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해커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은 일부러 점심시간 이후로 약속을 잡았다. 권수연은 평범한 식사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권수연을 부른 건, 나강인이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권수연은 지난번보다 굉장히 밝아져 있었다.
“어머. 강인아.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권수연도 나강인이 온다는 건 몰랐다.
권동진이 얼른 말했다.
“우리 회사 보안점검을 위해 불렀다. 네 친구가 그쪽으로 좀 한다더라.”
“강인이가? 못 본 동안 무술수련만 한 줄 알았더니?”
나강인이 말했다.
“그냥 이것저것 좀 할 줄 알아. 넌 퇴원했구나?”
권수연이 화사하게 웃었다.
“응. 오늘 아침에. 그냥 체력만 떨어진 거라서 퇴원해도 된대.”
나강인은 그녀의 병을 안다. 그녀가 그 병을 숨기려 한다는 것도 안다.
“어…. 그렇구나.”
권동진이 권수연에게 말했다.
“전산실에는 내가 연락해둘 테니까 네 친구는 네가 안내해라. 거기 가면 다 알아서 해줄 거야.”
“난 아빠 회사 직원도 아닌데 그래도 돼?”
“조금 전부터 네 방문자 보안카드로 전산실을 출입할 수 있게 해놨다. 그래도 돼.”
권수연이 팔을 걷는 시늉을 했다.
“그럼 그럴까? 오늘은 푹 쉬어서 체력이 좋으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녀는 희망이 생긴 후로 기운이 더 났다.
***
율명바이오 연구소에는 IT 담당 부서가 따로 있지만, 연구 자료는 본사 전산실에도 일부가 저장되어 있다.
나강인이 전산실로 걸어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해커가 수연이의 노트북까지 노릴 정도면, 그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봐야지. 연구소는 물론이고 본사 방화벽도 뚫으려고 했을 거야.”
AI 전지인이 큰소리쳤다.
- 지구연합군의 해킹방어 능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너만 믿는다. 어떤 놈인지만 찾아내.”
***
전산실장은 사장으로부터 보안점검을 할 사람이 간다는 말만 들었다.
실장이 툴툴댔다.
“사장님이 아는 사람인데, 보안상태를 점검할 테니까 잘 협조하란다.”
해킹방어를 담당하는 정보보안팀장이 물었다.
“잠깐만요. 보안 회사가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이 와서 점검한다고요?”
“어. 그쪽으로 좀 안다더라고.”
“어디서 선무당이 사장님한테 큰소리라도 쳤나 본데요?”
“원래 어설프게 아는 놈들이 현장을 잘 모르잖아.”
“어떻게 할까요?”
“우리 전산실이 아마추어한테 털리면 사장님이 우리에게 월급을 줄 때 안 아깝겠냐?”
“아깝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팀장이 큰소리쳤다.
“제가 현장의 무서움을 보여주겠습니다.”
“김 팀장만 믿겠어.”
***
나강인은 권수연과 같이 율명바이오 본사 전산실에 들어왔다.
실장은 권수연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어? 사장님 따님?”
권수연이 비슷한 또래의 남자와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사장님이 아는 사람을 보낸다더니, 그게 아니라 사장님 따님이 아는 사람이었어?”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혹시 저 남자가 사장님 따님의 남자친구? 아니면 애인? 나이가 있으니까 혹시 결혼 상대? 로열패밀리?”
의식의 흐름이 순식간에 로열패밀리까지 도달했다.
“그런 사람이 왜 우리 전산실을….”
어느새 의식의 흐름이 로열패밀리 단계를 넘어갔다.
“헉! 설마 결혼한 다음에 전산실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팀장으로 시작한 후에 차근차근 세력을 키워 내 자리를 차지하려는 건가?”
실장은 나강인과 권력싸움을 하다 밀려나 지방 창고 관리직으로 가는 것까지 상상했다.
창고 문앞에 혼자 앉아서 과자 한 봉지에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창고 앞마당에 고장 난 지게차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실장이 손을 흔들어 환상을 흩어버렸다.
“아, 안돼.”
권수연이 전산실장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 어. 반가워요.”
“안색이 너무 창백해 보이세요. 병원은 가보셨어요?”
“하, 하하.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실장이 나강인을 보며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쪽은 누구신지?”
“친구예요.”
“그러니까 어떤 친구….”
실장에게는 나강인이 권수연의 남자친구인지가 중요했다.
권수연이 나강인을 슬쩍 보며 말했다.
“학교 친구….”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지만 못 들을 정도로 작지는 않았다.
실장의 긴장했던 표정이 탁 풀렸다.
