그려진 신은하의 사진을 가리켰다.

“히히. 제가 은하 언니랑 쪼끔 친한데요. 이 회사에서 보내준 음료수를 혼자 다 못 마신다고 저희한테 많이 줬어요.”

“아. 그렇구나. 제가 요즘 TV를 통 못 봐서 연예계를 잘 모르는데, 혹시 여러분도 유명한 분?”

최지혜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 아니에요. 저희는 아직 한참 멀었죠. 으흐흐흐. 근데요.”

최지혜가 눈을 반짝이면 물었다.

“저희가 공연하기 전에 무대에서 발표하신 박사님이죠?”

권수연이 작게 웃었다.

“아직 박사는 아니에요. 공부하는 중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박사님이 되실 거잖아요.”

“그게….”

그러려면 먼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병은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좋았던 기분이 살짝 처졌다.

최지혜가 물었다.

“저도 나중에 이 학교 오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돼요?”

“음…. 아직 학생?”

“고등학생이에요.”

“그럼 국영수 위주로 열심히?”

“에이. 그게 뭐예요.”

“나도 잘 몰라요. 내가 들어올 때는 공부만 잘하면 됐는데, 요즘 입시제도는 좀 복잡해졌다고 들어서요.”

최지혜가 아예 그녀의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물었다. 그녀는 대학 생활이 어떤지 궁금한 게 많았다.

권수연도 대학생 때 이야기는 해줄 말이 많았다. 몇 번 질문과 대답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말도 놓았다.

최지혜가 물었다.

“그럼요. 언니도 대학 가서 막 연애도 하고 그랬어요?”

“난 대학원 이후로는 공부하고 연구하느라 바빠서….”

“그럼 그전에는 연애했나 보다.”

“글쎄?”

권수연이 대답을 피하고 빙그레 웃었다.

최지혜가 꿈을 말했다.

“저는요. 대학 가면 김유찬 님 같은 잘생긴 남자랑 사귈 거예요.”

권수연도 김유찬이 누군지는 안다.

“김유찬은 허들이 너무 높지 않아?”

“그런가?”

“그리고 대학교엔 그런 미남은 없어. 방송국에 있지. 아. 연예인이 연애해도 돼?”

“안 들키면 되죠.”

권수연이 씁쓸한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네가 나보다 똑똑하네. 안 들키면 되는데, 난 왜 그걸 몰랐을까?”

“히히.”

“그런데 왜 우리 학교로 오려고 하는데?”

“웅…. 일단 학교가 되게 좋아 보이고요. 제 친구가 전교 1등인데 걔가 여기 갈 거라고 해서요. 같이 다니면 좋잖아요.”

“그래. 좋지. 그런데 넌 공부는 잘해?”

“아뇨. 이제 열심히 하려고요.”

권수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학교에 연예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과가 있던가? 잘 모르겠네.”

***

나강인이 대기실 앞에서 말했다.

“아무리 학교 행사라지만 어떻게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

민영희가 물었다.

“아이돌이니까 매니저가 같이 있지 않아요?”

“서울에서 하는 행사라서 얘들끼리 왔을 겁니다. 그래야 매니저가 움직이는 비용도 얘들이 받으니까.”

“와. 역시 생계형 아이돌.”

나강인이 대기실 문을 열었다.

안에서 프프걸스 네 명이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권수연이 보였다.

“음?”

프프걸스 네 명이 얼른 일어나 인사했다.

“앗! 선생님! 저희 공연 보러 오셨어요?”

“지나가다 들렀어.”

민영희가 따라 들어왔다.

“얘들아. 나도 왔다?”

“앗! 경호원 언니다!”

권수연이 놀란 얼굴로 최지혜에게 물었다.

“네가 강인이를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요. 우리 트레이너 선생님이고요, 메이크업 선생님이고요, 그리고 또 노래…. 앗! 언니도 나강인 선생님을 알아요?”

“응. 친구야.”

최지혜가 활짝 웃었다.

“우와아! 언니 멋져요!”

“쟤랑 친구인 게 멋진 일이야?”

“당연하죠!”

권수연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너 도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닌 거야?”

“이것저것?”

“연예인들은 어떻게 알아?”

“너도 지금 지혜랑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런 것처럼 어쩌다 보니?”

나강인이 권수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행사 안 봐? 왜 여기 있어?”

권수연은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냥 좀 쉬고 있어.”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정보 제공자의 건강 상태가 매우 나쁩니다. 체력 회복용 음료 제공을 추천합니다.

“체력 회복 음료? 포션 같은 거냐? 어디서 파는데?”

AI 전지인이 AR 렌즈를 제어했다. 허공에 체력 회복 음료 목록이 주르륵 떴다. 그런데 모두 2082년 기준이었다.

“야이. 넌 또 살 수도 없는 걸 보여주면서 날 놀리….”

권수연이 들고 있는 병이 보였다. 신은하와 김유찬이 CF를 찍은 음료였다. 나강인이 이 CF의 액션을 맡았다.

나강인도 이 음료를 회사에서 많이 받아 집에 쌓아놨다. 그래서 이 음료의 효과를 안다.

‘운동 후에 마시면 좋은 음료수잖아. 이거라도 마시게 할까? 조금은 도움이 될 텐데.’

권수연은 아직 음료수병의 뚜껑도 따지 않은 상태였다.

나강인이 손을 내밀었다.

“따줄까? 마실래?”

권수연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니야. 나중에 마시려고.”

“음….”

나강인은 권수연에게 물어볼 것이 좀 있다.

