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홍보
양용준이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나강인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잡아먹을 듯이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라도 되냐?”
“여기를 어떻게 들어왔지? 율명바이오는 오늘 세미나와 관계없으니까 수연이가 초대권을 구해준 건 아닐 텐데?”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넌 수연이가 뭘 연구하는지 모르나 보다?”
권수연의 연구도 이 세미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런데 그녀가 연구하는 에너지 기술은 첨단공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양용준이 아는체했다.
“내가 왜 몰라? 수연이는 밧데리를 연구하잖아.”
“어. 그래. 그렇게 알고 있어라.”
양용준이 주변 사람들을 슬쩍 살피며 으르렁댔다.
“너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다. 피시방에서 밥이나 파는 놈이 여기 왜 왔냐니까?”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내 뒷조사를 했네?”
- 뒷조사 수준이 하찮습니다.
나강인이 피시방에서 가끔 밥을 판다는 건 아는 사람이 많다.
그가 해커 사냥꾼 새벽토끼라는 건 같이 일해본 관련 업계 사람만 안다.
나강인이 용병이나 해적들을 때려잡은 요원이라는 건 대외비다.
그가 닥터 노네임이라는 건 몇 명만 아는 극비 사항이다.
그리고 그가 지구연합군 출신이라는 건 극비 중의 극비다.
양용준이 알아낸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피시방까지였다.
나강인이 대답했다.
“내가 이 기술에 관심이 많아서.”
“주방장이 첨단공학을 어떻게 알아!”
“그러는 넌? 양아치가 여긴 왜 있냐? 오늘 발표를 알아듣기는 하냐?”
양용준이 화를 벌컥 냈다.
“뭐? 너? 감히 나한테 너?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고!”
“화나는 포인트가 그거였냐?”
양용준이 주변을 힐끗거렸다.
이 세미나에는 여러 기업체의 고위층이 참석했다. 그중에는 양용준이 눈치를 봐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가 여기서 나강인과 치고받고 싸우면 바로 업계에 소문이 퍼진다.
양용준이 주변 눈치를 보며 이를 갈았다.
“너. 나중에 두고 보자.”
“그러든가.”
양용준이 씩씩대며 그 자리를 떠났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런데 쟤는 이름이 뭐지?”
- 모릅니다.
나강인이 초대권의 좌석 번호를 확인했다. 앞쪽 자리였다. 그런데 거기 앉으면 중간에 빠져나가기 어렵다.
“뒤쪽 빈자리에서 시간 좀 보내다가 저쪽으로 넘어가자.”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이 발표회장으로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뒤쪽에서 나강인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강인 씨가 먼저 왔군요.”
“본부장님은 발표자라서 이쪽에 안 앉으실 줄 알았는데요.”
“안 그래도 제일 앞줄에 자리가 있습니다. 강인 씨도 앞쪽일 텐데….”
나강인의 초대장은 이태성이 구해주었다.
“전 여기가 편해서요.”
이태성이 씩 웃으며 자랑했다.
“오늘 여기서 드래곤 플레이트 개념을 간단히 설명할 겁니다.”
“어…. 설계팀은 여전히 쓰레기만 만들던데요?”
“하, 하하. 설계팀은…. 노력 중입니다. 실력은 있는 친구들인데 이게 워낙 어려운 개념이라서….”
“그럼 철인기공 설계팀도 모르는 걸 본부장님은 어떻게 설명하시려고요?”
이태성이 큰소리쳤다.
“우리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직접 설계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어떻게 그런 방어력이 나오는지 그 개념 정도는 압니다. 오늘은 개념만 설명해야죠.”
“그것만 발표하러 오신 건 아닐 것 같은데요.”
“당연하죠. 그러면서 드래곤 플레이트의 방어력과 가벼운 무게, 얇은 두께를 실컷 자랑할 겁니다. 오늘 우리 발표가 끝나면 언론 기사가 좀 나갈 겁니다.”
“기술자랑을 하시려고요?”
“물론입니다. 기술자랑도 실컷 하고, 홍보를 통해 드래곤 플레이트 양산형의 판매도 늘릴 겁니다.”
그건 나강인에게도 좋은 이야기다. 양산형의 판매가 늘면 나강인이 받는 라이센스비도 늘어난다.
“대박 나세요. 진심입니다.”
“대박이 나려면 맞춤형 설계를 더 많이 해주셔야….”
“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
“드래곤 플레이트를 발표할 때 강인 씨의 이름도 넣을까요? 설계팀장 자리에요. PPT는 지금이라도 수정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손을 흔들었다.
“제 이름은 앞으로도 계속 빼주시죠.”
