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옥상
보석 전시관 옥상에는 1층에서 대피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태 초반에 대피한 사람들은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기운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신은하 일행은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옥상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몸 상태가 제일 나빴다. 하지만 회복 속도는 그들이 제일 빨랐다. 1층에서 해독치료제를 맞은 덕분이었다.
이보라가 숨을 크게 쉬었다.
“후우읍! 휴우우. 살았다.”
그녀는 전화가 걸려오는 소리를 듣고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 이름이 ‘신은하’였다.
그런데 신은하는 지금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이보라는 겁을 덜컥 먹었다.
“귀, 귀신?”
신은하가 발신자 이름을 보며 말했다.
“네가 살았는데 내가 죽었겠니? 나 안 죽었어. 좀 전에 강인 오빠가 내 휴대폰 빌려 갔잖아.”
“그랬어?”
“못 봤니?”
“아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잖아.”
발신자가 누군지 알게 된 이보라가 전화를 받았다.
“강인 오빠! 지금 어디세요!”
- 상태는?
“앗! 제 걱정해주시는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 옥상으로 대피한 다른 사람들 말이야.
“아…. 여기는 다 괜찮아요.”
그녀가 해독치료제 주사를 맞은 팔을 보며 궁금해했다.
“이거 무슨 주사인데 이렇게 금방 몸이 좋아져요? 좀 전에는 숨쉬기도 힘들었는데요.”
- 어….
아직 임상 시험을 하지 못한 약이다. 동물 실험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만 확인했다.
- 최신형 해독제라서 그래.
“신제품이면 몸에 좋은 거죠?”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 다들 옥상에서 쉬고 있어. 은하하고 유찬 씨는 옥상 출입구를 잘 감시하라고 해. 아무도 내려오지 마. 여기 상황은 정리됐지만, 아직 건물 내부에 독가스가 남아있다.
“앗! 알았어요!”
옆에 바짝 붙어서 듣고 있던 신은하가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통화하자.”
“나 아직 안 끝났거든?”
신은하가 이보라의 손을 잡고 그녀의 얼굴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강인 오빠. 거기 가스가 남아있으면 오빠도 빨리 올라와야지 왜 전화를 하는데?”
- 나는 방독면을 쓰고 있어서 괜찮아. 그리고 1층에 남은 사람이 더 있는지 확인해야지.
“방독면을 더 구했구나? 다행이다.”
고등학생 이연지도 이보라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녀가 휴대폰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저씨! 오늘 진짜 히어로 같았어요!”
- 그런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신은하가 따뜻한 눈빛으로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며 말했다.
“나한테는 히어로 맞아.”
이보라도 얼른 말했다.
“나도! 나한테도 히어로야!”
“보라야. 너까지 끼어들어서 내 감동을 망치지 말아줄래?”
***
나강인이 전화를 끊은 후에 말했다.
“이러면 율명바이오가 해야 할 임상 시험을 실전에서 한 게 되네.”
어쩔 수 없었다. 아까는 해독제 외에는 신은하 일행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
나강인은 방독면을 쓰고 1층에서 쿠거 일당과 싸운 곳으로 이동했다. XVE 가스의 농도는 그곳이 제일 높았다. 기절한 용병들을 그곳에 계속 놔두면 셋 다 죽는다. 그러면 일이 많이 복잡해진다.
게다가 1층에서 잡은 세 놈을 살려둬야 경찰이 조사할 때 대답할 놈이 많아진다. 입을 열 놈은 많을수록 좋다.
그 근처에 쓰러져 있던 경비원은 아까 신은하 일행이 해독치료제 주사를 맞을 때 같이 맞았다. 그런데도 상태가 나빴지만 신은하 일행이 옥상으로 데려가서 지금 이곳에는 없었다.
나강인은 용병 세 놈의 다리를 하나로 모은 후에 바짓단을 잡고 입구까지 질질 끌고 갔다. 입구는 XVE 가스의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는 보석 전시관을 빠르게 수색해 경비원 두 명과 지하층 보안실 직원 한 명, 그리고 사무실에 있던 사람 한 명을 찾아냈다.
이 사람들은 질질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는 그들을 한 번에 두 명씩 짊어지고 입구 쪽으로 옮겨놓았다.
나강인이 해독치료제의 남은 양을 확인했다. 중독된 사람은 일곱 명인데 해독제는 세 명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해독제가 부족한데….”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모든 XVE 가스 해독제는 필요한 양의 절반만 주사해도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는 전투력은 회복되지 않지만, 해독제가 이곳에 도착하거나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 버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약이 조금 모자라. 직원들에게 해독제를 반씩 주사하면, 여기 세 놈에게 쓸 건 하나밖에 안 남잖아.”
- 정량의 33%만 주사하면 지금보다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습니다.
“그 방법밖에 없네.”
나강인은 먼저 직원들에게 주사를 정량의 절반씩 놓았다. 그러고 나니 주사기도 모자랐다. 그는 이미 사용한 주사기를 재활용해 용병들의 몸에 약을 조금씩 나눠서 주사했다.
