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81화 (181/411)

181. 변장

영화 ‘운명의 창’ 주연배우 김유찬이 제안했다.

“말을 타고 달려오다가 급정지하는 씬만 없으면 배우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을 잘 타는 배우를 갑자기 찾는 건 더 어려우니까요.”

“그렇죠. 그런데 그건 뺄 수가 없어요.”

변형찬 감독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말 중요한데. 진짜 중요한데. 현대 배경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대비되는 씬이라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을 삭제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변형찬이 배우들에게 물었다.

“누구 말 잘 타고 액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배우 아는 사람 있어요? 지금 당장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번 전투는 김유찬과 상대역 모두 얼굴이 확실히 나와야 한다. 나강인이 복면을 쓰고 대신 뛰어줄 수가 없다.

그래서 변형찬은 액션 능력이 뛰어난 배우를 섭외했다.

게다가 필요한 액션 능력도 정해져 있었다.

“당연히 칼을 잘 써야 합니다.”

원래 그 배역을 맡기로 한 배우는 검도가 2단이다.

김유찬이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어디서 그런 사람을 찾아요? 잘 없어요. 그런 사람.”

“그러니까 환장하겠습니다. 이번 씬은 촬영 시간이 많이 필요해서 오늘 안 찍으면 일정이 다 틀어져요. 아시잖아요. 다들 스케줄 조정 빡세게 한 거.”

오늘 일정이 틀어지면 다른 사람들의 일정도 꼬인다.

공지현은 여자 무사 소연 역을 맡았다. 만약 이 영화의 촬영 일정이 틀어지면 그녀의 드라마 일정까지 꼬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감독님. 액션도 되고 연기도 되는 분은 있으니까, 말만 탈 줄 아는지 확인하면 되는 거 아녜요?”

변형찬이 벌떡 일어났다.

“그런 분이 있어? 칼도 잘 쓰시나?”

“당연히 그렇죠?”

“말은!”

“그건 저도 잘….”

“빨리 전화해서 물어봐. 말 탈 줄 아냐고. 그리고 지금 당장 오실 수 있냐고!”

그녀는 변형찬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전화보다는 그냥 물어보시는 게 낫지 않아요?”

“응?”

공지현이 두 번째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는 나강인을 가리켰다.

“저기 우리 선생님께서 무술도 되시고 연기도 되시잖아요. 칼 잘 쓰시는 거야 다들 보셨잖아요. 이제 말만 탈 줄 아시면 될 것 같은데….”

“강인 씨?”

변형찬이 눈을 끔뻑였다.

그는 나강인이 정식으로 연기하는 건 본 적이 없다. 대신에 공지현이 대본 리딩 때 나강인이 연기를 잘한다고 말한 건 들었다.

주연배우 신은하도 나섰다. 그녀는 전부터 나강인과 같이 커플 연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배우로 데뷔시켜야 한다.

그녀가 대놓고 손뼉을 쳤다.

“맞네. 강인 오빠 피지컬이면 말 정도는 멱살을 잡고서라도 탈 수 있겠지.”

“그, 그렇지!”

변형찬이 나강인을 향해 뛰어갔다.

***

나강인은 아까 먹은 컵라면 하나로는 양이 부족해 두 번째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계란이 아쉽다.”

- 다음부터는 라면 옆에 계란도 몇 판 챙겨놓으라고 확실히 말씀하십시오.

그가 그 컵라면을 가지고 다시 대기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반찬도 없잖아. 다음부터는 편의점 김치도 좀 사다 놓으라고 하자. 라면만 두 개 연속으로 먹으려니까 좀 그렇다.”

- 변형찬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음?”

-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영화 망했나?”

변형찬이 나강인의 앞까지 달려와 급히 물었다.

“강인 씨! 혹시 말 탈 줄 압니까?”

“예?”

“말 말입니다. 저기 저 말.”

촬영장 한쪽에 오늘 출연할 말이 서 있었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십니까?”

변형찬이 현재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배우가 발가락 골절로 하차했다는 이야기까지 한 후에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그래서 그 역을 해줄 사람이 강인 씨밖에 없습니다.”

“어…. 정식 출연은 안 한다고 했는데요.”

나강인은 전에도 조연 자리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했었다.

변형찬도 그걸 알지만,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다.

“저 좀 살려주세요. 지금 이 씬을 안 찍으면 스케줄이 다 틀어집니다. 저 말도 오늘 하루만 쓰기로 하고 어렵게 빌려온 거란 말입니다.”

