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68화 (168/411)

168. OST

남양주 외곽 영화 세트장에 첫날부터 와 있는 배우가 나강인이 한 일을 자기 일처럼 자랑했다.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동선 배치와 카메라 위치를 실시간으로 짜는데, 거기 맞춰서 같이 연기하면 진짜 싸우는 느낌이 들어.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야.”

“그럼?”

“나중에 변 감독님이 그 영상을 편집…까지는 아니고 간단히 잘라 붙여서 잘 나왔는지 확인하거든? 그거 같이 보면 정말 감탄밖에 안 나온다.”

“그럼 그 영상이 어떻게 조합될지까지 찍기 전에 미리 다 계산했다는 거네?”

“물론이지. 그것도 실시간으로.”

새로 온 배우가 입을 벌렸다.

“와…. 그 정도면 무술감독이 아니라 촬영감독이나 아예 감독을 해도 되는 거 아냐?”

“어?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

좋은 액션이 영화 촬영현장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었다.

그 분위기는 다른 씬을 찍을 때도 영향을 끼쳤다. 배우들은 일상 대화 장면은 물론이고 로맨스, 갈등 등을 연기할 때도 에너지를 쏟아냈다.

변형찬 감독이 갈등씬을 촬영하고 나서 배우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

“이야아. 정말 장난 아니시네요. 두 분 연기를 보면서 몸이 다 움찔거렸습니다.”

배우들이 활짝 웃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네요.”

“이 느낌이 살아있을 때 바로 다음 씬 가시죠?”

“당연히 바로 가야죠!”

원래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에너지까지 넘쳤다. 덕분에 명연기가 자주 나왔다.

상대적으로 살짝 처지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들은 이를 악물고 그들을 쫓아갔다.

카메라 앞에서 다른 배우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연기하고, 감독의 오케이가 떨어졌는데도 더 잘할 수 있다면서 다시 찍어보자고 요청했다.

그들보다도 연기력이 더 떨어지는 배우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저기 껴서 연기 어설프게 했다가 그게 스크린에 나가면, 그날이 내 영화 인생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 배우들은 쉬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대본을 뒤적였다. 어떤 배우들은 화장실에 갈 때도 대본을 들고 다녔다.

에너지를 쏟아냈으면 어떻게든 도로 채워야 한다.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체력이 바닥나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배우들이 그렇게 하고도 버틸 수 있는 데는 맛있는 밥도 한몫했다.

나강인은 오늘 점심으로 돼지고기를 넉넉히 넣은 매콤한 조림을 준비했다. 그 조림은 뼈 없는 갈비찜과 느낌이 비슷했다.

배우들이 밥을 먹으며 감탄했다.

“와. 난 소갈비보다 이게 더 맛있다.”

“오늘부터 이게 내 인생 갈비찜이다.”

“야. 남은 고기랑 밥을 이렇게 비벼서 먹어봐. 더 맛있다.”

“우와아! 밥이 달다!”

나강인은 매운 걸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맵지 않은 것도 조금 준비했다. 사람들은 매콤한 쪽을 주로 받아갔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밥을 한 번씩 타간 후에, 의외의 손님이 식판을 들고 찾아왔다.

“어?”

작곡가 곽찬석의 동생인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이 씩 웃으며 식판을 내밀었다.

“저도 밥 주세요.”

나강인이 밥을 퍼주며 말했다.

“유선 씨는 우리 영화 스태프가 아닌데?”

“어머. 소식 못 들으셨구나. 우리 큰오빠가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았잖아요. 저는 음향 엔지니어로 참여하기로 했어요.”

“아아.”

나강인이 고기 조림을 넉넉하게 담아주며 물었다.

“그런데 곽 작곡가님은 한 달에 한 곡만 만드는 분 아니셨나요?”

“그 한 곡을 메인 테마로 신나는 버전, 애처로운 버전, 강렬한 팝 버전, 메탈 버전까지, 진짜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만들어냈어요. 영화 속 다양한 상황에 골라 쓸 수 있게요.”

“이 영화는 조선 시대와 현대가 동시에 나오는데, 한 곡으로도 그게 되는군요.”

“우리 큰오빠가 집에서 놀 때는 바보 같은데 일할 때는 천재인가 싶다니까요.”

***

작곡가 곽찬석과 SAH 엔터 사장 서재현이 짜장면 그릇에 씌워진 비닐랩을 벗겼다.

서재현이 짜장면을 비비면서 말했다.

“맛있는 거 먹자니까.”

“그래서 간짜장 시켜줬잖아. 그게 천 원 더 비싸.”

“아니. 배달 말고 테이블 빙빙 돌리면서 먹는 데 가자고.”

“바쁘다.”

오늘은 곽찬석의 작업실로 서재현이 찾아왔다.

서재현이 배달 짜장면을 먹으며 물었다.

“시간을 자유롭게 쓰던 놈이 갑자기 왜 바쁜데?”

곽찬석이 짜장면을 정성스럽게 비비며 대답했다.

“곡 하나 만들었거든. 그걸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하는 중이야.”

