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58화 (158/411)

158. 오디션

이튿날 나강인이 영화사 THO 엔터를 다시 방문했다. 영화 제작 일정을 간단히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영화사 사장 이태호가 말했다.

“나 감독님이 도와주시니까 이제 액션씬 촬영 기간은 크게 단축되겠군요.”

변형찬 감독도 맞장구쳤다.

“액션만 맡아주시면 다른 촬영은 한 달 안에 끝내겠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한 달이요?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닌가요?”

“‘운명의 창’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찍어야 빨리 찍을지를 지난 몇 년간 고민해왔습니다. 제작비가 계속 걸림돌이어서, 틈만 나면 하던 게 그 작업입니다. 하하하.”

“아. 그럼 기간은 많이 줄어들겠네요.”

“게다가 오디션 지원자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졌습니다. 연기파 배우분들이 많으니까, 촬영이 원래 예정보다 더 빨리 끝날 겁니다.”

“다행입니다.”

변형찬이 제안했다.

“오늘 오디션 말입니다. 강인 씨도 같이 보실 거죠.”

“저도 오디션을 보라고요?”

“하하하. 농담도. 오디션 심사를 보셔야죠.”

나강인이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는 연기를 모릅니다. 출연배우는 감독님이 알아서 결정하시죠.”

주연배우 김유찬이 옆에서 말했다.

“에이. 이태호 사장님에게 듣기론 강인 씨 연기 잘한다던데.”

변형찬 감독이 이태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요?”

이태호는 그의 연기력을 강남 자칼 사건 때 직접 보았다.

그런데 그 사건을 나강인이 해결했다는 건 관계자들만 아는 대외비다.

당황한 이태호가 두루뭉술하게 설명했다.

“어…. 그러니까 전에 우연히 봤는데, 표정 연기와 목소리 연기가 진짜 실감 났습니다.”

변형찬이 다시 제안했다.

“이렇게들 이야기하시는데, 강인 씨도 오디션 심사를 같이 보시죠?”

나강인이 딱 잘라 거절했다.

“흉내나 좀 낼 줄 아는 제가 프로 배우들을 함부로 평가하는 건 아니다 싶군요. 사양하겠습니다.”

***

공지현은 며칠 전에 방송된 드라마에서 좋은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그녀가 연기한 건 여자 주인공과 싸우고 일도 방해하고 얄미운 짓도 하는 역할이다. 그런데도 시청자의 반응이 좋았다.

반응이 잠깐 좋았다고 해서 그 드라마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다. 대본이 수정되면서 출연 횟수가 원래보다는 많아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촬영하면 되는 조연이다.

그녀가 연기 감각을 계속 살리고 시청자에게 어필도 하려면 미리 다른 영화나 드라마를 준비해야 한다.

공지현은 어차피 주연급이 아니라 촬영 없이 쉬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은 신인감독 변형찬의 영화 오디션을 보러 왔다.

그녀가 오디션 장소 근처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소가 이 근처였는데…. 저쪽인가?”

그녀가 목적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강인이 길 건너편을 걸어가는 걸 발견했다.

“어? 앗!”

그녀가 얼른 손을 흔들며 외쳤다.

“저기요! 선생님!”

나강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아저씨! 오빠!”

젊은 아가씨가 대놓고 소리를 질러댔다. 다양한 호칭에 맞는 여러 나잇대의 사람들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나강인도 고개를 돌렸다가 공지현과 눈이 마주쳤다.

공지현이 얼른 마스크를 내리고 선글라스를 벗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난 애송이입니다.

공지현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거기 계세요! 제가 건너갈게요!”

도로를 직접 건너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런데도 공지현은 도로에 뛰어들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나강인이 5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손짓의 의미를 깨달은 공지현이 횡단보도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신호는 빨간불이었다. 그녀는 신호등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파란색 보행 신호가 뜨자마자 도로를 건넜다.

나강인은 천천히 걸어왔다. 그렇게 해도 공지현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에 그 앞에 도착했다.

공지현은 도로를 건너자마자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또 보네요?”

“진짜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근처에서 아는 사람이랑 일 이야기를 하고 가느라고요.”

“아. 그렇구나. 아참.”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도와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나강인도 인사 삼아 말했다.

“드라마 봤어요. 잘하던데요.”

“히히. 보셨구나. 고맙습니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사라진 나강인을 길에서 다시 만나서, 그녀는 지금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 나강인의 이름도 모른다. 뒤늦게 그게 생각났다.

“그런데요. 성….”

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그녀의 바로 옆에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 유리는 이미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몸을 옆으로 숙이며 외쳤다.

“지현아! 너 여기서 뭐 해? 이러다 늦겠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어? 실장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녀의 소속사 매니저가 다급히 설명했다.

