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36화 (136/411)

136. 권수연

권수연은 이튿날 아침에 병실에서 눈을 떴다.

그녀가 지금 처음 깨어난 건 아니다. 이미 전날 밤에 일어나 그녀의 부모와 오빠들을 만났다. 나강인이 그녀를 구해줬다는 말도 그때 들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그녀가 휴대폰을 찾았다.

“전화를 해야겠…. 아. 내 폰 부서졌지.”

바로 옆 탁자에 새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범인이 발로 밟아 부순 휴대폰은 경찰이 증거로 가져갔다. 새 휴대폰은 그녀의 큰오빠가 갖다놓았다.

그녀가 어제 본 나강인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냈다.

“번호가 분명히….”

권수연이 그 번호를 누른 후에 전화를 걸었다.

***

나강인은 모르는 번호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걸려온 전화는 받았다.

“여보세요.”

- 강인아. 나야.

예상대로 권수연이었다.

“어. 괜찮냐?”

- 아무 이상 없대.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이 있어 보이던데?”

권수연이 말을 슬쩍 돌렸다.

- 그 공터 아직 기억하네? 하긴. 거길 잊어버리면 안 되지.

나강인은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냥 얼버무렸다.

“그냥 거기 있을 것 같아서. 지금은 어디냐?”

- 병원.

권수연이 병원 이름을 말했다. 나강인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종합병원이었다.

“가깝네. 내가 문병 갈게.”

***

나강인이 권수연의 병실을 찾았다. 부상자가 먹기 좋은 요리도 만들어서 가져왔다.

“이거 좀 먹어봐. 내가 만들었다.”

권수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니야. 내가 속이 아파서 음식을 잘 못 먹어.”

“이제 괜찮다더니?”

“괜찮아. 여기 의사 선생님들 실력 좋아.”

“알아.”

나강인은 그곳에서 일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과거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어제 있었던 일을 한참 이야기하고 났더니 권수연의 체력이 떨어져서 대화를 마쳐야 했다.

***

나강인이 병실을 나왔다.

“얘가 말이 쓸데없이 많아.”

- 말만 많았지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없습니다.

외과 의사 김중석이 앞쪽에 있었다. 그가 김중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중석 씨?”

김중석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헉! 나강인 씨? 여긴 어쩐 일로….”

“마침 잘 만났습니다. 이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 대해서 물어볼 게 좀 있습니다만.”

김중석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듣는 사람이 많았다.

“죄송합니다. 환자의 개인 정보는 함부로 알려드릴 수가 없어서….”

갑자기 김중석을 찾는 호출이 왔다. 그가 머리를 꾸벅 숙인 후에 달려갔다.

나강인이 혀를 찼다.

“권수연이 그냥 탈진은 아닌 것 같은데….”

이연지가 복도를 돌아다니다 나강인을 발견했다.

“앗! 아저씨! 저 문병 왔어요?”

“너 아직도 입원해 있었냐?”

“쳇. 아니구나. 내일 퇴원하거든요?”

“잘됐네.”

이연지가 실실 웃었다.

“저 퇴원하면 일단 연예인부터 할 거예요. 제가 액션영화 찍을 때 아저씨가 팍팍 좀 밀어줘요.”

“아직 연예계에 발도 들여보지 않은 녀석이 벌써 꿈은 액션 스타냐?”

“히히. 꿈은 크게 가져야죠. 그래야 조금이라도 이룰 거 아니에요. 꿈이 작으면 이룰 수 있는 것도 작아요.”

“그래. 지금 네 나이에는 꿈이 큰 게 좋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영…. 가능하겠냐?”

이연지가 얼굴을 가리켰다.

“일단 제 와꾸는 은하 언니가 통할 거라고 했잖아요. 이제 연기력만 있으면 되죠.”

“그 바닥에 예쁘고 잘생겼는데 연기 안 돼서 못 뜨는 사람 수두룩 빽빽이다.”

“쳇. 응원은 절대 안 해주시네. 아저씨는 근데 병원엔 왜 왔어요?”

“친구 문병 왔다.”

나강인이 권수연이 입원한 병실을 가리켰다.

“저기.”

이연지는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는 걸 모른다.

“아저씨도 친구가 있구나.”

“시끄럽구나.”

