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율명바이오 II
도둑놈이 작성한 계획서에는 권수연의 노트북을 어떻게 훔칠지가 적혀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권수연의 노트북과 행사장의 노트북은 똑같은 기종입니다.”
“그럼 착각하고 가져간 걸까요?”
“아니요. 그러기에는 이 계획서가 너무 구체적입니다. 잘못 볼 수가 없습니다.”
“그놈은 분명히 예전 여자친구를 엿 먹이려고 훔쳤다고 자백했는데….”
“확인은 하셨고요?”
“담당 형사가 알아보니까 실제로 사귀었던 건 확실하답니다.”
“헤어진 예전 여자친구를 팔아서 작은 죄를 지은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겁니다.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서요. 문제는 왜 권수연의 노트북을 노렸냐인데….”
“왜 그랬는지는 그놈에게 확인하겠습니다. 추가 증거가 이만큼 있으니까 잘 구슬리면 털어놓겠죠.”
나강인은 권수연이 이라미트 태양전지의 최초 개발자라는 걸 안다.
나강인이 생각했다.
‘이거 좀 이상한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인지는 30년 뒤에나 알려지니까, 지금은 아무도 몰라야 하는데?’
그는 누가 왜 권수연의 노트북을 노렸는지 알고 싶어졌다.
“뭔가 나오는 게 있으면 저한테도 이야기해주시죠. 계속 협조할 테니까. 아. 제가 이 수사에 협조하는 게 문제가 되진 않겠죠?”
박순기가 활짝 웃었다.
“당연하죠! 저희가 원래 수사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전문가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묻고 그럽니다. 나 사범님이 이런 일의 전문가시잖습니까? 하하하.”
***
이튿날 박순기가 나강인을 다시 찾아왔다.
“그 도둑놈 말입니다. 입을 열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그 노트북을 가져오라고 시킨 놈이 학교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네요. 노트북을 가져다주고, 그놈이 거기다 뭔가 하면 도로 원래 자리에 갖다놓기로 했다더군요.”
“노트북에 해킹 코드를 심으려고 했군요.”
“저도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둑놈에게 도둑질을 의뢰한 놈이 원한 건, 행사진행용이 아니라 권수연의 노트북이었을 거고요.”
“맞습니다. 권수연 씨가 발표하는 도중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권수연 씨의 아버지가 계속 갖고 있어서 실패했나 봅니다.”
왜 행사장의 진행용 노트북을 훔쳐갔는지도 짐작이 갔다.
“그 도둑놈이 의뢰한 놈에게 같은 모델의 노트북을 갖다 주고 속이려고 한 거군요. 의뢰인이 구분 못 할 줄 알고요.”
“그렇겠죠. 그 도둑놈은 권수연의 노트북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의뢰한 놈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비밀번호나 아니면 지문인식용 실리콘 모형 손가락 정도는 갖고 있었겠죠. 어쨌든.”
나강인이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어떤 놈이 권수연의 노트북에 해킹 코드를 심으려고 전문 도둑놈을 고용했는데, 그 도둑놈은 다른 노트북을 갖다 주고 돈만 챙기려 했다는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노트북을 가지고 나오다가 하필 수연이에게 걸리니까 쫓아간 거고요.”
“예. 급한 마음에 협박이라도 하려고 했다더군요.”
“수연이를 놓친 후에는 아예 학교 밖으로 도망치려고 한 거고요.”
“저랑 같이 들은 것처럼 잘 아시네요.”
나강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전 여자친구는요?”
“그 학교에서 다른 걸 훔치려고 예전에 꼬셨다더군요. 그동안 그런 식으로 꼬신 여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잡히니까 마침 그 행사장에 있던 예전 여자친구를 팔아먹은 겁니다.”
박순기가 불평했다.
“이래서 사람을 얼굴만 보고 사귀면 안 되는데 말이죠. 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봐줄 사람은 어디 없나.”
“민영희 씨가 있잖습니까?”
박순기가 펄쩍 뛰었다.
“지금 누굴 잡으려고! 아무리 나 사범님이라도 그건 아니죠. 영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처럼 생긴 맹수입니다.”
“아, 네. 그래서 도둑놈에게 도둑질을 의뢰한 놈은 잡았습니까?”
박순기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사건이 터지니까 도망친 것 같습니다. 약속장소에도 나오지 않아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그 학교에 들어온 사람은요?”
“그때쯤에는 지역 주민들도 많이 들어와 있어서 파악이 안 됩니다. 휴대폰 추적도 하고 있는데, 대포폰을 썼다면 그것도 큰 의미는 없고요.”
“정문이나 후문 CCTV에는 출입자의 얼굴이 찍혔을 것 아닙니까?”