***
이태성이 단상 위에 올라갔다. 그의 뒤쪽 대형 스크린에는 드래곤 플레이트의 사진이 크게 떠 있었다. 그는 기술적인 부분은 개념만 설명하고 나머지는 자랑으로 채웠다.
실사격 테스트는 공개하지 않고 CG로 대체했지만, 그 방탄조끼가 9mm 탄환을 충분히 방어한다는 점은 적극적으로 자랑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그는 발표 중간에 갑자기 셔츠의 앞을 두 손으로 잡아 뜯었다. 단추가 떨어지며 셔츠가 찢겨나갔다. 셔츠 속에서 그가 입고 있는 드래곤 플레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분에게 드래곤 플레이트 실물을 공개합니다!”
관객들은 박수를 쳤다.
“우와. 와이셔츠 속에 방탄조끼를 입고 있는 줄은 몰랐어.”
“퍼포먼스 장난 아니다.”
양용준도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죽이네. 와.”
양용준에게 방탄조끼는 필요 없다. 그런데 그는 있어 보이는 물건은 필요가 없더라도 갖고 싶어 한다.
“저거 얼마야? 당장 하나 사야겠다.”
화면에 두 가지 버전의 드래곤 플레이트 사진이 나타났다. 겉모양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른쪽 사진에는 드래곤 플레이트가 하나만 있고, 왼쪽에는 여러 개가 모여 있었다.
이태성이 맞춤형과 양산형의 차이를 설명했다.
“맞춤형 드래곤 플레이트는 고객의 몸에 딱 맞춰서 설계부터 다시 합니다. 장비에 최고의 방어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죠.”
그가 왼쪽을 가리켰다.
“반면에 보급형은 기성품 양복 같은 개념입니다. 이건 저희가 미리 준비한 제품과 딱 맞는 체형을 가진 분만 구입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보급형은 당일 구입이 가능합니다.”
양용준이 실실 웃었다.
“더 마음에 드네. 나한테는 당연히 맞춤형이 어울리지. 옷을 나한테 맞춰야지 내가 옷에 맞춰야겠어?”
이태성이 단서를 달았다.
“최첨단 기술로 매번 새로 설계되는 맞춤형은 극히 제한된 고객에게만 판매됩니다.”
양용준은 그 부분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남들은 못 입고 나만 입으면 더 좋잖아.”
이태성의 발표가 끝났다.
동시에 드래곤 플레이트 관련 기사가 언론사를 통해서 나왔다. 비록 검색어 순위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된 건 아니지만, 관련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빠른 속도로 그 기사가 퍼졌다.
관련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그 기사가 올라왔다.
댓글이 바로 붙었다.
- 이거 진짜입니까?
- 진짜입니다. 드래곤 플레이트는 실제로 판매되는 제품입니다.
- 방탄과 방검 기능이 다 있는데도 옷 속에 입어도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얇다고요?
- 그래서 대단한 거죠.
- 그렇게 얇은데 적의 총탄에 맞는 중에도 안정적인 반격이 가능하고요?
- 그 부분은 실전 데이터도 있다더군요.
- 와. 이거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백화점에서 팔까요?
- 보급형은 개인에게도 팔긴 하는데, 철인기공이 가지고 있는 설계도 중 하나와 몸이 맞아야만 효과가 있습니다.
- 그럼 사람이 물건에 몸을 맞춰야 하나요?
- 그렇죠.
- 고객의 몸에 맞춰 재설계하는 것도 있다면서요.
- 그건 각국 정부 정도는 되어야 오더를 넣을 수 있을 걸요? 그나마도 생산량이 적어서 받기 어렵다던데요.
***
양용준에게 그의 아버지인 팔성테크 사장이 전화를 걸었다. 양용준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 너 지금 드래곤 플레이트 발표회장에 있다면서?
“네. 드래곤 플레이트 발표는 끝났는데 다른 업체의 기술 발표가 아직 안 끝났습니다.”
- 거기 간 김에 하나 구해봐라. 내가 입을 거로.
“예? 아버지가 지금 막 발표한 제품을 어떻게 아시고….”
- 김 비서가 기사를 보여주더라. 구할 수 있겠냐?
이태성이 큰소리쳤다.
“당연하죠. 제 것까지 맞춤형으로 두 개 사겠습니다.”
***
나강인은 첨단공학 세미나 중간에 인공태양 기술 발표장 쪽으로 슬쩍 넘어갔다. 그는 뒤쪽 빈자리에 앉아서 기술 발표를 들었다.
이쪽에서는 인공태양 하나만 다룬다. 그래서 첨단공학 세미나보다 행사 시간이 짧았다.
기술 발표가 모두 끝난 후에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지인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냐?”
- 저의 이해력은 요원님과 비슷합니다.
