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연락
공지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 번도 못 본 분이에요. 제 생각에는 그날 출연하는 다른 배우의 연기 선생님이신 것 같아요.”
변형찬 감독이 볼펜을 내려놓으며 반가워했다.
“그런 훌륭한 연기 트레이너가 있으면 우리도 도움을 받고 싶군요.”
모든 배우가 감독이 원하는 연기력을 가진 건 아니다.
연기를 잘할 줄 알고 뽑았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서는 당황하게 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투자자가 밀어서 뽑았는데 기대보다 못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공지현 씨의 말대로라면, 영화판에 꼭 필요한 인재야.’
배형찬이 질문했다.
“그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공지현은 시무룩해졌다.
“아직 이름도 몰라요.”
“어? 잠깐이지만 연기를 배웠다면서 연락처도 안 받았습니까?”
“그 촬영장에 계속 계실 줄 알고…. 일찍 가셨나 봐요.”
“그럼 그 이후로 본 적이 없겠네요?”
“아뇨! 만났어요!”
공지현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오늘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어요. 두 번이나 만났으니까, 한 번만 더 만나면 세 번이에요. 세 번이나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라면, 운명이 아닐까 싶어요.”
THO 엔터 사장 이태호가 끼어들었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영화를 찍기도 전에 스캔들은 좀….”
공지현이 깜짝 놀라 손을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 그냥 연기자로서 존경하는 거예요!”
***
공지현이 출연하는 드라마에서 그녀의 비중이 늘어났다. 자주 나오는 건 아니지만 감초라고 해도 될 만큼은 출연했다.
공지현의 친구 1, 2, 3 역할인 단역 세 명은 원래는 한 번만 출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방송이 나가고 세 명에 대한 반응이 제법 괜찮았다. 그래서 대본이 수정될 때 셋 다 이번에도 출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대사는 한 줄밖에 없는 단역이지만 그래도 세 사람은 마냥 좋았다.
세 사람은 공지현과 같이 출연하기 때문에 촬영 순서를 기다릴 때도 같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촬영 전에 공지현이 워낙 다운되어 있어서 말을 걸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금 공지현은 굉장히 밝았다. 여고생 하나, 스무 살 둘, 스물한 살 하나가 한자리에 모였다. 자연스럽게 수다가 쏟아졌다.
그러다 공지현이 그저께 오디션을 본 이야기를 했다.
“오디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는 있는데,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안 될지도 몰라.”
이연지가 물었다.
“무슨 작품인데요?”
“신인 감독님 입봉 영화야. 운명의 창이라고….”
이연지가 손뼉을 쳤다.
“앗! 우리도 그 영화 오디션 봤어요! 와. 이런 우연이!”
“응? 거기서 너희들을 못 본 것 같은데?”
“우리는 어제 오디션을 봤어요.”
“그렇구나. 어? 잠깐만.”
공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는 소속사가 없는데 그 오디션을 어떻게 알았어?”
“은하 언니가 알려줬죠. 그 언니가 우리 동네 아는 언니거든요.”
“아. 그 언니는 출연 확정이지. 주연이냐 아니냐만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어.”
이연지가 활짝 웃었다.
“그럼 그 영화도 언니랑 같이 찍겠네요? 아는 언니들이 많아서 진짜 좋아요.”
공지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먼저 오디션에 합격해야지.”
“네? 우린 합격했는데요?”
공지현은 당황했다.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오늘 연락 왔는데요?”
“난 연락이 없었는데?”
이연지가 머뭇거렸다.
“어…. 이상하다. 지현 언니가 떨어질 리가 없는데.”
공지현은 조금 초조해졌다. 단역 배우들은 연락을 받았는데 조연인 그녀는 소식이 없었다.
“심사위원님들이 나보고 연기 잘한다고 했는데 왜….”
그녀는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그 초조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피디가 촬영 중간에 컷을 외친 후에 말했다.
“공지현 씨. 요즘 연기 잘하더니 갑자기 왜 이래?”
“죄송합니다!”
“아냐. 괜찮으니까, 공지현 씨는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하자. 그동안 다른 씬 먼저 찍을 테니까.”
피디의 목소리는 지난번과 달리 그녀가 실수해도 부드러웠다.
공지현의 어깨가 다시 처졌다.
그녀가 자리에 돌아와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매니저의 전화였다.
매니저는 톡도 보냈다. 공지현이 내용을 확인했다.
- ‘운명의 창’ 오디션 합격했다. 소연 배역은 네 거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글씨를 다시 확인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며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
“됐다!”