“이제 진짜 남은 해독제가 없다.”
갑자기 1층 문에 구멍이 뚫렸다. 뚫린 자리를 시작으로 철판이 조금씩 잘려나갔다.
- 외부 침입을 경계하십시오.
“경찰이겠지.”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시 후에 경찰특공대가 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원들은 모두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박순기도 방독면을 쓰고 따라 들어왔다. 그는 나강인을 발견하자마자 다가왔다.
“나 사범님!”
나강인이 물었다.
“대책은 세우고 문에 구멍을 뚫은 거지요?”
“물론입니다. 입구 바깥에 두꺼운 비닐로 제작된 밀폐 공간을 임시로 설치했습니다. 주변 시민은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율명바이오의 해독치료제도 곧 도착합니다.”
박순기가 살짝 불안해했다.
“그런데 그 해독제의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
“효과는 확실합니다. 부작용은 아직 모르겠지만요.”
박순기는 나강인이 이미 해독제를 사용했다는 걸 안다. 중독된 사람을 살리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율명 바이오 측에서 부작용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습니다. 그걸 믿어야죠.”
박순기가 그의 얼굴에 쓴 소형 방독면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화학무기는 호흡기를 통해서만 중독된다더군요. 공기 중에 노출되면 서서히 소멸해서 오염이 오래 남지는 않는답니다. 건물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량의 가스는 공기 중에 희석되면 피해가 없을 거고, 건물 내부에 있는 것도 몇 시간이면 소멸할 거랍니다.”
“화학무기치고는 깔끔하네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XVE 가스는 뒤처리가 깔끔해서 남용하기 쉬운 화학무기입니다.
“이번처럼 말이지.”
나강인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지하실에 넷을 잡아놨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XVE 가스가 들어있는 가스통도 지하층에 있습니다.”
“헉!”
나강인이 제안했다.
“그 가스통은 같이 가서 회수하시죠.”
박순기가 손으로 방독면을 눌러보며 망설였다.
“아니, 그런 건 화학무기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게….”
“뭐, 그러시던가요. 다른 사람들은 옥상으로 대피했으니까 그분들도 도와주시고요.”
“예. 일단 여기 총 맞은 사람부터 병원으로 옮기겠습니다.”
나강인이 용병들을 가리켰다.
“저기 총을 네 발 맞은 놈이랑 어깨에 나비 장식이 꽂혀 있는 놈은 보석 강도입니다. 그 옆에 있는 놈도 일당이고요.”
“수갑을 채워서 병원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박순기는 그중 한 놈의 어깨에 박혀 있는 금속 나비를 가리켰다.
“저 나비는… 혹시 암기입니까?”
“예?”
“그런 거 있잖습니까? 나비 모양의 암기에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든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금속과 보석으로 만든, 머리에 꽂는 장신구입니다.”
“예. 그러시겠죠. 하다 하다 이젠 암기술까지…. 저도 배울 수 있습니까?”
“총권도 수련이 참 편하신가 봅니다?”
“어이구. 아닙니다. 경찰이 암기술은 무슨.”
잠시 후에 구조대원들이 보석 전시관 내부로 들어왔다.
먼저 들어온 경찰특공대는 방독면만 쓰고 이곳에 진입했는데, 구조대원들은 아예 화생방 방호복을 입고 등에 산소통까지 짊어졌다.
먼저 진입해 내부를 수색했던 경특 대원들이 손으로 방독면을 만져보았다.
“우리는 이거로 충분한 거 맞나?”
“어…. 좀 불안하네.”
“여기서 내가 이러고 있는 거 우리 와이프가 보면 울겠다.”
“나는 내가 울고 싶다. 울어줄 애인조차 없어서.”
다른 경특 대원들도 방호복을 입고 들어왔다.
경찰특공대 팀장이 먼저 진입한 팀원들에게 손짓했다.
“지시 떨어졌다. 나가자. 입구로는 아직은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진 못하니까, 우리는 옥상으로 올라가서 사다리차로 내려간다. 나가서 방호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들어오자.”
같이 들어온 박기정이 방독면을 손으로 눌러보며 말했다.
“어…. 나도 나가야 할 거 같은데….”
나강인이 물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겠다?”
“나가서 방호복을 입고 다시 오겠다는 거죠. 나 사범님도 같이 나가시죠?”
나강인이 주변을 보았다.
화생방 방호부대 요원들이 장비를 사용해 내부의 XVE 가스 농도를 측정하고 있었다. 새로 진입한 경특 대원들이 남은 사람들은 대피시키고 용병들은 체포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 중에는 율명바이오의 해독치료제를 가져온 의료진도 있었다.
의사가 용병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당황했다.
“어? 이 세 사람은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요?”
나강인이 그 의사에게 말했다.
“해독제가 부족해서 범인들은 조금씩만 주사했습니다. 한 대씩 더 맞아야 할 겁니다.”
