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액션
AI 전지인이 김유찬의 액션보다 높은 단계의 근접전 훈련 영상을 세 개 만들어냈다.
그 영상들은 AR 렌즈를 통해 동시에 재생됐다. 그건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강인의 눈에는 허공에 반투명한 모니터 세 개를 띄워놓은 것처럼 보였다.
- 애송이의 신체 능력을 고려해, 적절한 수준의 근접전투 훈련 코스를 제안합니다. 선택해 주십시오.
“3번.”
즉시 1, 2번 영상이 사라지고 3번 영상 하나만 크게 확대돼 천천히 재생되었다.
나강인이 그 영상을 공중에 띄워놓고 공지현에게 시범을 보였다.
“네가 나를 이렇게 베고, 내가 피했다가 돌입하면서 베면, 너는 몸을 뒤로 이렇게 젖혀서 피하고, 다시 몸을 돌려서 칼을 뻗어. 내가 그걸 뒤로 물러나며 겨우 피하는데, 네가 앞으로 돌진하면서 나를 베는 거야. 그럼 끝. 어렵지 않지?”
공지현은 나강인의 시범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본 후에 대답했다.
“해볼게요!”
나강인이 단서를 달았다.
“사정 봐주지 말고 진짜 나를 벨 생각으로 해라. 피하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녀가 걱정했다.
“그러다 제 칼에 맞으시면….”
“네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
나강인은 공지현이 해야 할 동작을 좀 더 설명했다.
카메라 배치는 촬영감독과 협의해 정했다. AI 전지인이 홀로그램 영상처럼 찍으려면 카메라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표시해주었다.
“이 씬은 카메라의 위치가 조금 전보다 더 중요합니다.”
스태프들이 현장을 세팅하고 카메라가 재배치되었다. 꽤 공들인 준비가 끝났다.
변형찬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서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공격은 공지현이 먼저 시작했다. 그녀는 나강인을 향해 달려들며 칼을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쭉 그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에는 나강인이 다칠까 봐 걱정했지만, 칼을 쓸 때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애송이가 요원님을 진짜 죽일 듯이 덤비고 있습니다. 밉보인 거라도 있으십니까?
나강인이 뒤로 물러나면서 몸을 젖혔다. 칼날이 그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믿는 거겠지.”
물러났던 나강인이 공지현을 향해 돌진하며 칼을 수평으로 크게 그었다. 칼날이 공지현의 상체를 정확히 노리고 날아갔다.
공지현이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허리가 마치 활처럼 휘어졌다. 나강인이 칼날이 그녀의 가슴 바로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공지현이 뒤로 젖혔던 몸을 용수철처럼 앞으로 튕기며 칼을 내질렀다. 빨랐다. 빈틈도 정확히 노렸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 칼을 피하기 어려울 정도로 반격이 날카로웠다.
나강인이 뒤로 급히 물러났다. 칼을 급히 피하느라 균형이 흐트러졌다. 적어도 남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공지현이 균형을 잃은 나강인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돌진하면서 땅을 박찼다. 날씬한 몸이 위로 솟았다. 공중에서 옷이 펄럭였다.
그건 나강인이 시범을 보여줄 때는 없던 동작이다.
새처럼 공중으로 점프한 그녀가 땅으로 착지하면서 칼을 아래로 강하게 내리쳤다. 칼날이 공간을 수직으로 쩍 갈랐다.
그 매서운 칼날의 끝에 복면을 쓴 나강인의 가슴이 있었다.
날카롭게 갈아놓은 칼끝이 그의 가슴을 길게 베었다. 옷이 쩍 갈라지면서 특수효과용 피주머니가 터졌다.
나강인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공지현은 자세를 낮추고 칼날은 옆으로 젖히며 나강인이 넘어지는 모습을 확인했다.
다른 복면인들은 미리 정해진 동선대로 주변을 뛰어다녔다.
공지현이 바닥에 쓰러진 나강인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옆으로 뻗은 칼을 아래로 내리며 몸을 세웠다. 그런 후에 복면인 중 한 명을 향해 달려갔다.