“네가 연락이 안 돼서 직접 왔다! 너 전화기 어쨌어?”

공지현이 스마트폰을 다시 확인했다.

“아. 이게 무음 모드로 바뀌어 있네요. 바꿔놓고 깜빡했어요.”

“빨리 타.”

“네? 저 오디션 보러 가야 하는데요?”

“그 오디션 때문에 내가 지원 나왔다. 빨리 가자.”

“알았어요. 잠깐만요.”

공지현이 나강인 쪽을 돌아보았다.

“일단 전화번호만 좀 찍어주시…. 어?”

나강인이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가 물었다.

“왜? 같이 이야기하던 사람? 갔는데?”

공지현은 당황했다.

“아니, 언제요?”

“내가 너 부르자마자 시계 보더니 가더라.”

“그러면 안 되는데….”

매니저가 경계했다.

“왜? 누군데? 설마 너…. 설마 이 중요한 시기에 연애하는 건 아니지?”

공지현이 두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빨리 타! 오디션 시간 늦으면 감점 백 점 먹고 시작하는 거야.”

***

영화 ‘운명의 창’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도 몇 명 있었다.

공지현은 이 영화가 신인감독의 입봉작이라고 들었다. 주연배우가 김유찬이지만 그래도 다른 영화보다는 실질 경쟁률이 낮을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장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 달랐다.

“분위기 장난 아니다.”

매니저가 옆에서 설명했다.

“시나리오가 잘 나왔잖아. 거기다 남자 주인공은 김유찬 확정이고, 신은하와 이보라도 출연한대.”

“알아요. 그래도 이렇게 경쟁이 치열할 줄은 몰랐어요.”

“그 정보가 공개되기 전에는 실질 경쟁률이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네? 그 정보라니요?”

매니저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술감독 나강인 알지?”

공지현이 손뼉을 쳤다.

“앗! 당연히 알죠. ‘햇살 좋은 날’이랑 ‘푸른 하늘’ 무술감독님이잖아요. 극장에 걸리지도 못할뻔한 햇살 좋은 날이 천만 영화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고, 푸른 하늘도 나강인 감독님이 액션을 맡은 후부터 시청률이 확 올라갔잖아요.”

“나강인을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저도 그분과 액션 연기를 꼭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은하 언니나 보라 언니가 너무 부러웠어요.”

작년만 해도 신은하, 이보라, 공지현의 인지도는 비슷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서 있는 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 신은하와 이보라는 떴고, 공지현은 추락했다.

그녀는 신은하와 이보라가 뜨는 데 나강인의 역할이 컸다는 걸 안다. 그래서 기회를 잡은 두 사람을 많이 부러워했다.

매니저가 말했다.

“그 나강인이 이 영화에 참여하기로 확정됐다.”

공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진짜요?”

“그 소식이 어제부터 퍼졌거든. 그래서 갑자기 오디션 경쟁률이 올라갔어. 반응이 시큰둥하던 회사 몇 곳이 적극적으로 돌아섰다더라.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이렇게 많은 분이….”

“오늘 오디션은 보려던 배역들은 지원자가 많아서 내일까지 연장한다더라. 급이 되는 배우들은 여기 안 오고 감독과 따로 만난대. 그러니까 지금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 아니야. 실질 경쟁률은 더 치열해.”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 중에는 매니저와 같이 온 사람들도 있었다.

공지현은 왜 매니저가 따라왔는지 깨달았다.

“아!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도 실장님이 나오신 거구나.”

“아니, 난 사실 나강인이 아니더라도 널 지원하려고….”

“괜찮아요.”

“험험. 어쨌든, 지금 배역이 확정된 건 남주 김유찬밖에 없어. 여주는 신은하나 이보라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긴 한데, 그 자리는 확정은 아니거든. 신은하나 이보라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여배우들이 갑자기 참전했다더라.”

“부럽다.”

그녀가 오늘 노리는 자리는 주연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비중 있는 조연이다.

“상황이 이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오디션을 봐. 네가 노리는 배역이 되면 당연히 좋지만, 다른 배역을 받아도 너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일단 오디션 통과를 목표로 하자.”

공지현도 각오를 다졌다.

“알았어요.”

***

오디션 심사는 감독 변형찬과 영화사 사장 이태호, 그리고 남자 주연배우 김유찬이 맡았다.

김유찬은 주연배우라서 심사위원석에 앉은 게 아니다. 김유찬이 처음부터 주연을 맡겠다는 선언하고 THO 엔터까지 끌어들인 덕분에 이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다.

공지현이 심사위원들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변형찬이 인사말을 했다.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에서 연기하신 거 봤습니다. 좋던데요.”

“고맙습니다!”

“소연 배역을 지원하셨는데, 시작하시죠.”

