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55화 (155/411)

155. 1mm

촬영은 세 번이나 더 중단됐다. 셋 다 여자 주인공의 상대역인 공지현의 연기에 문제가 있었다.

피디가 말했다.

“후우.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일단 다음 씬부터 찍읍시다. 공지현 씨는 어디 가서 연습 좀 하고 다시 와.”

“죄송합니다!”

피디가 짜증을 냈다.

“애당초 죄송할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도주희는 이 드라마의 작가를 만나러 갔다.

신은하가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걸어가는 도주희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전에는 연기를 꽤 잘했는데 왜 저렇게 됐을까?”

“아는 사이야?”

“같이 작품을 한 적은 없는데, 방송국이나 행사장에서 만나면 잠깐 수다 정도는 떠는 사이야.”

“전에는 연기를 잘했어?”

“꽤 잘했지. 배우로서의 인지도도 예전의 나랑 비슷했어. 이제 겨우 스물한 살짜리가 그런 연기력에 그런 인지도면 정말 대단한 거야.”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기력이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올해 초부터 연기가 어색해졌어. 그때부터 인지도도 추락했고. 슬럼프가 왔나 봐.”

신은하가 안타까워했다.

“이 바닥은 냉정해. 슬럼프를 극복하면 살아남을 테고, 못 하면 이 바닥에서 사라지겠지. 그렇게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배우를 한두 명 본 게 아니야.”

“연기가 어색해진 게 문제라면, 네가 만났을 때 조언이라도 좀 해주지 그랬냐.”

신은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못 도와줘. 도와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없어. 왜냐하면, 이미 쟤네 소속사에서 나보다 유명한 배우나 잘 가르치는 연기 강사를 동원해서 이것저것 다 시도해봤을 테니까.”

“아….”

“내가 괜히 이것저것 충고한답시고 떠들면 혼란만 커질걸?”

“그럴 수도 있겠네.”

촬영 순서가 바뀌면서 이연지도 할 일이 없어졌다. 그녀가 친구 배역 1, 2를 데리고 나강인을 찾아왔다.

이연지와 같이 온 두 사람이 신은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팬이에요!”

신은하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어. 안녕. 반가워요.”

친구 배역 1이 물었다.

“와! 연지 너 어떻게 신은하 선배님을 알아?”

이연지가 씩 웃으며 자랑했다.

“우리 동네 아는 언니?”

“우왕! 진짜 부럽다.”

친구 배역 2도 질문했다.

“옆에 있는 분은?”

“우리 동네 아는 아저씨.”

“아아.”

나강인이 툴툴댔다.

“와. 호칭만 빼고 똑같은 설명인데 어떻게 반응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르지?”

이연지가 실실 웃으며 졸랐다.

“아저씨. 달달한 거 좀 사주세요. 배고파요.”

“촬영 중인데?”

“우리 순서 다시 돌아오려면 멀었어요. 아까부터 와 있어서 배고프단 말이에요. 우리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충전에는 초콜릿이랑 조각 케이크가 좋대요.”

“기왕이면 돈 많은 은하를 뜯어먹는 게 낫지 않겠냐?”

“은하 언니는 여기 이 언니들이 할 말이 많아 보여서요.”

친구 배역 1과 2가 신은하의 앞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초콜릿이랑 조각 케이크, 거기에 마실 거 추가. 콜?”

“아싸! 콜!”

도주희가 이 드라마의 작가를 찾아갔다.

“왜 표정이 그렇게 구겨져 있어?”

드라마 작가가 불평했다.

“오늘 씬이 중요한데 공지현이 자꾸 망치잖아. 인제 와서 바꿀 수도 없고 미치겠어. 박 피디님은 왜 쟤를 써서 말이야.”

“공지현은 원래 연기 잘했잖아.”

“다 옛날이야기지. 요즘은 애가 아주 망가졌어.”

도주희가 친구를 살살 긁었다.

“그러게 나처럼 연기파 배우들이랑 일했어야지. 공지현의 급이 이보라 정도지? 이보라가 철이 좀 없어서 그렇지 연기는 잘하는데.”

친구가 도주희를 째려보았다.

“운 좋은 년. 넌 배우들만 잘 만난 게 아니라 무술감독도 하늘에서 뚝 떨어졌잖아. 난 어디서 그런 사람 못 만나나?”

“어? 여기 왔던데 못 만났어?”

“응? 누구?”

“우리 무술감독.”

드라마 작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앗! 설마 나강인? 어디야? 누구야?”

“저쪽에 있…. 없네? 집에 갔나 보다.”

“이년이! 미리 알려줬어야지!”

“왜? 너희 드라마 장르는 액션이 아니잖아.”

