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57화 (157/411)

157. 고전 명작

이연지가 친구 3으로 연기한 촬영이 끝났다.

신은하는 이연지를 차에 태우고 본가로 향했다. 그녀는 요즘은 주로 본가에서 지낸다.

이연지의 집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연지가 조수석에서 계속 쫑알댔다.

“와. 오늘 촬영 진짜 대박 아녜요? 너무 좋아요.”

신은하가 이연지를 오늘 친구 3이라는 단역에 꽂아준 건, 현장의 혹독함을 직접 경험해보고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기왕이면 원래 잘하는 공부에 더 집중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현장은 그녀의 예상과 많이 다르게 돌아갔다. 이연지에게 예정에 없던 짧은 대사가 생겼고, 공지현은 그동안 쌓았던 포텐을 터트렸다.

이연지가 물었다.

“공지현 언니요. 원래 연기를 그렇게 잘해요?”

“음…. 예전엔 잘했지. 그러다 한동안 슬럼프가 왔는데, 오늘 그걸 극복했더라.”

“와아! 멋있어!”

신은하가 충고했다.

“오늘처럼 욕먹던 배우가 현장에서 갑자기 화려하게 부활하는 일은 거의 없어. 그러니까 매번 촬영이 오늘처럼 멋지고 스펙터클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에이. 저도 알죠. 그러니까 은하 언니. 저 단역 또 꽂아주면 안 돼요? 대사 없어도 돼요. 병풍으로 서 있어도 돼요. 그냥 너무 재미있어서 그래요.”

“너 오늘 병풍은 아녔어. 쫌 하더라?”

이연지가 실실 웃었다.

“진짜요? 흐흐. 제가 원래 뭐든지 일단 손대면 쫌 하기는 해요.”

“나나 공지현에 비하면 반딧불 수준이지만.”

“엑!”

“그래도 학원에서 연기 배운 애들만큼은 했어.”

연기를 배운 적이 없는데 그 정도 했으면 재능이 있다고 봐야 한다.

‘얘 이러다 공부보다 연기에 더 관심을 가지는 거 아냐?’

***

신은하는 그날 저녁 나강인의 집에서 배달 음식 먹기로 했다.

배달을 시켜놓고 신은하가 물었다.

“오늘 철인기공하고 일한다고 한 거 말이야. 드래곤 플레이트에 관한 거야?”

“어. 회사에서 자체 양산형을 설계했더라고.”

신은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철인기공도 설계를 잘해?”

AI 전지인이 말했다.

- 쓰레기 마크 투를 만들어왔습니다.

“아니. 시간만 낭비했다.”

***

이연지가 친구 3으로 출연한 드라마는 이미 전체 회차의 절반쯤 방영된 상태다.

그 드라마는 촬영 일정이 여유가 없었다. 작가는 이미 대본을 다 써놓은 상태라 현장에 놀러 올 정도로 여유가 있지만, 촬영팀의 사정은 달랐다. 비축해놓은 초반 촬영분은 벌써 다 까먹었다.

이연지가 출연한 장면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방영됐다.

그녀가 병원 휴게실 TV 앞에서 자랑했다.

“앗! 봤어요? 저기 나 나왔잖아요!”

친구 1, 2, 3이 여주인공과 말싸움하는 장면이 먼저 나왔다. 이연지도 대사를 그럴듯하게 쳤다.

“흐흐흐.”

그 휴게실에는 그녀가 알았던 것과 같은 병을 앓는 권수연도 있었다. 권수연이 손뼉을 쳤다.

“어머. 너 연기 잘한다. 연기학원 다녔어?”

“아뇨. 처음 해본 건데 잘했다고 칭찬 많이 받았어요. 은하 언니가 저한테 연기 재능이 없다고는 못하겠대요. 그거도 칭찬 맞죠?”

“좋겠다. 그럼 이제 연예계로 갈 거야?”

“저 공부도 잘해요. 전교 1등!”

미래 에너지 기술의 핵심 중 하나인 이라미드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 권수연이 슬쩍 웃었다.

“에이. 전교 1등은 공부 조금만 하면 그냥 되잖아. 난 고등학교 때 그랬는데?”

“그쵸? 역시 언니랑은 말이 통한다니까!”

나강인은 권수연의 문병을 왔다가 붙잡혔다.

그가 두 사람 사이에서 말했다.

“너희들 많이 아프구나? 약 먹자.”

권수연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농담이야. 농담.”

“맞아요. 농담이죠. 아저씨가 농담을 모르네.”

“둘 다 진담 같았어.”

나강인이 TV를 보았다. 공지현과 여주인공의 대결이 시작됐다.

그녀의 표정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화내는 모습 속에서 슬픔이 느껴질 때는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탄식했다.

“아아.”

“저런.”

