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전시관
나강인이 커피와 햄버거를 먹으며 모니터를 보았다. 네 대의 모니터에 어제 검색하던 자료들이 올라와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까 머리가 좀 맑아졌어. 기준을 좀 더 정리하자. 적의 공격 목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일 거야. 한두 명을 죽이는 게 목적이라면 화학무기가 아니라 칼이나 총을 쓸 테니까.”
- 타당한 추론입니다.
그는 어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칼이 페넬로페에서 스칼렛을 납치하려 했던 건, 결국 돈 때문이었어. 자칼에게 신념이 있던 것도 아니고, 미친놈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어.”
- 자칼은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입니다.
“그런데 어제 제시카 씨가 자칼 친구 쿠거가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단 말이야. 자칼과 같이 일을 많이 했다는 건, 쿠거도 돈을 목적으로 일한다는 거겠지.”
- 국제용병 쿠거. 돈만 충분히 준다면 뭐든 다 하는 용병이자 테러리스트입니다.
“그놈이 하필 이 시기에 한국에 있단 말이야. 만약 그놈이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다면?”
- 쿠거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화학무기 사용을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그놈은 지금 어디 있을까?”
- 인터넷에서는 쿠거의 얼굴 사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강인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쿠거의 손에 XVE 가스가 있다면, 그놈은 그걸 어디에 쓸까? 단순히 사람만 많은 곳을 노리진 않을 거야. 돈이 되는지가 중요하겠지.”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지시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서 돈이 되는 곳을 찾아봐.”
AI 전지인이 인터넷을 검색했다.
- 국내에는 고가의 미술품을 보유한 미술관이 여러 곳 있습니다.
“미술관이 타깃일 수도 있어. 이건 오른쪽 화면에 옮겨놔.”
-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보관되어 있습니다.
“거길 털 수만 있으면 훔친 물건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겠네. 이것도 옮겨놔.”
AI 전지인이 인터넷을 검색해 몇 곳을 더 찾아냈다.
나강인이 손을 키보드에서 떼며 말했다.
“잠깐.”
모니터에 종로에서 열리는 보석 전시회 정보가 떠 있었다.
“보석 전시회라….”
그는 학교 행사장에서 노트북을 훔친 도둑놈의 비밀 창고에서 보석을 본 게 생각났다.
“그 보석과 이 전시회의 보석이 직접적인 상관은 없겠지. 그러데 그 도둑놈은 보석을 따로 보관했단 말이야.”
왜 그랬는지는 안다.
“보석은 부피가 작아서 작은 공간에 숨길 수 있고, 필요할 때는 돈으로 바꾸기도 쉬워.”
그가 다른 모니터에 옮겨놓은 자료를 확인했다.
“미술품을 팔기가 쉬울까? 팔 수야 있지만, 화학무기까지 써서 훔친 미술품을 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 있긴 있겠지만, 구매자를 찾기가 쉽진 않을 겁니다.
국보급 문화재도 팔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문화재를 파는 것보다 보석을 파는 게 훨씬 간단해. 보석은 출처를 숨기기도 쉬워.”
쿠거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용병이다.
“보석을 숨겨서 외국으로 빠져나가기도 쉽지. 이거 조건이 딱 맞지?”
AI 전지인도 나강인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 현재까지 검색한 장소 중에는 보석 전시관이 적의 공격 목표일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인터넷으로 조사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저 전시관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자. 이거 날짜가 언제야?”
“어제부터 내일까지 사흘 동안 종로 전시관에서 열립니다.”
“그럼 당장 가자.”
토요일 그 시간에 종로로 가려면 차를 모는 것보다 지하철이 빠르다.
나강인은 차를 동네에 세워 놓고 지하철을 타고 종로로 이동했다.
보석 전시회는 종로 인사동 근처의 전시관에서 열렸다. 그곳에서는 평소에도 그림이나 다른 예술품의 전시회가 열리곤 했다.
나강인이 입구에서 말했다.
“보석 전시회도 입장료를 받는구나.”
- 만 원입니다.
나강인이 돈을 내고 티켓을 받은 후에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보석 전시관은 입구 근처부터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보석으로 장식한 새의 모형이었다.
“좋은 거 많네.”
- 저 보석들의 가치를 모르시잖습니까?
“넌 아냐?”
- 모릅니다. 보석은 정보 수집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거봐.”
-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있습니다.
“뭔데?”
AI 전지인이 조금 떨어진 곳에 전시된 목걸이 주변에 홀로그램 동그라미를 띄웠다.
- 저 목걸이에서 특별함이 느껴집니다.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몸속에 있다. AI 전지인이 저 목걸이를 목에 걸려면, 나강인의 목에 걸어야 한다.
“완전 여성용 반짝반짝 목걸이를 내가 걸고 다니면 많이 이상하겠지?”