서재현이 씹던 짜장면을 꿀꺽 삼켰다.

“벌써? 빠르잖아!”

곽찬석이 자랑했다.

“요즘 필이 팍팍 온다. 이렇게 빨라지면 나중에는 곡 쌓아놓게 생겼다.”

서재현이 단무지를 곽찬석 쪽으로 밀어주며 물었다.

“그럼 그 곡 나 주나?”

“넌 양심도 없냐? 저번에 줬잖아.”

지난번에 준 노래 ‘오늘도 걷는다’는 여러 사정이 겹쳐서 SAH 엔터 소속 가수가 아니라 나강인에게 넘어갔다. 나강인이 가수로 활동할 때 쓰는 가명은 ‘댕댕’으로 지었다.

“야. 그 곡은 결국 나강인 씨가 불렀잖아. 그 사람은 우리 회사 소속 가수가 아니라고.”

“난 분명히 너한테 줬다. 네가 강인 씨에게 넘긴 거지.”

“그때는 나강인 씨가 부른 가이드곡이 인터넷에 유출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서 그랬지. 그러니까 이번에 이 곡은 나 줘라.”

“안돼.”

“야. 우리 사이에….”

서재현이 멈칫했다.

“어? 설마 또 나강인 씨에게 주려는 건 아니지?”

곽찬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양한 버전이 있으니 안 될 건 없지만, 아니야. 이 곡은 걸그룹이 불러야 제일 좋아.”

“어?”

“처음부터 걸그룹을 타깃으로 만든 건 아닌데, 만들다 보니까 그쪽으로 딱 맞게 나왔어. 곡이 알아서 만들어질 때는 내가 방향을 못 정하는데, 이번이 그런 경우야.”

서재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찬석이가 손이 가는 대로 만든 노래는 히트 칠 확률이 더 높은데?’

그는 이번에는 양파와 춘장도 밀어주었다.

“찬석아. 우리 회사에도 걸그룹 있다. 프프걸스 애들 주면 딱 되겠네.”

“이거 영화 OST로 쓰려고 만든 거야.”

“우리 애들이 OST 부르면 되지!”

“내가 영화 OST 만든다는 소문이 이미 많이 퍼졌어. 이 곡 나오면 달라고 조르는 곳이 너 말고도 많아. 짜장면이나 먹어.”

***

곽유선은 나강인이 만든 밥차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역시 맛있어. 이거 먹으러 남양주로 온 보람이 있어.”

촬영장 한쪽에는 김유찬의 팬클럽에서 보낸 커피차가 서 있었다. 그녀는 거기서 공짜 커피도 한 잔 받았다. 컵에는 주연배우 김유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1차 배식을 끝낸 나강인이 나머지는 밥차 주인 김병호에게 맡겨두고 밥차를 나왔다.

그는 커피차에서 커피를 한 잔 받은 후에 곽유선의 앞에 앉았다.

“오늘은 영화음악 음향 엔지니어가 할 일이 없을 텐데, 무슨 일로 온 겁니까?”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다.

“당연히 강인 오빠 밥도 얻어먹으러 왔죠.”

“이거 하나 먹으려고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웅…. 사실 일이 하나 더 있어요. 큰오빠가 작업 중인 버전 몇 개를 감독님에게 직접 들려주고 의견을 들어야 해요.”

“그게 여기 온 진짜 이유군요.”

“저한테는 큰오빠 심부름이 덤이에요.”

나강인이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그럼 일하고 가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앗! 안돼요.”

“왜요?”

“큰오빠가 강인 오빠 의견도 받아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액션과 관계된 건 강인 오빠 의견이 최우선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녀가 콩나물처럼 생긴 블루투스 무선 이어폰을 꺼내 나강인에게 내밀었다.

“시간 되면 지금 좀 들어보세요.”

나강인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밥은 다 만들었으니까.”

나강인이 이어폰을 받아 귀에 꽂았다.

곽유선이 그녀의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음악을 재생했다. 나강인은 그 음악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이건 댄스곡이군요.”

지금 들려주는 건 샘플이라 30초밖에 되지 않았다.

“걸그룹이 부르면 딱 좋겠네요.”

“바로 아시네요. 네. 맞아요. 만들다 보니까 걸그룹에 최적화된 곡이 됐대요.”

그녀가 투덜댔다.

“아까 우리 큰오빠가 천재라고 한 말 취소. 그 정도도 조절을 못 하면서 무슨 천재야. 이번 노래도 강인 오빠가 부르면 좋을 텐데.”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난 뭐 됐어요.”

“뭐가 돼요?”

“난 노래도 내봤고 한 자릿수 차트에도 들어봤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곽유선이 조금 흥분한 얼굴로 나강인을 설득했다.

“아뇨. 아직 아니죠. 10위 안에는 들었지만 1위는 못 찍었고,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내려왔잖아요. 큰오빠 곡으로 한 번 더 도전하면 이번에는 1등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나강인이 지난번에 발표한 노래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음원 순위가 너무 높아져서 괜히 했나 싶기도 했었다.

“난 됐다니까요. 진짜입니다.”