공지현과 여주인공의 싸움이 끝나고 장면이 전환되었다.

권수연이 말했다.

“저 사람 말이야. 그냥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봐. 어쩐지 안쓰러워 보여.”

이연지가 자기 일처럼 자랑했다.

“저는 저 때는 저 언니 뒤에 서 있어서 표정을 제대로 못 봤는데도 진짜 감탄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TV로 보니까 와…. 그날 생각하니까 막 눈물 날라고 하네요.”

나강인이 말했다.

“피디가 힘 빡 주고 편집했네.”

오늘 방송된 씬에는 세 개의 촬영본이 사용됐다.

한 번은 여주인공이 실수했고, 한 번은 제대로 찍었고, 마지막 한 번은 예비 카메라까지 가져다 놓고 다시 찍었다.

피디는 그 세 개의 촬영본에서 제일 잘 나온 부분을 잘라서 하나로 만들었다. 공지현과 여주인공은 물론이고 친구 1, 2, 3도 잘한 부분만 모아서 하나로 합쳤다.

그 이후에도 공지현이 나오는 장면이 더 있었다. 그녀는 이후에 찍은 다른 씬들도 연기를 잘했다.

그래도 첫 등장 장면이 제일 강렬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드라마 이야기가 올라왔다. 말싸움하는 부분만 보여주는 영상이 여러 게시판에 퍼졌다.

- 와. 연기력 살아있네.

- 공지현이 사나운 역할을 잘하는 듯.

- 오늘 저 드라마에서 저 장면이 제일 좋았습니다.

- 공지현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좀 어색한 연기만 하는 거 아녔어요?

- 작년에 나온 영화 보면 연기는 원래 잘했어요. 올해에는 연기력이 갑자기 사라졌는지 영 어색했는데 말이죠.

- 올해에 쭉 모은 연기력 에너지가 오늘 제대로 터졌나 보네요.

- 배우가 연기력을 숨김.

- 지난번 드라마에서는 연기 어색하다고 욕먹었는데, 어떻게 사람이 순식간에 이렇게 변하나.

- 오늘 다른 장면에서도 연기 다 잘했잖아요. 이게 진짜 실력일 겁니다. 그동안은 무슨 사정이 있었나 보죠.

- 진짜 오늘은 조연이 주연을 연기력으로 쌈 싸먹었네.

게시판에는 공지현 이야기만 나온 게 아니다. 친구 1, 2, 3 중에 3이 누군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생겼다.

- 공지현 뒤에 친구 역할로 나온 여자 중에 제일 오른쪽은 누군가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 신인배우겠죠.

이연지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 어? 쟤 우리 학교 친구인데요? 아니, 쟤가 왜 저기서 나와? 쟤 배우가 아니라 고등학생인데요?

- 배우 지망생인가 보네.

-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말이야! 드라마 촬영장이나 기웃거리고 말이야!

- 쟤가 우리 학교 전교 1등인데요?

- 전교 1등이 드라마까지? 재능충 다 꺼졌으면.

***

며칠 뒤에 나강인이 영화와 공연 전문 회사인 THO 엔터를 방문했다.

이태호 사장이 나강인을 반갑게 맞았다.

“자주 뵈었어야 했는데 요즘 좀 뜸했습니다. 제가 출장을 가는 바람에. 하하하.”

“민지는 과자 얻으러 자주 오던데요.”

“저도 덕분에 잘 먹고 있습니다.”

사장실에는 ‘햇살 좋은 날’ 조감독 변형찬도 있었다.

변형찬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나강인 무술감독님.”

“영화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렇게 부르세요?”

“어. 그게 말이죠.”

변형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시나리오를 하나 써뒀단 말 기억하시죠?”

AI 전지인이 즉시 반응했다.

- 고전 명작영화 ‘운명의 창’ 이야기입니다.

‘운명의 창’은 2082년 지구연합군 병사들에게 추천하는 고전 명작영화 중 하나다.

“물론이죠. 운명의 창.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지고 현대에 유물로 발견된 창을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

변형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정확히 기억하시는군요. 시나리오는 이미 다 써놨습니다. 제작을 맡아줄 영화사만 있으면 되는데….”

그 영화는 과거와 현대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그런데 그렇게 찍으려면 제작비가 많이 든다.

영화사 한 곳이 과거 이야기는 회상으로 처리하고 현대 이야기만 남겨 영화로 만드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제가 시나리오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날 이야기만 들어도 과거 이야기는 빼면 안 되겠던데요.”

“예. 그래서 그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김유찬 씨와 신은하 씨가 시나리오를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두 분 다 출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아. 잘됐네요. 그럼 영화화되기 쉽…. 음. 혹시 THO 엔터에서?”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웃었다.