-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건 딱 봐도 되게 비싸 보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신은하가 지나가다가 그 목걸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머. 이거 딱 내 취향이다.”
스칼렛도 말했다.
“내 취향인데? 얼마야 이거. 확 사버릴까?”
친구이자 비서인 제시카가 옆으로 다가와 말렸다.
“사지 마라. 분명히 말했다. 사지 마라.”
“왜? 나랑 어울리잖아.”
제시카가 작게 속삭였다.
“너 지금 그래서 사려는 게 아니잖아. 신은하 씨를 견제하려는 거잖아.”
“어울리는 거 맞거든? 진짜 마음에 들거든?”
“내가 너를 모르냐?”
고등학생 이연지가 신은하와 스칼렛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럼 제가 살까요?”
신은하가 물었다.
“이거 얼만지 알고 하는 소리야?”
“지금 말고요. 일단 연예계에 데뷔한 후에, 첫 출연작부터 주연을 맡아서 천만 배우 딱 찍고, 그 인기로 CF 좀 찍으면 살 수 있잖아요.”
“너 그러려면 연예계 탑 찍어야 하는 건 알지?”
“저 전교 1등인데요?”
신은하가 코웃음 쳤다.
“너 같은 배우 지망생을 만 명쯤 모으고 그중에서 탑을 찍으면, 그게 네가 말한 천만 배우야. 그 치열한 경쟁을 어디서 겨우 몇백 명짜리 전교생하고 비교하니?”
이연지가 손뼉을 쳤다.
“와아! 은하 언니는 그걸 해낸 거예요?”
“흐흐. 당연히….”
‘햇살 좋은 날’ 주연배우 오세미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해냈지. 은하가 아니라.”
이연지는 깜짝 놀랐다.
“앗! 오세미다!”
“오세미 언니라고 해야지?”
“네!”
오세미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네가 말한 천만 영화의 주연배우가 바로 나란다. 호호호.”
“히히. 알죠. 그런데 오세미 언니도 보석 보러 오셨어요?”
“나랑 김유찬은 게스트. 그냥 와주기만 해도 빛이 난다나? 오호호호.”
“와. 나 어제도 그런 말 들었는데.”
김유찬도 다가왔다.
“이야아. 여기 아는 사람이 많…. 어?”
김유찬은 스칼렛을 보고 살짝 긴장했다.
“혹시 바다에서 만난 그….”
낙귀 해적단이 스칼렛을 노렸을 때는 김유찬도 그 배에 있었다.
스칼렛이 인사했다.
“어머. 그때 본 영화배우네요? 반가워요.”
“하, 하하. 전 반갑다기보다….”
‘사건에 잘 휘말리는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식은땀이 나네.’
김유찬이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나강인 씨가 없으니까 괜찮겠지?’
이보라도 보석 전시회를 구경하러 왔다. 그녀가 나강인을 발견하고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다.
“어머! 강인 오빠! 여기 올 거면 나랑 같이 오지 그랬어요.”
신은하와 일행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보라가 나강인의 팔을 슬쩍 잡고 있었다.
신은하의 눈꼬리가 당장 올라갔다.
“저것이!”
그녀가 씩씩대며 나강인에게 걸어갔다.
“강인 오빠. 여기 올 거였으면 나랑 같이 왔어야지!”
나강인이 이보라에게 물었다.
“너는 여기 왜 온 거냐?”
“보석 구경하러요. 가격 적당하고 예쁜 거 있으면 하나 살 수도 있고요.”
그가 이번에는 신은하에게 물었다.
“너는?”
“보석 구경하러 왔지! 그러다 예쁜 거 있으면 하나 사려고!”
오세미가 뒤쪽에서 그들을 보며 툴툴댔다.
“보라하고 은하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면서 하는 말은 왜 저렇게 비슷한지 진짜 모르겠다.”
스칼렛도 같이 툴툴댔다.
“강인 씨는 이런 곳에 안 올 거라더니 잘만 오네. 은하 씨가 어제 날 견제한 건가?”
제시카가 말했다.
“너도 저 목걸이 앞에서 은하 씨를 견제했잖아.”
“표가 났어?”
“응. 많이.”
김유찬이 살짝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신은하에 저 외국 여자분에, 이보라에, 거기다 나강인 씨까지.”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니겠지. 설마 또 무슨 일이 생기겠어? 여기는 외곽도 아니고 종로 한복판인데 말이야.”
***
국제용병 쿠거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시큐리티 시스템은?”
- 준비 끝났습니다. 신호하시면 바로 먹통으로 만들겠습니다.
“주변 상황은?”
전시관 밖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부하가 보고했다.
- 조용합니다. 경찰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부는?”
전시관에 먼저 잠입한 부하들이 한 명씩 보고했다.
