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프리패스
팔성테크 팀장 양용준이 받은 문서에는 방금 앤더슨이 말한 계약 추진 이야기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역시! 오메가테크도 이 제안을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본사 반응이 꽤 괜찮습니다.
“앤더슨. 이 문서를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요?”
앤더슨이 밀어주었던 문서를 도로 잡아당기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아직 곤란합니다. 본사에서 보낸 이 공문은 좋은 소식이라서 미스터 양에게만 보여드리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우리가 아직 정식으로 계약한 건 아니잖습니까?”
양용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건 그렇지만….”
“본사 방침이 그러니 양해해주시죠.”
“이해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보다시피 본사에서 전제조건으로 지시한 부분이 있습니다.”
앤더슨이 문서의 아래쪽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본사 경영진이 팔성테크의 연구시설과 핵심부품 생산시설, 그리고 물자 보관시설이 어떤 상태인지 직접 확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부터 해결해야 우리 협의가 계속 진행될 수 있습니다.”
양용준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우리 회사를 오메가테크가 감사하겠다는 건 아니죠?”
앤더슨이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아닙니다. 그냥 제가 가서 눈으로 둘러본 후에 본사에 잘 관리되고 있다고 보고하면 됩니다.”
양용준은 난감했다.
“그것도 사실….”
양용준이 팀장이긴 한데 그의 팀은 연구팀이 아니다. 생산팀도 아니다.
양용준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창고밖에 없다. 마침 앤더슨의 요구에는 창고도 들어있었다.
그가 제안했다.
“우리 회사에도 절차라는 게 있어서 다른 곳은 곤란합니다. 대신에 물자 보관시설부터 보시겠습니까? 그건 제 권한으로 바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음…. 본사 지시라서 이러면 곤란한데….”
양용준이 부탁했다.
“사정 좀 봐주시죠. 서로 하나씩 진행해야지, 어떻게 처음부터 연구시설을 보여주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우선 물자 보관시설부터 제가 확인하고, 그걸 바탕으로 본사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잘 풀리자 양용준이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활짝 웃었다.
“역시 앤더슨은 말이 잘 통합니다.”
‘난 오메가테크가 우리와 계약하겠다는 약속만 받아내면 돼. 그러면 다들 나를 제대로 보겠지.’
그는 예전에 따로 추진하던 계약을 너무 일찍 주변에 알렸다가, 나중에 무산되면서 바보 취급을 당한 일이 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조심해서 접근했다.
양용준이 앤더슨에게 질문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태양전지 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말씀하신 연구자가 아직 박사과정이라고 하셨지요? 친환경 재생에너지 분야는 본사도 관심이 있으니까, 물자 보관시설을 확인할 때 같이 만나시죠. 간단히 미팅이라도 하게요.”
양용준이 웃었다.
“하하하. 앤더슨은 정말 시원시원해서 정말 좋습니다. 제가 꼭 데려가겠습니다.”
***
권수연은 율명바이오의 사장 권동진의 딸이다.
그런데 율명바이오는 제약회사라서 권수연의 태양전지 연구와는 접점이 없다. 권동진이 사장이긴 하지만 회사와 상관없는 분야에 연구자금을 지원하는 건 관련 절차가 까다롭다.
게다가 권동진은 권수연이 지금은 연구보다 건강에 더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수연도 집에 손을 벌리지는 않았다.
“건강해지면 다른 회사를 찾아가서 제안해 볼까? 아빠 인맥이면 소개는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런 고민을 하는 그녀에게 양용준이 전화를 걸었다. 양용준도 이제 권수연의 바뀐 전화번호를 안다.
권수연이 전화를 받았다.
“왜 전화야?”
- 내가 너 연구하는데 보탬이 되라고 유명한 회사에 투자를 요청했다.
“응. 안 믿어.”
- 어? 야. 이번엔 진짜야.
“그래서 그 회사가 어디라고?”
- 이건 우리 부모님이나 형한테도 아직 말 안 한 거야. 나중에 놀라게 하려고 말이야.
“응. 끊는다.”
양용준이 급히 말했다.
- 오메가테크!
“어?”
권수연은 오메가테크가 어떤 곳인지 안다.
“거기는 각종 장비랑 로봇, 그리고… 무기를 연구하는 회사 아냐?”
- 아는구나?
“거기 사장 스칼렛 켈리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거든.”
- 하하하. 놀라지 마라. 내가 오메가테크와 우리 회사의 제휴 사업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
“하긴. 팔성테크는 그 회사와 같이 일할 게 있겠네.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 거기서 재생에너지 쪽도 관심이 있더라고. 그래서 네가 널 추천했지. 네 연구에 투자 좀 해보라고. 긍정적으로 보더라.
