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OST II
음향 엔지니어 곽유선이 물었다.
“어떤 상황에서 남자 가수가 필요한데요?”
‘운명의 창’은 조선 시대와 현대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영화다. 액션은 조선 시대에 많지만, 현대라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현대에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강렬한 액션이 들어간다.
변형찬 감독이 설명했다.
“영화 후반에 남자 주인공이 창을 차에 싣고 질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에서는 남자 목소리의 강렬한 노래가 필요합니다. 그때 외에도 필요한 씬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 그러면 넣으셔야죠.”
변형찬이 고민했다.
“그럼 남자 가수는 누구를 섭외하죠? 적당한 사람을 찾으려면 빨리 알아봐야….”
곽유선이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가수 댕댕은 어때요?”
“아. 그 얼굴 없는 가수 댕댕?”
“네. 어울릴 거 같지 않아요?”
변형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걷는다’도 강렬한 느낌을 주는 부분이 꽤 있죠. 괜찮겠네요. 그런데 얼굴 없는 가수인데 섭외가 됩니까?”
“댕댕이 우리 큰오빠 노래로 데뷔했잖아요. 당연히 연락하고 지내죠.”
곽유선이 그러면서 나강인을 슬쩍 보았다.
나강인은 이번 영화에서도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복면을 썼을 때뿐이다.
“이번에도 얼굴 없는 가수가 되겠지만요.”
***
남양주 외곽 세트장 촬영은 사흘 만에 끝났다.
현대가 배경인 서울 촬영은 초반에는 액션이 거의 없었다.
이틀 뒤에 나강인이 작곡가 곽찬석을 만났다.
곽찬석이 제안했다.
“강인 씨가 우리 OST의 남자 버전을 맡아주시죠.”
곽유선도 옆에서 거들었다.
“가수 댕댕이 강인 오빠라는 건 공개 안 하면 되잖아요.”
“음…. 영화 배경에 쓰는 부분만 짧게 하겠습니다. 저에게 맞는 노래도 아닌데 정식 음반 출시는 아니다 싶어서요.”
곽유선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어디에요? 그러다 반응 좋으면 풀버전도 부르고 그러는 거죠. 호호호.”
나강인이 물었다.
“그래서 이 OST 원곡은 누가 부릅니까?”
곽찬석이 설명했다.
“이 곡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걸그룹은 많습니다. 그중 이 셋이 후보입니다.”
그가 모니터에 문서 파일을 띄웠다.
“이 세 팀 중 한 곳에 줄 겁니다.”
그 문서에는 세 팀을 비교한 표가 들어 있었다.
“체리스카이, 레드스타즈, 프프걸스?”
셋 중에 프프걸스도 있었다.
나강인이 물었다.
“후보 선정 기준이?”
“개인적인 취향에, 걸그룹의 인기에, 회사의 지원 계획, 그리고 이런저런 부탁과 인연들이 많이 얽혀 있습니다.”
“안 유명한 팀도 있는데요?”
인기만 놓고 보면 프프걸스는 다른 두 팀에게 한참 밀렸다.
“물론 인기 가수가 부르면 곡이 히트 칠 확률이 높죠. 곡이 뜨면 저작권료도 많이 들어올 테고요.”
곽찬석이 씩 웃었다.
“근데 내 곡이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저 곽찬석입니다.”
곽찬석은 히트곡을 많이 만든 유명 작곡가다.
“물론 완전 무명 신인은 제 곡을 불러도 묻힐 수 있는데, 체리스카이와 레드스타즈는 인기 걸그룹이고, 여기서 인기가 제일 낮은 프프걸스도 제 곡이 묻힐 정도로 무명은 아닙니다.”
나강인이 프프걸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얘들이 후보에 든 이유는요?”
“재현이가, 아, 서재현 사장이 제 친구입니다. 서 사장이 하도 달라고 졸라서요. 프프걸스에게 곡을 주면 홍보는 회사 차원에서 팍팍 밀어주겠다더군요. 게다가 영화가 뜨면 어차피 곡도 뜹니다. 근데 이 영화가 말이죠.”
곽찬석이 웃었다.
“어떻게 봐도 뜰 거 같더군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10년 뒤에 나왔으면 명작이 될 영화입니다. 다만, 지금 나오면 명작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래 역사대로 명작이 나오도록 저희가 열심히 서포트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생각했다.
‘명작 영화의 OST. 이걸 부르면 애들에게 좋은 기회일 텐데.’
나강인은 다른 두 팀은 개인적으로 모른다. 사정을 모르니까 걱정해줄 일도 없다.
반면에 프프걸스는 그에게 자연 체조 2단계를 배우고 있다.
‘차트에 들어간 곡이 하나밖에 없어서 가끔 행사가 들어와도 남의 노래를 주로 불러야 한다던데. 곡이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던데.’
곽찬석이 말했다.
“세 팀 중 어디에 이 곡을 줄지 주변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강인 씨도 추천해 보시죠. 우리 영화의 무술감독님이시니까 반영하겠습니다.”
