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경고
나강인이 해커를 압박했다.
“우리가 바보인 줄 알아? 네가 화학무기를 노리고 율명바이오를 해킹하려던 거 다 알아. 이 테러리스트 새끼야.”
나강인은 해커가 빼내려던 것이 화학무기가 아니라 해독치료제라는 걸 안다. 그런데도 일부러 화학무기 이야기로 압박했다.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든 화학무기를 노리고 해킹을 하는 건 심각한 중범죄다. 당연히 교도소에서 아주 오래 살아야 한다.
해커도 그걸 안다. 그는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해독제 정보만 찾으려던 겁니다.”
“이게 어디서 그런 얕은 수작으로 빠져나가려고!”
“진짜입니다! 해독제는 누굴 해치는 데 쓰는 게 아니잖아요! 전 그냥 잠깐 조사만 하려던 겁니다!”
“이 새끼가 아직도 거짓말을 하네? 잠깐 조사하려고 여자를 납치하고 노트북도 훔치고 그러냐?”
“지, 진짜 아닙니다. 저는 그냥 돈만 주면 만들어달라는 건 만들어주고, 해킹해달라는 거 해킹해준 것뿐입니다.”
AI 전지인이 조언했다.
- 포로가 저항 의지를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제 조금 믿어주는 척하며 압박 강도를 낮추시면 더 좋은 효과가 기대됩니다.
나강인이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며 물었다.
“그럼 납치나 화학무기는?”
“사람을 납치할 줄도 몰랐고요. 화학무기라니요! 그런 건 해독제 찾다가 같이 보였어도 건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전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나강인이 일부러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진짜 아니야?”
나강인의 표정을 AI 전지인이 보정했다. 목소리 톤도 조금 조정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옆에서 구경만 하는 박순기가 속으로 감탄했다.
‘와아. 저런 연기력이면 그냥 배우를 해도 되겠네. 난 나 사범님이 왜 저러는지 알면서 보는데도 진짜인가 싶잖아.’
박순기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강인의 연기가 좋았다. 해커는 나강인이 연기한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해커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저는 그냥 돈만 주면 해킹하는 청부해커입니다. 진짜 누굴 해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그럼 너한테 해킹을 의뢰한 놈은 누구야?”
“그건 저도 잘….”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박 형사님. 그냥 테러리스트로 쳐넣죠? 증거도 충분한데.”
박순기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럴까?”
해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사정했다.
“진짜 모릅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어요. 돈은 퀵서비스 통해서 현금으로 받고 연락은 대포폰으로 받았어요. 저 진짜 다 말씀드릴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눈짓했다.
박순기가 해커에게 물었다.
“지금 그 이야기 경찰서에 가서도 그대로 할 수 있어?”
“이미 다 알고 오셨잖아요.”
“그렇지. 그래도 네가 자백한 걸 기록으로 남겨야 일이 편해지니까 말이야.”
나강인이 옆에서 바람을 잡았다.
“나중에 잡아떼면 지금까지 널 역추적해서 수집한 자료를 다 첨부해서 처넣을 거다. 거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참 많더라?”
나강인은 해커가 그동안 어디까지 해킹을 했는지 아직은 모른다. 이번 일이 처음일 리가 없어서 넘겨짚어 말한 것뿐이다.
해커는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마,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
박순기가 해커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후에 차에 태웠다. 그런 후에 차 밖에서 나강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나 사범님이 참관인으로 보시는 것 정도는 제가 손을 쓸 수 있는데요.”
나강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저 해커는 넘길 테니까 알아서 잘 털어주시죠.”
“이러면 실적을 저나 해커를 조사할 팀에서 다 먹게 되는데, 그러면 죄송해서 그러죠.”
“경찰 실적 점수를 민간인인 제가 따서 뭐하게요.”
“그런가요? 하, 하하.”
“그냥 데려가시죠.”
“조사가 끝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 중간에 정보가 더 필요할 때도 연락할 테니까 좀 도와주시고요.”
“그러죠.”
박순기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그런데요. 방금 해커를 압박할 때 하신 이야기 말입니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조금 전에 해커의 사무실에 침입해서 알아냈다.
“제가 해킹방어를 좀 합니다.”
“아. 예. 뭐든지 좀 하시겠죠. 근데 진짜 못 하는 게 없으시네요.”
***
박순기는 해커를 데리고 떠났다.
나강인은 제작거점으로 돌아왔다.
해커의 컴퓨터에서 전송한 파일들이 그의 제작거점 컴퓨터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나강인이 복사된 파일들을 확인했다.
“거기 있던 게 이게 다는 아니지?”
- 해커가 데이터 서버에 대량의 파일을 저장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경찰이 언제 현장에 출동할지 몰라 그것까지 복사할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건 경찰이 가져가서 확인하겠지. 아. 잠깐. 경찰이 해커의 장비들을 조사할 때 우리까지 역추적당하지는 않겠지?”
