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칭찬
AI 전지인이 합성한 반투명 얼굴 이미지와 실제 공지현의 얼굴이 완전히 겹쳐 보였다. 그렇게 겹쳐놓고 보면 작은 차이도 쉽게 알 수 있다.
“오차를 밀리미터 단위로 표시해.”
AI 전지인이 차이가 나는 부분마다 선을 그리고 몇 밀리미터나 차이가 나는지 적었다.
나강인이 그걸 보며 공지현에게 말했다.
“먼저 입술을 조금만 열어봐요.”
이 장소는 촬영 스태프나 배우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나강인은 이미 그녀에게 완성된 표정 연기를 보여주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그 표정을 따라 했을 때는 효과가 굉장했다.
그녀가 나강인의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는 지금 궁지에 몰렸다. 오늘 촬영을 망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공지현이 나강인이 시키는 대로 입을 살짝 열었다. 그런 후에 이러면 되냐는 눈으로 나강인을 쳐다보았다.
“3mm만 더.”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지 못하고 혀만 움직여 말했다. 발음이 뭉개졌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이렇게요?”
“그건 5mm나 되잖아요. 2mm만 다물어요. 아. 지금 거기. 그렇게.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살짝 닿게. 잘했어요.”
“이제 됐….”
“이제 왼쪽 입꼬리를 살짝 올려요.”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이 정도면 됐냐는 눈빛으로 나강인을 보았다.
나강인이 말했다.
“너무 올라갔네. 2mm 내려요. 너무 많아요. 1mm 위로. 아니, 1mm라니까. 이상하네. 이게 그렇게 어렵나? 다시 아래로. 정지! 됐어요.”
“이제 다 됐….”
“그 상태에서 눈을 조금 가늘게 떠봐요.”
일반인이 mm 단위로 얼굴 근육을 조절하는 건 어렵다. 공지현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배우인 그녀는 평소에도 다양한 표정을 짓는 연습을 많이 했다. 슬럼프에 빠진 후에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더 많이 노력했다. 그 노력 덕분에 나강인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강인의 요구치가 너무 높았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대놓고 가늘게 뜨는 게 아니라 평소의 80퍼센트 수준으로.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0.5mm미터만 더.”
“네?”
“어. 거기서 정지. 이제 눈꼬리만 조금 접히게 해봐요.”
공지현이 눈꼬리만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이게 왜 안 되지?”
공지현이 표정을 유지하며 어색한 발음으로 말했다.
“보드으 안 대자나요.”
나강인은 그 어색한 발음을 쉽게 알아들었다. AI 전지인이 해석해서 글자로 표시해주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안 되잖아요.]
“눈 옆 근육에 조금 더 힘을 줘봐요.”
[어디 말씀이세요?]
나강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니까 여기.”
[손으로 짚어주세요.]
나강인이 손가락 끝으로 공지현의 눈꼬리 쪽을 살짝 눌렀다.
“여기.”
공지현은 나강인이 눌러준 부분에 더 신경 쓰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요. 거의 왔네. 이제 눈썹은 살짝….”
공지현은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뭘 하라는 건지 이해했다. 그녀가 눈썹 쪽도 살짝 움직였다.
“그렇지. 눈썹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네요.”
나강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공지현의 얼굴을 보았다. 홀로그램 영상 속 표정과 실제 표정이 거의 일치했다. 몇 부분에 0.5mm쯤 오차가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허용범위 안이었다.
근처에 소품으로 쓰는 거울이 있었다. 그리 큰 거울은 아니지만 얼굴 전체를 비춰보기엔 충분했다.
나강인이 그 거울을 가져와 그녀가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때요?”
공지현은 거울 속 자신의 표정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나강인이 말했다.
“어허. 표정 무너집니다.”
그녀가 얼른 표정을 원래대로 돌렸다. 거울 속 그녀의 얼굴도 돌아왔다.
“아. 이거구나.”
거울 속 그녀는 겉으로는 화를 내는데, 그러면서 조금 어이없어하고, 조금 웃기도 했다. 그런데 그 복잡한 표정 속 눈빛에서 조금 슬픈 내면이 살짝 느껴졌다.
그 적당히 드러나고 적당히 숨겨진 감정이 하나의 표정으로 모두 표현되었다.
거울 속에 있는 건 그녀의 얼굴이지만,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이 모습, 참 좋다.’
그녀의 그런 마음이 그 표정에 더해졌다.
그녀는 올해 초부터 자신의 연기력에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감을 잃을수록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최근에는 이대로 연예계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올해 내내 그녀를 괴롭혀오던 연기력 문제가 지금은 너무나 간단하게 사라졌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걸 그동안 하지 못했던 바보 같은 자신에게 화가 조금 났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거울 속 그녀는 공지현이 바라던 것 이상의 감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웃음이 살짝 났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모든 감정이 거울 속 표정에 다시 묻어났다.