“제가 큰오빠 조르면 한 곡 더 받아낼 수 있는데…. 아. 다른 배리에이션도 몇 개 있는데 좀 들어보세요.”

곽유선이 락 버전의 30초짜리 음원을 들려주었다. 나강인이 감상을 말했다.

“이건 현대에서 주먹으로 싸울 때 배경에 깔면 좋네요.”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번에는 잔잔한 로맨스 버전을 들려드릴게요.”

촬영장의 다른 식탁에서 이보라가 신은하에게 물었다.

“쟤는 누구인데 강인 오빠하고 커피를 마셔?”

신은하가 곽유선을 보며 대답했다.

“곽찬석 작곡가님 알지?”

“당연하지.”

“그분 여동생.”

“흐음. 쟤도 혹시 배우야?”

“아니. 음향 엔지니어.”

“역시. 우리보다 얼굴이 많이 부족하다 싶더라.”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면 욕먹어. 사실이지만.”

“근데 음향 엔지니어가 왜 강인 오빠하고 저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해?”

“전에 CF 찍다가 강인 오빠가 쟤 목숨을 구해줬거든. 생명의 은인이라는 거지.”

이보라가 코웃음을 쳤다.

“난 뭐 강인 오빠가 생명의 은인 아닌가? 그리고 난 한 번이 아니거든?”

신은하가 손가락을 하나 세워 흔들었다.

“어디 나한테 비비니? 내가 더 많아.”

이보라가 즉시 말을 바꾸었다.

“어머. 은하야. 우리 이런 거로 경쟁해야 해?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누가 더 많이 생명의 위기에서 구출됐냐니. 남들이 보면 미친 줄 알아.”

“이게! 네가 시작해놓고 불리해지니까 왜 딴소리야!”

***

변형찬 감독과 곽유선, 나강인이 조용한 곳에 따로 모였다.

변형찬은 나강인이 OST 음악을 같이 듣고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씬은 몰라도 액션에 들어갈 음악은 강인 씨 의견도 들어봐야지.’

곽유선이 변형찬에게 사과했다.

“큰오빠가 직접 왔어야 했는데, 지금 다양한 버전의 편곡 작업으로 바빠서요. 그래서 제가 대신 왔어요.”

“아유. 괜찮습니다. 곽 작곡가님 전화도 받았습니다.”

“그럼 일단 원곡부터 들어보시죠.”

권유선이 스마트폰에 들어 있는 곡을 재생했다. 곽유선이 흥얼거리면서 부르는 목소리가 같이 나왔다.

변형찬은 30초짜리를 원곡과 몇 가지 편곡 버전을 눈을 감고 들었다.

들려줄 노래가 모두 나온 후에 권유선이 물었다.

“어떠세요?”

변형찬이 눈을 뜨고 활짝 웃었다.

“이야아. 역시 곽 작곡가님은 다르시네요. 곡이 정말 좋고, 상황에 맞춰 확장한 버전도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이거 가사는….”

“제가 흥얼거릴 때 쓴 가사는 영화 대본에 있는 걸 갖다 썼어요. 각각의 감정에 맞는 부분을 골라 쓰긴 했지만, 정식 가사는 당연히 따로 만들어야죠. 감독님이 쓰셔도 좋고요.”

“아. 제가 가사를 써도 될까요?”

“그럼요. 시나리오를 직접 쓰셨잖아요. 가사도 잘 어울리게 쓰시겠죠.”

“그럼 곽 작곡가님과 공동 작사하는 거로 하죠. 부족한 부분은 작곡가님이 고쳐주셔야 하니까요.”

작사는 그렇게 협의가 됐다. 이제 남은 문제는 이 곡을 누가 부르게 하느냐다.

권유선이 설명했다.

“이 곡은 걸그룹이 부르는 게 최선이에요. 걸그룹은 보통 여러 명이니까, 각자 파트마다 다른 목소리도 써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다양한 씬에 다양한 분위기로 적용할 때 더 좋겠죠.”

변형찬이 웃으며 턱을 긁었다.

“그렇겠네요. 멜로디만 쓰는 장면이 더 많겠지만요. 싸울 때는 격렬한 멜로디, 연예 때는 분위기 있는 멜로디.”

변형찬이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강인 씨. 그렇죠?”

“전투씬만 이야기하면, 조선 시대 전투는 멜로디 위주로, 현대에는 가수의 목소리가 들어간 버전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역시 강인 씨는 내 생각을 딱 아시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같은 노래인데도 시대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질 겁니다.”

곽찬석이 권유선을 보며 말했다.

“그럼 이 노래는 누가 부르게 할 겁니까? 기왕이면 노래도 잘하고 분위기도 밝은 걸그룹이 불러주면 좋겠는데요.”

“요즘 걸그룹은 노래 잘하는 애들 많아요. 하고 싶어 하는 걸그룹도 많고요. 후보군이 서너 개 정도로 압축되면 말씀드릴게요.”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변형찬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역시 남자 가수도 필요합니다.”

“예?”

“제가 생각한 그림대로 가려면 남자 목소리가 최소한 두 번은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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