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66화 (166/411)

166. 맛보기

변형찬 감독이 다섯 개의 전투씬 중에서 첫 번째 씬의 영상들을 잘라서 이어붙였다.

그렇다고 본격적인 편집을 한 건 아니다. 화질을 바꾸거나 효과를 넣지도 않았다.

그저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만 보려고 영상 파일들을 적당히 잘라 붙였다.

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해서 그 씬을 찍었기 때문에 영상 파일도 카메라 숫자만큼 있었다.

김유찬과 배우 몇 명이 변형찬에게 다가왔다.

김유찬이 잡탕 과자를 내밀었다.

“감독님도 맛 좀 보시라고 가져왔는데, 바쁘시네요? 설마 벌써 편집 들어가신 건가요?”

변형찬이 방금 잘라 붙인 영상을 재생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나강인 씨 말대로 조합하면 어떤 그림이 나오는지 확인만 하는 겁니다. 지금은 하나만 했지만, 이런 식으로 다섯 개를 다 이어붙여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내일 통으로 다시 찍어야겠….”

그는 처음에는 단순히 점검만 하려고 의자에 등을 뒤로 기대고 영상을 보았다. 그런데 노트북 화면에 영상이 재생된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와아….”

변형찬이 예상한 것보다 그림이 훨씬 더 잘 나왔다.

배우들도 숨을 죽이고 영상을 보았다. 입을 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첫 번째 복면인이 쓰러진 후에 영상이 끝났다.

김유찬이 참았던 숨을 뱉었다.

“장난 아니네요. 내가 저렇게 멋지게 싸웠구나.”

변형찬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저도 놀랐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제 예상을 뛰어넘네요. 이 정도로 좋은 그림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감독님. 이거 이대로 가실 건 아니죠?”

“당연하죠. 이건 그냥 그림만 맞춰본 겁니다. 이 좋은 그림을 어떻게 대충 편집하겠습니까? 힘 빡 줘야죠.”

노트북에는 영상 파일이 많았다.

“아까 찍을 때는 고속 카메라도 두 대 썼습니다. 그 촬영본도 섞어야죠. 아. 말 나온 김에 간단하게 맛만 볼까요?”

김유찬의 전투 영상은 네 개의 씬에서 찍은 여러 카메라 촬영본을 잘라 붙어야 완성된다. 방금 본 건 그중 첫 번째 것이었다.

반면에 공지현의 전투씬은 하나짜리다. 그때도 카메라를 여러 대 썼지만, 네 씬을 다 조합하는 것보다는 공지현의 씬 하나만 확인하는 게 더 빠르다.

변형찬이 이번에는 공지현의 영상을 간단히 편집했다. 이번에도 아무 효과도 넣지 않고 영상을 잘라 붙이기만 했다. 고속 카메라로 찍은 부분은 느리게 재생되게 놔두었다.

그가 빠르게 작업한 후에 간이 편집한 영상을 재생했다.

“이번에는 고속 카메라로 찍은 슬로우 모션을 넣어봤습니다. 이런 식으로요.”

노트북 화면에 공지현이 몸을 뒤로 젖히며 칼을 피하는 모습이 느리게 나왔다. 허리가 휘어졌을 때의 그녀의 몸은 마치 활이 휘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그 아름다운 가슴 바로 위를 매서운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칼날이 가슴 바로 위 옷을 스치고 지나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공지현이 반격할 때는 영상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공지현이 점프해서 칼을 내려칠 때는 아름답던 모습에서 살벌하게 바뀐 표정이 화면에 크게 나왔다. 정상 속도로 영상이 재생돼 그 순간은 짧았지만 강렬한 느낌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에 콱 꽂혔다.

나강인은 가슴이 베이면서 뒤로 날아가 쓰러졌다. 그녀가 나강인을 베는 모습과 나강인이 베이면서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 완벽하게 이어졌다.

마치 그녀의 칼이 사람과 공간을 실제로 벤 것처럼 보였다.

변형찬은 자기가 영상을 편집했는데도 놀란 소리를 냈다.

“헉! 와…. 저거….”

공지현은 적의 공격을 피할 때는 아름답게 움직이다가, 반격할 때는 살벌한 모습으로 적을 베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예쁘면서도 강렬하고 멋있었다.

어느새 배우들이 더 모여 있었다. 공지현도 사람들 틈에 껴서 그 영상을 보았다.

영상의 마지막 장면이 나온 후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박! 내가 이렇게 예쁘고 멋있게 찍힐 줄이야! 난 그냥 선생님이 하라고 한 것뿐인데!”

주연배우 김유찬도 흥분했다.

“감독님. 내가 싸운 것도 고속 카메라 영상을 섞어서 보여주세요. 나도 저렇게 멋있게 나오나 보게.”

변형찬도 결과가 궁금했다. 이제 휴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찬 씨가 첫 번째 복면인과 싸울 때 영상을 이번에는 고속 카메라 위주로 조합하겠습니다.”

