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중독
국제용병 쿠거가 지시했다.
“단계별 상황 점검해.”
그의 부하가 보고했다.
“감마 팀이 지하에서 XVE 가스를 살포하면, 환풍구를 통해 건물 내부는 물론이고 이 일대까지 가스가 퍼질 겁니다.”
화학무기가 살포된 곳은 경찰이 접근하지 못한다.
“건물 내부에 있는 사람 전부와 이 건물 근처에 있는 사람 상당수가 가스에 당할 겁니다.”
도심이 대혼란에 빠지면 긴급 출동한 경찰만으로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다.
“화학무기 테러 사건이 터진 것으로 위장한 후에, 이곳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가면 끝입니다.”
다이아몬드는 불에 탄다. 그들이 훔친 보석 중에서 제일 가치가 큰 건 다이아몬드 원석이다. 이곳에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 그 원석이 도난당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지금 이 건물에는 관람객과 직원이 있다. 건물 밖은 서울 도심이라서 XVE 가스가 이 근처에만 퍼져도 피해자가 최소한 몇백 명은 나온다.
쿠거도 그걸 안다. 알면서 이번 일을 준비했다.
“테러가 터졌는데 죽는 사람이 없으면 수상해 보이잖아. 가스를 좀 뿌려줘야 완벽해지지.”
“역시 보스이십니다. 계획이 완벽합니다. 차 이사 따위는 비교도 안 됩니다.”
“차 이사는 내 상대는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쿠거가 입맛을 다셨다.
“일이 술술 풀리니까 욕심이 생기지 않냐?”
쿠거는 욕심이 많다. 게다가 이런 규모의 일은 다시 저지르기 어렵다. 같은 수법을 반복해서 쓰면 금방 꼬리가 잡힌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 한탕 제대로 하고 싶었다.
“바깥도 조용하고, 아직 작업할 시간이 좀 있지?”
“흐흐. 그렇죠. 바로 옆 전시실에도 좋은 보석이 많던데요. 여기 불을 지르면 그것들도 탈 텐데 아깝잖습니까?”
“보석을 사랑하는 우리가 그러면 안 되지. 가방에 공간 남았지? 비싼 거로 좀 더 챙기자.”
다른 부하가 말했다.
“보스. 애들이 지하실에서 가스를 연결해놓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보석을 챙길 동안 몇 분 더 대기하라고 해야지.”
쿠거가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감마 팀. 대기해라. 물건 좀 더 챙기게.”
곧바로 돌아와야 하는 대답이 없었다.
“음?”
쿠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어이. 감마 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쿠거의 표정이 굳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예? 어떤….”
쿠거는 스칼렛 켈리의 옆에 있던 김유찬을 떠올렸다. 그는 김유찬이 한국 정부에서 그녀에게 붙여준 1급 경호 요원이라고 착각했다.
“아무래도 오메가테크 사장의 옆에 있던 그놈이 지하를 장악한 것 같다.”
“예? 지하에는 셋이나 있었는데….”
“그게 아니면 무전에 대답 안 할 리가 없잖아.”
그들의 무전기는 개조한 것이라서 다른 장비와는 통신할 수 없다. 그래서 무전기가 남의 손에 넘어가도 외부에 경고하진 못한다.
“오늘 일이 우리 짓인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해.”
“어떻게 할까요.”
“다 제거해야지. 어차피 그러려고 했잖아.”
그가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비상용 XVE 가스 꺼내.”
그의 부하 중 두 명이 서류가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가진 가방에는 지금 보석이 잔뜩 들어있다.
다른 부하가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방독면 네 개와 작은 은색 원통이 들어있었다. 그것 외에도 물건이 좀 더 있었다.
네 사람이 방독면을 하나씩 꺼내 얼굴에 썼다. 얼굴 전체를 덮는 대형 방독면이 아니라 코와 입, 그리고 눈만 가리는 초소형 방독면이었다.
쿠거가 소형 텀블러 크기의 은색 원통을 들었다. 지하에 있는 가스통은 허벅지까지 올 정도로 컸는데 이건 무척 작고 가늘었다.
부하가 가방을 다시 닫고 잠금장치를 잠갔다.
쿠거가 원통에 달린 레버를 살짝 열었다. XVE 가스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쿠거가 원통을 부하에게 넘기고 권총을 제대로 쥐었다. 가느다란 원통에서는 가스가 계속 나왔다.
“가스가 깔리면 이 전장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필드가 된다. 가자!”
***
나강인이 지하층에서 1층으로 올라왔다.
AI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XVE 가스를 감지했습니다.
“젠장. 가스가 더 있었어?”
