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교체
철인기공 본부장 이태성은 합수부 형사의 푸념을 들으며 어떻게 된 건지 조금 눈치챘다.
‘반응을 보니 이번 사건도 나강인 씨가….’
이태성은 나강인이 개입한 다른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가 아는 것만 해도 대형 사건이 많았다.
이태성이 위로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사가 슬그머니 요청했다.
“폐기됐어야 할 미사일 부품 몇 개가 유출된 걸 확인했습니다. 철인기공에는 그런 유출 문제가 없는지, 부품 재고의 철저한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서류만 보지 마시고 직접 실물을 확인하셔야 합니다.”
“어…. 담당 직원들 야근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
신은하가 남양주 외곽 영화 촬영 세트장에서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오늘 저녁에 강인 오빠도 촬영이 있으니까 다른 스케줄을 잡았을 리 없잖아! 그러면 같이 밥 먹을 시간은 있을 거 아냐!”
맞은편에서 이보라가 물었다.
“왜? 아직도 전화 안 받아? 또 바람맞았어?”
신은하가 즉시 반박했다.
“바람맞은 거 아니거든?”
“그럼 피우나?”
“야! 너 가!”
“같이 밥 먹어주러 왔는데 왜 구박이야?”
“그게 아니겠지! 둘이 밥 먹는 줄 알고 끼어들러 왔겠지!”
이연지가 두 사람 사이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말했다.
“싸울 시간에 밥 드세요. 이 초밥 도시락 진짜 맛있어요.”
“박 실장님이 오늘 여기 들른대서, 강인 오빠하고 먹으려고 좋은 데서 사다 달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맛있어야지.”
“진짜 좋은 가게에서 샀나 보다. 살살 녹아요.”
신은하가 물었다.
“근데 연지야. 넌 왜 여기서 밥을 먹는 거야? 네 촬영은 이미 끝났잖아. 집에 안 가?”
“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생겼다고 알아서 밥 먹으래요.”
“그렇구나. 오늘 토요일인데도 급한 일이 있으시구나.”
“응급수술이라도 있겠죠. 그럴 땐 자주 사 먹어요.”
이연지가 어느새 초밥 도시락 하나를 다 비우고 입맛을 다셨다.
“다 좋은데 양이 모자라요. 밥차에 가서 한 판 더 먹어야겠다.”
이보라는 촬영 기간에는 음식을 평소보다 적게 먹는다. 그녀가 초밥을 나눠주며 물었다.
“근데 너 진짜 잘 먹는다. 아무리 여고생이라도 이렇게 잘 먹으면 살이 좀 쪄야 하는 거 아니야?”
“예전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번에 수술받고 나서는 더 많이 먹어도 살은 안 찌고 체력만 늘어나요.”
“완전 연예인 체질이 됐네?”
“그쵸? 흐흐흐.”
신은하가 걱정했다.
“설마 몸에 다른 병 있는 거 아니지?”
“에이.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의사잖아요. 검사 싹 다 했는데 완전 건강하대요.”
이보라는 촬영만 들어가면 다이어트 하느라 고생을 많이 한다. 그녀가 급히 물었다.
“잠깐만. 그럼 수술받고 나서 다이어트 안 해도 되는 체질이 됐다는 거잖아. 그 수술 뭐야? 나도 받을 수 있나?”
“그런 수술이 아닌데요? 이건 그러니까, 음…. 수술 부작용이 아니라요. 아마 원래 앓았던 병의 부작용일걸요? 병에서 나쁜 건 제거되고 좋은 것만 남은 거죠.”
“그 좋은 병 혹시 전염은 안 돼?”
“전염병 아니거든요?”
***
권수연의 수술이 드디어 끝났다.
이정호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뭘 본 거지….”
권동진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48분.”
연습할 때의 최고 성적은 39분 59초였다.
그런데 그건 모형 장기 부분만 연습하는데 걸린 시간이다.
전체 수술시간 커트라인은 원래 1시간이다. 이연지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수술은 총 48분이 걸렸다. 그동안 연습했던 부분은 32분 만에 끝났다. 연습 때보다 무려 8분을 줄였다.
나머지 과정도 20분을 예상했는데 16분 만에 끝냈다. 거기서도 예상보다 4분이 줄어들었다.
권동진은 전자식 스톱워치 두 개를 보며 울었다. 하나는 32분, 다른 하나는 48분이 찍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정말 고맙….”
나강인이 말했다.
“저는 먼저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스케줄이 있어서요.”
