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리딩 II
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지금 이 회의실에 나강인이 있냐고 물었다.
이 영화의 스태프 중 절반은 영화 ‘햇살 좋은 날’을 찍을 때 당시 조감독이던 변형찬과 같이 일했다. 그중에서 강원도 재촬영 때 나강인과 같이 일한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지금 이 회의실이 아니라 외부에서 촬영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나강인은 이 회의실에 남들보다 늦게 도착했다. 고사도 지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가 누군지 소개받을 시간이 없었다.
무술감독이 대본 리딩에 꼭 참석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변형찬은 오늘 나강인이 아예 오지 않은 줄 알았다.
“그게…. 어?”
그는 이제야 회의실 구석에 있는 나강인을 발견했다.
변형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당연히 오셨지요. 저기 계십니다.”
나강인이 앞으로 조금 나와 인사했다.
“나강인입니다.”
배우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악수라도 청하려고 손을 내밀다가, 지금은 대본 리딩이 먼저라는 걸 깨닫고 도로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나 감독님이 참여하신다는 말을 듣고 제가 진짜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전부터 같이 작품을 하고 싶었거든요. 하하하.”
다른 사람들은 다 자리에 앉았는데 공지현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어? 어? 어?”
변형찬 감독이 물었다.
“공지현 씨. 왜 그래?”
공지현이 나강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술감독님이셨어요?”
나강인이 가볍게 대답했다.
“어.”
그녀가 현실을 부정했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변형찬은 공지현이 나강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설명했다.
“그럴 리가 있어. 지현 씨는 잘 모르나 본데, 저분은 고품격 액션을 최단시간에 찍을 수 있게 해주는 능력자셔. 나하고 영화사 사장님은 나강인 무술감독님만 믿고 촬영 스케줄을 한 달로 잡았어.”
공지현은 혼란에 빠졌다.
“그럴 리가 없어요.”
“왜 자꾸 뭐가 없다고….”
“저분은 저를 도와주신 연기 선생님이란 말이에요!”
배우 몇 명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라 그냥 웃었다. 공지현이 대본 리딩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농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는 THO 엔터의 회의실이다. 사장 이태호도 대본 리딩을 구경하러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이태호는 나강인의 연기를 예전에 직접 본 적이 있다.
‘강인 씨가 그 7층 빌딩에서 자칼 일당을 유인할 때의 그 연기력은 정말 어마어마했는데….’
이태호는 최근에 공지현의 연기력이 갑자기 좋아진 이유를 오디션 심사 때 들었다. 그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혹시 드라마 촬영장에서 공지현 씨의 슬럼프를 벗어나게 해줬다는 그 연기 선생님….”
드디어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공지현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네!”
“진짜?”
그녀가 말을 빠르게 쏟아냈다.
“네! 진짜예요. 제가 그 드라마 촬영장 구석에서 한숨 쉬는 걸 지나가다 보시더니, 어떻게 하면 제 연기가 나아지는지 직접 보여주고 디테일하게 가르쳐 주셨어요. 연기력이 진짜 엄청나신 분인데 왜 자꾸 무술감독님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신은하도 공지현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입을 벌렸다.
“와. 강인 오빠. 하다 하다 이제 연기 가르치는 것까지 잘….”
그녀는 문득 이 영화의 주연을 따기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나강인과 연습한 것도 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강인 오빠! 내가 대본 분석할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서, 난 왜 지현이한테 한 것처럼 안 해줬는데!”
나강인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넌 그냥 둬도 잘하더라고.”
“어? 하긴. 내가 원래 잘…. 도와줬으면 더 빨리 더 잘할 수 있었잖아!”
억울한 건 또 있었다.
“그리고 내 상대역 해줄 때 대사를 왜 국어책 읽듯이 읽었는데!”
“널 강하게 단련시키려고 그랬지.”
“우이씨…. 내가 강해지긴 했는데 말이야.”
나강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AI 전지인이 신은하의 연기 연습에 비협조적이었다.
사람의 생명이 걸린 상황이면 AI 전지인이 알아서 도와주겠지만 그런 사건은 아니었다. 임무 수행에 필요한 일이면 조건 없이 지원받을 수 있지만 신은하의 연기와 임무는 관계가 없다.
게다가 신은하는 혼자 힘으로 주연을 따냈다.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변형찬 감독이 나강인을 보며 아쉬워했다.
“그렇게 연기 잘하시는 줄 알았으면, 진짜 딱 좋은 배역이 있었는데….”