거울 속 그녀의 표정이 더 풍부해지고 더 좋아졌다.
이제 홀로그램 속 표정과 그녀의 실제 표정은 차이가 제법 났다. mm 단위가 아니라 1cm 가까이 틀어진 곳도 있었다.
나강인은 그걸 다시 고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가 알려준 것보다 그녀의 지금 표정이 더 나았다.
나강인이 작게 말했다.
“지인아. 네가 제안한 표정이 최선이 아니네?”
- 현지에 잡입할 때는 저 정도로 깊고 복잡한 감정 전달 기술까지는 필요 없습니다. 임무 수행용으로는 제 스킬이 최선입니다.
“뭘 무안해 하고 그래? 그냥 그렇다고.”
공지현은 거울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어떤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괜찮았고, 어떤 표정은 다른 상황에 더 어울렸다.
한참을 그러다 그녀의 표정이 스르르 풀렸다. 오늘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이해했다.
이제 거울을 들고 있는 나강인이 눈에 들어왔다.
나강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잘하네요.”
그녀가 나강인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진짜요?”
“보통 사람의 안면근육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그렇게 정밀하게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 평소에 훈련을 많이 했을 겁니다.
공지현이 말했다.
“표정 연기 연습을 많이 했어요. 진짜 많이 했어요.”
“연기를 원래 잘한다더니 사실이었네. 내가 설명해준 것보다 나중에 지은 표정이 훨씬 더 좋습니다. 진짜 잘했어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나강인이 들고 있던 소품용 거울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난 일이 있어서 이만. 오늘 촬영 잘해요.”
“네? 아, 네.”
나강인이 간식이 든 편의점 비닐 봉투를 들고 촬영장 쪽으로 걸어갔다.
공지현은 나강인이 이 촬영 현장의 관계자라고 생각했다.
‘촬영부터 끝내고 나서 제대로 인사해야지.’
지금은 연습을 더 하고 싶었다. 그녀가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어려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
나강인이 이연지에게 편의점에서 산 간식을 넘겼다.
“초콜릿, 조각 케이크. 음료수. 마카롱이 보이길래 그것도 세 개.”
“앗! 아저씨에게 이런 센스가!”
“촬영 끝나면 바로 집에 가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간다.”
신은하가 말했다.
“연지는 내가 데려갈게. 이따가 봐.”
“난 회사 일이 좀 있으니까 저녁때나 보자.”
“철인기공?”
“어.”
***
공지현의 촬영이 다시 준비됐다.
피디가 말했다.
“지현 씨. 이번엔 좀 제대로 하자.”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드라마 작가가 피디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피디님. 여차하면 배우를 교체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러기엔 너무 늦지 않았어?”
“어차피 쟤는 오늘이 첫 촬영이잖아요. 배우를 교체하려면 지금 해야 해요.”
피디가 한쪽에서 촬영을 준비하는 공지현을 힐끗 보며 물었다.
“대안은 있고?”
“오늘 우리 촬영장에 나강인이 왔대요.”
피디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그 나강인? 어디에?”
“여기 어딘가 있겠죠. 나강인이 도와주면 오늘 말싸움을 진짜 싸움으로 바꿀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 배우도 자연스럽게 교체하는 거죠.”
“어…. 우리 드라마에 화려한 전투는 좀 아니지 않나?”
“에이. 화려한 싸움이 아니라 그냥 실감 나는 싸움을 잠깐 보여주는 거죠. 이후 스토리에는 영향이 없을 거예요.”
피디가 손을 비볐다.
“그래? 일단 이거부터 좀 찍어보고. 세팅 다 해놨는데 그냥 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 이거 찍는 사이에 나강인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해봐.”
촬영이 시작됐다.
친구 1, 2, 3이 먼저 여주인공과 시비가 붙었다. 이 장면은 아까 몇 번이나 찍었었다. 친구 3 역할인 이연지는 연기력이 더 좋아졌다.
그런 후에 공지현이 나타나 여주인공과 말싸움을 시작했다.
피디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그 모습을 보았다.
“반성 좀 했나? 초반 표정은 좋….”
피디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
공지현은 여주인공과 진짜 싸우는 것처럼 연기했다. 그것도 그냥 혼자 화가 나서 싸우는 게 아니라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며 싸웠다.
그런데 그 감정 전달이 거슬리지 않았다. 게다가 싸우는 모습을 열중해서 보고 있으면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련한 슬픔이 슬쩍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끝난 후에 피디가 외쳤다.
“컷! 그게 아니지! 연기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
공지현은 울상을 지었다. 재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OK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안 되는 거야? 이것도 아니야? 난 역시 안돼?’
피디가 여주인공에게 외쳤다.
