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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하는 히어로-167화 (167/411)

167. 김칫국

남양주 외곽에서 영화 촬영을 마친 공지현은 이튿날은 아침부터 서울에 있는 드라마 촬영장으로 갔다.

본격적인 촬영은 그녀가 도착하고 나서 한 시간 후에 시작됐다. 조연인 공지현이 나오는 부분은 상당히 짧아서 그 촬영은 금방 끝났다.

오후에는 공지현과 여자 주연과 싸우는 씬이 있다. 그녀는 주연배우가 올 때까지 몇 시간 정도 대기해야 한다. 그 시간이면 집에 갔다 올 수 있지만 촬영장에 남는 걸 선택했다.

그녀는 구석에서 손때가 묻은 대본을 다시 읽으며 오후에 할 연기를 점검했다.

점심시간에는 영화 스태프가 잡아놓은 근처 식당을 이용했다. 공지현은 제육 덮밥을 먹었다. 먹다 보니 어제 촬영장에서 먹은 나강인표 잡탕밥이 생각났다.

‘진짜 맛있었는데.’

점심을 먹은 후 휴식시간에 공지현이 사람들에게 과자를 돌렸다.

그녀는 어젯밤에 잡탕 과자를 손바닥 크기의 쿠키 포장용 투명 봉투에 나눠 담고 예쁘게 리본도 달았다.

그녀가 그 과자 봉투를 스태프들에게 한 개씩 나눠주었다.

“입이 심심할 때 드세요.”

“어. 고마워.”

피디에게는 특별히 두 개를 내밀었다.

피디가 잡탕 과자를 슬쩍 보았다.

‘건빵처럼 생겼네?’

“직접 만든 거야?”

공지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는 분이 만들어주셨어요.”

“됐어.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난 건빵을 별로 안 좋아해.”

“아, 네.”

공지현이 그래도 피디의 옆자리에 투명 봉투를 한 개 내려놓았다.

공지현이 막 돌아서는데 다른 쪽에서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어?”

다른 사람들도 잡탕 과자를 먹으며 감탄했다.

“이야아. 생긴 건 건빵인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냐?”

근처에 있던 조명감독이 공지현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팔아?”

그녀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파는 거 아니에요. 아는 분이 특별히 만들어주셨어요.”

과자를 먹어본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이야아. 밥 먹고 나서 먹는데도 맛있어.”

“이러다 돼지 되겠다.”

“넌 이미 뚱뚱하다.”

“너도.”

“알아.”

사람들의 반응이 하도 좋아서 피디도 과자 맛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떻길래 저래?’

그는 손바닥 크기의 투명 봉투에서 리본을 풀고 과자를 하나만 꺼내 맛을 보았다.

“어?”

맛있었다.

“이거 진짜 맛있네?”

봉투가 워낙 작아서 과자는 몇 개밖에 안 들어 있었다.

그는 공지현이 조금 전에 과자 봉투 두 개를 주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아…. 두 개 다 받을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피디 체면에 더 달라고 하기 망설여졌다.

그는 비닐 봉투의 리본을 조용히 감았다.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어야겠다.’

공지현의 친구 배역을 맡은 단역 3인방이 도착했다.

공지현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그 세 명도 같이 다니는 친구 역할로 출연할 기회가 또 생겼다. 오늘은 대사가 없지만 셋은 그래도 좋았다.

세 사람이 수다를 떨었다.

“나 저번에 TV에 얼굴 나오고 친구나 친척들이 전화랑 톡 엄청 했어.”

“나도. 난 옛날 남자친구가 톡을 보냈더라니까?”

“다시 사귀재?”

“지현 언니 싸인 받아 달래.”

“미친 새끼네.”

“나도 욕했어.”

이연지가 물었다.

“언니. 혹시 다시 사귀자는 걸 대놓고 말하지 못하니까 돌려 말한 거 아녜요?”

“걔가 양다리인 거 들켜서 내가 찬 건데?”

“미친놈 맞네요.”

공지현이 투명 봉투에 든 잡탕 과자를 꺼냈다.

“이거 맛 좀 볼래?”

이연지가 얼른 봉투를 받았다.

“앗! 고맙습니다!”

봉투 하나에 과자 다섯 개가 들어 있어서 3인방이 한두 개씩 맛볼 수 있었다.

이연지는 과자를 먹자마자 누가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어? 이거 아저씨가 만드는 과자다.”

공지현이 물었다.

“응? 아저씨라니?”

이연지는 영화에서도 대사가 별로 없는 단역이라서 대본 리딩에는 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강인이 그날 그곳에 왔다는 걸 모른다.

“우리 동네 피시방에서 밥을 파는 아저씨요. 그 아저씨가 만드는 잡탕 과자가 딱 이 맛이에요. 겉모습을 보고 설마 했는데, 맛을 보니까 확실해요.”

공지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에이. 아니야. 이걸 만든 분은 내가 요즘 찍는 영화의 무술감독님이야.”