“김유찬 씨가 권해서 저도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정말 좋더군요. 거기다 김유찬 주연에 신은하, 이보라 출연. 이보라 씨는 어디서 들었는지 먼저 연락했더라고요. 그리고 무술감독은 나강인. 이러면 우리 회사가 안 할 수가 없죠.”

“어…. 잠깐만요. 무술감독이 접니까?”

이태호가 변형찬을 돌아보았다.

“변 감독님?”

변형찬이 급하게 말했다.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왔을 때요. 분명히 액션을 맡아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AI 전지인도 다급히 말했다.

- 요원님! 고전 명작영화 ‘운명의 창’에 출연할 기회입니다! 이런 기회는 절대로 놓치면 안 됩니다!

“원래는 2032년에 나오는 영화잖아. 십 년이나 일찍 찍는데 그 퀄리티가 나올까?”

- 우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됩니다!

“우리 지인이가 막 지르는구나.”

나강인이 이태호에게 물었다.

“설마 이번에도 THO 엔터가 제작비를 전액 투자하는 건 아니죠?”

“저야 그러고 싶은데, 지난번에 큰일 날 뻔한 이후로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회사가 투자하는 건 30% 정도입니다.”

지난번에는 영화를 망하게 해서 THO 엔터도 망하게 하고, 그 여파를 이용해 철인기공의 경영권을 노리려던 놈이 있었다.

“시나리오를 돌리면서 주연이 김유찬이라고 했더니 나머지 70%의 투자금이 모이더군요. 나강인 씨는 아직 확정이 아니라 투자자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과거와 현대를 오가려면 제작비가 많이 들 텐데요.”

“과거 쪽은 제작비를 줄일 방법이 생겼습니다. 다른 영화에서 최근에 사용한 조선 시대 세트가 있는데, 그걸 인수해서 쓸 겁니다. 시나리오만 세트에 맞춰서 살짝 손보기로 했죠.”

변형찬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제가 그 세트를 확인해봤는데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겠더군요.”

AI 전지인이 졸랐다.

- 요원님. 이건 해야 합니다! 꼭 해야 합니다!

나강인도 그럴 생각이다. 그가 변형찬에게 말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도와드려야죠.”

변형찬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고맙습니다! 진짜 고맙습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참여하면 됩니까?”

“스태프는 이미 팀 단위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배우들만 다 모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찍을 수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정된 배우는 아직 김유찬, 신은하, 이보라 세 명밖에 없다.

“오디션이라도 보셔야겠네요.”

“물론이죠. 주요 배역들은 내일 지원자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보기로 했습니다. 하하하.”

“저도 조건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변형찬이 침을 꼴깍 삼켰다.

“말씀하시죠. 혹시 직접 출연하실 생각이시면 딱 좋은 배역이….”

“그건 아니고요. 제가 연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출연은 무리입니다.”

“그럼 무슨….”

“제가 바쁜 일이 많습니다. 스케줄을 무조건 조정해줘야 하는 날이 가끔 있을 겁니다.”

권수연의 수술 일정이 잡히면 영화가 아니라 그 일정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일정이 갑자기 바뀌면 제작비가 늘어난다.

그 대답은 이태호가 했다.

“강인 씨가 중요한 일을 많이 하는 분이라는 건 제가 압니다. 제작비가 얼마가 더 들더라도 스케줄은 당연히 맞춰드리겠습니다.”

***

나강인이 집으로 돌아왔다.

- 요원님.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지인아. 네가 이렇게 대중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다.”

- 고전 명작영화는 2082년에도 병사들에게 권장될 정도로 명작입니다. 참여할 가치가 있습니다.

“너 혹시 지구연합군 병사들이 네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걸 원하는 거야? 너도 배우가 되고 싶은 거 아냐?”

- 그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전투지원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몸속에 있어서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어. 미안. 엔딩 크레딧에 네 이름은 올라가게 해줄게.”

전화가 걸려왔다. ‘햇살 좋은 날’ 감독 손태민의 전화였다.

나강인이 전화를 받았다. 손태민이 외쳤다.

- 나는!

“뭐가요?”

- 내 영화 도와준다고 했잖아!

“손 감독님 영화는 이제 시나리오 쓰셨잖아요. 투자는 받으셨어요?”

- 나 손태민이야! 지금 투자비 모으는 게 걱정이겠어? 투자자들이 벌써 줄을 서고 있어!

“줄을 이제야 서는 거면, 영화 제작 들어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겠네요?”

- 그건 그렇지.

“변형찬 감독 영화는 손 감독님 영화 시작하기 전에 촬영 다 끝날 걸요?”

- 이야아. 형찬이가 이제 감독 소리를 듣는구나. 알았어. 그럼 형찬이 다음은 나다?

“봐서요.”

- 아니, 진짜 이러기야? 이거 강인 씨가 액션을 맡아주는 걸 전제로 쓴 시나리오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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