- 아직 농도가 낮습니다. 대량 살포는 아닙니다.
“마시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잖아. 지하층에 있는 놈들은 가스가 퍼진 후에 어쩔 셈이었지?”
- XVE 가스는 방독면으로 차단할 수 있습니다.
“방독면을 지하 어딘가에 숨겨놨구나.”
하지만 그걸 찾으러 갈 틈이 없다. 1층에는 숨이 가빠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 가스 농도가 높지 않습니다. 낮은 농도의 가스를 짧은 시간만 흡입했으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오래 마시면 못 버틴다는 소리잖아.”
나강인이 사람들에게 외쳤다.
“독가스다!”
놀란 사람들이 팔로 입과 코를 가렸다. 동그래진 눈으로 나강인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대피시키자.”
건물 정문은 이미 차단되어 있다. 옥상이 안전하다는 건 조금 전에 확인했다.
“옥상으로 대피하면?”
- 최선의 선택입니다. 낮은 농도의 XVE 가스가 개방된 곳에서 희석되면 독성이 더 약해집니다.
나강인이 외쳤다.
“독가스를 피하려면 위로 올라가요! 옥상으로 대피해!”
전시관에 있던 사람들도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강인의 말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직원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계단으로 걸어갔다. 다들 안색이 안 좋지만 걸어갈 힘은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신은하 일행이 없었다.
그는 신은하나 다른 배우들이 어디 있을지 추측해보았다.
“비싼 보석은 어디 있지?”
- 전시관 안쪽에서 고가의 보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거기구나.”
나강인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안쪽으로 갈수록 XVE 가스의 농도가 높아집니다.
“어? 잠깐. 난 이 가스를 마셔도 되냐? 지하층에 가서 방독면 가져와야 하는 거 아냐?”
- XVE 가스는 2082년 기준으로 다양한 해독제가 개발되었습니다.
“지금은 없잖아.”
- 요원님의 강화된 신체는 강력한 해독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독 방법이 이미 잘 알려진 XVE 가스에는 중독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미리 말해라.”
***
국제용병 쿠거는 신은하 일행을 일찌감치 찾아냈다.
하지만 함부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그중에 김유찬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놈이 자칼을 잡은 그 초특급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니까 지하층에서 벌써 돌아왔겠지.”
“어떻게 하지요?”
쿠거가 실실 웃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특수요원이라도 숨은 쉬어야 살아. 방독면 없이 XVE 가스를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쿠거는 이미 초소형 가스통의 가스를 절반쯤 살포했다. 살포 방향은 신은하 일행이 있는 전시실 쪽이었다. 그래서 그쪽의 가스 농도가 다른 곳보다 높았다.
“XVE 가스에 중독되면 1분이면 전투력을 상실하니까, 숨을 참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5분쯤 기다렸다가 들어가서 처리하자.”
***
신은하 일행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XVE 가스는 신경계를 교란해 근육이 힘을 잃게 만드는 무기다. 중독 시간이 길어져 숨 쉬는 데 쓰는 근육까지 힘을 잃으면 보통 사람은 죽는다.
그들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경계가 교란되면서 통증을 느끼는 감각까지 무뎌져서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숨을 쉬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는 건 다들 알았다.
신은하가 말했다.
“저놈들이 무슨 가스 같은 걸 뿌렸나 봐.”
쿠거 일당이 경계하는 김유찬도 입을 열었다.
“살려줘.”
***
쿠거가 시계를 보았다.
“3분. 이제 2분만 더 기다렸다가….”
갑자기 쿠거가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렸다.
신은하 일행이 있는 전시실은 두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쿠거 일당은 그중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 갑자기 나강인이 나타났다.
쿠거가 즉시 권총을 들었다.
“저 새끼는 뭐야!”
나강인은 방독면이 없었다. 그게 쿠거를 조금 방심하게 했다.
“저놈도 움직일 기운이 없겠….”
나강인이 전시실을 향해 뛰었다. 쿠거가 뒤늦게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가 아음속 총탄의 총성을 줄였다.
날아간 총탄이 나강인의 뒤쪽 벽을 때렸다. 쿠거가 급히 방아쇠를 더 당겼지만 다음 총탄도 벽을 때렸다.
나강인이 순식간에 전시실로 뛰어들었다.
쿠거의 부하가 다급히 물었다.
“보스. 저 새끼 뭡니까?”
“지하실에서 감마 팀을 잡은 놈이겠지. 한 놈이 더 있었을 줄이야.”
“왜 저놈은 중독당하지 않는 겁니까? 방독면도 없는데요.”
“숨을 참고 있겠지. 이 가스는 흡입해야 효과가 있으니까.”