“우리 아저씨가 부업으로 무술감독도 해요. 그럼 아저씨 맞네.”

공지현은 멈칫했다.

“어? 진짜야?”

“진짜죠.”

“잠깐. 네가 우리 선생님을 어떻게 알아?”

“우리 동네 아저씨라서 아는데요?”

옆에서 3인방 중 한 명이 물었다.

“연지야. 너 은하 언니랑 한동네 산다고 했잖아. 그럼 그 아저씨도 같은 동네 사셔?”

“응.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이랑 은하 언니랑은 바로 근처는 아니고 옆 동네쯤? 가본 적은 없지만 아저씨도 대충 그 정도 떨어진 곳에 집이 있대.”

공지현이 끼어들었다.

“잠깐만. 너 그럼 이거 전에도 먹어본 적 있어?”

“있죠. 아저씨가 밥파는 날에 말만 잘하면 잡탕 과자를 만들어주니까요.”

“잡탕 과자?”

“이 과자 이름이에요. 그날 재료에 따라서 그때그때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다 맛있어요. 언니가 준 이거랑 똑같은 맛도 먹어본 적 있어요.”

공지현은 지금 이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피시방은 무슨 소리야? 선생님은 유명한 무술감독이신데, 왜 피시방에서 밥을 팔아?”

“어머. 모르셨구나. 아저씨는 가끔 우리 동네 피시방에서 요리를 팔아요. 옛날에는 더 자주 팔았는데 요즘은 뜸해서 아쉬워요.”

공지현은 영화 ‘운명의 창’에 배우들이 갑자기 몰린 이유가 나강인이 참여한다는 소식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잘나가는 분이 왜? 돈을 벌려고 그러시는 건 아닐 거 아냐?”

“몰라요. 그냥 가끔 팔아요. 취미생활 같은 건가 봐요.”

“가끔 언제? 정확히 말해봐.”

“그냥 기분 내킬 때 파니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죠. 판다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달려가야 해요. 파는 시간이 짧아서 늦으면 국물도 없거든요.”

공지현은 아쉬웠다. 다른 지역에 사는 그녀에게는 어려운 조건이다.

“아…. 같은 동네 사니까 그게 되는구나.”

“네. 그리고 그때 조르면 잡탕 과자를 만들어줘요.”

공지현이 가만히 생각했다.

‘그래도 나한테 준 건 피시방에서 파는 것보다는 특별하게 만들….’

이연지가 그 기대에 초를 쳤다.

“그런데 이건 스페셜이 아니네요?”

“응? 스페셜?”

“스페셜 잡탕 과자는 진짜 맛있거든요.”

“아니, 어떻게 이것보다 더 맛있을 수가 있어?”

“있어요. 먹어보면 맛이 장난 아니네요.”

이연지가 아쉬워했다.

“근데 스페셜은 잘 안 만들어줘요. 동네 언니들하고 같이 있을 때 졸라야 해요.”

공지현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부러웠다. 그 동네에서 다들 재미있게 사는구나 싶었다.

“나도 그 동네로 이사 가고 싶다.”

***

여자 주연의 오후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드라마 작가가 촬영장에 왔다.

이 드라마는 대본이 이미 다 나와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드라마의 작가는 시청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시청자 반응이나 현장 상황을 보고 대본을 조금씩 수정하곤 했다.

피디는 배우들과 이야기하느라 자리에 없었다.

그녀가 피디 자리에 왔다가 투명한 쿠키 봉투에 담긴 잡탕 과자를 발견했다.

피디에게 이런 식으로 과자를 선물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많았다. 매니저는 물론이고 배우들도 종종 간단한 것을 선물했다. 쿠키는 여자 배우들이 주는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 피디는 원래 과자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들어온 건 그녀가 종종 집어먹곤 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리본을 풀고 투명 비닐 봉투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먹었다.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머. 맛있다. 응? 그런데 이 맛은….”

피디가 뒤늦게 그걸 보고 달려왔다.

“아니! 김 작가! 그건 내가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건데!”

“어머. 과자 안 좋아하는 거 아녔어요?”

“맛있는 건 좋아한다고.”

“아. 이게 맛있긴 하죠.”

피디가 얼른 비닐 봉투를 다시 리본으로 감아 봉인했다.

“에이. 세 개밖에 안 남았네.”

하나밖에 못 먹은 드라마 작가가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나강인 씨는 어디 있어요? 인사라도 해야겠다.”

피디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작가를 돌아보았다.

“응? 나강인이라니? 그 사람이 왜 여기 있어?”

“네? 이거 나강인표 과자잖아요.”

“응?”

“모양도 비슷한 데다가 맛까지 보니까 딱 알겠는데요?”

두 사람이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대화가 어긋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뭔가 아는 게 있는 드라마 작가가 먼저 설명했다.

“내 친구가 도주희 작가잖아요.”

드라마 ‘푸른 하늘’의 작가 도주희와 이 드라마의 작가는 친구다.

