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39화 (139/411)

139. XVE

나강인이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과 만나겠다고 말했다.

외과 과장 이정호는 깜짝 놀랐다.

“닥터 노네임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도 커지잖습니까?”

AI 전지인이 맞장구를 쳤다.

- 역시 많이 배운 사람은 다릅니다. 이 위험한 방법이 최선이십니까?

“응. 최선이다.”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말했다.

“제약회사 사장님을 끌어들이면 약을 빼돌리긴 좋겠네요.”

“그런 문제라면 직접 만나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수술에 필요한 약 중에서 두 가지는 권 사장님이 구해오기로 했으니까요. 혈액은 다 제가 구해야 하지만요.”

“그냥 자리 좀 마련해 주시죠.”

이정호는 나강인이 걱정돼서 말린 것뿐이다.

“알겠습니다. 권 사장님도 닥터 노네임을 만나고 싶어 했으니까요.”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정보 통제가 어려워집니다.

“해커를 고용한 놈을 잡으려면 율명바이오를 조사해야 해. 사장을 만나서 협조를 받는 게 제일 빨라.”

나강인이 이정호에게 말했다.

“오늘 중으로 만났으면 합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정호가 물었다.

“갑자기 권동진 사장을 만난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번 수술을 하는 이유가 혹시 권 사장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니요. 수술은 권수연만 보고 하는 겁니다.”

권수연이 이라미드 태양전지 개발자라서 수술한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권수연이 지금 연구하는 게 성공하면 미세먼지가 줄어든다더군요. 그 연구를 계속하게 하려면 일단 살려야죠.”

“예? 미세먼지요?”

***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은 지난번에 이정호를 만난 술집을 다시 통째로 빌렸다.

술집 주인은 이번에는 다른 손님이 오기도 전에 술과 안줏거리를 챙겨놓고 가게를 나갔다. 그는 내일 돌아오기로 했다.

가게 간판의 불은 이미 꺼놓았다. 술집 주인은 나가면서 입구 쪽 조명도 껐다. 문에는 영업이 끝났다는 푯말도 달았다.

권동진은 긴장을 풀려고 찬물을 마셨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술도 한 잔 마셨다. 이 가게에서 제일 좋은 술이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주를 한 병 내놓고 가라고 할 걸 그랬나.”

소주를 꺼내러 가지는 않았다. 오늘 이 자리는 그에게 무척 중요했다. 소주 냄새를 풍기며 손님을 만날 수는 없다.

“닥터 노네임이 왜 나를 만나려는 걸까?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왜 마음을 바꾼 걸까?”

돈을 요구할 리는 없다는 말은 이정호에게 이미 들었다.

“차라리 돈을 달라고 하지.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혹시 수술 준비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나를 보자고….”

술집 문이 열렸다.

권동진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는 사람이 들어왔다. 나강인이었다.

권동진은 당황했다.

“어? 우리 수연이 친구?”

나강인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예.”

권동진이 어색한 얼굴로 일어났다.

“반가워. 내가 밥이라도 한 번 샀어야 했는데 요즘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어. 그런데 오늘 이 가게는 손님을 안 받아서 말이야. 미안한데 다른 가게로 가면 어떨까?”

나강인을 뒤따라 이정호가 들어왔다.

“권 사장님. 먼저 와 계셨군요.”

“아. 예. 마음이 급해서요.”

이정호가 나강인을 소개하려고 했다.

“닥터 노네임….”

권동진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들어 그 말을 막았다.

“이 박사님. 지금은 다른 사람이 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예?”

권동진이 나강인에게 말했다.

“다음에 수연이하고 같이 밥 한번 사지. 수연이 통해서 연락할게.”

이정호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 권 사장님. 혹시 닥터 노네임과 아는 사이십니까?”

권동진은 이정호가 닥터 노네임을 언급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 박사가 이렇게 입이 싼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모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소개를 받으려고 와 있잖습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니까요.”

“아니, 이미 아시는 사이 같은데….”

“모른다니까 왜 자꾸 그러십니까? 알 리가 없잖습니까?”

이정호가 나강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에 밥 한번 산다면서요. 그것도 따님하고 같이.”

“그거야 저 친구에게…. 어?”

권동진은 뭔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가게는 지금 간판에 불이 꺼져 있다. 나강인이 들어오자마자 이정호가 따라 들어왔다.

“설마?”

이정호가 말했다.

“이분이 닥터 노네임입니다.”

“헉!”