- 경비원은 있지만 무장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건은?”
- 들여오는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세팅은?”
- 끝났습니다.
쿠거가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변장은 제대로 되어 있었다.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준비 다 끝났단다.”
쿠거가 차에서 내렸다.
조수석에서 내린 부하는 왼손에 007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뒷좌석에서도 부하 두 명이 내렸다. 그중 한 명도 서류가방을 들었다.
쿠거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보석 전시관으로 휘적휘적 걸어가며 말했다.
“저기가 우리 보물섬이다. 가자.”
“예!”
***
신은하와 이보라가 나강인의 옆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요원님은 적의 공격 예상 지점을 조사하러 이곳에 오셨습니다. 신은하나 이보라는 조사에 방해만 됩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럼 다들 보석 구경 많이 하시죠. 난 혼자서 보는 걸 좋아해서.”
신은하는 나강인이 다양한 제작 기술을 갖고 있다는 걸 안다.
“강인 오빠는 보석을 어디에 쓰려고?”
‘목걸이라도 만들려고 그러나? 아니면 혹시 반지? 어? 반지!’
“그러니까….”
- 특정 보석은 무기의 부품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오랜 세월 땅에 묻혀 있던 보석에 신성한 힘을 담아서 무기의 부품으로 사용하는 건가?”
- 당연히 자연산이 아니라 합성 보석을 사용합니다. 지구연합군은 자연산 보석을 쓸 정도로 예산이 썩어나진 않습니다.
“혹시나 했다. 그런데 너 조금 전에는 보석의 가치를 구분할 줄 모른다며?
- 예술적 기준으로 가치를 구분하긴 어렵습니다만, 무기 재료로 적당한 보석을 구분할 수는 있습니다.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말했다.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이연지가 두 사람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녀가 옆쪽에 전시된 비녀처럼 생긴 뒤꽂이를 가리켰다. 뒤꽂이 끝에는 금속으로 만든 나비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저씨. 저거 어때요? 보석이 반짝반짝 빛나서 되게 이쁘다. 가격도 엄청 싸요.”
- 인조 사파이어입니다.
“그건 자연산 보석이 아니라 인조 사파이어를 나비에 장식한 거다. 그래서 가격이 저렴한 거야.
“어때요. 예쁘면 됐죠. 대신에 싸잖아요.”
“저건 머리 장식인데 여고생이 저걸 어디에 쓰게?”
“프로필 사진 찍을 때?”
“연지야. 넌 촬영 현장에 가서 눈물 좀 흘려봐야, 그냥 잘하는 공부나 계속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겠다.”
이연지가 활짝 웃었다.
“앗! 촬영 현장이요? 저 데뷔하나요?”
“야. 그 이야기가 아니라….”
신은하가 말했다.
“연지야. 드라마에 친구3 자리가 비어 있는데 해볼래?”
“네? 친구3이요?”
“어. 여주랑 경쟁자랑 말싸움을 하는데, 경쟁자 뒤에 병풍으로 서 있는 친구 세 명. 그중에서 제일 뒤에 서 있는 친구3.얼굴은 잠깐 나오지만 대사는 없어.”
“할래요!”
“내가 PD님한테 이야기할게.”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연지한테 재능이 보여서 꽂아주는 거야?”
신은하가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아니. 연기에 투자한 게 하나도 없이 현장에 들어갔다가, 온종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도 좀 먹으면 환상이 깨져서 바로 접고 공부할까 싶어서.”
“딱 좋네. 연기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니까 접는다고 해서 아까울 것도 없고.”
“그치.”
나강인이 말했다.
“자.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나는 혼자 둘러보는 게 좋아서 이만. 다들 관람 잘하시죠.”
신은하가 얼른 물었다.
“점심은 같이 먹을 거지?”
“점심때 전화해.”
나강인이 전시관 안쪽으로 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기왕 모인 김에 같이 움직였다.
***
국제용병 쿠거가 전시관 정문을 성큼성큼 걸어서 통과했다. 그의 부하 세 명이 뒤를 따라갔다. 그중 두 명은 검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쿠거가 입구 쪽에 전시된 보석 장식품들을 보며 실실 웃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하냐?”
어제 이 전시관을 미리 정찰한 부하가 대답했다.
“입구 쪽에는 인조 보석이나 저렴한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이 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냐고.”
“이건 한국 돈으로 32만 원입니다.”
“운반비도 안 나오겠군.”
“우리 타깃은 안쪽 특별 전시실에 있습니다.”
쿠거가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거기부터 가야지.”
휘적휘적 걸어가던 그의 눈에 신은하 일행이 보였다. 일행이 모두 미인이라서 쿠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했다.
쿠거가 멈칫했다. 아는 얼굴이 보였다.
“어? 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