그는 첫 번째 전투씬을 임시로 편집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맛만 보는 겁니다. 나중에 진짜 제대로 편집할 겁니다.”

노트북에서 새로 이어붙인 영상이 재생됐다.

고속 카메라는 두 대가 사용됐다. 한 대는 김유찬의 얼굴이 나오게 찍었고, 다른 하나는 손과 칼날, 복면인이 칼에 맞는 부분 위주로 찍혔다.

그 영상이 교차 재생됐다. 김유찬의 진지한 표정은 느리게 나왔다가, 칼날이 복면인의 가슴을 벨 때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칼날이 적을 베는 순간 피가 튀었다.

그런 후에 다시 김유찬의 얼굴이 느린 속도로 나왔다. 얼굴에 피 몇 방울이 튀어 있었다. 표정과 핏자국이 잘 어울려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김유찬의 눈이 조금 가늘어지며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그쪽에 다른 복면인이 있었다.

영상이 끝났다.

김유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거지! 내가 원한 게 바로 이거라고!”

같이 영상을 본 배우들이 박수를 쳤다.

“이야아. 잘생긴 얼굴로 저러니까 더 멋지네요.”

“역시 김유찬. 눈빛이 살아있네.”

김유찬이 변형찬에게 말했다.

“고속 카메라를 그 방향에 배치한 게 신의 한 수였네요. 덕분에 제 표정이 정말 잘 나왔…. 어? 가만.”

전투 장면을 촬영할 때 카메라 배치 위치를 정한 건 나강인이다.

“강인 씨는 이런 그림이 나오게 하려고 카메라를 그렇게 배치한 건가?”

변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겠죠. 편집해보니까 느낌이 딱 옵니다. 어쩌다 하나쯤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는데, 아닙니다. 전투씬은 제가 확인한 모든 영상이 다 이런 퀄리티예요.”

“매번 카메라를 다시 배치했는데도 이렇단 말이죠? 그러면 절대로 우연이 아니네요.”

신이 난 변형찬이 첫 번째 영상을 다시 틀어놓고 편집 계획을 설명했다.

“정식으로 편집할 땐 여기서 여기로 전환하는 부분을 다듬을 거고요. 여긴 배경에 CG를 살짝 넣어야겠네요.”

“CG요?”

“이때는 김유찬 씨가 움직이는 동선을 따라서 흙먼지가 잔상처럼 일어나 따라갈 겁니다.”

“크으. 좋네요.”

변형찬이 공지현을 돌아보았다.

“아. 공지현 씨 전투 장면에는 블링블링을 좀 넣을까? 아닌가? 그냥 놔두는 게 느낌이 강렬해서 더 낫나?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겠어요.”

다른 배우들은 두 사람을 부러워했다. 동시에 기대도 많이 했다. 낮에 찍은 추가 액션 두 개는 이렇게까지 본격적인 전투씬은 아니었다. 그 배우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액션씬은 나중에 다시 나온다.

“나도 이런 거 하나 찍으면, 내 주변에 다 돌려야지.”

“난 인생작 리스트에 넣을 거야.”

다들 신이 나서 기대감을 내뱉었다.

그러다 중견 배우가 말했다.

“잠깐만. 그런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형님. 또 뭐가요?”

“아까 다들 봤잖아. 처음 한 번 찍어보고 이게 아니다 싶으니까 즉석에서 동선 다시 짠 거 말이야. 난 그 짧은 순간에 영상을 어떻게 조합할지 계산한 줄 알았지.”

“그렇게 했잖아요.”

“그냥 조합하는 수준이 아니라 이런 고퀄리티가 되도록 계산했잖아. 그것도 현장에서 바로.”

몇 사람이 숨을 삼켰다.

“헉!”

이 영상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동선을 짰어도 감탄할 만큼 수준이 높았다. 그런데 나강인은 실시간으로 계산해서 동선을 짜고 카메라 배치까지 디테일하게 지정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까 그 모습을 직접 보았다. 아까 중견 배우의 설명을 들었을 때도 놀랐는데, 실제로 영상을 보고 나니 아까 놀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변형찬이 나강인이 있는 쪽을 보았다. 나강인은 밥차 주인 김병호와 뒷정리를 하며 잡담하고 있었다.

변형찬이 나강인을 보며 말했다.

“천재네요.”

김유찬이 자랑했다.

“난 강인 씨가 천재라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

첫날부터 찍어야 할 씬이 많았다. 오늘은 야간 촬영도 예정되어 있었다.

이 세트장의 첫 촬영 일정은 사흘짜리다. 이곳에서 사흘간 촬영한 후에 서울로 돌아가서 현대를 배경으로 다시 찍어야 한다.

