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의뢰인
대학교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이튿날 저녁 공중파 뉴스에 나왔다.
단순한 노트북 도난 사건은 공중파 뉴스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 노트북이 없어져서 어제 행사에 잠시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행사가 중단된 것도 아니다.
권수연이 위협을 당하고 쫓기기까지 했지만, 사건 직후에는 현장에 기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뉴스가 이튿날 공중파에 나왔다.
공중파 뉴스 아나운서가 카메라 앞에서 말했다.
“서울 시내 모 대학교의 행사장에서 노트북을 훔쳐 도망치던 사람이, 그 행사에 초대가수로 참여한 걸그룹 멤버와 딱 마주쳤습니다. 바로 이곳인데요.”
오늘 기자가 그 학교에 가서 찍어온 현장 사진이 먼저 나왔다.
“저희가 사건 당시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이번에는 인근에 주차된 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동영상이 TV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바로 그 영상 때문에 이 사건이 공중파 뉴스에 나오게 됐다.
영상 속에서 젊은 남자가 아이돌 최지혜를 향해 돌진하며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시청자들의 입에서 ‘어어?’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최지혜는 그 주먹에 맞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범인의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린 후에 순식간에 영상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녀는 상대를 던진 후에도 몸을 낮추고 두 팔을 쭉 편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 자세로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영상만 보면 최지혜의 모습은 굉장히 그럴듯했다. 마치 적을 카운터 기술로 한 방에 해치운 후에 여운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방송국에 제보된 영상은 거기까지였다. 영상이 끝난 후에 여자 아나운서가 설명을 이어갔다.
“범인을 잡은 사람은 걸그룹 프프걸스의 막내 최지혜 양입니다. 아직 여고생이죠.”
같이 방송을 진행하는 남자 아나운서가 감탄했다.
“요즘 아이돌은 참 대단하네요. 덩치 큰 성인 남자를 저렇게 던져버리는 건 저보고 하라고 해도 어렵겠는데요?”
“최지혜 양이 보여준 저 무술, 저도 배우고 싶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
뉴스가 나간 후에 그 블랙박스 영상이 인터넷에 빠른 속도로 퍼졌다. 여러 게시판에서 최지혜가 화제가 됐다.
- 쟤 아직 여고생이라던데?
- 보아라. 이것이 여고생의 전투력이다.
- 오십삼만은 가볍게 넘겠네.
- 프프걸스는 도대체 무슨 훈련을 하는 걸까? 회사에서 댄스가 아니라 무술을 수련하나?
- 진짜 그런가? 걸그룹이 아니라 자객그룹인가?
- 아닙니다. 최지혜는 저 기술을 그저께 배워서 어젯밤에 써먹었습니다.
-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요?
- 진짜입니다. 최지혜가 호신술을 배우는 영상이 어제 올라왔는데, 그걸 촬영한 날이 하루 전날이라고 했습니다.
- 뻥치시네.
- 뻥이 아닐 걸요? 저도 그 영상을 찾아봤는데 사실입니다.
- 아니,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진짜요?
격투기 관련 게시판에도 그 영상이 떴다.
- 이야아. 기술이 깔끔하게 들어갔네요.
- 어제 그 영상에서 배운 걸 정확히 써먹었어요.
- 역시 아이돌이라 그런지 몸 쓰는 데도 재능이 있습니다.
- 저 기술을 가르친 사람은 누굴까요?
- 로봇 가면을 쓰고 가르쳐서 정체 파악이 안 됩니다. 주변에 연락을 돌려봤는데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 나도 저 사람한테 배우고 싶다.
***
영상이 유명해진 만큼 최지혜가 누군지도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를 아는 사람이 늘어난 만큼 프프걸스의 인지도도 올라갔다.
리더 소지영이 최지혜를 꽉 껴안았다.
“아유. 우리 귀여운 막내! 잘했어!”
최지혜가 자랑했다.
“흐흐. 내가 좀 하지?”
“역시 넌 재능이 있어. 다음에는 선생님한테 너만 호신술을 집중적으로 가르쳐달라고 하자. 잘하는 걸 키워야지.”
최지혜가 정색하고 소지영의 팔에서 빠져나갔다.
“아니, 언니. 나를 제물로 바치고 언니들은 도망치시겠다?”
“어머나. 우리 막내한테 눈칫밥도 안 먹였는데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졌지?”
“진짜 이러기야? ”
***
기자가 최지혜를 찾아와 인터뷰했다.
먼저 네 명이 동시에 인사하는 모습을 찍은 후에, 최지혜가 카메라 앞에서 기자와 이야기했다.
기자가 물었다.
“지혜 씨는 평소에 무술을 수련했나요?”
