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XVE 가스
전시관의 모든 조명이 갑자기 꺼졌다.
나강인이 재빨리 지시했다.
“이상 현상 보고해.”
- 지하에서 이상 소음을 감지했습니다. 기계실의 전력계통 장비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잠시 후에 실내 곳곳에 설치된 충전식 비상등에 불이 들어왔다. 단순히 비상구를 알려주는 등이라 불빛이 약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야간 시야 모드를 활성화합니다.
나강인의 야간 시력이 좋아진 건 아니다. 적외선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AI 전지인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 요원님이 눈으로 본 것을 분석해 식별 가능한 형태의 영상으로 만들어 AR 렌즈에 투영했습니다.
AR 렌즈는 사물을 직접 보는 장비가 아니다. AI 전지인이 합성한 영상을 투영해주는 장비다. AR 렌즈 덕분에 나강인은 평소에도 홀로그램 영상을 볼 수 있다.
반투명한 AR 렌즈의 영상과 실제 모습이 겹쳐 보였다.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해도 내부의 사물을 확실히 구분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야간 시야 모드에는 단점이 있다.
- 요원님이 실제로 보는 사물과 AR 렌즈의 증강 영상 사이에 미세한 시차나 오차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감각 이상을 주의하십시오.
“알았다. 일단 사람들부터 대피를….”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AI 전지인이 급히 보고했다.
- 정문 출입구의 셔터가 내려가고 있습니다!
나강인이 입구 쪽을 보았다. 벽에 가로막혀 정문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AI 전지인이 증폭시켜주는 소리는 들렸다.
“전기가 나갔는데 저건 왜 움직여?”
- 전력 공급이 끊기면 전시관 출입을 강제로 차단하는 장치로 추정됩니다. 자체 배터리로 동작할 겁니다.
“다른 보안은 약한데 저건 또 제대로네. 정문을 도로 열려면?”
- 강제로 차단된 문을 외부인이 열긴 어려울 겁니다. 관리자를 찾아야 합니다.
나강인이 상황을 재빨리 분석했다.
“관리자를 찾아서 문을 열고, 은하랑 기타 등등도 찾아서 내보내고, 사람들도 대피시키자고?”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평소라면 시간이 좀 걸려도 된다. 그런데 그는 지금 화학무기 테러가 의심되어서 이곳에 왔다.
“내가 은하를 대피시키는 게 빠를까? XVE 가스가 터지는 게 빠를까?”
- XVE 가스가 터지면 신은하는 물론이고 이 전시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합니다. XVE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맞아. 원인부터 제거해야 해. 화학무기가 이미 이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면, 어디에 있을까?”
옥상은 이미 확인했다. 2층은 텅 비어 있다.
그런데 지하층에서는 방금 전력 공급 장비가 파손됐다.
“지하에 있겠지.”
***
스칼렛의 경호원 두 명은 전시관 밖 주차장 차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석 전시관의 정문 셔터가 내려가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서둘러 차에서 내려 보석 전시관으로 가면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 명은 스칼렛에게 연락하기 위해서, 다른 한 명은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서둘러 걸어가다가 앞쪽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툭 부딪혔다.
부딪힌 사람들이 갑자기 전기충격기를 그들의 몸에 대며 버튼을 꾹 눌렀다. 신경계를 교란하는 전기가 경호원들을 덮쳤다.
“끄, 끄으….”
불시에 전기충격기에 당한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축 늘어졌다.
그들과 부딪힌 두 사람이 전기충격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중 한 명이 손목 마이크를 입가에 대며 보고했다.
“오메가테크의 경호원들을 처리했습니다.”
-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치워라.
“이놈들이 타고 온 차에 도로 태우겠습니다.”
***
특별 전시실의 경비원도 쿠거의 부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국제용병 쿠거가 지시했다.
“장비 챙겨라.”
그의 부하가 007가방이라고 불리는 서류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소형 권총 네 자루가 들어있었다. 쿠거와 부하 세 명이 권총을 한 자루씩 받아 소형 소음기를 앞에 장착했다.
쿠거가 다시 지시했다.
“보석 챙겨. 쓸데없이 짐 늘리지 말고 돈 되는 놈만 골라서.”
다른 부하가 말했다.
“비싼 놈들로 체크해뒀습니다.”