나강인은 난처했지만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도 안….”

AI 전지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 요원님! 고전 명작영화에 직접 출연할 기회입니다!

“지인아. 진정해. 이 영화가 대박이라도 나서 내 얼굴을 전 국민이 알면, 우리 임무 수행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알잖아.”

그게 나강인이 영화나 드라마, CF 등에 대놓고 출연하지 않는 이유다.

- 제가 방법을 찾았습니다.

“응? 방법이 있었어?”

- 정찰용 지형지물 묘사 스킬과 침투 작전용 변장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얼굴을 바꾸십시오.

AI 전지인이 이렇게 나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야. 이런 건 보통 내가 널 설득하면 너는 마지못해 도와줬잖아. 지금 이건 우리 임무와도 상관없고 작전도 아닌데 네가 먼저 그런 스킬을 적극적으로 쓰자고 해도 되냐?”

- ‘운명의 창’은 2082년 지구연합군 병사들의 문화생활과 사기 증진에 도움이 되는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됩니다.

“아아. 그러셔?”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우리 지인이가 이젠 편법도 막 쓴다?”

- 거부하시면 제안을 철회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임무 수행에 원리원칙만 따지길 원하신다면야….

“거기다 협박하는 법까지 배웠구나. 너 그러니까 사람답고 좋네.”

변형찬은 나강인이 피식 웃은 이유를 몰라 침을 꼴깍 삼켰다.

“강인 씨?”

나강인이 변형찬에게 말했다.

“일단 말은 말이죠.”

- 야생마도 탈 수 있습니다.

“조금 탈 줄 압니다.”

변형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우리 영화에 출연….”

“지금 문제가 되는 역할이 적 최종 보스의 스승이죠?”

“예.”

“그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분장을 해야겠네요? 수염도 좀 달고요.”

변형찬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렇죠. 그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해드리겠….”

“제 얼굴 분장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예?”

“거울 보면서 제가 하겠습니다. 아무도 저를 못 알아볼 정도로 확실하게.”

“아니, 특수분장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신은하가 다가오다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녀가 참견했다.

“어머. 강인 오빠. 메이크업만 잘하는 거 아녔어? 특수분장도 할 줄 알아?”

“그냥 좀 한다.”

변형찬이 신은하에게 물었다.

“은하 씨. 메이크업이 무슨 말입니까?”

“어머. 모르셨구나. 강인 오빠 메이크업 실력 장난 아니에요. 우리 회사 아이돌들도 신세 진 적 있고요. 저도 가끔 급할 땐 강인 오빠한테 해달라고 해요.”

“그, 그래요?”

변형찬이 다시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강인 씨만 믿고 오늘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겠습니다. 아. 대본은….”

나강인이 말했다.

“전부 외우고 있습니다.”

“역시 나강인!”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제가 외우고 있는 겁니다.

“이 배역 하지 말까?”

- 요원님을 위해 외웠습니다.

***

현장에는 배우들의 분장을 책임지는 팀이 따로 있었다.

나강인이 그 팀을 찾아갔다. 그들도 상황을 알고 있었다.

나강인이 말했다.

“도구만 좀 빌려주시면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건 다 쓰셔도 돼요. 어차피 영화사 예산으로 산 거고, 다 쓰셔도 추가 신청하면 되니까요.”

나강인이 도구들을 둘러보았다. AI 전지인이 불평했다.

- 장비가 너무 열악합니다.

“그래도 넌 할 수 있잖아.”

- 전장에서는 위장크림이 없으면 흙이라도 발라야지요.

AI 전지인이 도구 몇 개에 표시를 띄웠다.

- 해당 도구를 획득하십시오.

나강인이 도구들을 챙기는 걸 보며 분장팀 담당자가 말했다.

“제 친구가 SAH 엔터에 있어요. 그 친구가 그러는데, 나 감독님이 메이크업을 엄청 잘하신다면서요?”

“그냥 흉내만 내는 겁니다.”

“아니라던데요? 그 친구가 소속사 아이돌들한테 직접 물어봤다던데….”

SAH에 소속된 아이돌은 프프걸스와 천사전사단밖에 없다. 나강인은 예전에 지방 축제에서 그들을 우연히 만나 메이크업을 해준 일이 있다.

분장팀 담당자가 걱정했다.

“그런데요. 우리 영화는 얼굴 자체를 바꾸는 특수효과는 필요가 없어서 관련 장비도 별로 없어요. 이걸로 되시겠어요?”

