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물건
나강인은 2번 창고 외벽에서 4번 창고의 출입문 앞까지 적의 눈을 피해 이동했다.
4번 창고의 벽은 두꺼운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었다. 출입구는 육중한 철문이었다.
철문 옆에 숫자로 된 버튼식 잠금장치가 보였다.
나강인이 그 버튼들을 가까이서 보며 물었다.
“예상 비밀번호는?”
AI 전지인이 나강인이 눈으로 본 숫자 키패드의 모습을 재처리해 최근에 자주 터치한 버튼을 찾아냈다.
- 최근에 주로 사용된 번호 4개를 찾았습니다.
“겨우 4개? 가정집 현관문도 아니고 이 튼튼한 시설에?”
- 확률이 높은 조합부터 표시합니다.
허공에 4자리 숫자 여러 개가 주르륵 나타났다.
나강인이 그 번호를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입력했다. 세 번째 번호를 입력하자마자 디지털 잠금장치가 열렸다.
“7641? 이거로 열리는 거 실화냐?”
- 그러게 말입니다.
“보안시스템에 돈을 아무리 많이 쓰면 뭐하나. 관리하는 사람이 입력하기 귀찮다고 비번을 짧게 정하면 이 꼴이 되는데.”
- 그런 시설은 많습니다. 1q2w3e4r처럼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흔히 사용하는 비번도 있습니다.
“그런 걸 쓰는 곳일수록 해킹당하기 쉽겠지.”
- 물론 저는 훨씬 더 고급기술을 사용합니다.
“어. 그래. 그 고급기술로 그놈들이 오기 전에 자물쇠도 따자.”
이 철문에는 전자식 잠금장치만 있는 게 아니다. 열쇠를 돌려서 여는 기계식 잠금장치도 같이 설치되어 있었다.
- 락픽을 꺼내주십시오.
나강인이 주머니에서 자물쇠 해제용 도구들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냈다. 그건 평소에는 차에 보관하는 장비다.
AI 전지인이 가느다란 쇠꼬챙이로 자물쇠 내부를 가볍게 긁어 정보를 수집했다. 곧바로 눈앞에 자물쇠 내부 구조가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AI 전지인이 도구들을 사용해 내부 핀을 조작했다.
- 잠금장치가 해제되었습니다.
나강인이 철문 손잡이를 옆으로 밀었다. 손잡이가 옆으로 꺾이자마자 전기 모터가 돌아가면서 철문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넌 자물쇠 하나는 진짜 잘 딴다.”
- 손의 감각으로 내부 구조를 확인 후 필요한 핀만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이런 철문 정도는 제 손에 걸리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도 자랑은. 그리고 내 손이다.”
그는 4번 창고 안으로 들어간 후에 도로 문을 닫았다. 수동 잠금장치도 다시 잡았다.
이 창고는 안쪽에서는 손쉽게 문을 열 수 있다. 반면에 밖에서 안으로 침입하려면 비밀번호나 보안카드, 그리고 열쇠가 필요하다.
철문은 꽤 두꺼웠다.
“놈들이 쳐들어와도 이 문이 잠깐은 버텨주겠지.”
이 정도면 적에게 뒤를 습격당할 위험은 없다.
나강인이 창고 내부를 확인했다.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스마트폰의 불빛과 AI 전지인의 야간 시야 모드를 조합하면 내부를 훤히 볼 수 있었다.
“수연이가 여기 있으면 좋겠는데.”
AI 전지인이 화살표로 방향을 표시했다.
- 인기척을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이 그쪽으로 뛰어갔다.
창고 한쪽에 권수연이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수연아!”
권수연은 나강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강인아? 네가 왜 여기 있어? 너도 붙잡혔어?”
“아니. 구하러 왔다.”
“어떻게 알고….”
“네가 나한테 전화했잖아.”
그녀가 아까 걸었던 전화는 여기가 가평 창고라는 말만 하고 끊어졌다.
권수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다행이다. 경찰에 신고했구나? 그럼 밖에는 경찰이 와 있는 거야? 그 이상한 놈들도 다 잡았어?”
“아니. 나 혼자 왔어.”
“어? 왜?”
“신고해도 되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권수연이 걱정했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해?”
나강인이 권수연의 손목을 잡아 맥박을 확인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숨소리와 맥박 모두 좋지 않습니다. 중요 경호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게 있다.
나강인이 일어났다.
“저놈들부터 잡아야지.”
나강인이 밖에 있던 놈들을 놔둔 건 적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권수연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녀부터 찾아야 했다.
권수연이 이미 적에게 잡혀있는 상태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그녀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제 권수연은 찾았다.
“이 창고에 다른 인기척이 있냐?”