***

나강인이 병원을 나가려고 복도를 걷다가 이정호 과장과 마주쳤다.

“어? 나강인 씨? 여긴 어떻게…. 혹시 우리 연지를 보러….”

“아니요. 친구가 입원해 있어서 문병 왔습니다.”

이정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침 잘 왔습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죠.”

이정호는 나강인을 그의 방으로 데려갔다. 그런 후에 상황을 설명했다.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 환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의 아버지가, 연지 수술이 성공한 걸 알게 됐습니다.”

“정보가 어떻게 샌 건가요?”

“연지가 병원에 있는 걸 보고 눈치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딸도 수술해달라고 지금 난리입니다.”

이정호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

“나강인 씨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닥터 노네임이라고 가명을 둘러댔습니다.”

“닥터 노네임이라. 저는 닥터가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이정호가 부탁했다.

“어떤 환자인지 이야기라도 좀 들어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AI 전지인이 반대했다.

- 추가 수술은 위험합니다. 요원님이 체포되는 상황은 피해야 합니다.

“고민이네. 민간인의 목숨이 위험하다는데.”

- 민간인 구출과 임무가 충돌합니다. 본부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본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환장하겠지?”

- 예.

“나도 그렇다.”

나강인은 AI 전지인과 상의하느라 이정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정호는 나강인이 고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득을 위해 그의 방에 있는 대형 TV에 환자의 정보를 띄웠다.

“이 환자입니다.”

나강인이 TV로 고개를 돌렸다.

‘어?’

권수연의 사진이 화면 한쪽에 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병을 짧게 요약한 것이 적혀 있었다.

이정호가 그녀의 증상을 설명했다.

“이 환자는 케이타이거 증후군이 발병한 곳 중 하나가 위입니다. 알다시피 이 병은 신체기관의 이상 발생이 특징이지만, 암은 아닙니다. 신체기관 일부가 몸속에 새로 생성된 거라서, 그 부분을 수술로 잘라내기만 하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정호가 CT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환자의 경우는 그 증상이 위의 바깥쪽에 생겼는데, 음식이 들어가 위가 움직이면 엄청난 고통을 받습니다. 많이 먹으면 생명이 위험하기도 하고요.”

이정호가 다른 것도 보여주었다.

“다른 장기에도 이것보다는 작은 크기로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걸 모두 제거하는 수술은 한 시간 안에 끝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저와 나강인 씨만이 이 환자를 살릴….”

나강인이 말했다.

“하겠습니다.”

“예?”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비밀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위험도 커집니다.

“그래도 해야지. 권수연은 과거의 나를 알아. 물어볼 게 많아.”

- 요원님의 판단을 따르겠습니다.

이정호는 나강인이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 몰랐다.

‘이렇게 생명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걱정을 했구나.’

“고맙습니다.”

“대신에 비밀유지는 철저히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환자의 가족에게도 닥터 노네임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겠습니다. 들키면 우리 다 큰일 나는데요. 하하하.”

***

이정호는 먼저 아내인 손미연과 제자인 김중석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손미연은 찬성했다.

“우리 딸만 살리면 미안하잖아. 수술 안 해줬다가 딸이 죽으면 권 사장님이 입을 다물고 있을 리도 없고.”

김중석은 다른 이유로 찬성했다.

“지난번에 과장님과 나강…. 닥터 노네임의 수술을 보고 느낀 게 많습니다. 좀 더 배우고 싶습니다.”

문제는 수술실을 제공해야 하는 성형외과 의사 손성현이다.

이정호의 전화를 받은 손성현이 우는소리를 했다.

- 아니, 매형. 그거 그때 한 번만 하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내 조카 살리는 일도 아닌데 내가 꼭 수술실까지 내줘야 해? 이거 걸리면 난 병원문 닫는다니까?

“환자 아버지가 부자다. 만약 이번 일로 병원문을 닫게 되면 돈으로 보상해줄 거다.”

- 으응? 그래?

“다만, 걸리지 않으면 돈도 없다. 반드시 무료수술이어야 해. 돈 받고 수술하다 걸리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아. 그땐 우리 모두 구속이다.”

- 어…. 에이. 알았어. 대신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

이정호가 권동진을 조용히 불렀다.

권동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닥터 노네임과 연락이….”