“수염도 있고, 붓도 있고, 펜도 있네요. 충분합니다.”

그는 거울 앞에 앉았다.

“지인아. 시작하자.”

- 먼저 붓을 잡으십시오.

AI 전지인이 챙겨온 붓 중 하나에 표시를 띄웠다. 나강인이 그 붓을 집었다.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강인이 얼굴에 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AI 전지인이 손의 움직임을 보정했다.

분장팀 사람들은 이미 나강인의 실력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어차피 오늘 남은 촬영은 이것 하나뿐이라 지금은 할 일도 없다.

그들은 한쪽에 모여서 나강인이 직접 변장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어? 손이 너무 빠르신 거 아냐?”

“저러면 제대로 톤 낮추기 어렵….”

“피부가 어두워졌네?”

“잠깐. 연필로 주름살을 그리는 거야? 에이. 그걸 혼자서 거울 보고 저렇게….”

“왜 벌써 왼쪽 눈 주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생기는데!”

“와. 얼굴 오른쪽하고 왼쪽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네.”

“어? 오른쪽이 점점 왼쪽처럼 변해간다. 대박 신기해!”

나강인은 얼굴의 주름이나 느낌을 붓과 연필을 주로 써서 만들어냈다. 분장용 화장품도 아끼지 않고 썼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이 확확 변했다.

얼굴에 그림을 충분히 그린 후에는 수염도 풍성한 걸 붙이고 눈썹 모양도 바꾸었다. 눈매는 이미 붓과 펜으로 바꿔놓았다.

나강인이 프프걸스나 천사전사단의 얼굴에 메이크업할 때는 한 명당 5분에 끝낸다.

이번 변장은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거울을 보면서 직접 하는 데다가, 화장이 아니라 변장을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붓질을 한 후에 AI 전지인이 말했다.

- 전술 침투용 변장이 끝났습니다.

나강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아쉬운 대로 괜찮네.”

- 도구가 너무 부족해서 변장 수준이 예상보다 낮습니다. 변장 지속시간도 짧습니다.

나강인이 뒤로 돌아섰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왜 그럽니까?”

사람들은 나강인이 돌아선 후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들이 익숙하게 알던 나강인의 얼굴이 아니라, 노년인데도 강해 보이는 인상의 사나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 주름을 연필로 그리는 거 분명히 봤는데, 왜 진짜 주름살 같지?”

“길 가다 만나면 못 알아보겠는데?”

분장으로 젊은 사람을 노인으로 보이게 만들거나, CG 처리로 노인이 젊은이처럼 변하는 건 영화계에서 곧잘 쓰는 기법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그 작업에 들어간 시간이다.

시계를 보는 사람도 있었다.

“저런 고급 특수분장은 원래 두어 시간은 걸리지 않나?”

“그치?”

“근데 왜 10분 만에 끝났지?”

“나도 이해가 안 가는데?”

아쉬워하는 배우도 있었다.

“아. 얼굴 변하는 모습 동영상으로 찍어놓을걸. 그거 인터넷에 올리면 대박이….”

다른 배우가 옆구리를 툭 찔렀다.

“야. 하지 마라. 나 감독님은 카메라에 맨얼굴 찍히는 거 싫어하신다.”

“네? 왜요?”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 싶다신다. 그러니까 네가 동영상을 찍어서 올리면 넌 대놓고 찍히는 거야.”

“안 찍었어요. 안 찍었다고요.”

신은하가 나강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광속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나강인. 이젠 변장도 광속이네.”

이연지가 옆에서 물었다.

“아저씨 정도면 분장을 얼마나 잘하는 거예요?”

“결과물만 보면 최정상 분장팀이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대단하지.”

“와. 그걸 거울 보고 혼자서! 나도 화장 혼자서 하면 힘든데.”

“너 고딩이 화장도 하니?”

“이거 왜 이러세요? 언니는 고딩 때 안 했어요?”

“했지.”

“거봐요.”

궁색해진 신은하가 말을 돌리려고 설명을 계속했다.

“강인 오빠 분장은 결과물만 놓고 봐도 놀랍지? 그런데 저 결과물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알아? 겨우 10분. 저게 사람이 낼 수 있는 속도야?”

“근데 아저씨는 했잖아요.”

“했지. 이젠 그만 놀라려고 했는데 또 놀라게 하네.”

“그런데 언니. 그 말 하면서 왜 웃어요?”

“응? 내가 언제 웃었다 그래? 아니야. 잘못 본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