“그렇죠.”
“얼굴 사진만 쭉 볼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이 있나 보게요.”
박순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그 학교를 출입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다고 의미가 있나 싶지만, 저희 쪽에서 정리해 놓은 게 있으니까 보시죠.”
나강인은 박순기의 노트북으로 그날 그 사건 이후에 한국대학교를 빠져나간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 시간 분량만 확인했는데도 수백 명이나 됐다.
나강인이 그 사진을 쭉 넘겨보며 작게 말했다.
“지인아. 모두 기억해 둬라. 어디서 마주치든 알 수 있게.”
- 알겠습니다.
나강인은 화면을 쭉쭉 넘기며 박순기에게 물었다.
“그놈은 왜 권수연의 노트북에 해킹 코드를 심으려고 했을까요?”
“도둑놈도 모르더군요. 제 생각에는 권수연 씨의 연구를 훔치려던 것 같습니다.”
***
얼굴 사진을 모두 봤지만 알아낸 건 없었다.
박순기가 떠난 후에, 나강인이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수연이의 이라미드 태양전지 연구는, 핵심 개발자가 사망하면서 30년이나 묻힌다며.”
- 그렇습니다.
“누가 그 연구를 노리고 이런 짓까지 벌였다면 그 연구가 묻힐 리가 없잖아?”
- 그것도 그렇습니다. 같은 연구실 사람들을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시겠습니까?
“그래. 그 사람들은 아니야.”
- 이라미드 태양전지 기술과는 상관없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조사를 중단하시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그놈이 권수연과 관계된 뭔가를 노린 건 맞잖아. 핵심 개발자의 집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연구가 제대로 되겠냐?”
- 문제가 생길 겁니다.
“거기다 수연이가 수술을 받기도 어려워지겠지. 이게 그냥 아무 병원이나 입원해서 받는 수술은 아니니까.”
- 불법이란 불법은 다 저질러가면서 하는 수술입니다.
“우리 지인이가 그 수술에 불만이 많구나?”
- 권수연의 집에 큰일이 생기면 수술이 불발될 수 있습니다.
“그건 곤란해. 수술을 못 받으면 권수연은 죽어. 그러면 이라미드 태양전지는 30년 뒤에나 나온다.”
- 현재 시점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건 진짜 만약인데….”
나강인이 인상을 살짝 썼다.
“이라미드 태양전지가 미래에 어떻게 사용될지 아는 놈이 있어서 수연이의 노트북을 해킹하려던 거라면? 앞으로의 연구도 알아내려고 말이야.”
-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 불가능한 정보를 누군가 아는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그놈에게도 우리처럼 미래에 대한 정보가 있는 거겠지?”
AI 전지인이 다급히 말했다.
- 철저히 조사해서 범인이 누군지만 찾아내고 잡아야 합니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반드시 찾아내서 확인해야 합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아마도 그놈은.”
나강인은 권수연이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의 딸이라는 걸 외과 과장 이정호에게 들었다.
“율명바이오. 그 회사를 노렸겠지.”
- 권수연이 집에 노트북을 가져가면, 집안에서의 대화를 도청할 수 있습니다. 집 내부 통신망에 접속할 수도 있습니다.
“2082년에도 율명바이오가 있나?”
- 제 초기 데이터에는 그 회사의 이름이 없습니다.
AI 전지인의 초기 데이터에 없다고 해서 그 회사도 없는 건 아니다.
“2082년까지 회사가 존재해도 네 초기 데이터에 이름이 없을 수는 있지. 아니면 회사 이름이 바뀌었든지.”
- 가능한 일입니다.
“해킹하려던 놈은 그 회사의 무슨 정보가 필요한 걸까?”
- 정보가 없어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범인이 율명바이오가 아니라 이라미드 태양전지를 노렸을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존재한다면, 반드시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합니다.
“하나를 조사해서 범인을 잡으면 다른 하나도 알 수 있겠지.”
율명바이오를 조사하려면 그 회사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일단 이정호 과장님을 만나야겠네.”
***
나강인이 이튿날 병원을 찾아갔다.
고등학생 이연지는 이미 퇴원했다. 요즘은 통원치료 중이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복도에서 이연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연지도 병원에 들렀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앗! 아저씨!”
“어. 몸은 괜찮냐?”
“히히. 이제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요. 이따가 떡볶이에 쫄면 한 그릇 하실래요?”
“또 만두도 빼앗아 먹게?”
“히히. 라면도요.”
“오늘은 시간이 안 된다. 다음에 먹자.”
“넹!”
“그런데 말이야. 저번에 분식 사줬을 때, 다음에 병원에서 보면 네가 산다고 했잖아?”