권동진은 닥터 노네임이 이정호 정도 나이의 의사일 줄 알았다. 이정호보다 젊더라도 최소한 의학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일 줄 알았다.

권수연의 친구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아, 아니, 어떻게…. 분명히 우리 수연이 학교 친구라고….”

나강인이 말했다.

“학교 친구 맞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의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의대 아닙니다.”

권동진이 이정호에게 물었다.

“이 박사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도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릅니다만.”

이정호는 한 가지는 눈치챘다.

“닥터 노네임이 권 사장님 따님을 수술하겠다고 한 이유는 알겠군요. 따님 자료를 보여주자마자 하겠다고 했거든요.”

권동진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계속 당황한 채로 서 있어서는 안 된다. 그에게 중요한 건 나강인의 정체가 아니다. 나강인이 딸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 일단 이쪽으로 앉…. 이거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편하게 말씀하시죠. 수연이 아버님이신데.”

“그, 그럴까?”

권동진이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쪽으로 앉아. 하, 하하. 이거, 우리 수연이가 자기가 살 방법을 스스로 찾아놨었네. 하하. 어?”

권동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수연이가 친구 정체를….”

“모릅니다. 알아서도 안 되고요.”

“그래? 하긴. 이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굳이 나한테 얼굴을 보여주면서까지 만나기로 한 이유가 그럼….”

“학교 행사장에서 노트북을 훔치고 수연이를 쫓아갔던 놈 말입니다.”

권동진의 주먹으로 탁자를 쳤다.

“그 새끼는 내가 반드시 콩밥을 처먹일 거야.”

“이미 경찰에서 여죄를 찾아냈습니다. 전문적인 도둑놈이더군요. 청부 도둑질도 자주 하는데, 그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가 봅니다.”

“그래? 그런 놈은 아주 오래오래 콩밥을 먹어야지.”

“그런데 그놈이 원래 노렸던 건 행사장 노트북이 아니라 수연이의 노트북이더군요.”

“어?”

“누군가 수연이가 그날 행사에서 발표하는 동안 그 노트북을 훔쳐오라고 했다더군요.”

“그때는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하니까, 도둑놈은 똑같은 모델인 행사용 노트북을 훔쳤더군요. 공연할 때 잠깐 빼돌렸다가 발표가 다시 시작되기 전에 도로 갖다놓으려고 했는데, 수연이에게 들키면서 일이 꼬인 거지요.”

“아니, 도로 갖다놓을 거면 왜 훔친 건데?”

“경찰은 그 도둑놈에게 노트북을 가져오라고 한 누군가가, 해킹 코드를 심으려 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동진이 화를 냈다.

“우리 수연이의 연구를 훔치려고? 이런 나쁜 놈!”

“아니요. 제가 볼 땐 율명바이오에서 뭔가 훔치려고 했을 겁니다.”

“어? 우리 회사?”

이라미드 태양전지 연구는 권수연이 사망하면 앞으로 30년은 묻힌다. 적이 노린 것이 그 연구라면 묻힐 리가 없다.

만약 그 연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강인이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적의 목적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상대는 권동진이 사장으로 있는 율명바이오를 노렸다고 의심해야 한다.

나강인은 그런 사정까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으로 이해시켜야 한다.

“이번 해킹 시도가 처음은 아닐 겁니다. 그 해커는 율명바이오의 방화벽을 뚫을 수 없거나, 뚫긴 했는데 찾아내지는 못한 어떤 정보를 원했을 겁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내 딸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닌데 왜 노트북을 해킹하지?”

“권 사장님의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집안에서는 수연이 것과 같은 인터넷 공유기에 접속하잖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침투하려고 했겠죠.”

“아….”

나강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여쭤보는 건데, 혹시 회사에서 뭔가 특별한 걸 연구하고 있습니까? 기존의 대체 가능한 약품 말고 특별한 것 말입니다.”

“그게….”

권동진이 망설이다가 주변을 보았다. 지금 이술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한 배를 탔다.

권동진이 입을 열었다.

“국방부 발주 프로젝트가 있어.”

“제약회사에서 국방부와 뭘 합니까?”

“몇 년 전에 외국에서 신종 화학무기인 XVE 가스가 개발됐어. XVE에 사람이 노출되면 일 분 안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십 분 후에는 사망하지. 기존 해독제로 사망 시간을 조금 늦출 수는 있는데, 제때 대형병원으로 보내지 못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야.”

“설마 그걸?”