‘내가 모르는 나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인터넷에 남아있는 정보는 검색하면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나강인의 과거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개인 SNS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정보를 대량으로 가진 사람이 나타났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대놓고 ‘내가 누구냐’라고 물어볼 수는 없다.

기억상실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미 지난 2년 동안 산에 들어가서 총권도를 창안했고, 장비개발 능력이나 폭발물 처리 능력도 혼자 연구해 습득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에 와서 기억상실이란 핑계를 대면 그동안 한 말과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나가인이 일단 일상 대화를 꺼내보았다.

“너 발표하는 거 봤다.”

권수연이 살짝 웃었다.

“나 지난 2년 동안 엄청 열심히 살았지?”

“그래. 정말 대단한 걸 연구했더라.”

권수연이 물었다.

“네가 그린 그 피라미드 그림이 갑자기 스크린에 나와서 놀랐어?”

나강인이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걸 그린 건 나구나.’

“어. 그 파이프 피라미드.”

“옛날에 건물 사이 작은 공터에서 네가 그거 만들어놓고 태양에너지를 모은다고 생쇼를 했잖아. 그때 주변 건물이 태양에너지 반사판이 될 거라면서, 거기서 실험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했는데.”

“어…. 그랬지? 그래서 그게 효과가….”

권수연이 웃었다.

“네 피부가 빨갛게 익어버리는 효과는 있었지. 선크림 바르라고 해도 태양에너지를 느껴야 한다고 안 발라서 그렇게 됐잖아.”

“하, 하하.”

“내 연구가 잘 안 풀려서 고생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때 일이 생각나더라? 네가 하도 오래 연락이 안 되니까 생각났나 봐.”

그녀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네 피라미드가 크기가 클 때는 문제였지만, 미시 세계로 가면 의미가 없는 건 아니겠더라. 그래서 긴가민가하면서 실험했는데.”

권수연이 활짝 웃었다.

“효과가 있었어.”

“혹시 내가 그려준 그대로 만들었냐?”

그녀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에이. 아니지. 피라미드의 재질이 완전히 달라. 크기도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 정도로 작으니까 많이 다르지.”

나강인이 슬쩍 떠봤다.

“야. 내가 그래도 그 피라미드를 다 계산해서 그린 거….”

“너의 감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정답이라면서 노트에 볼펜으로 찍찍 그리는 거 내가 다 봤는데, 어디서 수작이야?”

“아이디어만 얻었구나?”

“응. 그런데 너랑 연락이 안 되니까, 그게 효과가 있다고 알려줄 수가 없어서 답답했는데.”

그녀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쟤들 공연한다고 해서 구경 왔어.”

그녀가 그를 살짝 째려보았다.

“서운하다. 쟤들은 공연하면 보러 오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2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니?”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번호가 다 날아갔다고 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럼 휴대폰은 왜 다시 안 샀어?”

“그동안 산에 있었어. 얼마 전에 내려왔다.”

“산에는 왜….”

권수연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응. 아빠. 아니야. 대기실에서 친구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하고 있었어. 지금 갈게.”

권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가야겠다.”

나강인이 말했다.

“전화할게.”

그녀가 웃었다.

“꼭 해.”

권수연이 대기실을 나간 후에, 프프걸스 네 명이 쪼르르 다가왔다.

막내 최지혜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선생님. 저 박사 언니하고 무슨 사이세요?”

“대학교 친구야.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갑네.”

“그게 다예요?”

기억나는 건 그게 다였다. 과거가 기억나지 않았다.

“어. 다야.”

“저 언니는 박사 공부도 하고, 학교도 한국대인데 선생님이 어떻게…. 어?”

최지혜가 눈을 껌뻑였다.

“설마 선생님도 한국대 나왔어요?”

“어.”

“와! 육체파 아녔어요? 두뇌파였어요? 어떻게 인서울을 나와? 믿어지지가 않아!”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저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한국대는 아무나 가는 곳인 듯합니다.

나강인이 최지혜에게 말했다.

“이 학교는 아무나 갈 수 있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지금 나 무시하냐?”

“아니, 그건 아니고요. 운동이랑 메이크업이랑 무술감독이랑 노래 같은 쪽으로 전문가시니까….”

“내가 오늘 마음에 상처받은 만큼 너희들의 다음 훈련이 힘들어질 거다.”

리더 소지영이 얼른 손을 들었다.

“저는 공부 잘하셨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진짜예요!”

AI 전지인이 재빨리 보고했다.

- 소지영의 표정과 억양, 행동을 분석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나 상처받았다.”

***

권수연은 대기실을 나와 무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조금 전에는 괜찮은 척하느라 체력을 더 소모했다.

그녀가 복도를 조금 벗어나 안쪽에 있는 계단 난간을 잡고 숨을 쉬었다.

“하아. 힘들다.”

몸은 힘들지만 오랜만에 나강인을 만나서 좋았다.

“얼굴은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잠시 쉰 그녀가 다시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앞쪽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어?”

노트북이 익숙했다. 권수연의 노트북과 같은 모델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행사를 위해 직원이 가져다 놓은 것도 같은 모델이다.

주최측이 준비한 노트북에는 오늘 발표자들의 자료가 모두 들어있었다. 그게 없으면 행사가 중단된다.

남자가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권수연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권수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놀란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어?”

권수연이 노트북을 다시 보았다. 상판에 붙어 있는 스티커가 살짝 보였다. 아까 행사장의 노트북에도 비슷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권수연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만요. 그 노트북 혹시….”

남자가 갑자기,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다른 쪽으로 휙 걸어갔다. 권수연이 손을 뻗으며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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