“아. 맞다. 편의점에서 커피 쏠게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커피는 이정호 과장에게 얻어먹으면 됩니다. 콜라로 하시지요.
“난 콜라.”
이연지는 병원 1층 편의점에서 콜라를 두 개 샀다. 그들은 병원 밖 벤치에 앉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당연하죠. 우리 아빠 수술 실력은 세계 최고!”
“어. 그러냐. 그래. 세계 최고지.”
나강인이 슬쩍 떠보았다.
“이정호 과장님이 혼자 수술하셨나?”
“몰라요. 수술 방법은 비밀이래요. 제가 딸이고 수술받은 당사자인데 저한테도 말을 안 해줘요. 와. 억울해서 나도 의사 할까 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정호 과장의 입이 무겁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신뢰도가 높아졌습니다.
이연지가 쫑알댔다.
“물론 진짜 의대 갈 건 아니고요. 전 과학자 할 거예요.”
“어떤 과학자?”
“우주선도 만들고 싶고, 로봇도 만들고 싶고, 핵융합 같은 거도 연구하고 싶어요.”
“수소폭탄? 스케일이 크네?”
“아뇨. 핵융합 발전소 같은 거요. 에너지 문제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넌 하고 싶은 게 참 많구나. 그런데 저번에 만났을 땐 연예인 한다더니?”
이연지가 실실 웃었다.
“그런데 그건 다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고요. 지금 당장은 연예인이 하고 싶어요. 가수도 하고 싶고요. 배우도 하고 싶어요.”
“그래. 너 다 해라. 그런데 너 연기는 할 줄 아냐?”
그녀가 손가락으로 볼을 찍으며 말했다.
“혹시 제가 연기력을 타고나지 않았을까요?”
“배워본 적 없구나?”
“히히.”
“노래는?”
“제 친구가 저보고 잘한댔어요.”
“어. 그냥저냥 잘하는 수준. 연지야. 너 전교 1등이라며?”
“네!”
“내가 보기엔 너는 그거 하나 잘한다. 그냥 공부나 해.”
“우이씨.”
나강인은 콜라를 다 마시고 이정호를 만나러 갔다.
이연지는 검진을 받아야 해서 헤어졌다.
이정호가 그의 방에서 나강인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우리 딸이 살았습니다.”
“1층에서 만났습니다. 괜찮아 보이더군요.”
이정호가 웃었다.
“이제 아주 건강합니다. 회복도 놀랄 만큼 빠릅니다. 하하하.”
이정호가 웃다가 표정을 조금 굳혔다.
“사실 회복이 너무 빨라서 당황스럽긴 합니다. 벌써 완전히 정상이 돼서 또 뛰어다니니까….”
“빠른 회복이 그 병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중증 상태에서 치료에 성공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만약 그렇다 해도 자주 검진해서 이상이 없게 만들어야죠.”
이정호가 커피를 머그컵에 담아 가져왔다.
나강인이 커피를 마셨다.
“맛이 참 좋군요.”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이 선물이라면서 원두를 주고 가더군요. 좀 더 챙겨달라고 할까요?”
“아니요.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만.”
“말씀하시죠.”
“혹시 율명바이오에서 특별한 걸 개발했습니까?”
“예? 제약회사니까 약 개발이야 항상 하는데, 그중에 뭘 이야기하시는지….”
“자세한 건 모르시는군요.”
“영업사원이 알려주는 것 외에는 딱히…. 의사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거기도 특별한 건 본 기억이 없습니다.”
“음….”
나강인은 도둑놈에게 노트북을 훔치라고 시킨 놈이 뭘 노리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놈 때문에 권수연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권수연은 나강인의 예전 삶을 아는 사람이고, 미래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인 이라미드 태양전지의 최초 개발자다.
‘만약 이라미드 태양전지가 그놈의 목적이라면, 그 이유도 반드시 알아내야 하고.’
그놈을 잡으려면 상대가 뭘 노리는지부터 알아내서 추적해야 한다.
“수술날짜는 아직 남았지요?”
이정호가 주변을 둘러본 후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에 필요한 약품과 혈액을 빼돌리고 서류를 조작하고 스케줄까지 조정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연지 때 이미 한 번 저질렀는데 곧바로 또 빼돌리면 발각될 위험이 너무 큽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제가 수술 조건으로 돈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이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돈이 오갔다가 나중에 수술 사실이 알려지면 법적으로는 물론이고 여론도 큰일 나지요. 대가 없이 수술해 주시는 걸 권 사장도 알고 정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이정호가 살짝 긴장했다.
“혹시 뭔가 필요한 게….”
“오늘 중으로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