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첫 촬영
촬영 첫날부터 액션을 찍을 계획이라서 나강인도 남양주 외곽 세트장에 와 있었다.
공지현이 무사 소연으로 분장하고 돌아다니다가 나강인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앗!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 아니라니까.”
“히히. 저한테는 선생님 맞아요.”
무사 소연 역의 공지현이 살갑게 구는 걸 보고 여자 주인공 신은하가 쓱 끼어들었다.
“어허. 어디 학생이 선생한테. 떨어져. 훠이.”
“네?”
“너 지금 강인 오빠하고 거리가 너무 가까워. 그러다 막 팔짱도 끼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이제 겨우 수렁에서 벗어났는데, 괜히 스캔들 터지면 너 또 멘탈 나간다? 넌 사진만 잘못 찍혀도 바로 스캔들이야.”
“전 연기를 더 배우고 싶어서….”
나강인이 끼어들었다.
“넌 왜 애를 잡고 그래?”
신은하가 발끈했다.
“메이야? 강인 오빠는 지금 누구 편이야!”
“어…. 감독님이 어디 계시나?”
나강인이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신은하가 얼른 쫓아갔다.
“어딜 도망쳐! 서라!”
***
‘운명의 창’은 조선 시대가 배경일 때는 액션에 칼이 많이 나온다.
금속으로 만든 칼은 날이 없는 것도 쇠막대와 비슷한 위력이 있다. 당연히 맞으면 아프고 잘못 맞으면 크게 다친다.
그런 칼을 들고 싸우는데 동선 지정을 안 해줄 수는 없다.
김유찬이 나강인에게 물었다.
“‘햇살 좋은 날’을 찍을 때처럼 이번에도 동선을 짜지 않고 실시간으로 할 줄 알았는데요.”
“CF 찍을 때는 미리 훈련을 시켰습니다만?”
“아. 그렇죠. 그때 고생 진짜 많이 했는데.”
“사람을 상대로 칼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위험합니다. ‘햇살 좋은 날’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내가 유찬 씨 대역으로 뛸 수 없습니다. 그럼 유찬 씨가 직접 칼을 써야 하는데, 잘못하면 다른 배우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상황이 좀 다르긴 하네요.”
김유찬이 칼을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요? 내 최근 별명이 야수성 꽃미남인 건 알지요? 뭐든 시켜만 줘봐요. 내가 다 해낼 테니까.”
“칼 멋있게 휘두르는 건 잘합니까?”
김유찬이 칼을 부드럽게 뽑으며 장담했다.
“당연하죠. 그게 내 특기입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지시했다.
“실제 전투를 가정한 근접전 교본 촬영 모드로 가자.”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훈련에 참여할 대원들의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실제 전투를 가정한 훈련을 하면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이 높습니다.
“어…. 누가 문제야?”
- 김유찬이 제일 위험합니다. 민첩이 너무 낮습니다.
“주인공을 뺄 수는 없잖아.”
- 다른 모드를 선택해 주십시오.
“그럼… 훈련병 교육용으로 하자.”
- 훈련 상황을 설정해 주십시오.
“김유찬과 공지현 두 명이 복면을 쓴 적 열 명에게 습격당하는 상황. 2대 10의 전투를 상정해. 2명이 10명과 싸워서 이기는 코스로 가자.”
- 무기는 칼만 사용합니까?
“당연히 칼 전용 훈련으로. 여기서는 칼싸움 위주로 가야지. 조선 시대인데 반자동권총을 쓸 수는 없으니까.”
AI 전지인이 교본 촬영 모드 목록을 몇 개 보여주었다.
아무거나 골라서는 안 된다. 나강인이 액션을 맡기로 했지만, 변형찬이 쓴 대본의 설정을 많이 벗어나면 곤란하다.
나강인이 그중에서 대본의 설정과 제일 비슷한 것을 골랐다.
“이거로 가자.”
- 설정을 마쳤습니다.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만든 훈련 동영상이 떴다.
나강인이 김유찬과 공지현을 부른 후에 그 동영상을 보며 동선을 설명했다.
“유찬 씨는 이쪽으로 와서 나를 베세요. 그때 지현이는 저쪽에서 적과 싸워.”
공지현은 여자 무사 배역을 맡았기 때문에 싸울 일이 많다.
신은하는 아직 싸울 일이 없다. 그녀가 직접 싸우는 씬은 영화 후반에나 나온다. 그 촬영 스케줄은 한참 나중으로 잡혀있다.
나강인이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일단 내가 앞에서 공격할 테니까, 유찬 씨는 이쪽으로 움직이면서 칼을 멋있게 휘둘러요. 피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변형찬은 시나리오를 수정해 아군이나 적이 복면을 자주 쓰게 했다. 지금 전투씬의 경우에는 주인공을 습격한 쪽이 모두 복면을 쓰고 있다.
