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62화 (162/411)

162. 리딩

드래곤 플레이트 구매 문의는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민간인이 오더를 넣으면 그 부서에서 처리한다.

그런데 이태성은 팔성테크 집안과 조금 아는 사이다. 그는 양용준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잠깐 시간을 냈다.

양용준이 말했다.

“예. 아버지가 드래곤 플레이트를 원하십니다. 하나, 아니, 두 개만 팔아주시죠. 저도 하나 갖고 싶어서요. 흐흐.”

이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 사장님이 방탄조끼가 왜 필요하신데?”

“아버지가 첨단기술장비를 워낙 좋아하시니까요.”

“아….”

이태성이 손가락으로 턱을 긁었다.

“우리 양산형 사이즈와 체형이 딱 맞는 사람이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아. 양 사장님 체형을 대충 아는데, 아마 안 맞으실걸? 어쩔 수 없이 적당한 설계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셔야겠네.”

양용준도 그런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고객의 몸에 맞춰 설계하는 주문제작 방식도 있다면서요. 일단 하나만이라도 만들어주시죠.”

“우리 설계팀이 바빠. 어제 발표했다시피 주문제작은 각국 정부의 오더도 다 처리하지 못하고 있어.”

나강인은 요즘은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를 자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개인 맞춤형은 생산량이 무척 적었다.

양용준이 머리를 숙였다.

“형님. 이거 우리 아버지 특명입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제가 나중에 신세 갚겠습니다.”

이태성이 피식 웃었다.

철인기공이 팔성테크에 신세를 질 일은 별로 없다. 게다가 양용준에게는 철인기공이 고마워할 정도로 편의를 많이 봐줄 권한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걸 대놓고 말하면 상대가 마음이 상할 수 있다.

이태성이 적당히 돌려 말했다.

“드레곤 플레이트를 따로 만들어달라고 청탁한 사람이 너 하나가 아니야. 네 부탁을 들어주면 그 사람들 부탁도 다 들어줘야 해. 안돼.”

앙용준은 이미 큰소리를 있는 대로 쳐놓은 상태다.

“형님. 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방법이… 있긴 있는데.”

‘강인 씨가 개인 의뢰를 받아주면 되겠지.’

신은하가 가진 드래곤 플레이트는 나강인이 따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신은하처럼 특별한 사람 외에는 나강인 씨가 그렇게 해준 적이 없단 말이야.’

이태성이 충고했다.

“그 방법은 네 인맥으로는 쓸 수 없어. 포기해.”

***

영화 ‘운명의 창’은 여자 주인공 배역이 마지막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원래는 신은하와 이보라가 제일 유력했다. 두 사람은 영화가 아직 시나리오만 있던 때부터 출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신은하와 이보라는 여자 주인공 자리와 그 대칭점에 있는 조연 자리를 둘이서 나눠 가질 줄 알았다. 그때만 해도 누가 주연을 차지하고 누가 조연이 될지를 놓고 경쟁했다.

그런데 오디션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 영화에 나강인이 무술감독으로 참여한다는 게 알려지면서, 강한 여전사 이미지를 탐내는 여자 배우들이 참전했다.

나중에는 그 경쟁에 오세나까지 뛰어들었다.

오세나는 천만 영화 ‘햇살 좋은 날’의 주연배우다. 그녀가 신인감독의 입봉작에 출연하겠다고 하면, 보통은 엎드려 절을 해서라도 모시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운명의 창’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도 전부터 찾아온 신은하와 이보라를, 단지 오세나가 왔다는 것만으로 쫓아낼 수는 없다.

영화사와 감독, 투자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였다.

변형찬 감독이 강하게 주장했다.

“우리 상황이 좋아졌다고 해서 신은하와 이보라 두 사람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투자자가 돈을 빼도 영화는 엎어지지만, 시나리오를 쓴 감독이 안 한다고 해도 엎어지는 건 마찬가지다.

결국 여자 주연과 상대역 조연은 비공개 오디션을 통해 결정하기로 결론이 났다.

***

그 소식을 들은 오세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지금 신인감독 영화에 오디션을 봐야 해? 나 오세나야!”

매니저가 얼른 물었다.

“그럼 안 한다고 할까?”

“응?”

“너 지금 응이라고 했다? 잘 생각했어. 네가 신인감독 영화에 나가는 건 좀 그렇지. 김유찬하고 또 투톱으로 영화 찍으면 괜히 스캔들 기사가 나올 수도 있고. 그러니까 하지 말자.”

“싫어! 이대로 물러나면 지는 거 같잖아! 할 거야! 기어오르는 것들을 아주 자근자근 밟아주겠어!”

“아오. 이 청개구리.”

***

오세나가 참전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경쟁자 몇 명이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영화사나 감독이 당연히 오세나를 선택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 배우들은 오세나로 내정된 오디션에 들러리를 서기는 싫었다.