- 없습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에게 말했다.
“여기가 튼튼하니까, 수연이는 이곳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해.”
- 이 창고 건물을 임시 방어거점으로 지정하겠습니다.
이번에는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적 병력 규모는 1개 분대 수준으로 추정됩니다. 발견한 적은 1명 외에는 모두 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교전에 들어가기 전에 무기부터 확보하십시오.
“여기 뭔가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
나강인이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가 본 창고 내부 모습을 AI 전지인이 분석한 후에 보고했다.
- 위험물 표시가 강조된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뭔가 좀 강력한 게 들어 있으면 좋겠는데.”
상자는 기계식 버튼 방식 잠금장치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비밀번호는 네 자리 숫자였다.
다섯 번째 시도에서 잠금장치가 풀렸다. 나강인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대전차미사일을 발견했습니다.
나강인은 당황했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어?”
- 저도 당황했습니다.
상자 안에는 무선 대전차 유도 미사일과 제어장치가 들어 있었다.
- 요원님께서는 강력한 무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이 정도를 바란 건 아니었다고. 이걸 어디에 쓰냐.”
- 이 미사일이 창고 안에서 터지면 권수연은 죽습니다. 적이 창고 내부로 사격하기 전에 나가서 적을 처리해야 합니다.
“알아. 그런데 이 미사일은 어디서 났을까?”
여기는 팔성테크의 창고다.
“팔성테크에서 밀수한 걸까?”
- 국방부와 국방과학연구소, 국내 관련 기술 업체들이 공동으로 연구 중인 신형 대전차 무선 유도 미사일입니다. 철인기공과 팔성테크도 이 미사일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국산이라고?”
- 국산입니다. 양산 단계는 아직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상태를 보면 개발은 거의 끝난 것 같은데…. 어쨌든 국경을 넘어온 밀수품은 아니란 거네?”
- 물론입니다.
“그럼 다른 나라로 밀수해 가려는 거겠지. 저놈들이 찾는 물건이 뭔가 했더니, 이 미사일이구나.”
-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나강인이 상자 안쪽에 접힌 채로 꽂혀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AI 전지인이 그 서류를 확인하고 보고했다.
- 이 미사일은 탄두의 화약을 제거하고 동일 질량의 다른 물질을 채워놓았습니다. 연구용 미사일입니다.
“그러니까 안 터진다고?”
- 동체에 연료가 들어 있어서 터지긴 터집니다만, 전차 장갑을 관통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탄두도 없는 양산 전 물건을 이 고생을 해서 굳이 외국으로 빼돌린다? 누군가에게 쏘려는 게 아니라 기술을 분석하는 게 목적이겠어.”
나강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지인아. 이 미사일의 외형은 이미 알려졌으니까 네가 알아본 거지?”
- 일반 대중에게는 정밀한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구하려면 구할 수 있습니다. 현재 시대의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 미사일의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미사일의 몸통 껍데기가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지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고?”
- 물론입니다. 재질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너도 이걸 만들 수 있냐?”
- 겉모습은 유사하게 복제할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허공에 손짓하며 말했다.
“만약 이 창고 안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화재도 나고, 그리고 이것도 터져서 창고가 다 날아간다고 치자.”
- 이 창고 내부에는 다른 인화물질도 많습니다. 이 창고는 완전히 소각될 겁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이 미사일의 껍데기 재질이 조금 발견되는 거야. 그러면 이게 터져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겠지? 아니면 다른 화재가 먼저 일어났다가 이게 터졌다고 생각하든지.”
-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이놈들은 미사일을 훔쳤다는 증거를 그렇게 없앨 계획이야.”
왜 적이 총을 갖고만 있고 양용준에게 쏘지 않았는지, 왜 양용준을 어설프게 묶어놓기만 하고 한 대도 때리지 않았는지도 깨달았다.
“저놈들은 여기 있던 사람들을 전부 산 채로 죽일 생각이야. 미사일이 폭발할 때 이 창고에 있다가 모두 죽은 거로 처리하려 했겠지.”
- 한 놈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맞아. 저놈들은 사정 봐줄 것 없는 확실한 적이다. 다 잡자.”
권수연이 물었다.
“강인아. 왜 계속 허공에 손짓하면서 혼잣말을 하는 거야?”
“널 어떻게 구할지 계획을 세웠지. 이제 준비는 끝났다.”
***
앤더슨이 열쇠를 흔들며 말했다.
“드릴까지 쓸 필요는 없겠네.”
양용준은 물론이고 이 창고 시설에 있던 일곱 명의 직원도 4번 창고 앞에 끌려와 있었다. 권총으로 무장한 용병들이 그들을 감시했다.