그 배역은 이미 사람이 찼다.
이 영화의 액션을 노리고 온 배우 몇 명이 움찔했다. 그들은 변형찬이 말한 배역이 자기 자리인가 싶어서 긴장했다.
‘나강인 본인이 직접 하는 액션은 당연히 최고겠지.’
‘거기다 연기까지 잘하면….’
‘내가 감독이라도 배우를 바꾸고 싶겠다.’
나강인이 그들의 배역 중 하나를 노리면 그 사람은 밀려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몇 명은 긴장했다.
나강인이 말했다.
“공지현 씨를 도와줬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조언만 조금 한 겁니다. 저는 연기를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릅니다.”
긴장했던 남자 배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공지현이 작게 웅얼거렸다.
“아닌데. 진짜 잘하셨는데.”
어쨌든 본인이 연기를 못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지현이 더 따질 수는 없다.
‘연기를 그렇게 잘하시면서 왜 안 하려고 하시지?’
***
대본 리딩은 술술 진행됐다. 연기력이 좋은 배우가 많았다. 그 배우들은 실제 촬영처럼 연기하며 대본을 읽었다.
변형찬 감독은 그런 배우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리딩을 진행했다. 좋은 의견이 나오면 바로바로 메모했다.
연기력이 조금 약한 배우들은 그 배우들이 하는 걸 보고 바짝 긴장했다.
‘저 사이에 끼어서 어설프게 하는 모습이 스크린에 나가면, 연기 못 한다고 소문나겠다.’
‘자칫하면 커리어 박살 난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한 배우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를 악무는 배우도 있었다.
‘저 사이에서 정신 못 차리면 잡아먹힌다!’
여자 주연인 신은하는 잘하는 배우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그녀의 연기력이 여기 모인 배우 중에 최고는 아니지만, 여자 주인공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스물한 살인 공지현도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 쪽에 포함됐다. 몇 사람이 그녀의 연기를 보고 감탄했다.
김유찬은 외모와 연기력으로 다른 배우들을 학살했다. 부러워서 불평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저 얼굴에 저 연기력은 사기 아냐?”
“사기 맞아.”
나강인은 대본 리딩을 구경하다 중간에 회의실을 나갔다. 오늘은 어차피 분위기만 보러 온 것이라 계속 있을 필요가 없었다.
대본 리딩이 끝난 후에 변형찬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진짜 잘하시네요. 우리 영화가 엄청 잘 될 건가 봅니다. 하하하.”
배우들은 적당히 박수를 치고 덕담도 나눈 후에, 다시 삼삼오오 모여서 인사를 나눴다.
조감독이 스케줄에 문제가 있는 배우들을 찾아다니며 확인했다. 그는 공지현을 찾아와 스케줄을 확인했다.
“출연하시는 드라마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우리보고 조정해달라고 하면 곤란해요.”
공지현은 영화와 드라마 양쪽에서 조연으로 출연한다.
“드라마 일정은 괜찮아요. 대본과 촬영 일정이 다 나와 있거든요.”
“우리 영화도 그건 마찬가지인데요. 촬영이라는 게 일정대로만 진행되는 건 아니잖아요.”
“스케줄 안 겹치게 저희 소속사에서 잘 조정해주기로 했어요.”
공지현의 소속사는 그녀에게 드라마 배역을 따줄 때만 해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공지현은 작년에는 꽤 잘나가는 조연 배우였다. 그때는 연기력도 좋았다.
그러다 올해 초부터 연기력도 망하고 인기도 떨어졌다.
소속사는 그런 그녀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그녀는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자마자 시청자의 호평을 받았다. 갑자기 경쟁이 치열해진 영화의 오디션도 단번에 통과해 꽤 괜찮은 배역을 따냈다.
그녀의 소속사는 다시 공지현을 예전처럼 지원했다. 스케줄 조정도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조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속사에서 잘 책임지는 거로 알겠습니다.”
조감독은 더 따지지 않고 다른 배우의 스케줄을 확인하러 갔다. 한두 달 전이었다면 조감독이 이렇게 간단히 넘어갈 리 없었다.
공지현은 나강인과 촬영장 구석에서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그때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계시지?”
나강인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이런 식이었다. 그때도 촬영이 끝난 후에 나강인을 찾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걱정하지 않았다.
‘촬영이 시작되면 다시 만날 수 있잖아.’
***
나강인은 오랜만에 피시방에서 밥을 팔았다.
대본 리딩을 마치고 돌아온 신은하가 피시방 고정석에 앉아서 입이 삐죽거렸다.