신은하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박박 갈았다.

“지금 나를 밟겠다는 거지? 웃기지 마! 내가 밟아버릴 거야!”

그녀는 대본을 손때가 까맣게 묻게 읽으며 캐릭터를 연구했다. 그녀의 목표는 오직 하나, 여자 주연이었다.

읽고 분석만 한 게 아니다. 배역에 맞춘 연기연습도 했다.

연습 상대는 매니저를 시키거나, 남동생에게 용돈을 쥐여주고 시키거나, 가끔은 나강인을 시켰다.

맡기는 배역도 각자 달랐다. 매니저에게는 회사원일 때의 동료 직원을, 남동생에게는 적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나강인에게는 러브 라인의 상대역을 부탁했다.

신은하가 대본은 보지도 않고 대사를 쳤다.

“도련님. 적의 추격이 예상보다 끈질겨요. 방도를 찾아야 해요.”

나강인은 대본을 눈으로 보고 읽었다.

“할 수 없다. 여기서 갈라지자.”

신은하가 불평했다.

“아니, 강인 오빠. 연기를 해야지 국어책을 읽으면 어떻게 해?”

“나는 배우가 아니잖아.”

“이태호 사장님이 오빠 연기 꽤 한다고 하던데? 진짜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거야?”

이태호가 본 건 나강인이 국제용병 자칼의 부하들을 유인하고 속일 때의 모습이다. 그때는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음성과 표정을 보정해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AI 전지인이 전혀 협조하지 않았다.

- 명작영화 ‘운명의 창’에 신은하가 주연을 맡다니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왜 너까지 사극톤이야?”

- 저는 못 도와드립니다.

AI 전지인이 배를 쨌다. 그래서 나강인은 그냥 국어책 읽듯이 대본을 읽었다.

나강인이 신은하에게 말했다.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들면 그만할까?”

“안돼. 그런 거라도 계속해. 이런 악조건을 극복해야 세나 언니를 이길 수 있어!”

신은하와 오세나의 대결은 돌발상황이 발생해 무산됐다.

오세나가 탄 차가 교통사고에 휘말렸다. 그녀는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당분간 오른팔에 깁스를 해야 한다.

이 영화는 곧 촬영에 들어간다. 오세나가 참여할 방법이 없어졌다.

오세나가 병원에서 발로 침대를 퍽퍽 차며 짜증을 냈다.

“아오! 다 밟아주려고 했는데!”

오세나의 들러리를 서기 싫었던 배우들은 미리 떨어져 나갔다. 오세나가 교통사고로 탈락했다고 해서, 이미 떨어져 나간 배우들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다.

덕분에 여자 주연 자리의 경쟁률이 낮아졌다.

촬영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남은 두 배역이 정해졌다.

신은하가 상쾌한 얼굴로 이태호에게 인사했다.

“어머. 이태호 사장님. 잘 부탁드려요. 주연배우 신은하예요.”

이보라가 옆에서 툴툴댔다.

“나도 주연 할 수 있는데.”

“넌 내 상대역으로 만족해. 이 영화의 주연은 나란다. 오호호홋.”

“닥쳐.”

영화 제작 기간을 줄이면 예산도 줄어든다. 똑같은 퀄리티를 낼 수 있다면 빨리 찍을수록 좋다.

며칠 뒤에 영화 제작 공식 행사가 시작됐다. 기자들을 불러놓고 고사도 지냈다.

신은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고사를 구경했다. 공지현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언니. 주연 맡으신 거 축하해요.”

신은하는 며칠 전부터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내가 이번에 캐릭터 분석하고 연습하면서 고생 참 많이 했다? 좋은 연기 트레이너가 진짜 간절하더라니까?”

“저를 가르쳐주신 그 선생님이 계셨으면 언니도 도움 많이 받았을 텐데 아쉽네요.”

공지현은 슬럼프를 벗어나게 해준 사람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신은하도 이미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공지현이 말한 것과 일치하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신은하는 이제 슬슬 공지현이 뭔가 착각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도대체 어디 있냐? 너의 그 환상의 연기 선생님은.”

“저도 궁금해요. 어쨌든 이 업계에 계실 테니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죠.”

감독 변형찬이 먼저 절을 하고 돼지머리에 돈을 꽂았다. 다른 배우들은 절은 생략하고 돈만 꽂았다. 그 돈은 나중에 회식비로 쓰기로 했다.

고사가 끝난 후에 사람들은 각자의 업무를 위해 움직였다.

영화 스태프들은 촬영 준비나 장비 세팅, 소품 제작 등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배우들은 THO 엔터의 회의실에 모였다. 오늘 그곳에서 대본을 리딩하며 감을 잡기로 했다.