촬영 일정이 조선 시대 세트장과 서울을 오가게 된 건, 배우들의 스케줄과 장소 섭외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예정이 없다가 갑자기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배우들이 많아서, 스케줄 조정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내일부터 다른 스케줄이 있는 배우들은 가능하면 오늘 몰아 찍었다. 여유가 좀 있는 배우들은 내일과 모래 주로 찍기로 했다.

명품 액션을 원해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다들 신났다.

“내가 오늘 밤에 고품격 야간 액션을 보여주겠어!”

“형님은 오늘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서두르셔야죠. 저는 내일 모래 이틀 동안 여유 있게 명품 액션을 만들 겁니다.”

“야. 느긋하게 찍는다고 멋진 그림이… 나오겠지. 부럽다.”

전투씬 영상이 얼마나 멋지게 나오는지 직접 본 배우들은, 자기가 출연할 때도 그런 고퀄리티 영상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다.

변형찬에게 딜을 거는 배우도 있었다.

“감독님. 난 스케줄이 없어서 더 오래 있어도 되니까, 바쁜 사람들은 보내놓고 우리끼리 조선 시대에서 찍읍시다. 아주 명품을 만들어보자고요.”

그 제안은 바로 다른 배우의 태클이 들어와서 없던 일이 되었다.

“어허. 그러면 서울 스케줄이 꼬이잖아. 그런 건 다음에 찍어!”

“다음에 언제요?”

“나 무술감독님 다음 영화에 또 들어가서?”

“그거야 당연한 거고요.”

***

변형찬은 이미 몇 년이나 어떻게 하면 촬영 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덕분에 오늘 촬영은 하나가 끝나면 바로바로 다음 촬영이 이어졌다.

내일 드라마 촬영장에 가야 해서 오늘 몰아 찍어야 하는 공지현 같은 경우는 쉴 틈이 별로 없었다.

한참을 촬영하고 나서 겨우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신은하가 잡탕 과자가 든 종이컵을 그녀에게 주었다.

“이거 좀 먹어봐.”

공지현은 체력을 너무 소모해서 입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신은하가 권하는데 안 먹을 수도 없다.

그녀가 그 과자를 손가락으로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잡탕 과자는 원래 전장에서 체력을 많이 소모한 병사들을 위해 개발된 간식이다. 촬영으로 지친 공지현은 과자 하나를 입에 넣고 씹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우왕! 맛있어!”

신은하가 자랑했다.

“강인 오빠가 만든 잡탕 과자인데, 힘을 쓰고 나서 먹으면 더 맛있어.”

“진짜 맛있어요! 선생님이 매일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 매일….”

매일 만들어주려면 매일 봐야 한다.

신은하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너 말이야! 연기에 집중해도 모자랄 네가 말이야! 어디서 수작질이야!”

이보라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

“맞아! 어디서 그 핑계로 매일 보려고! 나도 못 그러는데!”

당황한 공지현이 두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요! 아! 이거 팔면 좋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에요! 매일 사 먹으려고요!”

신은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거야?”

“넵! 그런 겁니다!”

“어머. 내가 오버했네. 근데….”

신은하가 이보라를 돌아보았다.

“넌 왜 또 끼어들어! 꺼져!”

***

사흘간의 조선 시대 세트장 촬영 스케줄 중 첫날이 끝났다.

다른 스케줄이 있는 배우들은 오늘 일정이 끝나자마자 촬영장을 떠났다. 스케줄 때문에 내일부터 이곳에 오기로 한 사람도 있었다.

공지현의 출연분은 오늘 하루에 몰려있었다. 그녀는 내일은 경기도와 서울 두 촬영장을 오가야 한다.

공지현이 나강인에게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저 이제 가볼게요. 오늘 진짜 고맙습니다.”

“나도 조금 있다가 집에 갈 거야.”

이 세트장은 남양주 외곽에 있다. 나강인의 집은 서울 동북부에 있어서 출퇴근이 가능했다.

아예 현장에 남아있기로 한 스태프나 배우들은 근처 숙박시설을 잡았다.

나강인이 물었다.

“내일부터 드라마 촬영이야?”

“네. 내일이랑 모래 이틀이요. 내일은 서울이고요. 모래는 양평이에요.”

“양평이면 여기서 그렇게 멀진 않네.”

“네. 모레 밤에는 잠깐 들를 수 있어요.”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냥 촬영 끝나면 집에 가서 쉬어. 아. 그리고 이거.”

나강인이 잡탕 과자가 넉넉히 들어 있는 상자를 내밀었다.

“심심할 때 먹어라.”

“앗! 아까 그 과자다!”

공지현이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저…. 이거 혹시 나눠 먹어도 돼요?”

“너한테 줬으니까 이제 네 거야. 어떻게 먹든 네 마음이지. 머리에 꽃 대신에 꽂고 다녀도 돼.”

“히히. 아니에요. 내일 촬영장에서 다른 분들한테도 맛 좀 보여드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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