나강인이 변형찬과 촬영감독에게도 동선을 설명했다.
그는 그들과 의견을 주고받은 후에, 같이 싸워야 할 복면인 역할 배우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나강인이 복면을 쓰면서 말했다.
“자. 시작하죠.”
배우 한 명이 급히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연습은요?”
“그냥 가겠습니다.”
“예?”
전투씬 첫 촬영이 시작됐다.
김유찬은 복면을 쓴 나강인을 상대로 인정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그는 어떻게 공격하든 나강인이 막거나 피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김유찬의 칼은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그가 평소에 연습했던 멋진 동작이 계속 이어졌다.
나강인은 김유찬의 공격쯤은 쉽게 피할 수 있지만,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변형찬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야아. 역시 나강인. 멋지네.”
나강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AI 전지인이 주변 정보를 조합해 현재 어떤 모습으로 찍히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그 영상 속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김유찬이 칼을 크게 내리쳤다. 나강인이 그 칼을 옆으로 툭 밀어내며 말했다.
“막상 해보니까 이건 좀 아니군요.”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배우들이 뒤에서 놀고 있습니다.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유찬 씨가 저렇게 큰 동작으로 연속해서 공격하면, 다른 배우들은 안전하게 연기할 수가 없어.”
복면을 쓴 사람들은 액션 전문이 아니라 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다. 그 아마추어들의 실력으로는 김유찬의 칼을 안전하게 피할 수 없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나강인과 김유찬이 싸울 때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다.
“방법을 바꿔야겠어.”
나강인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언했다.
“칼에 맞는 역은 모두 제가 하겠습니다.”
변형찬 감독이 물었다.
“일인다역을 한다는 겁니까?”
“예. 제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칼을 맞겠습니다. 그걸 편집에서 가공하면 여러 명이 싸우는 모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 그건 그렇죠. 관객이 속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하려면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지시했다.
“지인아. 훈련교본 촬영 모드에서 상대가 칼에 맞는 순간들을 하나씩 분리해.”
AI 전지인이 즉시 하나의 영상을 여러 개로 분리했다.
나강인이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그 영상들을 그렸다.
“여기서 이렇게 들어갔다가 칼 맞는 거 하나, 저기서 들어가는 거 하나, 세 번째는 이렇게, 네 번째는 이쪽에서 들어갔다가 제가 칼을 맞을 겁니다.”
변형찬이 물었다.
“어떻게 매번 다른 사람처럼 보일 겁니까?”
“칼에 맞을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찍어야죠. 카메라의 위치도 매번 바꾸고요. 그런 후에 편집을 잘하면, 여러 명이 여러 방향에서 돌입해 싸운 영상이 될 겁니다.”
이번에는 촬영감독이 물었다.
“그럼 두 분이 싸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뭘 합니까?”
나강인이 다시 홀로그램 영상을 보았다. 분리된 영상마다 복면인들의 동선이 표시되어 있었다.
“제가 유찬 씨와 싸울 때, 다른 사람들은 뒤를 노리거나 아니면 지현이를 노려야지요.”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강인은 화이트보드에 모든 복면 배우의 움직임을 그리며 설명했다.
“각자 정해진 코스로 부지런히 뛰어가야 합니다. 이 첫 번째 씬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경로로요.”
AI 전지인이 보여주는 홀로그램 동영상에는 카메라 위치도 표시되어 있었다.
“카메라를 이쪽과 이쪽에 배치하면, 복면인들이 유찬 씨의 뒤를 잡으려고 뛰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는 두 번째 전투씬에도 동선을 따라 그림을 그렸다.
“이러면 이때는 몇 명이 지현이를 공격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겠죠.”
변형찬, 촬영감독, 김유찬, 공지현, 그리고 이번 씬을 복면을 쓰고 찍어야 하는 배우들이 모여서 그의 설명을 들었다.
나강인이 지금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릴 때 쓰는 건 정찰 관련 스킬이다. 예전에는 이 스킬로 방화 살인범의 몽타주를 그려주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의 설명과 홀로그램의 동영상을 비교하여 손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자세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게다가 화이트보드에 메모용 마카펜으로 그렸는데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배우들이 그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근데 그림 진짜 잘 그린다.”
“그러게. 마카펜으로 어떻게 저런 그림이 나오지?”
“빠르게 쓱쓱 그리는 그림인데도 컴퓨터로 출력한 것 같아.”
나강인은 김유찬과 복면인들의 전투를 네 개로 분리해 설명했다.
변형찬은 그 네 개의 영상을 합치면 어떤 그림이 될지 생각해보았다.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그가 활짝 웃었다.