“오케이!”
변형찬이 외쳤다.
달려가던 공지현이 즉시 방향을 틀어 나강인을 향해 달려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그녀는 언제 죽일 듯이 몰아붙였냐는 듯이 걱정했다.
바닥에 누워 있던 나강인이 일어나며 말했다.
“너 솔직히 말해봐. 검을 배웠냐?”
“아뇨.”
“날아다니던데?”
- 일반인의 움직임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발레를 배웠어요. 그래서 몸이 유연한 편이에요. 그리고 옛날부터 영화나 만화에서 멋있는 장면을 보고 연습 많이 했어요.”
“잘하더라.”
“앗! 고맙습니다!”
아까 네 명의 복면인을 처치하는 장면을 찍은 김유찬이 다가오며 박수를 쳤다.
“와. 액션 장난 아니다. 이번 씬은 그림같이 찍혔겠어.”
“히히. 고맙습니다!”
김유찬이 나강인을 보며 불평했다.
“나는 왜 저렇게 좋은 거 안 시켜줘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유찬 씨의 유연성으로 지현이가 한 걸 똑같이 하면 허리 나갑니다.”
김유찬이 공지현이 했던 연기를 떠올렸다. 허리가 그렇게 탄력 있게 휘는 동작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네요. 내 허리는 소중하니까.”
김유찬은 얼른 목표를 바꾸었다.
“난 그럼 파워 무사로 가야지.”
나머지 다섯 명의 복면인이 도망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김유찬에서 공지현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전투씬 촬영이 모두 끝났다.
조연을 맡은 배우들도 한마디씩 했다.
“마지막 씬은 진짜 박진감이 장난 아닌데?”
“난 정말 시체 치우는 줄 알았어요.”
“어디 그 씬만 대단했나?”
“앞에 씬들도 대단했죠.”
활짝 웃는 배우도 있었다.
“이야아. 전투씬을 다섯 개로 나눠서 찍었는데도 촬영이 벌써 끝났어.”
“역시 듣던 대로네요. 이렇게 빨리 액션씬이 진행되는 현장은 처음 봤습니다.”
“소문 그대로네.”
고개를 갸웃하는 배우도 있었다.
“아닌데? 내가 듣던 것보다 더하잖아.”
“형님은 나강인 무술감독이 원래 저렇게 빨리 찍는다는 소문을 못 들으셨나 보다.”
“그건 들었지. 그런데 방금 그 촬영은 소문하고 달랐잖아.”
“네? 어디가요?”
“하나의 전투씬을 다섯 조각으로 나누고, 각각의 상대역을 나 무술감독님 혼자 맡았어.”
“그랬…죠? 그런데 그런 일은 다른 데서도 종종 하는 거잖아요.”
처음 의문을 제기한 배우가 손가락으로 현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다른 영화라면 이런 건 미리 의견을 모으고 여러 사람이 하나하나 시연해보면서 동선을 설계해. 그게 정석이니까.”
“그야 그렇죠?”
“그런데 다들 봤잖아. 나 무술감독님은 현장에서 한 번 쓱 해보더니, 이게 아니다 하면서 그 자리에서 씬 하나를 다섯 조각으로 나눴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중에 하나로 합칠 수도 있게 재설계한 거라고.”
“와….”
“심지어 카메라 위치까지 다시 계산했는데, 그걸 암산으로 다 했다. 이게 가능한가?”
배우들이 질린 얼굴로 나강인을 보았다.
“설명을 듣고 나니까 사람 같지가 않네요.”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인가?”
“듣고 보니 이건 불가능한 작업인데….”
그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걸 우리가 직접 봤잖아요. 역시 나강인은 특별합니다.”
조금 전에 상황을 설명한 배우가 입맛을 다셨다.
“하긴. 우리도 그 특별한 맛 좀 보려고 이 영화에 참여한 거니까. 이거 앞으로가 기대되는데?”
“저도요.”
