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흔적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강당 관객석에서 말했다.
“아이돌 공연 전에 발표한 태양전지 기술 말이야. 흥미롭지?”
설계팀 차지희는 학교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고 돌아왔다가 직장 상사 이태성과 다시 마주쳐 붙잡혔다.
그녀가 대답했다.
“우리 회사의 장비에는 필요 없는 기술입니다.”
이태성이 허공에 손짓했다.
“발상을 전환해봐. 저 태양전지를 드론에 장착해서 공중에 띄우면 정찰드론이 되잖아. 구름 위에 띄우면 인공위성 대신에 장시간 떠 있을 수도 있고.”
“밤에는요?”
“배터리가 있잖아.”
“밤새도록 비행할 수 있을 정도의 대용량 배터리요?”
“음…. 그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드론의 크기가 너무 커지나?”
“네. 커진 만큼 무거워지고, 그럼 더 큰 태양전지판이 필요하고, 그럼 또 커지고 또 무거워지죠.”
“그래도 주간 전투에 쓰는 소형 정찰드론 정도는 만들 수 있잖아? 비행시간이 지금보다 훨씬 오래 가는 거로 말이야.”
차지희가 조금 툴툴대는 투로 반항했다.
“본부장님 말씀도 맞는데요. 우리 회사 제품과는 직접 관련이 없어요. 우리는 드론은 안 만드니까요.”
그녀의 반항을 눈치챈 이태성이 가볍게 공격했다.
“내가 드플 설계팀에 소형 정찰드론 개발 업무도 줄까?”
차지희가 즉시 꼬리를 말았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이태성이 피식 웃었다.
“이제 우리 발표인가?”
“네. 제가 벌써 발표 준비하러 갔어야 했는데, 본부장님이 붙잡고 계셔서 아직 여기 있네요.”
“드플을 연구하면서 정찰드론도 같이 개발한다고?”
“죄송합니다!”
차지희가 다음 발표 준비를 위해 무대 옆으로 도망치며 혼잣말을 했다.
“휴우. 이 소식을 팀원들이 들었으면 날 잡아먹었을 거야.”
그녀는 발표만 끝나면 먼저 도망칠 궁리를 했다.
그녀가 무대 옆에 도착했다. 그녀를 안내해야 할 진행요원들이 당황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차지희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진행용 노트북이 없어졌습니다.”
차지희는 깜짝 놀랐다.
“네? 거기 우리 회사 자료가 들어있는데요?”
***
권수연이 노트북을 든 남자를 쫓아갔다.
“저기요!”
남자는 그곳을 급히 빠져나가려다가 출구가 없는 곳으로 잘못 들어갔다.
권수연이 유일한 출구를 가로막고 숨을 몰아쉰 후에 말했다.
“그 노트북 좀 보고 싶은데요. 우리 발표용 노트북 같은데.”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권수연이 노트북을 자세히 보았다.
“맞네! 거기 그 스티커 내가 조금 전에 봤는데!”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 씨. 하필 저것한테 걸려서.”
“당신 뭐예요?”
“내가 누구든 말이야.”
남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너만 못 보고 넘어갔으면 서로 좋았잖아?”
***
나강인은 프프걸스의 질문공세를 피하려고 관객석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곳에서 권수연의 아버지 권동진이 당황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느낌이 싸했다. 그가 얼른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구….”
“수연이 친구입니다.”
“아. 혹시 아까 밖에서 수연이랑 대화하던 그 친구?”
“예.”
“그럼 우리 수연이 혹시 봤어?”
“조금 전까지 대기실에 같이 있었습니다만….”
“수연이가 금방 온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왔어. 전화도 안 받아. 수연이가 대기실을 언제 나왔지?”
나강인의 표정이 굳었다.
“저보다 먼저요.”
권동진이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 수연이가 먼저 왔어야 하는데…. 안 되겠어. 찾으러 가야겠어.”
‘어디 쓰러져 있을지도 몰라.’
권동진이 나강인에게 부탁했다.
“우리 수연이 친구라고 했으니까 이 학교를 잘 알겠네? 나 좀 도와줘.”
두 사람은 건물 내부부터 수색했다.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는 이상한 게 없었다.
AI 전지인이 내부를 계속 스캔했다. 그러다 갑자기 반짝이는 표시를 띄웠다.
- 건물 뒷문 바깥에서 개봉하지 않은 음료수를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건….”