권수연은 수술만 성공하면 태양전지 연구의 규모를 키우고 싶다. 그런데 그러려면 연구비를 투자해줄 곳이 필요하다.
“진짜?”
- 그래. 이따가 내가 오메가테크의 사람을 우리 회사 창고로 안내할 건데, 같이 갈래? 가서 이야기 좀 나눠봐.
권수연은 오늘 컨디션부터 확인했다. 나쁘지 않았다.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돼?”
양용준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2시에 내가 너희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
오후 2시에 권수연이 양용준의 차를 탔다.
“오메가테크 담당자랑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가평.”
“응? 팔성테크의 창고는 다른 데 있다고 전에 그랬잖아. 옮겼어?”
“가평에 내가 관리하는 회사 특수창고 시설이 따로 있어. 거기서 만나려고.”
***
오늘은 영화 ‘운명의 창’ 촬영팀 전체가 쉬는 날이다.
감독은 촬영 계획을 조정할 시간이 필요했고 스태프는 쉴 시간이 필요했다. 거의 매일 촬영하는 주연급 배우들도 다른 스케줄을 소화하거나 체력을 회복할 시간을 요구했다.
그래서 촬영팀은 일주일에 하루쯤은 쉬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페넬로페는 오랜만입니다. 자주 방문하십시오.
“거기 가면 서비스 요리를 하도 챙겨주니까 미안해서 자주 가기 그렇다.”
- 뻔뻔해지십시오. 그리고 적자를 볼 정도로 챙겨주는 건 아닐 겁니다.
“그치? 아니겠지?”
- 아닐 거라고 믿고 자주 가십시오.
나강인이 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오래된 연식의 차가 보였다.
“저 차를 개조할 때 공을 너무 들여서 새 차로 바꿀 수가 없다.”
- 새 차를 사서 같은 작업을 다시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나강인이 운전석 앞에서 방탄판이 붙은 묵직한 문을 열었다.
“그럼 그 고생을 또 해야 하잖아. 그건 아니지.”
그가 차에 타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권수연이었다.
“어. 수연아. 무슨….”
- 하악. 하악.
“응? 너 숨소리가 왜 그러냐?”
- 여기 가평 창고인데….
거기까지 말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뭐지? 이건?”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일반인이 몇 킬로미터는 달린 후에 낼 법한 거친 숨소리였습니다.
“수연이 상태로는 100미터만 뛰어도 이럴 거야. 그런데 얘는 자기가 뛰면 안 되는 걸 잘 알아.”
AI 전지인이 최악의 경우를 경고했다.
- 심각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지금 들어온 정보를 제대로 분석하려면 반대 경우를 같이 놓고 비교해야 한다.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 발작이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수연이는 쓰러진 적은 많아도 발작을 일으킨 적은 없어.”
- 이라미드 태양전지 개발자가 위험에 빠졌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나강인도 그렇게 생각한다. 최악과 최선을 놓고 비교했더니 최악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정보가 부족했다.
“가평이라고 말한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 다시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십시오.
이번에는 나강인이 최악을 가정했다.
“만약에 말이야. 수연이가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다가 어딘가에 숨은 상태면, 도로 전화를 걸면 어떻게 되겠냐?”
- 안됩니다. 절대로 전화하지 마십시오.
“일단 수연이 위치부터 파악하자.”
나강인이 권수연의 아버지인 권동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동진이 약간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닥터…. 아니, 강인이. 전화번호만 교환했지 전화를 준 건 처음인 것 같….
“수연이가 혹시 집에 있습니까?”
- 아! 수연이 찾는 전화였구나. 휴우. 오늘 동네 친구랑 같이 나갔다.
동네 친구라는 말에 예전에 집 앞에서 마주친 사람이 생각났다.
“그 동네 친구 이름이 혹시….”
- 팔성테크 양용준입니다.
“양용준입니까?”
-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는데, 맞아.
“둘이서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 외국 회사가 수연이 연구에 관심을 보인다더라. 연구비 지원 문제를 이야기하러 그 회사 사람을 만나러 갔어.
“팔성테크가 아니라 외국 회사요?”
- 용준이가 그 회사랑 일하는 게 있는데, 그 인맥으로 소개해줬다더라고. 그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도움이 될 때가 다 있네.
“어느 회사에서 투자한다고 했습니까?”
- 어디라더라…. 영양제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나강인도 영양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회사를 한 안다.
“오메가테크?”