“숨을 참으면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도대체 어떻게요?”
쿠거가 화를 냈다.
“이 새끼가!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아, 아닙니다. 전 그냥 이해가 가지 않아서….”
쿠거가 전시실 입구를 권총으로 겨누었다.
“대단하긴 한데, 숨을 참고 뛰어다녔으니까 슬슬 몸에 한계가 올 거다. 저놈도 곧 잡을 수 있어.”
***
나강인이 전시실에서 신은하를 발견했다.
“찾았다.”
신은하가 손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여기 가스가…. 위험해.”
김유찬은 손을 억지로라도 들 힘이 있었다. 김유찬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살려줘.”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모두 중독됐습니다.
“젠장. 대형병원 후송은?”
AI 전지인은 이 가스에 중독돼도 10분 안에 대형병원에 보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 제한시간 안에 후송해서 적절한 치료를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방법을 찾아.”
- 해독제가 유일한 방법입니다. XVE 가스의 해독제는 효과가 즉시 나타납니다.
나강인의 손에는 해독제가 없다. 율명바이오 연구소에 있는 걸 지금 가져올 수도 없다.
나강인이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AI 전지인이 홀로그램으로 벽 뒤에 있는 적의 위치를 표시했다.
“저놈들에게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래도 확인해야 한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다.
“몇 분 남았냐?”
- 5분 후에는 생명이 위험합니다. 7분 후에는 이연지 외에는 모두 사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연지만 서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연지가 이상합니다. 이 농도의 XVE 가스를 마신 사람은 저렇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서 있잖아. 연지는 숨을 참고 가스를 덜 마셨나?”
- 잠수부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숨을 참을 수 없습니다.
“특이체질일까?”
AI 전지인에게 병을 진단하거나 체질을 판단하는 스킬은 없다.
- 알 수 없습니다.
이연지는 이 전시관 내부 매장에서 비녀 비슷하게 생긴 뒤꽂이를 하나 샀다.
뒤꽂이의 뒤에는 인조 사파이어로 장식된 금속 나비가 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 뒤꽂이를 머리카락에 꽂으면 머리에 나비가 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그 뒤꽂이로 머리카락을 묶고 돌아다녔다.
이연지가 머리에서 뒤꽂이를 뽑았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뒤꽂이의 앞부분은 조금 뾰족했다. 그녀가 그걸 무기 대신 쥐고 말했다.
“나도 싸울 수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당장 주저앉고 싶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넌 수술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움직이면 독가스가 몸에 더 빨리 퍼진다. 활동량을 줄여야 하니까 여기 그냥 있어.”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적이 해독제를 가졌는지 아직은 모른다. 그래도 희망은 그것밖에 없다.
“해킹하는 것과 약을 조금 빼돌리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직원을 매수해서 완제품을 빼돌리는 것은 해킹보다는 쉽다. 제작 레시피를 구할 필요도 없이 치료제만 한 상자 정도 빼돌리면 된다.
“저놈들이 XVE 가스도 손에 넣었는데, 해독제도 있을 수 있잖아. 아니, 분명히 있을 거다. 자기들이 실수로 중독될 경우를 대비해야 하니까.”
나강인은 거기 희망을 걸었다.
그는 이연지의 손을 펴고 뒤꽂이를 가져갔다.
“이건 내가 좀 쓰자.”
“네?”
나강인이 전시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쿠거 일당은 그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강인이 보이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AI 전지인이 적의 사격 예측 궤도를 허공에 그렸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몸을 뒤집었다. 총알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 자루의 권총 사격을 계속 피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적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
나강인이 공중에서 벽을 발로 밟았다. 동시에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의 손에서 짧은 비녀처럼 생긴 뒤꽂이가 화살처럼 날아가 적의 어깨에 콱 박혔다.
뒤꽂이가 적의 어깨뼈를 뚫었다. 적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끄아악!”
뒤꽂이 뒤의 나비 장식은 적의 몸 위에 남았다. 마치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나비 한 마리가 적의 어깨에 박힌 것처럼 보였다.
다른 놈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총구를 나강인에게 향했다.
총 세 자루를 앞에 두고 정면으로 돌입하는 건 위험하다. AI 전지인이 대피 가능한 곳을 표시했다. 복도에 세워진 장식물이 보였다.
아음속 권총탄은 위력이 약하다. 사람을 살상하기엔 충분하지만 사물을 관통하는 능력은 낮다.
나강인이 복도의 장식물 뒤로 몸을 날렸다. 그가 엄폐물 뒤로 몸을 피하자마자 적의 총탄이 연속으로 날아와 장식물에 퍽퍽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