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단역
외과 과장 이정호는 나강인이 그동안 왜 바빴는지 조금은 안다.
“보석 전시관에서 우리 연지가 강인 씨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강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지는 제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나강인이 그날 일을 떠올렸다. 그때 이연지의 상태는 다른 사람과 많이 달랐다.
“XVE 가스가 연지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더군요. 가스의 영향을 안 받은 건 아닌데, 남들은 다 주저앉아 있을 때 연지 혼자 서 있을 정도로 효과가 약했습니다.”
이정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우리 딸은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말을 안 해줬군요.”
“걱정하실까 봐 그랬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연지만 괜찮았던 이유가….”
나강인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케이타이거 증후군의 영향일까요?”
이정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연지가 수술 후에 놀라운 속도로 회복하긴 했습니다만….
이정호가 아는 케이스 중에서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의 수술이 성공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케이타이거 증후군의 영향인지, 아니면 체질 탓인지….”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보고받기로는, XVE 가스는 몸의 회복능력이 강하면 더 오래 버틴다더군요. 병에 걸렸다가 나았는데 회복력이 좋아졌으면 좋은 일 아닙니까? 그 고생을 하고 나서, 뭐라도 하나 남는 게 있는 거니까요.”
이정호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딸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제 딸이 원래 회복력이 강해서 수술이 성공한 거라면….”
권동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고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이연지는 수술 전에도 잘 뛰어다녔지만 권수연은 걸음도 겨우 걷는다.
만약 수술 성공 여부가 환자의 현재 회복력에 달려 있다면, 권수연의 수술은 실패할 수도 있다.
권동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아니겠지요. 아니어야 합니다.”
그들이 오늘 이곳에 모인 건 권수연을 수술하기 전에 미리 손을 맞춰보기 위해서다.
이연지를 수술하기 전에도 이상 발생 장기를 본떠서 만든 모형으로 몇 번 연습했다.
제약회사 사장인 권동진은 인맥을 동원해 수술 연습용 모형 장기 제작 업체에 웃돈을 주고 긴급 의뢰를 넣었다. 덕분에 권수연의 이상 발생 장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연습용 샘플이 스무 개나 생겼다.
나강인이 분위기를 좀 바꾸려고 첫 번째 연습용 모형 앞에 서며 말했다.
“일단 손부터 맞춰보지요.”
이정호가 얼른 나강인의 맞은편에 섰다.
“수술 시간은 최대 1시간이지만, 이 연습은 장기를 고치는 부분만 하니까 40분 컷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 섰다.
율명바이오 사장 권동진은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다. 그런데도 수술실에 들어와 잔심부름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러면 법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권동진도 책임을 같이 져야 한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배를 탔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첫 번째 연습은 40분을 넘었다. 연습하면서 실수도 많이 했다.
권동진이 시계를 확인하고 흙빛이 됐다.
“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정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성공할 순 없지요. 시간을 줄이려고 이 연습을 하는 거잖습니까? 뭐가 문제였는지 확인하고 시간을 줄일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야지요.”
“그래도 불안해서….”
나강인이 처진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과장님. 왜 이 병의 이름을 코리아 타이거로 지으신 겁니까?”
“예? 코리아요? 아…. 케이는 코리아의 약자가 아닙니다.”
“어? 보통 이름 앞에 케이가 붙으면….”
“아시다시피 이 병은 저 혼자 발견한 게 아닙니다. 미국에 있는 의사 두 분과 공동으로 연구해서 밝혀냈죠. 그렇게 찾아낸 병의 이름에 제 마음대로 코리아의 K를 붙일 리 없잖습니까?”
“그럼 케이는 무슨 뜻입니까?”
“원래는 케이가 아니라 chi였습니다.”
“chi요?”
“고대 신화 속의 괴물, 키메라의 앞부분 철자죠.”
나강인은 깜짝 놀랐다.
“헉!”
이정호가 얼른 말했다.
“이 병은 신체 장기의 이상 발현 증상이 특징입니다. 심할 때는 몸속에 귀나 입 같은 게 생길 수도 있는데, 그 특이한 형태 때문에 처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 증상의 병이 기존에 없던 건 아닙니다. 물론 기존의 병은 수술하면 되지요. 케이타이거 증후군이 기존의 병과 달리 수술이 어려운 건 시간제한 때문이고요.”
중증 케이타이거 증후군은 한 시간 안에 수술을 마치고 봉합까지 끝내야 한다. 그 시간을 넘긴 사람은 모두 사망했다.