“거기서 그런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해! 왜 더듬거려! 표정은 또 왜 그래?”
여주인공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깐 당황해서 그만….”
피디는 왜 여주인공이 당황했는지 안다. 상대역인 공지현의 연기가 아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피디가 여주인공에게 말했다.
“이번엔 정신 차리고 해.”
“네!”
피디가 이번에는 공지현에게 말했다. 표정이 밝았다.
“지현 씨는 지금 그대로 해. 할 수 있지?”
공지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자신의 연기가 통했다는 걸 깨달았다.
“네? 네!”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친구 1, 2, 3부터 다시 찍었다.
그런 후에 공지현과 여주인공이 말싸움을 시작했다.
여주인공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지현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연기했다.
촬영이 끝난 후에, 공지현이 긴장한 얼굴로 피디를 돌아보았다. 여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피디가 활짝 웃었다.
“오케이! 이거지! 이거야! 이야아. 내가 바란 게 바로 이런 거야!”
공지현과 여주인공의 얼굴도 밝아졌다.
피디가 제안했다.
“진짜 잘했는데, 한 번만 더 하자. 느낌 왔는데 이대로 끝내면 너무 아까워서 그래.”
그가 스태프들에게 지시했다.
“카메라 더 가져와! 예비까지 다 돌려서 다양한 각도로 찍을 거야. 누가 지현 씨 메이크업 좀 손봐줘. 조명도 신경 좀 써주고!”
현장이 바쁘게 움직였다.
드라마 작가가 다가왔다. 그녀는 방금 촬영은 보지 못했다.
“피디님. 나강인 씨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못 찾겠어요.”
피디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지금 당장은 안 찾아도 돼.”
“네?”
“배우 교체 안 할 거야. 공지현 씨로 쭉 갈 거야.”
“아니, 쟤는 연기력이….”
“김 작가도 같이 좀 봐. 교체 생각이 싹 사라질 테니까.”
카메라가 추가되고 조명도 공지현에게 집중된 상태에서 같은 씬을 다시 촬영했다.
공지현은 조금 전보다 더 자신 있게 연기했다. 피디의 눈에는 그녀에게서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오케이! 이거로 갑시다!”
드라마 작가가 멍한 얼굴로 촬영장을 보았다.
피디가 속삭였다.
“김 작가. 우리는 공지현 씨 교체 이야기는 꺼낸 적도 없는 거다. 알았지?”
드라마 작가가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내요? 그런 나쁜 생각은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려요.”
“공지현 출연 비중은 어떻게 할 거야? 원래 계획대로 갈 거야?”
이 드라마는 이미 대본이 다 나와 있지만, 상황에 따라 조금씩 수정되기도 한다.
“당연히 후반부 대본을 고쳐서 비중을 늘려야죠. 상대 배우가 쟤한테 안 밀리려고 눈빛까지 바뀌는 거 봤잖아요. 저러는데 어떻게 그냥 놔둬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드라마 작가가 살짝 불안해했다.
“그런데 설마 어쩌다 한 번 연기를 잘한 건 아니겠죠? 대본 다 고쳐놨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
“당연히 아니지. 공지현은 원래 연기 잘했어. 한동안 슬럼프가 왔는지 연기가 영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예전보다 훨씬 더 잘하네.”
촬영이 끝난 후에 공지현은 깨달았다.
그 지독하고 끈질기던, 지긋지긋한 진흙탕 같은 슬럼프가 드디어 끝났다.
그녀는 이제 카메라가 두렵지 않았다. 마지막 촬영 때는 두렵기는커녕 신이 났다.
올해 초에 선배 배우 몇 명이 그녀에게 연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를 몇 번 했다. 그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그녀는 그런 소리를 안 들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원래 스타일이 무너지고 연기할 때 감정 오버가 커졌다. 연기 개성도 점점 사라졌다. 연기에 힘을 주면 줄수록 전달력은 오히려 떨어졌다.
자신감이 없어질수록 연기도 점점 어색해졌다. 그걸 벗어나려고 노력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아까는 촬영장 구석에서 배우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그런데 이제 다 괜찮아졌다.
“나 오늘 잘했나 봐.”
그건 지금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나강인이 그녀의 표정을 교정해주긴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방금 그 좋은 연기를 해낸 건 아니다.
그동안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더 빨리 달리게 하는 채찍이 아니었다. 잘한다는 칭찬과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나강인이 오늘 바로 그걸 해주었다. 그녀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그녀가 그동안 슬럼프를 극복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방금 촬영할 때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녀가 활짝 웃었다.
“이제 괜찮아. 연기 진짜 잘하는 분이 나한테 잘한다고 했잖아. 내가 틀린 게 아니야.”
그녀가 나강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나강인이 해준 건 평범한 스태프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른 기획사의 연기 선생님이 온 거겠지?”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나강인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나강인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