“우리 회사에서 그 화학무기의 휴대 가능한 해독치료제를 연구하고 있다.”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그것 자체는 무기가 아니군요.”

“그렇지. 무기가 아니라 치료제이지.”

“성과는 있습니까?”

“동물 실험에서는 효과가 있는 걸 만들었는데, 사람을 대상으로 한 테스트는 할 기회가 없어서 말이지. 갈 길이 멀어.”

“흐음….”

미묘했다. 해커가 그걸 노리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XVE 가스에 대해 아냐?”

- 인체에 치명적인 화학무기입니다.

“해독제를 만드는 법은?”

- 모릅니다.

“혹시나 했다. 해독제가 있긴 있지?”

- 2082년 기준으로 다양한 해독제가 있습니다.

“그럼 지금 연구 중인 해독제도 언젠가는 완성되겠네. 이미 완성된 것일 수도 있고.”

나강인이 권동진에게 물었다.

“다른 특별한 건 개발한 게 없습니까?”

권동진이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개발 중인 건 많지만, 특별하다고 할 만한 건 그 해독제 하나뿐이야.”

그렇다면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율명바이오가 해킹당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우리 회사 보안 시스템은 우수해. 우리 시스템이 뚫렸다는 보고는 받은 적이 없어.”

“뚫리진 않았어도 해킹을 시도한 놈은 있겠죠.”

“그거야 뭐 항상 있는 일이라….”

“어떤 놈들이 해킹을 시도했는지 조사하고 싶습니다.”

그건 권동진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알았다. 내가 전산실에 조사하라고 지시를….”

“그걸 제가 하려고요.”

“응?”

“제가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권동진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예.”

이정호도 놀랐다.

“어? 왜 그런 걸 할 줄 압니까?”

“원래 이것저것 좀 합니다.”

권동진에게 제일 중요한 건 딸을 살리는 것이다.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점검만 좀 하는 정도로 만족한다면 해줘야지.’

“알았다. 내가 필요한 절차는 다 처리해놓지.”

“빠를수록 좋습니다. 해커가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하니까요.”

권수연의 수술을 위해 저질러야 하는 수많은 불법에 비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권동진이 말했다.

“그러면 내일 당장 하지. 오후 두 시 정도에 회사로 찾아오면 어떨까?”

“그러죠.”

***

이튿날 나강인이 율명바이오를 찾아갔다. 본사 건물 옆에는 율명바이오 서울 연구소가 있었다.

나강인이 본사 건물 1층 로비에 들어갔다.

1층 로비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장님하고 약속이 있습니다.”

“혹시 성함이….”

“나강인입니다.”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네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냥 어디로 가면 되는지만 말씀해주시죠.”

“네? 아. 네.”

직원이 방문자 카드를 주었다.

“12층 출입문만 통과할 수 있는 카드입니다.”

나강인이 카드를 받은 후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1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건 튼튼한 출입문이었다. 반대 방향에는 화장실과 휴게실이 있었다.

나강인이 출입문 앞으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보안카드를 사용하거나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한다.

“지인아. 이거 뚫을 수 있냐?”

- 키패드 타입 터치패널도 없고 지문인식장치도 없습니다. 문을 부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문인식장치가 있으면 가능하고?”

- 대상자의 손가락 지문 사진을 확보한 후에 제작거점의 장비로 실리콘을 정밀 가공하면, 낮은 레벨의 지문인식장치는 뚫을 수 있습니다.

“낮은 레벨?”

- 사람의 손가락인지 감지하는 기능이 있으면 실리콘 손가락으로는 뚫기 어렵습니다.

“여긴 그런 게 없으니까, 카드키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겠지. 일단 출입문 보안은 괜찮네.”

나강인이 방문자 카드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 자리에서 일하던 직원이 시선을 돌렸다가 모르는 얼굴을 발견하고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장님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아!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죠.”

직원은 나강인을 사장실 방향으로 안내하고 돌아갔다.

나강인이 말했다.

“남의 보안카드를 훔쳐서 들어와도 직원 눈에 뜨이겠군.”

그가 사장실 쪽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CCTV 상태는?”

- 이 지점까지 CCTV를 피해 침투할 수 있는 경로가 없습니다. 사무실 내부도 출입구 방향은 CCTV의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놈은 직접 침투가 아니라 사장 가족의 노트북을 해킹하려 했겠지.”

사장실과 가까운 자리에서 비서가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강인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나강인은 사장실로 들어갔다가 살짝 놀랐다.

“어?”

사장실 소파에 권수연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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