그 가방에는 공구도 들어있었다.
쿠거가 소형 손전등으로 다이아몬드 원석이 있는 중앙 전시창을 가리켰다.
“이것부터. 물건 상하지 않게 잘 뜯어라.”
부하들이 공구를 사용해 유리와 유리가 연결된 부분을 분리했다. 그렇게 유리 한 짝을 떼어내자마자 쿠거가 손수건을 꺼내 원석을 감쌌다.
경보기는 울리지 않았다. 경보시스템 전체가 침묵했다.
쿠거가 다이아몬스 원석을 손에 들고 웃었다.
“이거 하나에 천만 달러다. 흐흐.”
그가 그 보석을 가방에 담은 후에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뭐해?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빨리빨리 가방을 가득 채워야 할 거 아냐!”
“예!”
***
신은하는 다른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보석과 목걸이, 반지, 공예품 등을 구경했다.
그녀가 보석이 장식된 가방을 구경하고 있을 때 전시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잠시 후에 비상등이 들어왔지만 전시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신은하가 말했다.
“서울에서 정전이 일어나네? 이런 일은 흔치 않은데.”
흔치 않다는 말에 스칼렛의 비서 제시카가 휴대폰을 꺼냈다.
“느낌이 안 좋아. 경호원들을 불러야겠….”
제시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통화권 이탈?”
신은하도 얼른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내 것도 통화권 이탈이야.”
다른 사람들도 휴대폰을 꺼냈다. 다들 마찬가지 상태였다.
신은하는 긴장했다. 그녀는 자칼 사건 때도 적의 공격과 동시에 휴대폰 통화가 차단됐다는 걸 안다.
“아무래도 뭔가 위험한 일이 터진 것 같아.”
‘햇살 좋은 날’ 주연배우 오세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일대가 정전되면서 휴대폰 기지국도 멈춘 거겠지. 괜히 오버하지 마.”
김유찬이 신은하의 편을 들었다.
“오버가 아니야. 나도 느낌이 안 좋아.”
신은하가 제안했다.
“무기부터 챙겨야 해요.”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무기를 가진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이보라가 걱정했다.
“설마 우리 망한 거 아니지?”
오세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침을 꼴깍 삼킨 후에 제안했다.
“만약 이곳에 강도가 든 거라면, 우리는 여기 그냥 숨어있는 게 낫지 않아? 돌아다니다 강도와 마주치면 위험하잖아.”
***
나강인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계단에 설치된 경보장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전시관 전체 경보장치가 먹통이 됐겠지. 그럼 놈들의 눈도 가려졌겠네.”
모든 경보장치가 꺼졌으면 적도 이 건물의 보안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다.
그는 지하층으로 내려간 후에 보안시스템을 관리하는 곳부터 찾았다.
오래 찾을 필요도 없었다. 베이지색으로 칠해진 철문이 열리면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적과 아군의 구분은 간단했다. 열린 문 안쪽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직원이 보였다.
나강인이 지하실을 달렸다. 적과의 거리는 이십 미터였다. 적은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휙 돌렸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나강인은 이미 점프한 후였다. 그는 공중에서 발을 내질렀다.
적의 몸통이 반으로 푹 접혔다.
“케엑!”
적은 방금 걸어 나온 보안실 안으로 도로 날아가 처박혔다. 나강인도 앞으로 더 날아가 보안실 안에 착지했다.
나강인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직원의 목에 손을 댔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기절했습니다. 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방금 발차기로 제압한 놈은 구석에 구겨져 있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나강인이 보안실 내부를 확인했다. 장비는 이미 다 망가져 있었다.
그는 전에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수법이 보면 볼수록 자칼하고 비슷하다. 그럼 이놈들에게 총도 있겠는데?”
- 제압한 적의 몸에서는 총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확인이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구석에 구겨진 놈의 몸을 더듬었다. 총은커녕 칼도 없었다.
“없네? 총이 모자랐나?”
나강인이 밖으로 나왔다.
“기계실은?”
AI 전지인이 기계실의 위치를 표시했다. 바로 옆에 있었다.
나강인이 기계실 문을 열었다. 내부 장비 일부가 합선으로 녹아 있었다. 화재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매캐한 연기는 남아있었다.
“전기계통을 좀 아는 놈 짓이겠지. 그런데 저놈 혼자 이걸 다 한 걸까?”