권동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 강인이. 아니, 닥터 노네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수연이는 제 친구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치? 하, 하하. 크흑.”
나강인이 먼저 수술실을 나갔다. 어차피 다음 단계부터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권동진이 물었다.
“이 박사님. 수술은 잘 된 거지요? 아무 문제 없었던 거지요.”
이정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잘됐습니다.”
옆에서 외과 의사 김중석이 중얼거렸다.
“사람 손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이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어떻게 그렇게 빠르고 완벽하게 봉합할 수 있지? 과장님. 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요?”
“나도 이해가 안 돼. 분명히 시야가 확보가 안 된 상황인데, 마치 사람 몸을 투시해서 보면서 봉합하는 것 같았으니까.”
“혹시 투시 초능력이 있는 거 아닐까요?”
“넌 의사라는 놈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니까 그러죠.”
“손끝의 감각으로 신체 내부 모습을 분석하면서 했겠지.”
“그게 가능합니까?”
“혈관 한두 개라면 나도 할 수는 있지만….”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요?”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인데…. 그걸 해냈어.”
두 사람에게는 수술 기법도 중요하지만, 권동진에게는 다른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가 물었다.
“우리 딸이 건강해지려면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이정호가 대답했다.
“환자는 오늘은 여기서 회복할 겁니다. 저희가 계속 케어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같이 있겠습니다. 가족에게는 제가 잘 둘러대겠습니다.”
“그러시죠. 여기서 하루 경과를 보고 내일 우리 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 그 후에는 가족분들을 부르셔도 됩니다.”
***
나강인이 ‘운명의 창’ 남양주 외곽 세트장에 도착했다.
그는 현장 스태프에게 도착을 알린 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위기가 좀 이상하네?”
- 사람들의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졌습니다.
감독 변형찬은 나강인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강인 씨! 갑자기 전화가 안 돼서 당황했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강인은 이 영화에 참여할 때 전제조건을 하나 걸었다. 그에게 정말 급한 일이 생기면 스케줄을 최우선으로 조정해줘야 한다는 게 조건이었다.
“오는 길에 전화를 드렸을 때는, 제 순서를 뒤로 옮길 수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죠. 강인 씨가 맡을 부분은 뒤로 미뤄서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나중에라도 오고 계시다고 전화를 주셔서 다행이었죠.”
“저 때문에 불편하게 해드렸군요.”
변형찬이 손을 흔들었다.
“어휴. 아닙니다. 다른 배우도 아직 연락이 안 돼서 지금 난리 났거든요. 아마 원래 시간에 오셨어도 못 찍었을 겁니다.”
변형찬이 촬영장 쪽으로 돌아간 후에, 나강인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가 이러나?”
- 요원님.
“왜?”
- 컵라면이라도 드시죠.
“아. 너도 배고프지?”
- 물론입니다. 요원님이 배가 고프면 저도 배가 고픕니다.
나강인은 수술을 마치자마자 이곳으로 오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밥차는 이미 배식을 마치고 철수했다.
대신에 한쪽에 컵라면과 뜨거운 물이 담긴 전기 물통이 있었다. 그 컵라면은 야식용으로 갖다놓은 것이었다.
나강인이 물통 앞에 가서 컵라면을 뜯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날계란도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 컵라면에 날계란을 넣으면 맛은 변하지만, 대신에 국물이 부드러워지죠. 저도 좋아합니다.
나강인이 물을 부은 컵라면과 젓가락을 가지고 한쪽에 가서 앉았다.
“수연이는 괜찮겠지?”
- 이럴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오늘 비밀수술에 참여한 사람들은 휴대폰을 다른 곳에 두거나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꺼놓았다.
만약 권수연에게 급한 상황이 생기면 병원 일반전화로 나강인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락이 온 게 없었다.
“그래. 우리 오늘 진짜 잘했잖아.”
-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은하가 촬영을 마치고 다가왔다.
“어? 뭐야? 어디서 밥 먹고 온 거 아녔어? 컵라면은 왜 먹어?”
“이게 내 저녁이다.”
신은하가 이보라를 휙 돌아보았다.
“봐! 어디서 데이트하고 온 거 아니잖아!”
이보라가 즉시 발끈했다.
“야. 왜 나한테 화살을 돌려!”
“네가 강인 오빠를 의심했잖아!”
“아니라고! 아까는 그냥 널 놀린 거라고!”
나강인이 말했다.
“아주 나 없는 곳에서 영화를 찍었구나.”
신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오늘 영화를 찍고 있긴 하지.”
이연지가 옆에서 입맛을 다셨다.