“누워서 침 뱉는 건 그만하기로 한 거 아냐?”
- 성과가 있습니다. 오늘 발표한 기술의 원리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과는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 단서가 몇 개 나왔습니다만,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한 번에 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잖아. 단서라도 나온 게 어디냐. 그걸 가지고 또 찾아봐야지.”
***
첨단기술 세미나 도중에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발표자인 이태성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든 발표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용준은 이태성과 접촉하기 위해 그쪽으로 걸어갔다.
문제가 생겼다. 다른 업체 사람들이 양용준보다 먼저 이태성에게 붙었다.
“이태성 본부장!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
이태성이 웃었다.
“박 전무도 괜찮던데?”
박 전무는 양용준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
양용준은 팔성테크 사장의 둘째 아들이고 직위는 팀장이다.
반면에 박 전무는 팔성테크와 비슷한 규모의 회사 후계자다. 게다가 양용준은 이태성과 얼굴만 겨우 아는 사이인데, 박 전무는 이태성과 친분이 제법 있었다.
양용준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다른 업체 사람이 몇 명이 더 붙었다.
양용준이 머리를 굴렸다.
“지금 저기 껴봤자 눈치가 보여서 개인 오더를 넣기 어렵겠는데?”
그는 원래 잔머리 쓰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그는 행사장을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엘리베이터는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지하주차장에 내려간 후에 실실 웃었다.
“그 위치에서 주차장으로 오려면 이 엘리베이터를 탈 거고, 오늘 행사 관련 차량은 다 같은 층에 있으니까 여기서 내리겠지.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따로 쓱 만나면 되지. 역시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해. 흐흐흐.”
잠시 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양용준은 혹시 이태성이 나오나 싶어서 그쪽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은 나강인이었다.
양용준이 당장 눈을 치켜떴다.
“어? 너 이 새끼!”
나강인이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또 보네?”
“너 내가 두고 보자고 했지!”
양용준이 주변을 슬쩍 보았다. 목격자는 없었다.
그는 나강인에게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다리를 냅다 걷어찼다.
나강인은 그가 그러리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강인이 옆으로 슬쩍 움직였다. 양용준은 허공을 크게 걷어찼다가 균형을 잃었다.
“어? 어?”
나강인이 한 다리로 흔들흔들 서 있는 양용준을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그 살짝 미는 힘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균형을 무너뜨렸다.
양용준이 그 자리에 나자빠졌다.
“으헥!”
나강인이 차를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개그맨인가?”
양용준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목을 꺾으며 말했다.
“하하, 이 새끼. 좀 치나 본데?”
나강인이 뒤를 쓱 돌아보았다. 목을 꺾던 양용준이 움찔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똥덩어리가 기가 죽었습니다.
“뭘 했다고 벌써 기가 죽어?”
- 발차기를 회피한 것이 깊은 인상을 준 것 같습니다.
“겨우 그거로?”
- 그러게 말입니다.
양용준이 옷깃을 풀며 사납게 말했다.
“내가 진짜 사회적 지위가 있어서 참는다. CCTV만 없었으면 넌 뒈졌어.”
“그럼 CCTV가 없는 곳으로 갈까?”
“내가 사회적 지위가 있다고!”
“어. 그러냐. 많이 있어라.”
나강인이 다시 걸어갔다. 양용준이 다급히 물었다.
“너, 너! 수연이하고 무슨 사이냐!”
“친구.”
“내가 수연이하고 더 친한 친구다!”
“그건 수연이 의견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
“나랑 수연이랑 같은 동네에 살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그래. 옛날엔 그랬겠지.”
나강인은 양용준은 완전히 무시하고 차를 타고 떠났다.
뒤에 남은 양용준은 화가 나서 근처에 주차된 차를 걷어찼다.
“저 쌔끼…. 으악!”
그는 성질대로 발길질을 하다가 잘못 걷어차 발목을 삐었다.
양용준이 주차장 바닥에 고꾸라진 채로 비명을 질렀다.
“악! 119! 119!”
***
양용준은 이튿날 철인기공을 직접 방문했다.
어제는 발목을 다쳐 병원에 가는 바람에 이태성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오늘도 다리를 살짝 절었다. 걷다 보면 조금 시큰한 통증이 올라오곤 했다.
“아오. 어제 그 새끼한테 내 발차기 맛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본부장 이태성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아. 미안. 회의가 조금 길어져서.”
양용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
“아닙니다! 형님!”
양용준과 이태성은 기업체 모임에서 가끔 보는 사이다.
이태성이 물었다.
“양 사장님께서는 잘 지내시지?”
“예. 그럼요.”
“그런데 말이야. 네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사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