수술을 여러 번 나눠서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수술을 일단 시작하면 이상 발현 기관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남겨두면 환자가 사망한다.
“이건 우리가 기존에 알던 질병이 아니라, 마치 저주라도 걸린 것 같은 특이질환입니다.”
이정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질병에 신화 속 괴물의 이름을 붙이면 환자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키메라라고 불렀다가, 키메라에서 chi만 만 남겼다가, 환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비슷한 발음인 케이로 바꾸었습니다.”
“아…. 그럼 타이거는 무슨 뜻입니까?”
“케이 증후군이라고 하면 너무 짧으니까 뭐라도 붙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에 나오는 키메라는 앞부분이 사자의 모습입니다. 사자와 비슷한 맹수는 호랑이고요.”
“그러니까, 타이거는 그냥 붙였군요.”
“그렇죠. 하, 하하.”
그들은 그날 모두 네 번 연습했다.
세 번째까지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런데 네 번째 시도는 오히려 시간이 늘어났다. 거기서 더 해봤자 사람들이 지쳐서 효율이 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그날은 거기서 헤어졌다.
나강인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AI 전지인에게 물었다.
“지인아. 케이타이거 증후군에 대해서 아는 게 있냐?”
- 저에게 부상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스킬은 있습니다만, 병을 진단하거나 치료하는 스킬은 없습니다.
“너는 초기 데이터만 남아있고 활동데이터는 다 잊어버렸잖아. 전에는 알았는데 지금은 모르는 거 아닐까?”
- 요원님이 알았던 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겠지. 지금은 나도 너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는 집으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이연지였다.
“어. 왜?”
- 아저씨. 저 내일 드라마 찍으러 가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이연지가 보석 전시관에서 사건에 휘말린 게 겨우 이틀 전이다. 그런데도 지금 목소리는 굉장히 밝았다.
“넌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 히히. 내일 구경 오실 거죠?
“가야지. 가서 촬영 현장이 얼마나 힘들고 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네가 깨닫는 거 꼭 봐야지. 넌 내일 이후로는 공부나 열심히 하겠다고 할 거다.”
- 무슨 악담이셔?
“현실을 말해준 거야. 내일 보자.”
***
나강인은 이튿날 늦잠을 잤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난 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냐.”
- 육체의 피로는 이미 회복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독가스를 많이 마셔서 그런 거 아닐까?”
-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면 더 자려고 했더니. 머리가 피곤했나 보다.”
- 최근에 뇌가 지칠 만큼 머리를 쓰긴 하셨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고생했다는 뜻은 아니지?”
- 오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인아. 왜 대답을 하다 말아? 아니지? 야. 잠이 확 깬다.”
오늘 일정이 눈앞에 나타났다. 몇 개는 평소와 같은 정보 수집 활동이지만 글자색이 다른 것도 하나 있었다.
- 이연지의 촬영 현장 방문 약속이 있습니다.
“연지가 현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는 모습은 꼭 봐야지.”
- 이미 촬영을 시작했을 시간입니다.
나강인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인아. 초고속 샤워!”
- 진심으로 긴급 제독을 받고 싶으십니까?
“아냐. 농담이야. 내가 씻을게. 긴급 제독은 이름만 들어도 뭔가 아닌 거 같다.”
***
나강인은 서둘러 준비하고 촬영 현장으로 갔다.
촬영장소는 서울 시내였다.
이미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스태프가 입구에서 외부인의 침입을 막았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 신은하를 발견했습니다. 신은하가 도움이 될 때가 다 있습니다.
나강인이 얼른 신은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신은하도 나강인을 발견하고 다가와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신은하가 물었다.
“그냥 안으로 들어오면 될 텐데 왜 나는 부른 거야?”
“저 사람이 외부인은 못 들어간다던데?”
“외부인? 강인 오빠도 이 업계 사람이잖아. 디지털 싱글도 냈고, 천만 영화와 히트 친 드라마, CF에서도 두루 활약했고, 또 파티에서도…. 아니다.”
그녀가 나강인이 외부인 취급을 받은 이유를 깨달았다.
“여기 스태프 중에는 강인 오빠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구나. 그러게 손 감독님이나 최 피디님이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라고 권할 때 하지 그랬어.”
“했잖아.”
“아니, 그건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써서 얼굴을 다 가린 모습이거나, 아니면 녹색 쫄쫄이를 입….”
나강인이 손을 들었다.
“거기까지.”
“응. 거기까지.”
신은하가 앞쪽을 가리켰다. 다음 촬영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준비하는 사람 중에 이연지가 있었다.