- 아! 맞아. 오메가테크. 미국 회사인데 거기서 친환경 재생에너지에 관심이 많다더라고.
“알겠습니다.”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오메가테크가 수연이와 접촉했다고?”
- 스칼렛이 요원님의 주변 사람과 접촉하는 것 같습니다. 경호대상자가 오메가테크 직원과 만난다면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진짜로 스칼렛이 접촉한 건지 확인은 해야지.”
나강인이 오메가테크 사장 스칼렛 켈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칼렛이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강인 씨!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자는 중은 아닌가 보네요.”
스칼렛이 우는소리를 했다.
- 야근 중이죠. 직원들은 퇴근했는데 나만 이 시간까지 야근이에요. 나만 착취당하는 것 같아요.
옆에서 친구이면서 비서인 제시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 네가 일한다고 해서 나까지 야근 중이잖아! 네가 날 착취한다고!
- 월급 많이 주잖아!
- 휴가를 줘!
나강인이 말했다.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요.”
- 어머. 한국에 언제 다시 들어가냐고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설마.”
- 쳇.
“태양전지 연구에 관심 있습니까?”
- 앗! 그걸 어떻게 알았지? 역시 나강인!
나강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군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서 권수연과 미팅을 잡은 겁니까?”
스칼렛이 도로 물었다.
- 권수연이 누구인데요?
“어?”
오메가테크는 큰 회사다. 직원이 연구비 지원을 위해 접촉한 사람의 이름을 사장이 모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태양전지 연구원인데 모릅니까?”
- 제시카. 혹시 알아?
- 아니. 외국 박사과정 연구원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그건 무리야.
나강인이 다시 물었다.
“오늘 태양전지 연구를 위해 미팅을 잡은 건 맞지요?”
- 글쎄요.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체크하지는 않아서….
“오메가테크가 태양전지 연구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분야이지, 회사는 상관없어요. 친환경 재생에너지는 우리 회사가 다루는 분야는 아니에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수연이는 양용준의 소개로 나갔다고 했어. 양용준은 팔성테크 사람이야.’
“그럼 팔성테크랑 일하거나, 일하려고 하거나, 뭔가 추진하는 일이 있습니까?”
- 팔성테크가 어디에요? 제시카. 알아?
- 한국에 있는 회사야. 내가 알기로는 우리 회사와 일한 적은 없어.
“젠장.”
- 어머. 나강인이 나한테 욕했다.
“부탁 하나만 합시다. 오메가테크가 팔성테크와 뭔가 추진한 게 있는지, 한국대학교와 태양전지 연구에 관해 뭔가 진행하려 한 게 있는지를 급하게 좀 알아봐 줘요.”
- 중요한 일인가요?
“굉장히.”
- 알았어요. 30분만 기다려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었다.
“대답을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수연이가 속은 것 같다.”
- 경호대상자 권수연을 찾아서 보호해야 합니다.
나강인이 스마트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일단 아는 형사에게 부탁해서 수연이의 위치부터 추적….”
그가 스마트폰을 내렸다.
“아. 그건 곤란하지.”
- 어째서입니까?
“수연이가 경찰의 관심을 많이 받으면 나중에 비밀수술을 들킬 위험이 있어. 외부에서는 수연이의 병이 어떤 건지 모르는 게 좋아.”
- 요원님이 불법 수술로 체포되면 임무 수행이 어렵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으셔야 합니다.
***
가평에 있는 팔성테크의 보관시설에는 4개의 창고와 1개의 관리건물이 있었다. 창고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대신에 이곳에 설치된 보안시스템은 다른 곳보다 성능이 좋았다.
이곳에는 많은 수의 감지기와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인이 무단으로 침입하면 즉시 경비 업체에 경보가 날아간다.
그런데 지금 그 보안시스템은 모두 해제된 상태였다.
양용준은 창고 한가운데에 놓인 나무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이 새끼들이. 내가 누군지 알고….”
그의 맞은편에서 앤더슨이 검은색 가죽장갑을 낀 채로 말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우리는 네 뒷조사를 다 했으니까. 넌 연구시설이나 생산시설에는 나를 데려다줄 수 없지만, 이 보안 창고는 들여보낼 수 있지. 여기는 네가 관리하는 곳이니까.”
“다 알면서 나한테 연구시설도 보여달라고 한 거야? 내가 연구소 대신에 이 창고로 데려오게 하려고? 날 속였어!”
앤더슨이 히죽 웃었다.
“너 따위와 손잡을 일이 뭐가 있지? 없어. 이곳에 들어오는 프리패스 카드로 써먹는 것 말고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