***
오늘은 액션만 찍는 날이 아니다. 러브 라인도 그려야 하고, 코미디도 찍어야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야간 촬영도 예정되어 있다.
나강인은 다른 배우들과 간단한 액션씬을 두 번 더 찍었다. 그때마다 같이 일한 배우들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야아. 이 맛이 소문으로 듣던 그 액션맛이구나!”
“이 영화에 참여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두 번으로 나강인의 오늘 낮 촬영이 끝났다.
현장을 벗어난 나강인에게 밥차 주인 김병호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인 씨가 대단한 건 전에도 알았지만, 이젠 아예 정식으로 무술감독님이 되셨네요?”
“그냥 잠깐 도와주는 거죠.”
밥차 사장 김병호는 예전에 피시방에서 넘어져 손목을 살짝 접질렸었다. 나강인은 그때 그 밥차 땜빵을 맡았던 일이 계기가 돼서 신은하를 만나고 연예계에도 발을 들였다.
김병호가 말했다.
“조감독님이, 아니지, 이젠 변 감독님이지. 변 감독님이 저번에 밥이 맛있었다면서 날 또 불러주시더라고요. 하, 하하. 그 추가촬영 때는 강인 씨가 도와줘서 밥이 맛있었던 건데 말이죠.”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같이 준비하시죠. 제 낮 촬영은 다 끝났으니까요.”
김병호가 활짝 웃었다.
“아이고. 그럼 나야 좋죠.”
나강인은 밥차에 준비된 재료를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이 재료로는 잡탕밥이 최선입니다.
“그거로 하자.”
낮 촬영이 끝났다. 저녁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밥 먹고 하겠습니다!”
조감독의 외침을 듣고 사람들이 밥차로 이동했다.
김유찬이 밥차로 걸어가다가 배식을 준비하는 나강인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와아아! 오늘 저녁은 강인 씨가 만들었나 보다! 난 두 그릇 먹어야지!”
매니저가 말렸다.
“안돼. 너 지금 촬영 중인 거 잊었어? 반 그릇만 먹어.”
“나 오늘 액션 찍느라 힘쓴 거 안 보여?”
“그럼 한 그릇으로 타협 보자.”
매니저가 밥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대신에 내가 두 그릇 먹을 테니까.”
“어? 형. 이러기야?”
“억울하면 네가 매니저 하던가. 내가 배우 할 테니까.”
김유찬이 매니저의 얼굴을 쓱 보았다.
“형은 얼굴에서 탈락 아닌가?”
“닥쳐. 나도 알아.”
배우들이 밥차에서 밥을 타서 자리에 앉았다. 그중에는 남들보다 잡탕밥을 많이, 식판이 수북해질 정도로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찍으러 온 게 아니라 밥 먹으러 왔나?”
“스태프는 카메라에 안 나오니까 많이 먹어도 상관없지만, 배우들이 왜 저렇게 많이 먹는대?”
“어우. 김유찬도 식판 가득 밥을 담았어.”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일단 잡탕밥을 먹어보고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
“왜 이렇게 맛있지? 특별한 걸 넣었나?”
뭔가 특별한 걸 넣었는지 물어본 사람도 있었다.
“아니래. 밥차에 있는 재료 그대로 썼다더라.”
“그런데 왜 이렇게 맛있지?”
나강인이 밥하는 걸 봤을 때부터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식판에 잡탕밥을 수북하게 담았다.
“이게 소문으로만 듣던 그 나강인표 밥차구나.”
“크으. 이 맛. 쥑이네.”
“고급 레스토랑보다 맛있는 요리를 현장에서 먹을 수 있다더니, 진짜였어.”
“이제 무술감독이 됐으니까 밥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오늘 계 탔다.”
“빨리 먹고 한 판 더 받아먹어야겠다.”
“나도!”
“나도!”
공지현이 밥차에 가서 밥을 타면서 물었다.
“선생님이 왜 밥까지 하세요?”
“이러면 일당 나와.”
“와. 알뜰하신가 보다!”
신은하가 그녀의 뒤에서 말했다.