***
나강인이 단체 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 내일 시간 되는 분이 있으면 총권도나 수련하러 오시죠.
곧바로 대답 네 개가 올라왔다.
- 됩니다.
- 당연히 가야죠.
- 저 지금 대전인데요. 오늘 밤에 서울 올라갈 거예요.
- 내일은 총권도 훈련하기 딱 좋은 날이죠.
마지막 대답도 조금 뒤에 올라왔다.
- 일하던 중이라 늦게 봤습니다. 당연히 가겠습니다.
나강인이 물었다.
- 갑자기 말해서 빠지는 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왜 다들 이렇게 OK가 빠릅니까? 한 분은 프리렌서라 일이 없을 수 있지만, 네 분은 공무원인데.
경찰 요원 박순기가 설명했다.
- 종로 화학무기 보석강도단 사건 덕분에, 우리 윗분들이 총권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시거든요. 이제 교육출장 결재는 거의 자동으로 떨어집니다.
쿠거 일당이 보석 전시장을 습격했을 때, 총권도 수강생 박순기가 칼을 휘두르는 용병을 맨손으로 간단히 잡았다.
사건 보고서가 올라가면서 그 일이 여러 부서에 알려졌다. 그러면서 총권도를 배우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다는 인식이 퍼졌다.
현재 수강생이 총권도를 잘 배우면, 나중에 다른 요원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경찰 요원인 박순기의 경우는 총권도를 배우러 가는 날이 주말이면 월요일 하루는 휴가로 처리해줄 정도로 부서에서 팍팍 밀어주었다.
나강인이 톡을 남겼다.
- 좋네요. 그럼 내일은 일하는 날이라 치고 근무시간 내내 훈련받아도 되겠네요.
- 어, 아니. 그건 아니고요. 하루 빼줬다고 제가 해야 할 일이 어디 가는 건 아닙니다. 그냥 뒤로 잠깐 미뤄진 거라서 어차피 나중에 제가 다 해야 합니다. 살려주세요.
나강인은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이 모여 있는 단체 톡방에도 글을 남겼다.
- 내일 자연체조 2단계 배우고 싶은 사람 모여.
곧바로 톡 여덟 개가 주르륵 올라왔다.
- 저요!
- 저여!
- 형님! 제가 제일 먼저 가겠습니다!
***
이튿날 체육관이 북적댔다.
프프걸스 네 명은 들어오자마자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부와 민간 일을 두루 처리하는 민영희가 막내 최지혜의 어깨를 왼팔로 껴안으며 물었다.
“우리 병아리들 잘 있었어?”
최지혜가 자랑했다.
“히히. 네. 이번 주에는 행사도 뛰었어요.”
“노래 많이 했겠네? 반응은 어때?”
“우리 노래는 한 곡밖에 없었지만, 옛날 히트곡을 부르니까 많이 좋아하셨어요. 행사에 오신 분들이 연령대가 좀 있으셨거든요.”
신은하는 영화 촬영이 바빠서 오늘은 오지 못했다.
피시방 삼인방 윤아름은 대학생 해커 안성환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훈련 과정 자체는 촬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그녀는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이 쉴 때 인터뷰를 딸 생각이다.
“으흐흐흐. 오늘 인터뷰 영상을 내 계정으로 공개하면, 구독자가…. 흐흐흐.”
자연 체조 1단계 풀버전은 예전에 윤아름의 계정으로 공개했다. 그녀의 계정은 덕분에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은 자연 체조 영상을 보러 오는 시청자라 광고를 붙이지는 못했지만, 체조를 배우러 왔다가 그녀의 게임 방송에 유입된 사람도 제법 있었다.
나강인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런데 너희는 오늘도 여기 오면 공부는 언제 하냐?”
윤아름이 대답했다.
“우리 이제 대학 1학년인데요?”
“1학년은 공부 안 해도 돼?”
“어….”
대학생 해커 안성환이 자랑했다.
“저는 전공은 다 에이 플러스 맞았어요.”
“잘했다. 아름이는?”
“그게…. 성적은 행복 순이 아니잖아요!”
안성환이 말했다.
“아름아. 앞뒤가 바뀌었어.”
“응? 어디가?”
나강인이 말했다.
“어쨌든 성적은 망했구나? 그럼 넌 여기 출입금지.”
“앗! 공부할게요!”
“방법도 제시해야지?”
“성환이가 가르쳐줄 거예요.”
“응? 나?”
“야. 살려줘.”
“어? 어. 알았어.”
***
아이돌 여덟 명은 자연 체조 2단계를 연습했다. 5인방은 총권도를 수련했다.
연습과 수련을 한 시간쯤 한 후에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은 체육관 바닥에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헉헉. 힘들어 죽을 거 같아.”
“헥헥. 난 이미 죽어있다.”
반면에 총권도 5인방은 쌩쌩했다.
“역시 병아리들하고 하는 게 정답이었어.”