“그래도 시간 딱 맞춰 왔네. 곧 연지가 나오는 씬 촬영이야.”
“연지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데?”
“두 시간 전부터.”
“얼 타고 있진 않았고? 구박이라도 받고 있으면 커버 좀 살짝 쳐주지.”
신은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 구박?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왜?”
“연지 친화력이 좋은 건 알았는데, 진짜 장난 아니더라. 쟤가 원래 주인공 상대역의 친구 3 역할이잖아? 근데 30분 만에 친구 1이랑 2하고 언니 동생 먹었어. 배우 사이에서만 그런 게 아니야. 스태프들도 연지 이름을 알아.”
“연지답네.”
“대사도 생겼어.”
“응? 갑자기?”
“대본이 어젯밤에 변경됐대. 친구 1, 2, 3을 그냥 세워두면 좀 미안하다면서 작가님이 한두 문장씩 대사를 챙겨줬대.”
“운이 좋네.”
신은하가 피식 웃었다.
“그게 과연 운이 좋은 걸까? 연기를 배운 적도 없는 애가 처음부터 진짜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쳐? 그게 잘 되겠어? 이번 기회에 욕 제대로 먹고 잠깐 생겼던 대사도 도로 사라져봐야 현실을 깨닫지.”
“맞다. 그러면 공부나 하겠지.”
신은하가 이연지를 이 배역에 꽂아준 건, 그녀가 제일 잘하는 공부에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래도 연지가 비주얼은 주변의 다른 배우들에게 꿇리진 않는다.”
“쟤가 원래 와꾸는 합격이었어.”
촬영이 시작됐다.
여주인공이 먼저 연기했다. 그 후에 상대역의 친구 1, 2, 3이 앞으로 나와서 한마디씩 하며 여주인공을 압박했다.
그런 후에 여주인공의 상대역인 배우 공지현이 앞으로 나섰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공지현이 실수하는 바람에 촬영이 중단됐다. 그녀가 얼른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촬영장이 다시 세팅되는 동안 나강인이 물었다.
“어…. 은하야. 연지가 연기 못하는 거 맞아?”
신은하도 살짝 당황했다.
“제법… 하네?”
친구 1, 2는 원래 기본적인 연기력은 있었다. 대사 한두 줄짜리 단역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연지가 거기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녀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럽고 능청맞아서 셋이 진짜 친구인 것처럼 보였다.
나강인이 말했다.
“쟤는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연기도 잘하나?”
신은하가 툴툴댔다.
“아니, 내 주변에는 왜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아?”
“누가 또 있어?”
“누구겠어!”
“그나저나 이러면 곤란하지 않나? 우리가 연지에게 가르쳐주려던 건 현장의 혹독함인데.”
“어쩌겠어. 자기가 알아서 해냈는데. 그렇다고 방해할 수는 없잖아. 우린 이제 구경이나 해야지.”
얼마 전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끝난 드라마 ‘푸른 하늘’의 작가 도주희가 촬영 현장에 나타났다. 그녀는 이 드라마의 작가와 친한 데다가 마침 촬영장소가 그녀의 작업실에서 멀지 않아서 놀러 왔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이곳에 왔다가 한쪽에서 구경하는 나강인을 발견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나강인에게 다가갔다.
“어머. 강인 씨!”
AI 전지인이 설명했다.
- 드라마 ‘푸른 하늘’ 작가 도주희입니다.
“아. 도주희 작가님.”
“혹시 강인 씨가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거예요? 어머. 저랑 최 피디님이 새로 만들 드라마를 도와주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아직 한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도주희는 조금 초조했다.
“우리는 당연히 강인 씨가 도와주는 줄 알고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드라마는 하면서 왜 우리 거는….”
“여기는 아는 애가 단역으로 나와서 그냥 구경 왔습니다. 뭘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아. 다행이다. 그런데 단역이요? 누군데요?”
나강인이 이연지를 가리켰다.
“쟤요.”
“아아. 방금 봤어요. 연기가 좀 거칠긴 한데, 그게 풋풋한 맛이 나서 나름대로 괜찮더라고요. 저 친구는 연기를 어디서 얼마나 배웠어요?”
“오늘 처음 하는 거라던데요.”
“어머. 진짜요? 장난 아니다.”
“그러게요. 재능충인가?”
신은하와 도주희가 나강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왜? 내가 뭐 실수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가 재능충이란 말을 하면 안 되지.”
“아. 욕한 게 아니라 칭찬한 건데, 듣기 좀 그랬나?”
“아니, 욕을 했다는 게 아니라! 에이,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