“어떻게 그걸 그렇게 해석하지? 넌 정말 머릿속이 꽃밭이야?”
이보라가 옆에서 말했다.
“그동안 황무지에서 구르다가 따뜻한 땅에 오니까 반작용으로 꽃밭이 펼쳐졌겠지.”
“아. 그런가?”
나강인이 잡탕밥을 넉넉히 펐다.
공지현이 배시시 웃으며 나강인에게 말했다.
“저 많이 안 먹어요. 조금만 담아주세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넉넉히 받아가.”
“진짠데….”
“그럼 남기든가.”
신은하는 식판을 내밀며 당당히 요구했다.
“난 가득! 마음을 담아서 한가득!”
이보라도 옆에서 식판을 내밀었다.
“나도 마음을 듬뿍 담아주세요.”
“야! 자꾸 숟가락 얹지 말라고!”
“같이 좀 먹고 살자!”
세 사람은 접이식 간이 식탁 앞에 앉았다.
공지현이 먼지 음식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음식이 혀에 닿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맛있는 거다!’
촬영장 간이탁자에서 잡탕밥을 먹는데 고급 레스토랑에서 셰프가 자랑하는 특별요리를 먹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눈을 살짝 감아보았다. 그 느낌이 더 강해졌다. 촬영장이 최고급 레스토랑 같았다.
그녀가 눈을 뜨며 감탄했다.
“와! 대박! 진짜 맛있어!”
신은하가 자랑했다.
“강인 오빠 요리는 원래 다 맛있어.”
“우와. 선생님은 매일 이렇게 만들어 드세요?”
“아니. 자기가 만든 요리는 별로 안 즐겨. 요리 실력이 이렇게 좋은데도 사서 먹는 걸 더 좋아하더라고. 하긴. 원래 특이한 사람이긴 하지.”
“특별한 거 아닐까요?”
“방금 나도 특별하다고 했을걸? 그치?”
“그, 그랬죠?”
“응. 그랬어.”
액션 연기를 한 사람들은 몸을 많이 써서 배가 고팠고, 스태프들은 무거운 장비를 옮기고 세팅하느라 힘을 많이 써서 배가 고팠다.
게다가 밥이 굉장히 맛있었다. 밥을 다 먹고 또 타 먹는 사람이 속출했다.
결국 밥차 주인 김병호가 가져온 식재료 중에서 주재료가 모두 소진됐다.
김유찬은 매니저의 견제 때문에 밥을 한 판밖에 먹지 못했다. 그가 아쉬운 얼굴로 나강인에게 물었다.
“강인 씨. 디저트도 나와요? 난 티라미수 스타일 케이크 그거 진짜 맛있던데.”
나강인이 남은 재료를 확인했다. 재료가 모자랐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잡탕 케이크 재료는 5인분이 있습니다.
“다섯 명만 주면 빈정 상하는 사람 많이 생길 거다. 잡탕 과자 재료는?”
- 넉넉합니다.
나강인이 김유찬에게 말했다.
“그냥 잡탕 과자를 만들어줄 테니까 야간 촬영 때 입이 심심하면 먹어요.”
“흐흐. 기본 과자도 좋죠. 많이만 만들어줘요.”
변형찬 감독은 식사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낮에 에너지 넘치는 촬영을 한 사람들이 기력을 회복하려면 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변형찬까지 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는 밤에 자는 시간도 아껴서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는 식사를 마친 후에 한쪽에서 노트북을 펼쳤다.
그 고성능 노트북에는 낮에 찍은 김유찬과 공지현의 전투씬 영상 파일이 들어 있었다. 카메라를 여러 대 썼기 때문에 영상 파일도 많았다.
‘강인 씨는 다섯 개의 씬으로 나눠 찍은 영상들을 하나도 합치자고 했는데….’
변형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나눠 찍는 것을 찬성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예상한 대로 그림이 나오는지 확인은 해야지.’
변형찬이 일단 첫 번째 전투씬의 카메라 영상들을 잘라서 이어붙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