“푸른 하늘은 뭐 원래 액션이었냐? 나강인이 있으면 공지현을 날려버리고 오늘 촬영을 다른 씬으로 채울 수 있잖아.”

“날려도 돼?”

“오늘 첫 등장이니까 그래도 돼.”

“대본은 언제 고치게? 너희 드라마 일정 빠듯하잖아.”

드라마 작가가 눈을 빛냈다.

“내가 들은 소문으로는, 나강인 씨만 있으면 수정 대본 정도는 하룻밤 사이에 쓸 수 있다던데?”

“네가 무슨 손태민 감독님이냐? 하룻밤 사이에 그게 되게?”

“적어도 지금 이 씬은 공지현을 빼도 해결할 수 있겠지. 도주희! 나강인을 당장 찾아내!”

도주희가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옆으로 흔들었다.

“나강인 씨는 찾아낸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섭외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다.”

“그럼 인사라도 하게 소개라도 시켜줘. 그래야 다음에라도 섭외하지.”

***

나강인은 근처 편의점에서 이연지의 간식을 사서 돌아왔다.

친구 배역 1, 2처럼 간단한 역할의 단역에게 매니저가 따라왔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그 두 사람이 먹을 간식도 같이 샀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가 걸려왔다. 철인기공 설계팀 차지희였다.

“여보세요.”

- 나 팀장님! 저희가 자체 양산형 드래곤 플레이트의 새 버전을 설계했어요!

“제작과 테스트는?”

- 아직 못했죠. 설계도면 단계에서 검토받으려고요.

철인기공의 기본 양산형은 나강인이 설계한 개인 맞춤형 드래곤 플레이트의 도면을 재활용해 만든다. 그런데 그 양산형은 기존 고객과 체형이 비슷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나강인이 정식 버전을 많이 설계해야 양산형도 다양한 버전이 나온다.

나강인은 요즘 다른 일이 바빠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를 별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철인기공의 맞춤형 정식 버전도 가끔 하나씩 나왔다.

철인기공은 대안으로 자체 설계 드래곤 플레이트를 연구했다. 자체 설계 제품도 라이센스비는 받기 때문에 나강인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

그런데 지난번에 철인기공이 자체적으로 설계한 건 방어력이 낮아서 기존 방탄조끼조차 대체할 수 없었다. AI 전지인은 그걸 확인하고 나서 쓰레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차지희가 물었다.

- 제가 오늘 나 팀장님 제작실로 찾아뵈려고 하는데 가도 될까요?

“음. 두 시간 뒤에 봅시다.”

- 넷!

나강인이 전화를 끊고 다시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외과 과장 이정호였다.

“오늘은 휴대폰이 불이 나는구나.”

이정호는 이연지 때문에 전화를 걸었다.

- 우리 연지가 강인 씨도 그곳에 있다고 해서요.

“간식만 조금 챙겨주고 저는 일하러 갈 겁니다.”

- 연지도 빨리 끝내고 집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도 하고 싶다고 하니까 시켜는 주는데, 와이프가 걱정이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연지가 수술을 받은 데다가, 얼마 전에는 독가스까지 마셔서….

나강인은 이정호의 하소연을 조금 들어준 후에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연지가 있는 곳으로 가다가, 한쪽 구석에서 우울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배우를 발견했다. 여자 주인공의 상대역인 공지현이 그곳에 있었다.

이연지는 한 씬만 찍으면 집에 갈 수 있다. 신은하도 이연지가 가면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공지현이 촬영을 계속 망치면 두 사람 다 집에 갈 수가 없다.

***

공지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오늘 촬영을 망쳐서 자존감이 떨어졌다.

그녀는 요즘 연기가 너무 어려웠다. 아무리 노력해도 피디가 만족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다.

작년만 해도 연기하는 게 이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초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그러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때부터는 연기가 어색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연기 강사에게 배우고 다른 배우의 충고를 들어도 해결되지 않았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연기는 더 어색해졌다. 이젠 작년에는 어떻게 연기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 이 드라마는 소속사에서 겨우 잡아준 것이다.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진 않지만 그래도 여주인공과 경쟁하는 역할이다. 대본에서는 앞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그런데 그러려면 첫 출연인 이번에 잘해야 한다. 여기서 말아먹으면 피디나 작가가 그녀를 계속 그 배역에 써줄 리가 없다.

매니저를 통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경고도 이미 들었다. 이번에도 말아먹으면 회사에서는 앞으로 이런 배역은 다른 배우에게 넘길 게 뻔하다.

눈물이 조금 났다.

“나는 왜 안 될까?”