“와우. 이거 잘만 찍으면 가능하겠는데요?”
주연배우 김유찬은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다.
“강인 씨가 알아서 잘하겠죠. 전 강인 씨만 믿고 칼을 마음껏 휘두를 겁니다.”
공지현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존경해요!”
나강인이 조건을 추가했다.
“그리고 유찬 씨 칼은 그라인더로 갈아서 끝부분만 날을 세웁시다.”
“예?”
“칼에 옷 정도는 베여야 해서요. 지금은 날이 무뎌서 옷이 그냥 찢어지겠네.”
카메라가 나강인이 말한 대로 배치되고 촬영이 재개됐다.
첫 번째 전투씬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김유찬의 주변에서 머뭇거리는 배우가 없었다. 다들 각자 배정받은 동선을 따라 열심히 뛰었다.
김유찬이 칼을 크게 휘둘렀다. 나강인이 그 칼을 몇 번 피하다가 마지막에 조금 늦게 움직였다.
칼날이 가슴 위쪽 옷을 베고 지나갔다. 칼날 끝은 이미 그라인더로 날카롭게 갈아놓았다.
나강인의 옷이 쩍 갈라졌다. 옷 속에 넣어둔 가짜 피주머니도 정확히 베였다.
붉은색 물감이 진짜 피처럼 쫙 튀었다.
나강인은 칼에 맞고 뒤로 쓰러졌다.
김유찬은 칼로 뭔가를 베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그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진짜 칼에 맞은 건 아니죠?”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변형찬을 보았다.
“감독님?”
변형찬이 놀란 눈으로 현장을 보다가 더듬거리며 손을 들었다.
“오, 오케이! 잘했어요! 와. 진짜 칼에 맞은 줄 알고 놀랐습니다.”
나강인이 스태프에게 말했다.
“옷 갈아입고 피주머니도 교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자리에는.”
나강인이 복면 배우 중 한 명을 골랐다.
“여기 방금 제가 했던 자세 그대로 쓰러져 계시죠.”
“예?”
“칼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화면에서 갑자기 사라지면 장르가 공포영화로 바뀌니까요.”
“아! 예!”
“겉옷은 저랑 바꿔입으시고요. 이 옷이 보기 좋게 찢어져 있고 빨간색도 잘 묻어 있습니다.”
나강인이 그 배우와 겉옷을 바꿔입었다. 손에 물감이 묻으면 안 돼서 옷을 갈아입는 건 스태프가 도와주었다.
나강인은 새 피주머니를 받아서 옷 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이쪽 각도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속 카메라를 이쪽에 두는 게 어떨까요?”
촬영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각도면 그게 좋겠네요.”
두 번째 씬이 시작됐다.
김유찬은 안심하고 조금 전보다 칼을 더 멋들어지게 휘둘렀다.
나강인이 그 칼을 한 번은 피하고, 두 번째에 칼을 맞았다. 이번에도 칼날이 옷과 피주머니만 정확히 베었다.
그 전투씬은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었다. 그중에는 고속 카메라도 두 대가 있었다.
1번 고속 카메라는 손과 칼날, 옷이 베이는 부분 위주로 찍었다. 2번 고속 카메라는 칼날과 김유찬의 얼굴을 같이 찍었다.
두 번째 씬도 끝났다. 칼을 맞고 쓰러졌던 나강인이 일어났다. 그는 이번에는 다른 배우를 지목했다.
“저랑 겉옷 갈아입으시고, 여기 누워 계시죠. 그리고 다른 분들은 뛰는 동선을 좀 바꾸겠습니다.”
나강인은 김유찬의 칼을 네 번이나 맞았다. 그는 매번 다른 동작으로 다른 부위에 칼을 맞았다. 카메라 위치도 그때마다 바뀌었다. 바닥에 쓰러진 사람도 넷으로 늘어났다.
시나리오에는 열 명이 습격했다가 다섯 명이 칼을 맞고 나머지 다섯은 도망치라고 되어 있다.
김유찬이 실실 웃으면서 칼을 들었다.
“흐흐. 이제 마지막 한 번 남았습니다. 어서 내 칼을 받으시오!”
나강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찬 씨는 그만하면 많이 찍었죠.”
“예?”
“마지막 한 명은 지현이에게 맡기시죠. 무사 수연도 한 명쯤은 베어야 느낌이 살잖습니까?”
변형찬 감독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수연이 고수라는 걸 관객들이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공지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저 열심히 할게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쭉 지켜봤습니다. 애송이의 민첩이 김유찬보다는 낫습니다. 훈련 단계를 높일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말했다.
“그럼 단계를 좀 높여서 가자. 지구연합군 근접전투 훈련 영상 띄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