신은하가 CF를 찍은 그 음료수가 떨어져 있었다. 신은하는 프프걸스에게 이 음료수를 몇 상자나 주었다. 프프걸스는 공짜로 생긴 이 음료수를 즐겨 마셨다. 아까 최지혜가 권수연에게도 한 병을 주었다.
권수연은 대기실을 나갈 때까지 이 음료수를 들고 있었다.
“이건 수연이가 가지고 있던 겁니다. 경찰에 실종 신고부터 하세요.”
“헉!”
권동진은 권수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길 빌었다. 이게 단순한 헤프닝이길 바랐다.
그래서 물었다.
“확실해? 누구 다른 사람이 흘린 거 아냐?”
나강인이 병을 돌려 ‘비매품’이라고 적힌 곳을 보여주었다.
“이건 가게나 자판기에서 파는 게 아닙니다. 홍보용 비매품인데, 대기실에서 수연이가 받은 겁니다.”
권동진이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내, 내가 지금 당장 신고를….”
“저는 수연이를 찾으러 가겠습니다.”
나강인이 주변을 확인하며 밖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권동진은 여전히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112에 전화를 거는 데는 성공했지만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나강인이 프프걸스 막내 최지혜에게 전화했다.
- 앗! 오늘 쏘시나요? 그래서 전화하셨나요?
“대기실에서 나와서 뒷문에 보면 수연이 아버님이 계셔. 지금 좀 놀라신 상태니까 너희들이 가서 도와드려.”
- 네? 수연이가 누군데요?
“조금 전에 너랑 이야기하던 내 친구.”
- 앗! 박사 언니! 네! 알겠습니다!
나강인은 아직 권수연이 왜 실종됐는지 모른다. 돌발상황이 생기면 프프걸스 네 명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무력이 필요하다.
“민영희 씨도 아직 같이 있어?”
- 아뇨. 친구분 찾는다고 나갔어요.
“연락해서 너희 쪽으로 오라고 해.”
- 네에!
나강인이 주변을 수색하며 경찰 요원 박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납치 가능성이 있는 실종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 헉! 현재 상황은요?
나강인이 권수연이 사라진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박순기는 나강인이 그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 어느 정도는 안다.
- 나 사범님이 그렇게 판단하셨으면 사건이 확실하겠죠.
“수연이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직 학교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 바로 학교 보안팀에 연락하겠습니다. 출입문을 모두 봉쇄하면 적어도 자동차는 이 학교를 못 벗어납니다. 나가는 차를 수색한 후에 내보내면 납치당한 사람도 못 데려가고요.
“학교 담장 주변 CCTV도 확인하시고, 순찰도 필요합니다.”
- 학교 보안팀으로는 인원이 부족할 테니 관할서에 지원요청을 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갔을까?”
- 모든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추적이 어렵습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도로는 발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다.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말했다.
“권수연의 전화 위치추적이 가능할까요?”
- 전화번호를 보내주시면 긴급으로 요청하겠습니다.
나강인이 번호를 보냈다. 잠시 후에 마지막 위치가 날아왔다.
- 그 지점에서 전화기가 꺼졌습니다.
나강인이 행사장 뒷문을 보고 다시 전화기가 꺼진 위치를 보았다.
“어느 길로 갔는지는 대충 알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그쪽으로 뛰었다.
갑자기 그가 가는 방향의 주차장에서 승용차 한 대가 급히 빠져나왔다. 그 차는 교내 도로를 꽤 빠른 속도로 달렸다.
의심이 갔다.
나강인이 즉시 옆으로 뛰어 도로를 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멈춰!”
만약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저 차에 범인이 있다고 가정하고 교문을 통제해서 잡으면 된다.
그런데 승용차가 급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정지했다. 운전하던 남자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나강인이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차량 내부에는 남자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트렁크 좀 봅시다.”
남자가 화를 냈다.
“당신 뭐냐니까? 내가 왜 트렁크를 보여주는데!”
따질 시간이 없다. 나강인이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어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어? 어? 뭐야!”
“잠깐만 보자고.”
나강인의 트렁크 열림 레버를 당긴 후에 차 뒤로 이동했다.
이 차에 사람을 숨겨둘 곳은 이곳밖에 없다. 나강인이 트렁크를 벌컥 열었다.
트렁크 안에는 잡다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권수연은 보이지 않았다.
“어….”
남자가 차에서 내려 소리를 질렀다.
“당신 뭐냐고! 신고할 거야!”
나강인이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누굴 좀 찾느라.”