“우리끼리만 훈련받을 때보다 훨씬 할만하네.”
“이 정도면 매일 받을 수 있….”
“닥쳐. 나 사범님 들으실라. 그러다 진짜 매일 하면 우리도 죽어.”
“어. 맞아. 내 주둥이가 실수했네. 매일은 무리지.”
나강인이 한쪽에 치워둔 휴대폰을 확인했다. 곽유선이 보낸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프프걸스로 확정됐어요. 궁금하면 전화 주세요.]
나강인이 전화를 걸었다.
“OST 말인가요?”
곽유선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네. 걸그룹 세 팀의 소속사들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는데요. 결국 프프걸스가 선정됐어요.
“운이 좋았군요.”
- 어머. 이걸 운이라고 해도 되나? 세 회사 다 인맥까지 동원했어요. 프프걸스는 사장님이 우리 큰오빠랑 친구라서 인맥으로 밀리진 않았지만, 자체 인기나 회사 지원계획 같은 걸 종합해서 낸 점수에서는 세 팀 다 박빙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강인 오빠가 추천을 딱!
“제가요?”
- 추천하셨잖아요. 그래서 무게추가 프프걸스로 조금 넘어갔다가, 방금 확정됐어요.
“잘됐네요.”
- 큰오빠가 OST 작업이 다 끝나면 강인 오빠를 위한 남자 버전 편곡도 하겠대요. 기대하세요.
“그건 굳이 안 하셔도 되는데.”
- 하셔야죠. 좋은 소식 전해줬는데 뭐 없나요?
“어…. 다음에 보면 밥이라도 사겠습니다.”
- 사주시는 것도 좋지만, 저는 직접 만들어주시는 쪽이 더….
“다음에 페넬로페에서 뵙죠.”
나강인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프프걸스는 여전히 지쳐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막내 최지혜가 누운 채로 숨을 헐떡이며 나강인을 돌아보았다.
“하악. 하악. 내가 이렇게 힘들 정도면…. 선생님. 지영이 언니는 나이가 있으니까 이렇게 시키면 죽어요. 좀 살살 해주세요.”
같이 숨을 헐떡이던 리더 소지영이 힘들어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었다.
“너 이리 와.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나를 팔아먹니?”
“세 살이라도 더 먹은 언니가 좀 희생해. 나 죽을 거 같아.”
나강인이 프프걸스에게 말했다.
“신곡 준비하려면 댄스도 연습해야 하는데, 여기서 체력이랑 몸 쓰는 법을 배워놓으면 그때 도움이 될 거다.”
최지혜가 우는소리를 했다.
“신곡은 무슨 신곡이요. 우리는 신곡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요.”
“맞아요. 안 나올지도 몰라요.”
프프걸스는 예전보다는 행사가 늘었다. 주머니 사정도 회사 구내식당을 주로 이용하던 때보다 좋아졌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가끔 행사를 가면요. 우리 노래는 거기서 부를 수 있는 게 한 곡밖에 없어요.”
네 명이 누워서 수다를 떨었다.
“그래서 행사에 가면 회사 선배님 노래랑 옛날 명곡을 부르고 와요.”
“저번에 우리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댓글에 남의 노래만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리더 소지영이 한숨을 쉬었다.
“좋은 노래가 한 곡만 더 있어도 그런 소리 안 들을 텐데.”
나강인이 말했다.
“너희 신곡 나오니까 이제 두 곡 되겠네. 그럼 그런 댓글도 줄어들겠지.”
막내 최지혜가 피식 웃었다.
“네? 에이. 농담도. 그래도 막 기분이 좋아지는 농담이네요.”
“진짜야.”
“네?”
갑자기 리더 소지영이 벌떡 일어나 가방을 모아놓은 곳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팀장님! 우리 신곡 나와요?”
- 무슨 헛소리야?
“네? 아니에요?”
- 응. 아니야. 그런 소리 들어본 적도 없다. 괜히 헛바람 들지 말고 거기서 훈련 열심히 받아.
리더 소지영이 휴대폰을 들고 돌아오며 실망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라는데요?”
막내 최지혜가 바닥에 누워서 팔다리 마구 흔들며 항의했다.
“이게 뭐예요! 괜히 기대했잖아요!”
총권도 오인방도 한쪽에서 쑥덕댔다.
“이번엔 나 사범님이 너무하셨네.”
“어떻게 저런 거로 놀리나. 쟤들한테는 간절한 일일 텐데.”
“어머. 나쁜 남자 콘셉트를 너무 세게 잡으셨다.”
나강인이 입맛을 다셨다.
“사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지를 않네.”
리더 소지형이 들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녀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매니저의 전화였다.
소지형은 나강인도 좀 들어보라는 뜻으로 아예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제가 왜 그런 소리를 했냐 하면요.”
매니저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네? 뭘 알아요?”
- 너희 신곡 소식을 어떻게 우리 회사보다 빨리 알았냐고! 나도 지금 막 들었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