“아뇨. 그 전날 우리 트레이너 선생님이 호신술을 하나 가르쳐주셨거든요. 그런데 그게 딱 그 상황에 맞는 거예요.”
“어머. 신기해라.”
“그쵸? 아무래도 미래를 보는 선생님인가 봐요. 그래서 그걸 바로 써먹었죠.”
“그 호신술 영상은 저도 찾아봤어요.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 여덟 명이 같이 배웠죠?”
최지혜가 리더 소지영을 돌아보고 씩 웃었다.
“네. 그래서 다음에도 다 함께 호신술을 배우려고요. 한 명도 안 빼놓고요.”
***
프프걸스는 멧돼지 사냥이나 자연 체조, CF, 거기에 이번 사건까지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인지도가 계속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들이 예전에 불렀던 노래도 재조명됐다.
“프프걸스의 이 노래 말이야. 다시 들으니까 괜찮은데? 이런 좋은 노래가 왜 묻혔지?”
“우리나라 가요시장에 좋은데도 묻히는 노래가 어디 한두 개야?”
“하긴. 그래도 이 정도면, 요즘 프프걸스가 꽤 유명해졌으니까 노래 차트 순위도 더 위로 올라가겠는데?”
“그러게. 차트에 들어온 다른 곡은 뭐 있어?”
“없어. 내가 찾아봤는데, 얘들은 조금이라도 알려진 곡이 이거 하나야.”
***
피시방 삼인방 윤아름의 인터넷 개인방송도 체급이 올라갔다.
그녀는 너튜브에 영상만 올리는 게 아니다. 게임 스트리머 활동도 한다.
전에는 그녀가 인터넷으로 게임 방송을 하면 시청자가 열 명 남짓 들어왔다.
그런데 오늘 방송을 켜자마자 시청자가 떼로 몰려왔다.
윤아름이 두 팔을 머리 뒤로 들어 커다란 하트를 만들며 활짝 웃었다.
“우왕! 여러부운. 환영합니다아!”
그런데 그 시청자 대부분은 게임을 보러 온 게 아니다.
- 여기가 호신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건 실시간으로는 안 해요. 오늘은 저에게 게임을 배우세요.”
- 호신술 강의는 언제 하나요?
“우리 사범님이 시간 되시는 날에요.”
- 그럼 오늘은 호신술 안 하나요?
“게임 할 거예요.”
- 사범님도 게임 잘하나요?
윤아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훗. 제 티어가 더 높아요.”
- 님 티어가?
“골드요.”
- 난 훈수질이나 해야겠다.
“훈수질 하면 쫓아낼 거예요.”
다른 걸 묻는 사람도 있었다.
- 님은 게임 방송에서는 얼굴 다 보여주시네요? 그런데 호신술 강의에서는 왜 로봇 가면을 쓴 건가요?
“다른 고정 출연자들이 다 쓰길래요.”
- 어…. 겨우 그 이유로….
“게임 시작할게요.”
***
경찰 요원 박순기가 나강인에게 말했다.
“나 사범님이 한국대학교에서 붙잡은 그놈 말입니다.”
“잡기는 지혜가 잡았죠.”
“하하. 그랬죠. 뭐 하는 놈인가 알아봤더니, 도둑놈이더군요.”
“노트북 도둑놈인 건 이미 알잖습니까?”
“그게 아니라, 전문적인 도둑놈입니다. 대도나 괴도까지는 아니지만, 훔치는 실력이 상당하다더군요. 그동안 잡힌 적도 없고요.”
“그런 놈이 굳이 행사진행 도중에 그 노트북을 훔쳤다? 팔아먹으려고 그랬다고 보기엔 좀 이상한데요.”
“예. 저희 쪽에서도 그게 이상해서 캐물었습니다. 그놈이 그날 발표가 예정된 사람과 사귀었다더군요.”
“이미 헤어졌겠군요.”
“맞습니다. 여자 쪽에서 남자가 도둑놈인 걸 눈치채고 헤어졌는데, 앙심을 품고 중요한 발표날에 찾아온 겁니다.”
“연구 성과 발표를 망치려고요?”
“예. 덤으로 그 노트북을 팔아 돈도 벌 셈이었겠죠.”
“그 노트북에 돈이 될 만한 자료가 있었습니까?”
“살짝 미묘한 게 몇 개 있는데, 어차피 발표할 것들이라서 그것만 노리고 훔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나강인이 앞을 보았다. 도둑놈이 거점으로 사용하는 단독주택이 나왔다.
“왜 저를 여기 데려온 겁니까?”
박순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그게 말이죠. 여길 수색하니까 장물이 장난 아니게 많이 나왔습니다. 그건 일단 다 수거하긴 했는데요.”
“그런데요?”
박순기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제 위에 계시는 분이, 이번 건은 나 사범님이 인지해서 처리한 사건이니까 마무리도 좀 도와주는 게 그림이 좋지 않냐고 해서 말이죠.”