“진짜 뭐 이런.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냥 가는데, 당신 조심해!”
남자가 다시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으려고 했다.
나강인이 그 문을 덥석 잡았다.
남자가 화를 냈다.
“너 진짜 콩밥 먹고 싶어? 어?”
나강인이 조수석에 실려 있는 노트북을 보았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오늘 행사 진행에 사용된 것과 같은 기종의 노트북입니다. 그 노트북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나강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숨이 가빠 보이네요? 차에 타기 전에 좀 뛰셨나?”
“바, 바쁜 연락이 와서 주차장으로 달려가서 그래!”
“연락이 온 통화목록 좀 봅시다.”
“내가 그걸 왜 보여줘야 하는데!”
“하긴. 그것까지 볼 필요는 없지.”
나강인이 남자를 차에서 끌어내고 조수석의 노트북을 꺼냈다. 그런 후에 노트북을 교내 가로등 불빛에 비춰보았다.
- 상판에서 스티커를 제거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건?”
권수연은 오늘 화장으로 병색을 감췄다.
사람은 평소에도 얼굴에 손을 대는 일이 많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에 그 화장품이 묻었고, 그게 다시 지문의 형태로 노트북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똑같은 지문이 그녀가 떨어뜨린 음료수병에도 남아있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권수연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문을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남자에게 물었다.
“이건 수연이가 만진 노트북인데, 왜 당신이 갖고 있어?”
남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손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적이 공격을 준비합니다. 무기 타입 확인. 잭나이프입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칼날을 세우며 협박했다.
“이 새끼! 그 노트북 당장 내….”
나강인이 남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너 뭐하냐?”
“어? 어?”
남자는 당황했다.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손목이 바위 중간에 단단히 낀 것 같았다.
나강인이 남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으아악!”
남자의 손이 쫙 펴지며 칼이 툭 떨어졌다.
“놔! 놔!”
“수연이 어디 있냐?”
“으아악!”
“권수연 어디 있어?”
“누, 누군지 몰라! 그게 누구야!”
“이 새끼가….”
나강인이 남자의 멱살을 잡고 위로 번쩍 들었다. 남자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디 있냐고.”
공포에 질린 남자가 컥컥대며 말했다.
“나,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 여자가 날 보더니 혼자 도망쳤어! 난 오해를 사기 싫어서 여기서 나가려던 것뿐이야!”
나강인이 남자를 옆으로 던졌다. 남자가 도로 옆에 떨어졌다.
나강인이 차의 수납함을 뒤졌다. 운전석 옆 팔걸이형 보관함에서 부서진 휴대폰이 나왔다.
나강인은 아까 권수연에게 번호를 찍어달라고 했을 때 이 휴대폰을 보았다.
나강인이 부서진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 있어!”
남자는 바닥을 기면서 도망치다가 나강인이 화를 내자마자 허겁지겁 일어나 후다닥 뛰었다.
그런다고 나강인의 앞에서 도망칠 순 없다.
나강인이 남자를 쫓아가려다가 멈칫했다. 돌발상황이 생겼다.
막내 최지혜가 박순기와 함께 나강인을 찾으러 왔다가 도망치는 남자와 딱 마주쳤다.
남자가 최지혜를 향해 돌진하며 소리를 질렀다.
“비켜!”
소리만 지른 게 아니라 주먹도 휘둘렀다.
최지혜가 남자의 주먹 안쪽으로 재빨리 파고들었다. 두 다리는 조금 구부려 자세를 낮추고, 상대의 정면이 아니라 옆쪽을 어깨로 받아쳐 균형을 잃게 했다.
그녀는 마무리로 상대가 내지른 팔을 두 손으로 잡고 확 당겼다.
“으악!”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로에 나가떨어졌다.
최지혜는 남자를 던져놓고 나서 깜짝 놀랐다.
“와! 이게 되네!”
그녀는 몸의 중심을 낮추고 두 팔을 쭉 뻗은 상태였다. 그녀도 방금 해낸 일에 놀라서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대신에 입은 열심히 움직였다.
“어제 그 고생을 하면서 호신술을 배우길 잘했다!”
그녀는 이 기술을 어제 호신술 영상을 촬영할 때 배웠다.
나강인은 기술을 딱 하나만 골라 다양한 상황에 응용할 수 있게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누군가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르는 이 상황은 어제 특별히 신경 써서 여러 번 연습시켰다.
“신기해라. 오늘 이런 일이 생길 줄 어떻게 미리 아셨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