그녀가 얼른 피디에게 뛰어갔다.
“피디님! 다시 찍으면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지금 바로 찍으면 정말 잘할게요!”
***
며칠 뒤에 THO 엔터가 출연배우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다과회를 마련했다. 장소는 영화사 회의실이었다.
감독 변형찬이 말했다.
“우리 영화에 출연하시는 분들이 서로 얼굴이라도 익히시라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오신 김에 수정된 대본도 가져가시고요.”
변형찬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촬영 일정이 꽤 타이트하게 진행될 겁니다. 빠른 대본 숙지를 부탁드립니다. 스케줄 조정이 불가능한 분은 미리 말씀해주십시오.”
오세나가 손을 들었다.
“다른 스케줄을 못 바꾸면 이쪽에서 조정해주시나요? 아니면 바로 탈락인가요?”
“예? 하하. 그게…. 오세나 씨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저희가 조정해 드려야죠.”
“어머. 마음에 든다.”
신은하가 끼어들었다.
“근데요. 세나 언니는 여기 왜 있어요?”
“나야 소문 듣고 왔지. 시나리오 잘 나왔고, THO 엔터가 작정하고 만들고, 감독님은 손 감독님 제자고, 출연배우 빵빵하고, 무술감독이 나강인 씨잖아.”
“그거야 우리한테나 중요한 일인데 언니가 여기 왜 왔냐니까요?”
오세나가 웃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어머. 내가 들은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여주인공 자리가 확정이 아니라더라?”
“언니는 후보에 없거든요?”
“어제까지 없었던 거겠지. 난 지금부터 참전하려고.”
그녀가 변형찬에게 말했다.
“감독님. 나 오세나예요. 내가 여주인공을 맡으면 투자받기 더 편할 걸요?”
변형찬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투자는 이미 다 받아서….”
“어머. 그래서 내가 싫으시다? 우리 지난번 영화 찍을 때 내가 감독님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는데 이러기에요?”
오세나는 ‘햇살 좋은 날’의 주연배우이고 변형찬은 그 영화의 조감독 출신이다. 두 사람은 영화 하나를 같이 찍은 사이다.
‘그때 손 감독님 말도 잘 안 들었으면서 조감독이던 내 말을 들었을 리가….’
그렇다고 오세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외모와 연기력, 대중의 인기 모두 최상급인 배우다.
변형찬이 말했다.
“여주인공은 아직 확정이 아니긴 한데 말이죠.”
“역시 그렇죠? 그럼 한번 믿고 써봐요. 내가 또 실망시키지 않는 배우잖아요?”
신은하가 발끈했다.
“아니, 감독님! 여자 주연은 나 주는 거 아녔어요? 내가 이 영화가 시나리오만 있을 때부터 여주인공 하겠다고 했는데!”
‘햇살 좋은 날’을 찍을 때만 해도 신은하는 오세나의 경쟁상대가 아니었다. 그때 주연 경쟁이 붙었다면 당연히 오세나의 압승이다. 실제로 ‘햇살 좋은 날’의 여자 주연은 오세나였다.
그런데 그 영화가 천만을 돌파하면서 주연급 조연이던 신은하도 많이 떴다. 여전히 오세나가 더 유명하지만, 신은하도 오세나에게 비벼볼 만큼 성장했다.
이보라도 얼른 손을 들었다.
“나도! 나도 주연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잖아요!”
이보라는 피시방 고정석에서 나강인이 파는 밥을 먹다가 그가 무술감독으로 참여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영화가 준비되기도 전에 변형찬을 찾아가 출연하겠다고 했다.
이보라는 드라마 ‘푸른 하늘’로 인지도가 올라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세나에게 비벼볼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신은하를 상대로 경쟁할 만큼은 된다.
세 사람 중에서는 오세나가 제일 유명하고, 그다음이 신은하이고, 마지막이 이보라다.
변형찬은 잘나가는 여자 배우 세 명이 주연 자리를 놓고 눈에 불꽃이 튈 정도로 싸우는 모습을 보며 감동했다.
‘나에게 이런 행복한 날이 올 줄이야. 눈물이 나려고 하네.’
공지현은 조연인 소연 역할로 배역이 확정됐다.
이곳에 모인 배우들이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인 건 아니다. 배우들은 어색함을 없애려며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공지현의 연기력 이야기가 나왔다.
신은하가 물었다.
“내가 그때 드라마 촬영현장에 있었잖아. 그날 중간쯤에 연기가 갑자기 좋아지더니, 그 후부터는 옛날 감을 완전히 찾았더라?”