“예? 아니, 그걸 왜 함부로 판단해서 주사….”
“아까 여기 없었으면 따지지 마시고.”
“아니, 그게 아니라도 이 사람들 상태가…. 총에 네 발이나 맞은 사람도 있고, 어깨에 나비가 꽂힌 이 사람은 뭔가 커다란 물건에 얻어맞은 거 같고….”
“안 죽게 살살 했습니다.”
“총을 어떻게 살살 쏘…. 헉!”
그 의사는 용병들을 박살 낸 사람이 눈앞에 있는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급, 급소는 피해서 살살 잘 쏘셨네요. 하, 하하.”
나강인은 경특 대원들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 XVE 가스통을 확보했다.
나강인이 쿠거를 가리켰다.
“저놈이 두목입니다. 저기 저놈은 보안시스템을 마비시켰고, 저쪽 두 놈은 이 지역에 가스를 살포하려고 했습니다.”
나강인은 쿠거와 용병 셋을 추가로 넘긴 후에 박순기에게 말했다.
“이제 뒷일은 맡기고 우리도 나가죠.”
박순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나강인이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미 소방차가 도착해 옥상에 대피한 사람들을 모두 탈출시켰다. 지금 사다리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경특 대원들과 마지막에 구출한 사람들, 그리고 체포된 용병들이다.
박순기가 옥상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놈들은 누군데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걸까요?”
“수법이 자칼과 비슷합니다.”
“자칼은 총만 썼고 이놈들은 총에 화학무기까지 썼는데요?”
“자칼과 비슷한 스타일이긴 한데, 잔혹하기는 자칼보다 더한 놈입니다.”
박순기가 큰소리쳤다.
“제가 어떤 놈인지 밝혀내겠습니다.”
“코드네임 쿠거. 돈만 주면 뭐든 하는 국제용병입니다.”
“예? 쿠거요? 국제용병이요?”
“쿠거는 퓨마의 다른 이름입니다. 맹수죠.”
“아…. 어? 아니, 그걸 나 사범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인터넷을 검색하면 저놈의 코드네임 정도는 나옵니다.”
“아, 예. 인터넷을 검색해서 아셨구나. 당연히 농담이시죠?”
나강인이 조언했다.
“쿠거는 국제 범죄자니까 경찰이 자료를 갖고 있을 겁니다. 난 그놈이 자칼과 비슷한 스타일의 국제용병이라는 것밖에 모르니까, 자세한 건 직접 알아보시죠.”
“여기서 나가자마자 조사하겠습니다.”
***
나강인은 아까 사건이 터지기 전에 박순기에게 이 보석 전시관이 적의 목표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때 그 정보는 합동수사본부로도 바로 전해졌다.
마침 간부 회의 중이던 합수부는 경고를 듣자마자 즉시 대응했다.
“테러 의심자 명단 찾았습니다!”
“보석 전시관 보안 설비 업체 연락처 어디 있습니까!”
합수부는 XVE 가스 테러 첩보를 어제 입수해서 오늘까지 조사했다. 그동안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가 제법 있었다.
“우리 자료를 각 부서로 전파해요!”
“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간부가 합수부장을 보며 외쳤다.
“어? 지금 그 보석 전시관에 나강인이 있답니다!”
“뭐요? 진짜입니까?”
“조금 전에 테러 경고를 한 사람이 나강인 본인입니다!”
합수부장은 당황했다.
“설마 혼자서 적의 목표를 찾아낸 겁니까?”
다른 간부가 말했다.
“우리도 적의 테러 목표가 어딘지 찾던 중입니다만, 의심 가는 곳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만 골라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열 곳으로 압축하긴 했습니다.”
합수부장이 물었다.
“그 열 개 중에 보석 전시관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 자료를 다른 부서에 보냈습니까?”
“아직….”
“그럼… 예상 지점은 아직 분석 중인 거로 합시다. 우리는 열 곳을 선정한 적이 없는 겁니다.”
헛다리를 짚은 게 알려지면 비웃음만 사지 사건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야겠죠?”
“그런데 나강인은 거기가 테러 목표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우리 분석으로는 그 보석 전시관은 테러 대상이 아닌데요. 놈들이 거길 털었다는 건….”
합동수사본부장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테러가 아니라 보석 강도?”
“아마도요. 그래서 우리가 추린 대상 목록에 보석 전시관이 없는 겁니다.”
“그럼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분석합시다. 우리가 수집한 자료에 쓸만한 게 있을 겁니다.”
합수부는 수집한 자료를 분석해서 뭔가 나올 때마다 관련 부서들로 전송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어…. 본부장님?”
“왜 그럽니까?”
“다 잡았다는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보석 전시관을 장악한 놈들을 다 잡았답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회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잠시 후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설마 또 나강인이?”
“예.”
그 사람은 방금 분석을 마친 서류를 머리 위로 확 던졌다.
“진짜 못해먹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