앤더슨이 창고를 보며 지시했다.
“문 열어라.”
창고 관리소장이 당황한 얼굴로 양용준에게 물었다.
“양 팀장님이 4번 창고 열쇠를 왜 갖고 있습니까?”
4번 창고는 평소에는 전자식 잠금장치만 사용한다. 지금처럼 비상 상황이 발생해 기계식으로 문을 폐쇄할 때는 사람이 안에 있어야 한다. 외부 침입자가 아무리 협박해도 열쇠는 구할 수 없어야 한다.
그게 이곳의 보안 규정이다.
그래서 저 열쇠는 이곳이 아니라 본사에 있어야 한다.
양용준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자랑하려고….”
“예?”
앤더슨은 팔성테크의 보관시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고 속였다. 그런데 양용준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4번 보안 창고까지 보여주려고 열쇠를 가져왔다.
“이 시설의 보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려고….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젠장.”
“저놈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파티에서….”
강남에서 열린 파티에서 앤더슨은 양용준에게 자신이 오메가테크의 간부라고 말하며 명함을 주었다.
우연을 가장한 자리에서 받은 명함을 양용준은 진짜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오메가테크와 뭔가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앤더슨은 양용준이 오메가테크와 접촉하길 원한다는 걸 미리 알고 일부러 그 명함을 준비했다. 명함은 몇만 원이면 만들 수 있다.
양용준은 오늘 이곳에서 앤더슨을 잘 구슬려야 오메가테크와 계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쓸 수 있는 카드는 다 챙겨왔다. 그중에는 4번 보안 창고를 수동으로 여는 열쇠도 있었다.
앤더슨의 부하 용병이 양용준의 보안카드를 전자식 잠금장치에 갖다 댔다. 번호를 누를 필요도 없이 잠금장치가 바로 해제됐다.
앤더슨이 용병에게 열쇠를 던졌다. 용병이 열쇠를 한 손으로 받아 열쇠 구멍에 꽂았다.
용병이 열쇠를 돌렸다. 수동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그런 후에 그 옆에 달린 레버를 밀었다.
모터가 돌아가며 철문이 옆으로 천천히 열렸다.
잠금장치를 해제한 용병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앤더슨이 다른 부하에게 지시했다.
“가서 더미 가져와.”
“예!”
용병이 차가 주차된 곳으로 뛰어갔다. 가짜 미사일 부품은 승합차에 실려 있었다.
앤더슨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창고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안에 우리 물건이 있단….”
문 안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와 앞에 서 있던 용병의 목을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켁!”
앤더슨은 깜짝 놀랐다.
“어? 뭐, 뭐야!”
나강인은 문이 열리자마자 앞에 서 있는 용병부터 붙잡았다.
AI 전지인이 용병의 권총 위치를 표시했다. 허리 뒤쪽이었다.
그는 용병을 왼팔로 잡아당기며 허리 뒤의 권총을 잡았다. 잡을 때는 권총 손잡이가 아니라 위쪽 슬라이드를 잡았다.
- 좌우에 적이 있습니다!
AI 전지인이 적의 위치를 표시했다.
나강인이 왼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용병을 그쪽으로 던졌다.
동시에 오른손에 쥔 권총을 짧게 흔들었다. 슬라이드가 그의 손에 쥐어진 상태에서 몸체만 앞뒤로 움직였다. 탄창에 들어 있던 첫 번째 총알이 약실로 들어갔다.
그는 권총 슬라이드에서 손을 놓았다가 곧바로 공중에서 권총 손잡이를 잡았다. 안전장치는 권총을 잡으면서 해제했다.
오른쪽에 있던 용병이 허리에 꽂아놓은 권총을 잡았다. 하지만 뽑을 틈도 없었다.
나강인이 오른쪽 용병을 향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총탄이 적의 양쪽 어깨를 꿰뚫었다.
“으아악!”
직원들의 좌우에 서 있는 용병은 두 명이었다. 나강인이 앞으로 걸어가며 그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다른 용병들도 상황을 깨닫고 권총을 뽑았다. 하지만 나강인이 더 빨랐다.
직원들의 오른쪽에 있던 용병이 어깨에 두 발을 맞고 고꾸라졌다.
나강인이 총구를 왼쪽으로 돌렸다.
- 적은 방탄조끼가 없습니다. 가슴을 쏘면 한 발로 제압 가능합니다.
나강인이 왼쪽 용병의 어깨에도 두 발을 먹였다.
“끄아악!”
“그러다 저놈들이 죽으면 합수부가 못 덮어줘.”
AI 전지인이 갑자기 경고했다.
- 좌측 후방에 권총 장전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