“그거 원래 경찰 일인데요.”
“저희가 그날 위치조회 같은 것도 긴급으로 해드렸는데요. 하, 하하.”
나강인이 피식했다.
“뭐, 그러시죠. 어려운 일도 아닌데.”
박순기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제가 윗분들에게 큰소리 좀 치겠네요.”
나강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 곳곳에 5단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곳에 있던 장물은 이미 경찰이 모두 가져갔다. 남은 건 빈 선반과 쓰레기들이었다.
“텅텅 비었네요.”
“증거물은 저희 쪽에서 다 가져갔으니까요.”
“이런 곳에 왜 굳이 부르신 건지?”
“그러게요. 위에서는 뭘 이런 걸 부탁하는지 원.”
박순기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이유를 알고는 있다.
‘위에서는 나 사범님하고 이런 식으로라도 업무 협조 관계를 만들자는 건데….’
박순기는 이미 나강인과 잘 아는 사이다. 그래서 그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나 사범님. 여긴 이미 저희 쪽에서 다 조사했으니까, 대충 둘러보고 식사나 하러 가시죠. 제가 부대찌개라도 사겠습니다.”
“뭐. 그러죠.”
나강인이 내부를 훑어보았다. 박순기가 옆에서 서류를 넘겨 목록을 확인하며 여기서 뭐가 나왔는지 설명했다.
“특별히 비싼 건 거의 없었는데, 양이 많았습니다. 한두 번 털어본 놈이 아닙니다. 여기 놓여 있던 시계가 그나마 가격이 좀 나갔죠. 이백만 원쯤 했으니까요.”
“훔친 물건의 가격대가 생각보다 낮네요?”
“예. 기술은 좋은데 간이 작았나 봅니다. 혹시 뭔가 좀 찾아내셨습니까?”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걸 저만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알지요. 하하하.”
AI 전지인이 그 말에 반응했다. AR 렌즈에 사격형이 그려졌다. 나강인의 눈에는 한쪽 벽에 반투명한 문이 그려진 것처럼 보였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건물 전체 구조를 파악했습니다. 해당 위치의 벽이 지나치게 두껍습니다. 접근 통로가 노출되지 않은 공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강인이 그 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다고 아예 못 본다는 건 아니고요.”
나강인이 그 벽을 손으로 톡톡 두드려보았다. 통통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물었다.
“이거 부셔도 되는 겁니까?”
“예? 아. 뭐, 살짝 정도는….”
나강인이 벽을 발로 콱 밀어 찼다. 잠금장치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벽 일부가 안으로 쑥 들어갔다.
박순기는 당황했다.
“어?”
“비밀 공간이 있네요. 이런 건 조사 안 하셨나 봅니다?”
박순기가 이곳을 수색한 사람들을 위해 변명했다.
“아, 그게요. 도난된 물품들이 이 사건의 핵심은 아니라서요. 그날 그 사건이 중요하잖습니까?”
박순기가 다가와 쑥 들어간 부분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래도 비밀 공간이 있는지 확인은 했을 텐데, 여긴 진짜 잘 숨겨져 있네요. 이러니까 못 찾았겠죠. 그런데 이건 어떻게 찾아내신 겁니까?”
“집안 내부 구조를 머릿속에서 도면으로 그려봤더니, 이 벽이 지나치게 두껍더군요. 마치 벽을 하나 더 겹쳐서 세워 놓은 것처럼.”
나강인이 벽을 밀었다. 문 역할을 하는 좁은 벽이 안쪽으로 열렸다. 그곳에는 좁고 긴 공간이 있었다.
나강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 충전식 조명등이 보였다. 그가 조명을 켰다.
내부 공간의 폭은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한쪽 벽에는 깊이가 얕은 선반이, 안쪽에는 깊이가 깊고 폭이 좁은 선반이 설치되어 있었다.
박순기가 나강인을 뒤따라 들어와 벽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아. 이놈 이거. 돈 되는 건 다 여기 숨겨놨네. 이거 금괴네? 여기 장난 아닌데요?”
나강인이 안쪽 선반을 확인했다.
“보석도 있군요.”
“보석까지요? 아! 바깥에 있는 건 만약을 대비한 미끼군요. 다른 도둑놈이나 경찰에게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요.”
“그렇겠죠.”
나강인이 안쪽을 좀 더 확인했다.
그러다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음?”
그 종이에는 노트북 탈취 계획이 적혀 있었다.
“계획까지 미리 짜서 도둑질을….”
그런데 그 종이에 적힌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
“음? 그놈이 노린 건 권수연의 노트북인데요?”
“어? 그러네요? 그럼 그놈은 왜 행사진행용 노트북을 훔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