“아아. 난 또.”
깜깜하게 느껴졌던 미래가 다시 밝아졌다. 얼굴에 화색도 돌았다.
“아. 그럼 우리 회사 보안 시스템을 점검해보겠다고 한 건 무슨 이유로?”
나강인이 대답했다.
“이 회사를 노리는 해커를 찾으러 왔습니다.”
실장의 표정이 더 풀렸다. 지옥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전산실이 천국처럼 보였다. 그는 여유롭게 웃음까지 지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런 거구나. 여기가 목표가 아니라 해커가 목표구나. 우리 회사를 공격하는 해커는 항상 있는데.”
“해커가 주로 어떤 정보를 노립니까?”
실장이 정보보안팀장을 향해 손짓했다.
“김 팀장. 설명해드려.”
김 팀장이 다가와 말했다.
“우리 회사의 신약 정보를 노리는 놈들은 평소에도 많습니다. 물론 우린 그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했습니다.”
“이곳이 해커에게 뚫렸다고 생각하고 온 건 아닙니다만.”
팀장은 조금 전에 실장과 대화할 때 나강인에게 현업의 무서움을 보여주겠다고 장담했다. 실장도 조금 전에는 분명히 그걸 원했다.
마음이 바뀐 전산실장이 잘 해주라는 뜻으로 눈짓을 살짝 했다.
팀장은 그 눈짓을 반대로 받아들였다.
팀장이 먼저 나강인의 경력 조사부터 들어갔다.
“그런데 해커를 쫓는다?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이쪽 일을 하던 분이신가? 어느 회사에 계십니까?”
나강인은 철인기공에 비상근 팀장 자리가 있다. 하지만 그 회사는 군과 경찰용 장비를 만드는 곳이지 해커를 잡는 곳이 아니다.
“그쪽 분야의 회사는 안 다닙니다.”
“다니신 적은?”
“없습니다.”
팀장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해킹대회 수상경력은 있으시고?”
“출전한 적이 없습니다.”
권수연이 이쪽 일을 잘 모르긴 하지만, 지금 분위기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건 눈치챘다.
그런데 그녀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다.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다.
대신에 그녀의 표정이 나빠졌다.
실장이 그녀의 눈치를 보며 팀장을 살짝 말렸다.
“어…. 김 팀장. 그래도 손님인데….”
팀장은 분위기가 변해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나강인을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이쪽 회사에 다닌 것도 아니고 수상경력도 없으면, 아마추어라는 소리군요. 그럼 해모수가 어떤 곳인지는 압니까? 이것도 모르면 여기 오면 안 되는데 말이죠.”
해모수는 국내에서 유명한 IT 보안 커뮤니티 사이트다. 지난달에 해모수에서 제공한 취약점 정보 덕분에, 서버 운영체제 제작사와 방화벽 회사에서 긴급 보안패치를 내놨다.
나강인이 말했다.
“압니다.”
“아. 그래요? 나 해모수의 정회원입니다. 닉네임은 돌산무사.”
실장이 자랑했다.
“우리 김 팀장이 거기서 꽤 알아준다더군요.”
“준회원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을 열심히 읽었으면 내 닉네임을 가끔 봤을 겁니다. 그런데 손님은 닉네임이 어떻게 되는지?”
“새벽토끼입니다.”
“헉!”
팀장이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실장이 물었다.
“김 팀장. 왜 그래?”
“어, 아니. 그게요.”
팀장이 침을 꼴깍 삼키고 물었다.
“정말 새벽토끼입니까? 다른 토끼 아니고 진짜 새벽토끼세요?”
“그렇습니다만?”
팀장이 입을 벌렸다.
“와. 우리 사장님 섭외력 쩌네. 해모수 방장님도 섭외에 실패한 사람을 어떻게….”
권수연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눈치챘다.
그녀가 얼른 자랑했다.
“제 친구예요.”
“대단하십니다.”
“친구인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예. 그야….”
나강인이 말했다.
“이제 여기 장비를 좀 써도 되겠습니까?”
김 팀장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 안쪽을 가리켰다.
“아유.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죠.”
김 팀장이 안쪽 자리를 안내했다. 나강인이 그곳에 앉았다.
김 팀장은 나강인의 뒤쪽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그 자리에서 보면 모니터가 보인다.
실장이 다가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김 팀장. 혹시 대단한 사람이야?”
“진짜 새벽토끼라면요. 진짜인지는 지금부터 봐야죠. 사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니까요.”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작게 말했다.
“지인아. 시작하자.”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손을 이용해 이 회사를 해킹하려 한 해커들을 추적했다.