- 복사 흔적이 완전히 제거되도록 처리했습니다.
“지구연합의 기술로 말이지? 우리 지인이가 해킹은 싫어하는데 이런 건 참 잘해.”
- 해킹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수요원이 직접 침투해 파일을 복사하는 건, 정상적인 전투지원입니다.
“그치? 수고했으니까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 페넬로페로 갑니까?
“거기는 예약도 없이 가면 미안하잖아.”
나강인이 가면 사장이자 대표 셰프인 오규철이 어떻게든 자리를 마련해주지만, 그것도 어쩌다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러기는 미안했다.
- 알겠습니다. 동네 맛집을 검색하겠습니다. 저녁은 소고기로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고기는 좀 그러네. 어쨌든 지금은 챙겨온 파일부터 분석해. 최근 자료는 대충 챙겼으니까, 뭔가 나올 거야.”
- 응원하겠습니다.
“우리 지인이가 반항이 늘었어. 네가 분석해야지 내가 뭘 안다고. 저녁은 여기서 국수로 때우는 수가 있다.”
- 당연히 제가 분석하겠습니다.
“내 손과 눈을 빌려줄 테니까 열심히 해라.”
손의 제어권을 넘겨받은 AI 전지인이 자료를 분석했다. 네 개의 대형 모니터에 각종 정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해커의 타깃이었던 연예기획사 중에 SAH 엔터를 발견했습니다.
“거긴 은하 소속사잖아.”
- 요원님과도 관계가 깊은 회사입니다.
“그래서 해커가 해킹에 성공했어?”
- 아닙니다. 안성환의 보안패치가 해커의 공격보다 빨라 방어에 성공했습니다.
대학생 해커 안성환은 피시방 삼인방 중 한 명이다. 안성환이 예전에 SAH 엔터에 가서 보안패치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날 지하식당에서 나강인과 마주쳤다가 CF 제작사 회의까지 따라갔다.
“은하한테 성환이 밥이라도 사주라고 해야겠다.”
- 프프걸스가 같이 나오면 안성환이 밥을 살 겁니다.
“은하한테 양쪽 다 한꺼번에 사라고 하면 되겠네. 프프걸스 애들이 맛있는 거 좋아하잖아.
나강인은 다른 게 궁금해졌다.
“잠깐. 해커가 혹시 THO 엔터도 노렸냐?”
THO 엔터는 영화 ‘햇살 좋은 날’의 제작사다. 나강인은 그 영화를 계기로 엔터 세계에 발을 들였다.
- 입수한 해킹 시도 기록에 THO 엔터는 없습니다.
“그럼 해킹을 의뢰한 놈이 나를 노린 건 아니네?”
- 요원님은 적의 타깃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해킹에 성공한 곳도 있어?”
- 해커는 일곱 개의 기획사 해킹을 시도해 그중 두 회사를 해킹했습니다.
“특정 연예인을 노린 것도 아니란 뜻이군.”
- 불특정 다수의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해킹으로 보입니다.
나강인은 해커를 처음 상대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전에도 연예계를 노리는 해커를 한 놈 잡았잖아. 혹시 그때 그 해커에게 의뢰한 놈이 이놈도 고용했나?”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놈은 연예계 정보를 모아서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거야?”
- 알 수 없습니다.
“저번에 잡은 해커는 연예인의 스마트폰을 해킹하려고 한 거라고 했잖아.”
- 그 해커는 그렇게 자백했습니다만, 뒤에서 의뢰한 놈을 잡지 못해 사실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이 이번에는 그놈까지 잡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다른 일이 더 급하다.
“우리는 율명바이오에 집중하자. 뭔가 나왔냐?”
모니터에 문서 하나가 나타났다.
- 해커가 율명바이오에서 찾으려던 것을 메모해놓은 문서 파일을 찾았습니다.
나강인이 그 문서를 읽었다.
“역시 XVE 가스의 해독치료제를 훔치려던 거구나. 이 화학무기는 율명바이오에서 만드는 건 아니지?”
- 외국에서 개발했습니다.
“그래도 해독제를 실험하려면 조금은 갖고 있겠지?”
- 요원님이 권동진 사장에게 그 질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갖고 있겠지. 동물 실험은 했다고 했잖아. 그 실험을 하려면 중독은 시켜봐야 하니까.”
나강인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그놈은 왜 해독치료제가 필요하지? 화학무기가 아니라?”
AI 전지인이 모니터에 다른 문서를 띄웠다.
- 해커가 작성한 메모에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해커가 해킹을 의뢰한 사람을 ‘차 이사’라고 지칭했습니다.
“어? 차 이사? 우리가 아는 이름이잖아.”