“그 드라마 중반부터 나강인 씨가 액션을 맡았잖아요. 그때 신은하가 나강인 씨가 직접 만든 과자를 주희한테 선물했거든요. 걔 작업실에 놀러 갔다가 먹어봤어요.”

그때는 도주희가 숨겨놓은 과자를 찾아내서 먹었다.

피디도 아는 정보를 꺼내 놓았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공지현 씨가 아는 사람이 만든 거야.”

양쪽 정보가 합쳐지니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드라마 작가가 말했다.

“그럼 걔가 아는 사람이 나강인이겠네요.”

“어?”

드라마 작가도 말을 해놓고 깜짝 놀랐다.

“어머. 진짜 그런가?”

두 사람이 공지현을 불렀다.

피디가 물었다.

“나한테 준 이 과자 말이야.”

“네. 딱 한 봉지 남았는데 드려요?”

“그래? 남았으면….”

드라마 작가가 얼른 끼어들었다.

“어머. 지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나는 입이 아닌가?”

“앗! 아뇨! 작가님 드릴게요!”

“고마워.”

피디가 입맛을 다시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 과자를 만든 사람 말이야. 혹시 나강인 씨야?”

공지현은 깜짝 놀랐다.

“어머. 말씀 안 드렸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피디는 대답보다 질문이 급했다.

“아니, 지현 씨가 나강인 씨를 어떻게 알아? 아니,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알 수는 있지. 하지만 이렇게 귀한 과자를 잔뜩 만들어주는 건 또 다르잖아.”

“아. 어제부터 촬영 시작한 영화 ‘운명의 창’이요. 제가 거기 출연하는데요.”

“어. 그건 알지. 그래서 스케줄이 충돌 안 하는지 확인했잖아.”

“그 영화의 무술감독을 나강인 선생님이 맡으셨어요.”

피디는 그것까지는 몰랐다.

“어? 그래?”

“어제 거기서 이 과자를 만들어주셔서, 오늘 나눠드린 거예요.”

“혹시 모든 배우가 다 이걸 받았어?”

공지현이 자랑했다.

“아뇨. 따로 한 상자를 받은 건 저밖에 없어요.”

피디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저번에 나강인 씨가 우리 촬영을 구경 온 것도 그렇고, 과자 상자를 지현 씨를 통해서 우리한테 보낸 것도 그렇고….”

피디는 짚이는 게 있었다.

“나강인 씨가 혹시 우리 드라마에 참여하고 싶은 건가?”

드라마 작가가 활짝 핀 얼굴로 박수를 쳤다.

“어머! 어머! 그거다. 그거.”

피디가 실실 웃었다.

“그러면 먼저 미팅을 해야겠지? 서로 조건이 맞아야 하니까 말이야. 하하하. 나강인 씨 소속사가 어디야? 연락 좀 넣게.”

“나야 모르죠.”

“조연출한테 소속사에 연락해서 미팅 좀 잡으라고 해야겠다.”

“그날 나도 올 테니까 꼭 전화해요.”

“흐흐. 당연하지. 우리 작가님이 오셔야 대본을 고치지.”

두 사람은 이제 공지현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 드라마에 어떤 액션을 넣어야 어울릴지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공지현이 할 말은 끝났다.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선생님한테 소속사가 있었나?’

없다.

나강인이 다른 곳과 계약할 때는 신은하의 매니저인 SAH 엔터 박우섭 실장의 도움을 받지만, SAH 엔터가 나강인의 소속사는 아니다.

그 회사에서 디지털 싱글 음반을 내긴 했지만 그것도 한 곡만 내고 끝나는 계약이다.

게다가 SAH 엔터는 나강인의 연락처를 흘리고 다니지 않는다.

공지현은 그런 사정은 모른다.

“피디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

남양주 외곽에서 사흘째 영화가 촬영됐다.

배우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중에서도 사흘 내내 촬영장에서 지내며 고생한 배우들의 얼굴이 제일 밝았다.

첫날부터 와 있던 배우가 오늘 도착한 배우에게 자랑했다.

“어제랑 그제 멋진 액션이 정말 많이 나왔어. 네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새로 온 배우가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손을 비볐다.

“형. 나도 지난 이틀간 여기 분위기가 어땠는지 소문 들었어. 그래서 아침부터 달려왔잖아. 오늘은 나도 좋은 그림 뽑아보려고.”

먼저 온 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액션씬이 별로 없을걸? 네가 오늘 나오는 씬도 액션이 좀 약하지 않나?”

“어디 오늘만 날이야? 나도 다음 주에 진짜 멋진 거 예정되어 있거든? 오늘은 맛만 보는 거지.”

“그 맛이 꿀맛일 거다.”

“그런데 형.”

새로 온 배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강인이 진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동선을 짜고 카메라 위치까지 다 정해?”

“어허. 나강인 무술감독님이라고 불러라. 어디 너 따위가 감히 이름만 부르고 그러냐?”

“헐.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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