공지현은 조금 늦게 회의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런데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거울을 보던 공지현은 누가 타나 싶어 시선을 돌렸다.

나강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앗! 선생님?”

나강인이 그녀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또 보네요. 그런데 내가 왜 선생님이에요?”

“저한테 표정 연기를 가르쳐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선생님이죠!”

나강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공지현 외에도 한 명 더 있다.

합동수사본부 형사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나강인을 찾아왔는데, 그때 쓰는 호칭이 선생님이다. 합수부 형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손님이나 고객님과 비슷한 의미였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르니까 느낌이 새롭긴 하네. 이번엔 사건도 안 터졌고.’

나강인을 보는 공지현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이 업계에 있으면 나강인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영화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 전에 내가 선생님 이야기를 했을 때, 사장님이 연기 가르치는 자리에 섭외하고 싶다고 하셨지. 영화사에서 찾아냈구나.’

오늘은 대본을 리딩하는 날이다.

‘나를 도와주셨을 때처럼, 다른 배우들의 연기력을 분석하려고 오셨나 보다.’

그녀가 그 생각이 맞는지 물어보려고 했다.

“혹시….”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감독이 공지현을 향해 손짓했다.

“공지현 씨! 얼른 회의실에 가서 앉아요. 다른 분들은 벌써 다 와 계세요.”

“앗! 네!”

공지현이 얼른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강인도 엘리베이터를 내려 회의실 쪽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안심하고 대본 리딩 장소인 회의실에 들어갔다.

고사를 지낼 때는 기자들을 불러서 사진을 찍었지만, 대본 리딩은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했다.

리딩을 시작하기 전에 배우들이 대본을 펼쳐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김유찬을 찍은 카메라가 제일 많았다.

신은하와 이보라도 꽤 찍혔다. 기자들은 다른 배우들도 렌즈에 담았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며 떠들었다.

“신인감독 입봉작인데도 급이 되는 배우들이 꽤 많은데? 김유찬 덕분인가?”

“그게 아니야. 이 영화가 액션이 굉장히 잘 나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대. 그래서 액션에 관심이 있거나 그쪽으로 이미지를 바꾸고 싶은 배우들이 막판에 몰렸다더라.”

기자들은 공지현의 사진까지 찍은 후에 회의실에서 빠져나갔다.

회의실 문이 잠겼다. 이제부터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공지현은 문이 닫힌 후에 회의실을 두리번거렸다.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을 수는 없어서 단역이나 스태프는 벽에 서 있었다.

나강인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녀는 다시 안심했다.

감독 변형찬이 먼저 인사했다. 그런 후에 주요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구석에 서 있던 단역 배우 두 명이 인사하는 배우들을 보며 속닥였다.

“아니, 저 선배님이 별로 크지도 않은 저 배역을 하러 오신 거야? 출연료를 맞춰줄 수 있나?”

“선배님 쪽에서 먼저 개런티를 낮췄다고 하더라.”

“왜?”

“저 선배님 배역은 비장한 액션을 보여주면서 죽잖아. 그게 꼭 하고 싶으셨대.”

“와…. 그럼 혹시 다른 선배님들도?”

“어. 급을 낮춰서 온 분들의 배역은 모두 액션이 강하게 들어가.”

“설마 그런 액션을 배우가 직접 하는 거야?”

동료 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넌 왜 아무것도 몰라?”

“소속사에서 얼굴 몇 번 안 비치는 단역 자리에 가라고 하잖아. 그래서 난 소속사가 날 박대한다고 생각했지. 그게 서운해서 대본만 훑어보고 주변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본 게 없는데….”

“그거 아니야. 내가 보기엔 회사가 널 챙겨준 거다. 출연진 봐라.”

“진짜 그런가?”

“어쨌든 이 영화는 배우가 직접 싸워야 하니까 너도 몸 관리를 하는 게 좋을 거다.”

“배우는 몸이 재산인데 직접 싸우다가 다치면?”

“안 다치게 잘해야지.”

“말이야 쉽지. 그게 어떻게 마음대로 되냐.”

“될 거야. 그 사람이 참여했거든.”

“응? 그 사람?”

변형찬 감독이 자꾸 떠드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변형찬이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든 분을 다 소개하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길어지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으로 참여한 배우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감독님. 우리 영화에 나강인 무술감독님이 참여하신다고 들었는데, 오늘 오셨습니까?”

공지현의 눈동자가 그 말을 듣자마자 반짝거렸다.

그녀도 이 영화에 나강인이 참여한다는 말은 들었다. 오디션을 보기 직전에 매니저가 그래서 경쟁이 더 심해졌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나강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회의실을 두리번거렸다.

“와. 어떤 분이시지? 막 키가 이 미터도 넘고 몸무게도 막 백이 넘고 그러시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