소연은 칼을 잘 쓰는 조선 시대 여자 무사의 이름이다. 같은 얼굴과 같은 이름을 가진 회사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공지현은 먼저 조선 시대 무사인 소연을 연기했다.

그 시대의 소연은 무뚝뚝했다. 말투는 항상 절도가 있었고, 조금만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그녀는 적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도 연기했다. 빈손으로 연기했는데도 그 싸늘한 눈빛 때문에 진짜 칼로 적을 베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검을 적들에게 겨누며 서슬이 시퍼런 목소리로 선언했다.

“나를 지나가려 하는 자는 모두 벨 것이다!”

변형찬은 그녀의 연기를 보며 생각했다.

‘사극을 찍어도 잘하겠네.’

살벌하던 공지현의 연기가 갑자기 현대의 회사원 소연으로 바뀌었다.

현대의 소연은 일상생활에서 실수를 연발하는 아가씨다. 아는 사람이 가볍게 던져준 물병을 놓치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다가 흘리기도 했다. 양말을 짝짝이로 신는 날도 많았다.

“에헤헤헤.”

그녀는 실수할 때마다 헤실헤실 웃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실수해도 밉지가 않았다.

“그래도 제가 과일은 엄청 잘 깎는다고요.”

실수가 많은 그녀지만 과도로 과일을 깎는 것 하나는 굉장히 잘했다. 남들이 사과 하나 겨우 깎을 시간에 그녀는 사과를 쪼개 토끼 여덟 마리를 만들었다.

공지현이 보여준 연기는 모두 영화 ‘운명의 창’ 시나리오에 있는 것이다.

감독 변형찬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오래 다듬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모든 배역의 원하는 이미지가 디테일하게 들어있었다.

공지현이 보여준 건 변형찬이 그리던 이미지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조금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 있는 소연의 이미지를 조금 수정해보았다. 그가 시나리오를 쓸 때 생각한 것보다 공지현이 지금 보여준 연기가 더 좋았다.

‘잘하네.’

변형찬은 공지현이 지난주 드라마에서 보여준 그 복잡한 표정 연기를 떠올렸다.

‘시나리오를 조금 고칠까? 조선시대 소연의 복잡한 마음을 관객이 눈치채게 하고, 현대의 소연이 가진 슬픔도 좀 드러내고.’

그런 설정은 이미 예전에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그 설정은 시나리오에는 빠져 있었다. 그 설정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를 추가하면 영화가 그만큼 늘어지기 때문에 일부러 삭제했다.

‘시나리오를 조금만 손보면, 표정 연기만으로 그 설정을 다 표현할 수 있겠는데?’

시나리오를 어떻게 고쳐야 적절할지는 금방 떠올랐다. 그는 오디션 참가자의 평가를 적어야 할 종이에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를 부지런히 썼다.

김유찬도 공지현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다.

“이야아. 연기 잘하는 분인 건 알았는데, 좋네요.”

공지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이걸 물어봐도 될지….”

“다 물어보셔도 돼요!”

김유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작년에 공지현 씨가 출연한 작품들을 보면서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연기력에 관해서 안 좋은 말이 많았죠?”

“아, 네. 제가 그동안 슬럼프가 좀….”

그녀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어요. 최근에 본 드라마나 오늘 연기를 보면 슬럼프는 완전히 벗어났나 봅니다. 일단 그건 축하하고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슬럼프를 그냥 벗어난 게 아니라 연기력이 대폭 업그레이드돼서 돌아왔는데, 방법이 뭡니까?”

공지현이 그날 일을 떠올리고 방긋 웃었다.

“제가요. 그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만난 분에게 연기를 잠깐 배웠거든요. 그러고 나니까 슬럼프가 저절로 사라졌어요.”

“그날 그 현장에서요?”

“네. 제가 그때 구석에서 혼자서 난 왜 연기가 안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그분이 지나가다가 보시더니 잠깐 가르쳐주셨어요.”

“잠깐 배운 것만으로 슬럼프를 탈출해요? 도대체 누가 뭘 어떻게 가르쳤길래….”

공지현이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먼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셨어요. 그분 표정 연기를 직접 보면 정말 감탄밖에 안 나와요. 그런 후에 제 표정을 밀리미터 단위로 교정해주셨어요. 저도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 있게요. 그리고요.”

공지현이 활짝 웃었다.

“잘한다고 칭찬해주셨어요.”

그게 제일 중요했다.

김유찬은 감탄했다.

“밀리미터 단위로 교정하다니. 와.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가르쳐준다고 그 자리에서 해낸 공지현 씨도 대단하네요.”

“감사합니다!”

김유찬이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연기력을 가진 분이면, 제가 아는 배우겠는데요?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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