AI 전지인이 갑자기 보고했다.
- 소음 감지! 인간이 내는 소음입니다.
“어디서!”
허공에 소음 발생 위치가 표시되었다. 그가 있는 곳과 정 반대 방향이었다.
나강인이 기계실을 뛰어나와 그쪽으로 뛰었다.
기계실 앞에는 시설물이 많아 달리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바로 앞을 가로막은 시설물은 발로 밀어 차며 방향을 틀었다. 그쪽에는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그 벽을 다시 발로 차며 앞으로 점프했다.
그는 순식간이 기계실 앞을 벗어났다. 이제 달릴 수 있는 공간이 조금 나왔다. 그는 그 공간을 순식간이 주파했다.
이번에는 코너가 나왔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는 자세를 바짝 낮추고 바닥을 미끄러지며 코너를 돌았다.
저 멀리에 두 사람이 장비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옆에는 가스통이 있었다.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보고했다.
- 적이 환기구와 연결된 장비에 가스통을 연결했습니다!
“XVE 가스냐?”
- 빈 가스통에 XVE 가스를 채웠을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이미 가스통 연결은 끝나 있었다. 그중 한 놈이 나강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놈은 즉시 오른손으로 가스 밸브를 잡으려 했다.
AI 전지인이 고속 음성으로 경고했다.
- 적이 가스를 살포하려 합니다! 저지하십시오!
홀로그램 경고표시가 주르륵 떴다. 밸브를 돌리기 전에 막으려면 뭔가를 던져서 저지해야 한다.
그가 지금 가진 것 중에 던져서 타격을 줄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다.
나강인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어딜 노리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막아야 하는 건 밸브를 잡는 적의 손이다.
나강인이 스마트폰을 힘껏 던졌다. AI 전지인이 손과 팔의 움직임을 조금 조정해 명중률을 높였다.
얇고 단단한 스마트폰이 고속으로 날아가 밸브를 잡으려던 적의 손을 정확히 타격했다. 적의 오른손이 부러지면서 팔도 옆으로 크게 젖혀졌다.
“으아악!”
적이 비명을 질렀다.
옆에 있던 다른 놈이 나강인을 향해 돌아서며 두 주먹을 앞으로 들었다. 권투 자세였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적을 제거하고 가스통을 장악하십시오.
나강인이 돌진했다. 적은 그 자리에 단단히 버티고 서서 달려드는 나강인의 얼굴을 향해 라이트훅을 날렸다.
나강인이 상체를 슬쩍 비틀어 적의 주먹을 피하며 왼손으로 받아쳤다. 카운터 펀치가 적의 턱에 꽂혔다.
“켁!”
적은 짧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무너졌다.
나강인은 적을 던져버릴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렇다고 어깨로 밀어버리면 가스통과 충돌한다.
그는 무너지는 적의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지나갔다.
가스통 앞에 서 있던 놈이 이번에는 왼손을 밸브 쪽으로 뻗었다. 밸브와 손이 닿았다.
나강인이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며 적의 몸통에 왼발 돌려차기를 먹였다. 사정 봐주면서 찰 여유는 없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갔다.
적의 몸이 허리를 중심으로 접혔다. 적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나강인이 재빨리 밸브를 손으로 잡아 잠갔다. 그러면서 급히 물었다.
“유출됐냐?”
AI 전지인이 조금 여유가 생긴 목소리로 보고했다.
- 요원님이 잠그실 때 밸브가 거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XVE 가스가 유출되지 않았거나, 유출되었어도 극소량이었을 겁니다.
“극소량이 유출되면 피해는?”
- 극소량의 가스가 공기 중으로 확산되면 실질적인 피해는 없습니다.
나강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막았다.”
- 적은 요원님을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가스를 살포하려 했습니다. 요격이 몇 초만 늦었어도 위험했습니다.
“안 늦었잖아. 그러면 됐지.”
- 그건 그렇습니다.
“수고했다.”
- 잘하셨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XVE 가스를 확보했으니까, 제일 위험한 사태는 막은 거겠지?”
***
쿠거 일당은 미리 찍어둔 보석을 다 챙겼다. 부하가 보석이 든 가방을 잠갔다.
다른 부하가 물었다.
“보스. 다음 단계로 넘어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