- 이보라 납치사건을 일으킨 조직은 그 전에는 차 이사의 일을 받아서 했습니다.
“차 이사. 이놈은 누굴까?”
- 경찰이 그 납치 조직을 조사했지만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납치 조직의 두목도 차 이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어쨌든 새로운 단서가 나온 거잖아.
나강인이 박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순기가 반갑게 상황을 설명했다.
- 나 사범님. 우리가 잡은 해커는 담당 부서에 넘겼습니다. 해커 사무실의 증거물도 챙겼습니다.
“거기 있던 걸 전부 경찰서로 가져갔나요?”
- 아뇨. 컴퓨터가 켜진 상태로 있어서, 수사팀이 현장에서 바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한두 건 저지른 놈이 아니더라고요. 담당자들이 좋은 거 챙겨줘서 고맙다고 난리입니다.
“그놈 조사하는 김에 하나 더 부탁 좀 하려고요.”
- 말씀하시죠.
“차 이사라는 놈이 관계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시죠.”
- 차 이사요?
“이보라를 납치한 조직이 전에는 차 이사라는 놈의 하수인 일을 했는데, 그 조직 두목도 차 이사의 얼굴은 본 적이 없다더군요. 연락은 대포폰으로만 하고요. 수법이 이번하고 비슷하잖아요.”
- 그 해커에게 의뢰한 놈하고 비슷하긴 한데요. 원래 이런 청부를 하는 놈들은 얼굴을 안 보여줍니다. 흔한 일입니다.
- 제가 보기엔 관계가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나 사범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차 이사라는 놈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경찰이 압수한 자료를 분석하다 보면 언젠가는 차 이사란 단어가 나오겠지만, 이러면 좀 더 서두르겠지. 그런데 차 이사는 해독치료제가 왜 필요할까?”
답은 간단히 나왔다.
“누군가 화학무기에 중독될 테니까 필요하겠지.”
그런데 그 추측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
“지인아. 쉽게 구할 수 있는데 사람이 먹으면 죽는 약은 많지?”
- 사람은 농약만 잘못 먹어도 죽습니다. 니코틴 농축액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죽습니다. 자동차용 부동액도 독성물질입니다. 그 외에도 사람이 먹으면 죽는 건 많습니다.
“그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수단은 많아. 그런데도 굳이 화학무기가 필요한 이유는?”
나강인이 휴대폰을 꺼내 경찰 요원 박순기에게 전화를 걸며 말했다.
“화학무기는 사람을 많이 죽여야 할 때 필요해.”
박순기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하하. 오늘 전화를 자주 주십니다. 차 이사를 알아보라고 하신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요.
“제가 뭘 좀 알아냈습니다.”
- 네? 아니, 벌써요? 무슨 단서라도 나왔습니까?
“이번 사건의 뒤에, 테러를 계획하는 놈이 있습니다.”
박순기의 목소리가 살짝 빨라졌다.
- 어떤 식의 테러입니까? 강남 자칼 사건처럼 총기를 사용한 테러입니까? 아니면 폭발물….
“화학무기 테러입니다.”
- 헉! 화학무기요? 아니, 이번 사건은 해독치료제를 노리는 거 아녔습니까?
“화학무기를 사용할 계획이 없다면, 해독치료제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 아직은 추측일 뿐입니다만, 느낌이 안 좋습니다.”
- 나 사범님이 그렇게 판단하셨으면…. 제 선에서 어떻게 할 사건이 아니군요. 위에 보고해서 정식으로 대응하겠습니다. 그런데 화학무기 테러의 배후도 차 이사라는 놈입니까?
“모릅니다. 차 이사가 노린 건 어쨌든 화학무기가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놈에게 무슨 정보가 있으니까 움직였을 겁니다.”
- 아. 그렇겠군요.
“서두르시죠. 누가 언제 터트릴지 모르는데.”
- 바로 대응하겠습니다.
***
합동수사본부가 새로 맡은 사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합동수사본부장이 말했다.
“후우. 이제 진짜 끝이겠지요? 이것만 마무리되면 해산할 수 있겠지요?”
합수부 간부가 손을 흔들었다.
“어우. 본부장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시다가 또 뭐가 터질까 봐 무섭습니다.”
“하하. 설마 또 그러겠습….”
경찰 소속 합동수사본부 간부가 회의실로 뛰어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합수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무슨 일입니까?”
“테러 위험 첩보입니다.”
“헉! 언제 어디서요?”
“테러 시간과 장소는 아직 모릅니다. 테러 위험이 있다는 첩보만 들어왔습니다.”
합수부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난 또. 그럼 대테러 부서에서 맡겠지요. 테러는 우리 합수부 일은 아니잖습니까?”
“테러 위험이 있다고 제보한 사람이 나강인입니다.”
다른 간부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나강인이요?”
“예.”
합수부장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니, 이걸 또 나강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