“예. 따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수술하겠다더군요.”

권동진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환성을 질렀다.

“으아아! 감사합니다!”

이정호가 다급히 말했다.

“권 사장님. 이번 일은 기밀유지가 핵심입니다. 들키는 순간 우리 모두 끝장입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면….”

“아, 그렇죠. 흐흐흐. 너무 좋아서요.”

“철저히 비밀로 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우리 가족도 모르게 하겠습니다.”

***

고등학생 이연지가 박사과정 권수연의 병실에 놀러 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누구?”

“언니가 강인 아저씨 친구라면서요?”

“응? 네가 강인이를 어떻게 알아?”

이연지가 웃었다.

“히히. 친해요.”

“그래?”

권수연은 나강인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오늘 문병 왔을 때는 어제 학교에서의 일을 먼저 이야기하느라 예전 이야기를 묻지 못했다.

“이쪽에 와서 이야기 좀 해볼래? 내가 강인이를 아주 오랜만에 봤거든.”

“음….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아! 청평호수에서 있었던 일 들어보실래요? 저도 그때 엄청 활약했거든요.”

“청평호수?”

“그때 마약조직이 거기 있었는데요. 이젠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요.”

***

권동진은 딸의 병실로 급히 걸어갔다. 그러다 병실에서 나오는 이연지를 발견했다.

“어? 쟤는 분명히….”

이연지는 권동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손에는 종이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연지가 걸어가면서 실실 웃었다.

“흐흐흐. 맛있는 밥이 다 내 거다.”

권동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이정호 박사의 딸….”

사진으로만 봤지만 틀림없었다.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짜 다 나았구나. 수술이 성공했어.”

권동진이 병실에 들어갔다. 권수연이 침대에 누우려다가 멈췄다.

“아빠가 이 시간에 왜? 회사 일은 안 해?”

권동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실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수연아. 내 말 잘 들어라.”

권수연이 긴장했다.

“혹시 나 더 나빠진 거….”

“아니야. 널 수술할 방법이 생겼다.”

권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하지만 내 병은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방금 이 방에서 나간 애 있지?”

“연지?”

“그래. 이연지. 걔가 이정호 박사 딸인데, 너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어.”

“하지만 연지는 내일 퇴원한다고 했는데?”

“수술이 성공해서 완치됐으니까. 바로 그 수술을 너도 받기로 했다.”

권수연은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나… 살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우리 딸은 내가 반드시 살린다!”

권수연은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했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도 알아?”

권동진이 표정을 굳혔다.

“아니.”

“왜!”

“이 수술의 모든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될 거야.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 너도 몰라야 해. 넌 그냥 수술만 받아.”

“그러니까 왜….”

“그럴 일이 있다. 네 엄마에게는 준비가 다 되면 내가 따로 이야기할 테니까, 너도 어디 가서 절대로 이 이야기를 하지 마라. 지금은 물론이고, 수술을 받아서 다 나은 후에도.”

“하지만, 내가 아프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많잖아. 우리 연구실 사람들도 있고, 또 친구들도…. 그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해? 계속 아프다고 해?”

“아니. 잘 치료받고 나았다고 해. 그냥 거기까지만 말해. 남들은 어차피 이게 무슨 병인지도 모른다. 의사들도 몰라.”

“응. 알았어.”

권수연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중요한 건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

권동진이 병실을 나가고 권수연은 혼자 남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나 잘하면 살겠구나. 그러면 밥도 먹고, 연구도 다시 하고….”

그녀는 문득 나강인이 아까 만들어온 요리가 생각났다. 그녀는 그 요리를 먹을 수 없어서 밀폐용기 그대로 이연지에게 주었다.

이연지가 나강인의 요리를 평가한 게 생각났다.

‘아저씨 요리는 진짜 진짜 엄청 맛있어요. 언니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난 괜찮으니까 가져가서 너 먹어.’

‘아싸아!’

권수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나강인에게 톡을 보냈다.

- 나 다 나으면 요리 다시 해줄래? 그때는 같이 먹자.

나강인은 바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잠시 기다렸더니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지고 답장이 왔다.

- ㅇㅇ

그녀가 방긋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지금은 이런 답장만 받아도 좋았다.

세상이 다 장밋빛으로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