“나는 말이야. 강인 오빠가 국어책 읽듯이 대본을 읽길래 그게 최선인 줄 알았어. 그랬는데….”
나강인이 그 어색한 연기력으로 그녀를 도와주려고 노력한 줄 알고, 연기를 못하는 모습이 귀엽다면서 좋아했었다.
“사람이 못하는 게 하나쯤 있는 줄 알고, 인간미가 있다 싶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지현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환상의 연기 선생이 강인 오빠였어?”
이보라가 옆에서 놀렸다.
“네가 귀찮았나 보다. 그치?”
그런 어설픈 공격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어디서 강인 오빠하고 같이 대본 연습도 못 해 본 네가 시비니? 난 그래도 연습이라도 했지. 그것도 러브 라인 위주로.”
“아씨. 그건 부럽다.”
신은하는 나강인이 만든 잡탕밥을 먹으며 투덜댔다.
“밥은 왜 또 이렇게 맛있어?”
이보라도 옆에서 나강인이 만든 잡탕밥을 먹었다.
“원래 맛있잖아. 오늘 밥하는 날이라길래 달려온 보람이 있는 맛이야.”
신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너한테 그런 정보를 줬을까? 은서구나?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할 테다.”
“은서가 너한테만 아는 동생이니?”
피시방 사장 조카 차은서는 신은하와 이보라의 한동네 동생이다.
두 사람의 전용석은 피시방 구석에 있다. 그 구석 자리는 다른 공간과 살짝 분리되어 있어서 손님들은 그들이 뭘 하는지 알기 어렵다.
신은하가 잡탕밥을 먹으며 투덜댔다.
“진짜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맛있…. 어? 가만. 내 건 지금 보니까 스페셜 잡탕밥인데? 어쩐지 더 맛있더라!”
이보라는 당황했다.
“응? 어? 난 왜 스페셜이 아닌데!”
신은하가 이보라와 밥을 비교해보며 실실 웃었다.
“강인 오빠가 나한테 많이 미안했나 보다. 그래서 나만 스페셜하게 대우한 거지. 이럼 또 내가 관대하게 넘어갈 수밖에 없잖아?”
“이 깃털처럼 가벼운 년. 넌 밥 한 그릇으로 용서가 되니?”
“응. 되네?”
***
이틀 뒤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운명의 창’은 조선 시대와 현대의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는 구조다.
조선 시대 촬영은 다른 영화 제작사가 남양주 한적한 곳에 만든 세트장을 활용했다. 그 영화는 이미 촬영을 모두 끝냈다.
영화사 사장 이태호가 현장에서 말했다.
“여기를 넘겨받은 덕분에 세트장 제작비와 제작 기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다른 영화사에서 직접 제작한 세트장이라서 우리 영화에 맞게 뜯어고칠 수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여기를 그냥 넘겨주지는 않았을 텐데요.”
“당연히 돈을 냈죠. 처음에는 아예 인수하려고 했는데, 출연료가 예상보다 많이 나가는 바람에 빌리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활발히 활동하는 배우가 많이 찾아오는 바람에 출연료가 예상보다 많이 나갔다. 비싼 배우 몇 명이 알아서 출연료를 깎았는데도 예산에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 지역 지자체에서 부수적인 문제는 다 해결해주기로 해서 다행입니다. 지자체에서는 그 영화와 우리 영화가 다 잘되면 여길 관광지로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히트 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장소가 관광지로 활용되는 경우는 꽤 흔하다.
이곳은 다른 영화사가 촬영을 위해 지은 곳이라 조선 시대 건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 곳만 뜯어고치면 필요한 장면을 찍는 데 문제 될 건 없었다.
이태호가 웃었다.
“제일 비싼 김유찬 씨가 출연료를 전부 러닝 개런티로 받겠다고 해줬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홍보비가 모자랄 뻔했습니다. 하하하.”
한쪽에서 신은하가 김유찬에게 물었다.
“유찬 오빠는 시나리오만 있던 때부터 러닝 개런티로 하겠다고 했다면서요?”
“어. 느낌이 좋았거든.”
시나리오만 있을 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신은하는 신인감독의 입봉작이고 제작비도 빠듯한 이 영화에 좋은 배우들이 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다.
“확실히 유찬 오빠가 잘생긴 것 빼고는 장점이 없지만, 시나리오 고르는 감은 좋아.”
이보라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
김유찬이 엄지와 검지를 턱에 댔다.
“내가 잘생기긴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