그녀는 예전에는 연기 꽤 잘했다.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예전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금방금방 이해가 되고 표현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게 안 된다. 자신감을 잃을수록 점점 연기가 어려워졌다.

그녀는 오늘 촬영장에서 신은하를 보았다.

“작년만 해도 나랑 같은 레벨이었는데.”

신은하는 천만 관객 영화 ‘햇살 좋은 날’로 빵 떴다. 동급이던 이보라도 드라마 ‘푸른 하늘’ 덕분에 한 레벨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공지현은 추락했다. 맡을 수 있는 배역도 더 작아졌다.

“울고 싶다.”

***

나강인이 말했다.

“연지와 은하를 집에 보내려면 저 아가씨가 제대로 해야 하겠네.”

그가 AI 전지인에게 말했다.

“지인아. 아까 저 아가씨가 연기할 때 지었어야 하는 표정을 내가 지을 테니까, 네가 보정을 좀 해줘야겠다.”

- 어떤 방향으로 보조하길 원하십니까?

“피디가 몇 번이나 설명하는 거 너도 들었잖아. 그거 그대로.”

- 이해했습니다.

나강인이 공지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 장소는 촬영 스태프나 배우의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다.

공지현은 나강인이 그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좀 전에 촬영하는 거 봤는데요.”

그녀가 시무룩해졌다.

“너무 못했죠? 저도 알아요.”

“그거 이렇게 하라는 거 아닙니까?”

나강인이 조금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AI 전지인이 그 표정을 보정했다.

공지현은 깜짝 놀랐다.

“어?”

그녀는 나강인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피디님이 말씀하신 그 느낌….”

오히려 피디가 요구한 느낌보다 더 많은 감정이 나강인의 표정에 담겼다.

“피디님은 이런 걸 하라고 하신 거구나.”

그녀가 나강인의 얼굴을 멍하니 보며 말했다.

“부럽다.”

그 복잡한 감정을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이렇게 간단히 표현하는 능력이 너무 부러웠다.

나강인이 표정을 풀었다. 공지현이 다급히 물었다.

“잠깐만요! 다시 한 번만 보여줄 수 있어요?”

나강인은 공지현이 이 씬을 무사히 찍게 해서 이연지와 신은하를 집에 보내는 게 목적이다.

“보여줄 테니까 따라 해봐요.”

“이렇게 하는 건가요?”

“아니, 그건 진짜 화난 거고.”

“네? 시청자가 제가 화난 줄 알게 해야죠.”

나강인이 조언했다.

“잔혹한 영화도 아니고 가족이 같이 보는 드라마잖아요. 시청자가 드라마를 보면서 같이 화내는 건 좋은데, 시청자의 기분이 상하면 안 돼요. 그 선을 지키면서 연기해야죠.”

“그쵸. 그러니까 표정을 이렇게….”

“그건 화난 거라니까.”

나강인이 표정을 하나씩 구분해서 지으며 설명했다.

“여기 이렇게 눈썹을 살짝, 여기 눈매를 조금. 이렇게 하나씩 해봐요.”

“이렇게요?”

“에이. 이렇게.”

공지현은 나강인이 가르쳐주는 대로 하나하나 구분해서 표정을 지은 후에 거울을 보았다.

“아!”

거울 속의 그녀는 진짜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선을 넘지는 않았다. 다음 촬영에서 이 표정을 지으면 피디가 통과시켜줄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정말 많이 됐어요.”

“뭘 고마워요. 이제 시작인데.”

“네?”

“설마 겨우 그 정도로 카메라 앞에 서려고?”

잠깐 밝아졌던 공지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저는 이것도 겨우 한 건데….”

나강인이 어깨가 처진 그녀를 보다가 AI 전지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내 표정 보조 스킬 말이야. 남의 얼굴에도 쓸 수 있냐?”

- 다른 사람의 얼굴 근육을 제가 무슨 수로 제어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얼굴을 직접 바꾸라는 게 아니야. 저 아가씨가 요원이라고 가정하고, 표정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지를 홀로그램 영상으로 만들어봐.”

AI 전지인이 공지현의 3D 사진을 허공에 띄웠다. 그런 후에 얼굴 부분만 확대해 표정을 만들었다.

“홀로그램 속 얼굴을 저 아가씨 얼굴과 겹쳐.”

곧바로 반투명한 홀로그램 얼굴 이미지가 공지현의 실제 얼굴과 겹쳐졌다.

나강인이 그녀의 얼굴과 홀로그램 이미지의 오차를 보며 말했다.

“자. 이번에는 표정 하나하나를 1mm 단위로 디테일하게 설명할 테니까, 안면근육을 미세하게 움직여봐요.”

“네? 1mm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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