“라면 맛있겠다.”
이보라가 물었다.
“넌 초밥 도시락을 두 개나 먹었으면서 또 배가 고파?”
“성장기잖아요.”
신은하가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그거 먹지 마. 저녁은 내가 시켜줄게. 여기도 배달되는 게 있을 거야.”
“됐다. 괜히 그러다 현장 분위기만 더 망친다. 지금도 뭔가 삐걱거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도 컵라면으로 때우는 건…. 아니다.”
그녀가 나강인의 옆에 앉았다.
“지금 유찬 오빠랑 싸워야 할 배우가 연락이 안 돼서 상황이 좀 그래. 촬영 순서 다 꼬여버린 데다가, 오늘 못 찍으면 내일부터 전체 스케줄이 엉망이 되니까.”
“음…. 이 영화. 그동안 별 탈 없이 잘 찍었지?”
“그치. 분위기도 진짜 좋았지. 그 배우님이랑 강인 오빠만 오늘 연락이…. 어?”
신은하가 나강인을 휙 돌아보았다.
“앗! 강인 오빠. 혹시 또 막 테러리스트나 무장강도 상대로 총 쏘고 그런 거 아니지? 그래서 늦은 거 아니지?”
가평 팔성테크 창고 전투는 어제 끝나서 합수부가 수사하는 중이다. 오늘은 갑자기 권수연의 비밀수술이 잡혀서 늦었지만 총은 쏘지 않았다.
“싸우다 온 거 아니다.”
“다행이다.”
조감독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은하 씨! 보라 씨! 오셔야 합니다!”
신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총알에는 눈이 없다더라.”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나강인은 한쪽에서 혼자 컵라면을 후후 불어서 먹으며 신은하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연기가 아주 물이 올랐네.”
- 보면 아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영화랑 드라마를 많이 보면서 보는 눈을 키웠잖아. 나는 아주 훌륭한 관객이고 시청자야.”
현장에 있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표정이 점점 더 나빠졌다. 촬영 순서를 조정했는데도 와야 할 배우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촬영은 다 끝났다.
변형찬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배우를 잘못 뽑았나? 이건 너무한 거 아냐?”
조감독의 휴대폰이 조용히 울렸다. 조감독이 발신자를 확인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화를 냈다.
“아니, 이러시면 안 되죠. 우리 감독님이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예?”
조감독이 당황한 얼굴로 이야기를 듣다가 그대로 변형찬에게 걸어갔다.
“감독님. 전화 좀 받아보셔야겠는데요.”
“왜? 누군데?”
변형찬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화를 벌컥 냈다.
“어? 아니, 왜 이제야 연락이 되는 겁니까? 내가 지금…. 예?”
- 죄송합니다. 촬영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제가 기절하는 바람에 그만….
“예?”
그런 상황에서 더 화를 내기는 어렵다.
“많, 많이 다치셨습니까?”
- 맞은편 차가 중앙선을 넘어 돌진했습니다. 우리 쪽 도로에서만 차 네 대가 부서졌습니다.
“헉!”
- 저는 기절은 했어도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는데, 지금 발가락이 부러져서… 발에 깁스를 해야 한답니다.
변형찬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짚었다. 그가 억지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 그, 그러시군요. 크게 안 다치셨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래서 언제쯤 촬영에 다시 참여를….”
- 죄송합니다. 의사가 깁스를 풀려면 4주, 아무리 빨리 풀어도 3주 이상은 있어야 한다네요.
이 영화의 촬영 기간은 4주다. 게다가 이미 촬영 초반을 지나 중반으로 달리고 있다. 깁스를 푸는 시기는 이미 모든 촬영 일정이 끝나 있을 때다.
“후우. 어쩔 수 없지요. 우리가 어떻게든 수습하겠습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빠지겠습니다. 다른 좋은 분과 찍으셨으면 합니다.
배우는 몇 번이나 사과했다.
변형찬은 답답했다.
이건 반대편에서 달리던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와 덮친 사고다. 배우에게 책임지라고 할 상황이 아니다.
전화를 끊은 후에 변형찬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 이걸 어떻게 하지?”
오늘 예정된 다른 촬영은 이미 다 끝났다. 배우들은 변형찬이 심각하게 통화하는 걸 보고 모여 있었다.
변형찬이 그들에게 방금 통화 내용을 짧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대형사고가 터졌네요.”
변형찬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걸 오늘 못 찍으면 전체 스케줄이 다 꼬일 텐데, 말을 탈 줄 알고 액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배우를 지금 당장 어디서 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