- 접속 로그를 분석 중입니다. 해킹 시도를 다수 발견했습니다.
“해커가 한 놈은 아니지?”
- 많습니다.
“그중에서 아마추어 말고 실력 좀 되는 놈들은?”
- 해킹에 사용한 기술로 분류하면 지난 한 달 사이에 최소 3인 이상의 상급 해커가 해킹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지금 시대 기준으로 상급입니다.
“국적은?”
- 중국, 일본, 미국 등의 서버를 통해 접속을 시도했습니다.
“추적해서 시작점이 국내에 있는 해커를 찾아.”
- 역추적을 위한 필수 정보를 확보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역추적하려면 추가 프로그램 설치가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돌려 팀장에게 물었다.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고 외부 프로그램을 설치해도 되는 단말기가 있습니까? 서버실 내부와 연결되어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 이쪽으로 오시죠.”
“이 장비에서 분석한 파일도 그 단말기로 복사해야 합니다만.”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나강인이 자리를 옮긴 후에 AI 전지인이 만든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김 팀장이 분석 파일을 복사해서 넘겨주었다.
AI 전지인이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 옆에 있는 장비로 분석한 정보를 이용해 적을 추적 중입니다. 요원님. 국내 해커를 의심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십시오.
“수연이의 노트북에 해킹 프로그램을 심으려던 놈 말이야. 지금 국내에 있잖아. 역추적 대상자 중에 국내 해커가 있다면 그놈부터 조사해야지.”
- 이해했습니다.
전산실장이 김 팀장에게 물었다.
“어때?”
김 팀장은 나강인의 뒤쪽에서 당황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저게 왜 뚫리지? 어? 어? 저건 또 왜 저렇게 간단히 뚫려?”
“어떠냐니까? 진짜 그 토끼 같아?”
“그 토끼가 아니라 새벽토끼요. 이쯤 되면 진짜라고 봐야죠.”
“그럼 혹시….”
실장은 나강인이 로열패밀리가 되면 전산실을 장악하러 올 거 같냐고 묻고 싶었다. 조금 전에는 마음을 잠깐 놓았는데, 실력을 보고 나니 다시 불안해졌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대신에 다른 소망을 말했다.
“둘이 그냥 친구겠지?”
“예?”
“아무것도 아니야.”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국내에서 활동하는 해커를 찾았습니다.
“역시 여기도 건드렸네. 여길 못 뚫으니까 수연이의 노트북으로 우회하려고 했겠지. 주소는?”
- 마지막 접속 지점을 확인했습니다.
“그놈부터 만나보자.”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끝났습니다.”
전산실장이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해킹은 좀 찾아내셨습니까?”
“아니요. 이 회사를 공격한 놈은 많은데 전부 다 잘 막으셨네요.”
실장은 권수연이 들을 수 있게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자랑했다.
“하하하. 우리 정보보안능력이 이 정도입니다. 특히 해킹방어 시스템은 확실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나강인과 권수연이 그곳을 나간 후에 실장이 씩 웃었다.
“야야. 봐봐. 큰소리만 치더니 그냥 가잖아. 별거 아니지?”
팀장은 반응이 달랐다. 그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와. 역시 새벽토끼.”
“응? 역시라니? 딱히 알아낸 건 없잖아. 해커를 찾아낸 것도 아니고.”
“아뇨. 분명히 뭔가 알아냈어요.”
“응?”
“순식간에 추적해서 자료를 모으고 결국 원하던 걸 찾아내는데, 와, 그게 진짜 왜 그 속도로 되지?”
“아니, 잠깐. 김 팀장. 그러면 저 친구는 왜 우리랑 정보 공유를 안 해?”
“우린 해커에게 뚫리진 않았으니까요.”
“응?”
“우리는 피해 본 게 없으니까 제삼자는 빠지라는 거겠죠. 어쨌든 새벽토끼는 원하는 해커를 찾은 것 같습니다.”
***
나강인이 이제 가려는 곳은 권수연을 데려갈 수가 없다. 위험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돌아다닐 체력이 없다.
나강인이 1층에서 손을 흔들었다.
“난 간다. 다음에 보자.”
“으응.”
권수연도 나강인을 붙잡지 못했다. 지금은 같이 차를 마실 수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다.
그래도 이제는 수술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 다 나으면 밥 먹자. 옛날처럼 술도 마시자.”
나강인은 옛날에 그녀와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앞으로 그녀에게 뭘 해줄 수 있는지는 안다. 그녀의 병은 이정호와 나강인이 같이 수술해야만 치료할 수 있다.
나강인이 말했다.
“넌 금방 나을 거야.”
“그렇겠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