이보라도 한마디 했다.
“옛날보다 더 좋아졌지.”
“맞아. 어제 방송한 것도 봤는데 거기서도 되게 좋더라. 그런데 그 연기를 가르쳐준 사람이 있다며?”
공지현이 그날 일을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날 촬영장에서 다른 배우님의 연기 선생님을 만났거든요. 그분이 가르쳐주셨어요.”
신은하가 감탄했다.
“와아. 도대체 얼마나 잘 가르치면 한 방에 슬럼프를 극복시켜?”
“진짜 어마어마하세요.”
“가르치는 것만 잘하셔?”
“아뇨. 연기력도 진짜 엄청나세요. 저 같은 건 상대도 안 돼요.”
“나도 그분한테 연기 좀 배우고 싶다.”
이보라가 맞장구쳤다.
“나도.”
공지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선배님들은 연기 잘하시잖아요.
신은하가 손을 흔들었다.
“에이. 아니야. 난 저기 저 잘생긴 얼굴밖에 장점이 없는 유찬 오빠보다도 연기를 못해.”
한쪽에서 크래커에 치즈를 얹고 있던 김유찬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화살이 왜 나한테 날아오지? 그리고 그거 칭찬이냐? 욕이냐?”
신은하가 시선을 슬쩍 피하며 말했다.
“얼굴 잘생겼고, 연기력도 나보다 좋다고 한 건데요? 당연히 칭찬이죠.”
“그치? 그런데 이상하게 욕으로 들린다.”
공지현은 신은하의 말을 듣고 당황했다.
“네? 김유찬 선배님은 탑스타인데….”
‘감히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닌가?’
그녀가 보기에 탑스타 김유찬은 신은하가 대놓고 비교할 위치가 아니다.
신은하가 물었다.
“왜? 비교하면 안 되나?”
그녀가 얼른 두 사람의 반응을 보았다. 김유찬은 그런 비교에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다. 둘이 친해 보이기도 했다.
“당연히 되죠.”
김유찬이 갑자기 실실 웃으며 공지현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랑 은하가 동급이란 소리야?”
“앗! 그, 그게요! 그러니까, 아! 어떤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님하고 원균도 비교….”
신은하가 발끈했다.
“메이야? 누가 원균이야!”
“노, 농담이에요!”
***
권수연은 퇴원해서 집에서 지낸다.
그녀가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쯤 왔어?”
- 거의 다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이 5분 남았다고 하네.
“알았어.”
권수연의 몸 상태는 조금만 뛰어도 쓰러질 정도로 안 좋다. 그래서 요즘은 집에서 멀리 나가는 날이 드물었다.
그런 그녀도 가끔은 외출을 한다. 오늘은 학교 연구실에 가야 하는 날이다.
권수연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동진이 물었다.
“오늘 네 친구…. 나강인하고 가는 곳이, 학교 맞지?”
“응. 내 연구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가자고 했어.”
권동진은 나강인이 닥터 노네임이라는 걸 안다. 권수연은 태양전지 기술을 연구한다.
‘의사가 왜 태양전지 기술을….’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닥터 노네임은 수연이의 상태를 잘 아니까, 무리하지 않게 잘하겠지.’
“그래. 잘 다녀와라. 너무 늦지 말고.”
***
나강인은 폐차 직전의 차를 사서 AI 전지인의 도움으로 수리했다.
그냥 수리만 한 게 아니라 내부에 방탄판도 추가했다. 방어력을 높일 수 있는 다른 부분도 보강했고 전투 보조장치도 달았다.
비상용 고속질주 모듈도 추가했다. 그 기능은 일단 사용하면 엔진을 날려 먹을 수도 있어서 급할 때만 써야 한다.
그런 다양한 개조 때문에 차의 무게가 늘어났다. 엔진은 낡았는데 차가 무거워져서, 언덕을 올라갈 땐 조금 힘들어하는 소리가 난다.
그는 그 차를 몰고 권수연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권수연에게 바람이 쐬고 싶으면 선풍기를 틀라고 하십시오.
나강인이 먼저 연구실을 구경하고 싶다고 한 게 아니다. 권수연이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한 게 먼저였다.
“학교 연구실에 가는 건 우리 임무와도 관련이 있어. 이라미드 태양전지 기술을 직접 보면 뭔가 생각나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 저는 초기 저장 메모리 외에는 활동 기록이 없습니다. 그걸 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데이터가 저절로 생성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너 말고 나 말이야. 혹시 나도 이라미드 기술에 대해서 아는 게 있을지 아냐?”
-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나 무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