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연기파 중견 배우
나강인이 영화에 직접 출연하게 되면서 촬영 계획도 변했다.
이 씬에는 복면을 쓴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나강인이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상황을 조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씬은 나강인이 전투 동선을 설정하면, 싸우는 연기는 배우들이 직접 하기로 했었다.
배우들이 할 수 없는 격렬한 씬 몇 개는 나강인이 대신 뛰고 편집으로 상대편 모습만 남길 예정이었다. 그러려면 여러 번에 걸쳐 나눠 찍고 편집해야 한다.
그래서 이 전투씬은 원래는 꽤 오래 찍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나강인이 직접 출연했기 때문이다.
변형찬 감독이 선언했다.
“원래 계획은 취소하겠습니다. 전처럼 나강인 무술감독님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찍겠습니다.”
김유찬이 활짝 웃었다.
“그럼 저야 좋지요.”
변형찬 감독이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저 말을 타는 데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면 따로 연습하시죠. 직접 출연하시니까, 그 정도 시간은 충분히 뺄 수 있습니다.”
나강인이 노년으로 변장한 얼굴을 가리켰다.
“이 주름은 대충 그린 거라서 오래 안 가니까 한 방에 끝내죠. 연습하느라 시간 쓰면 이거 다시 그려야 하고, NG가 나도 또 그려야 합니다.”
“어….”
다른 사람이 말을 타는 연습조차 없이 바로 찍자고 했으면 말렸겠지만, 변형찬은 그동안 나강인이 하는 걸 본 게 있고 들은 게 있다.
“10분 만에 끝낸 특수분장이니까 유지력에 문제가 있나 보군요.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오늘 마지막 촬영이 시작됐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공지현과 함께 움직였다.
그런데 그들이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말을 타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말이 말을 잘 듣습니다. 첫 출연이 아닌가 봅니다.
“말장난이냐.”
- 요원님도 하시잖습니까?
그들은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여유롭게 말을 몰았다.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 받는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말은 마치 전장에서 적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달렸다. 나강인은 마치 말과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머리에 쓴 반백의 장발 가발이 바람을 타고 뒤로 물결처럼 흔들렸다.
그렇게 빠르게 달리던 말이 갑자기 다리를 폈다. 말굽이 흙길 위에서 미끄러지고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감독이 현장과 모니터를 번갈아 확인하며 조용히 물었다.
“저 말 혹시 투우장에서 쓰던 말이야?”
조감독이 대답했다.
“아뇨. 개인이 그냥 키우는 말인데요.”
“그런데 저런 기술이 가능해?”
“승마 기술이 그만큼 좋은가 보죠.”
공지현이 칼을 뽑으며 튀어나가려 했다. 김유찬이 그녀를 왼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네 상대가 아니다.”
공지현이 나강인을 노려보며 각오를 다졌다.
“그럼 제가 저자의 발목을 잡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그것도 답이 아니야.”
김유찬이 칼을 뽑으며 말 위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복경산 장군. 은퇴해서 조용히 사는 줄 알았는데.”
나강인이 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자네가 하는 일은 내 제자가 하는 일에 방해가 돼. 어쩌겠나. 내가 나서야지.”
김유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나를 막으면 당신은 죽는다.”
나강인이 말 위에서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한테 그런 소리 한 사람은 그동안 참 많았지. 다들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나강인이 칼을 뽑았다.
“모두 내 칼에 죽었지. 너도 그리될 것이다.”
그가 말에서 점프했다. 위로 높이 뛰어오른 그를 김유찬이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김유찬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깜짝 놀랐다.
‘헉! 사람이 어떻게 저 높이까지 뛸 수 있지?’
나강인은 말 위에서 점프했다. 말이 다치지 않게 적당히 뛰었는데도 출발점이 높아서 높은 곳까지 솟아올랐다.
김유찬은 겁이 났다.
‘설마 진짜로 날 쪼개진 않겠지.’
나강인이 워낙 높이 뛰었기 때문에 김유찬도 대응할 시간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칼을 꽉 쥐었다.
높이 솟아오른 나강인이 김유찬을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나강인이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김유찬도 칼을 위로 크게 올려쳤다.
“타핫!”
AI 전지인이 고속음성으로 보고했다.
- 칼날의 각도를 보정합니다.
칼날과 칼날이 충돌했다. 나강인은 충돌하는 순간 칼날을 비틀어 충격을 분산시켰다. 그런 후에 칼날을 아래로 콱 눌렀다.
상대의 칼을 쳐내는 게 아니라 눌렀기 때문에 김유찬은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대신에 무거운 압력이 그를 짓눌렀다.
김유찬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큭!”
칼날은 여전히 위로 들고 있는데, 그 칼날이 나강인의 힘에 밀려 점점 얼굴 쪽으로 내려왔다.
김유찬은 얼굴에서 땀이 났다. 칼날이 다가오는 게 눈에 보였다.
‘으, 으아! 내가 강인 씨한테 뭐 잘못한 거 있었나?’
그는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칼을 위로 밀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그 필사적인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칼날이 점점 더 그의 눈을 향해 내려왔다.
‘으아아아!’
갑자기 옆에서 공지현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강인을 향해 칼을 똑바로 휘둘렀다.
김유찬을 압박하던 힘이 빠르게 사라졌다.
나강인이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공지현이 칼은 허공을 갈랐다.
김유찬은 살았다는 생각과 함께 욕이 하고 싶어졌다.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아직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이라 욕은 할 수 없었다. 대신에 김유찬도 나강인을 향해 달려들며 칼을 작정하고 휘둘렀다.
김유찬은 칼을 쓰는 기본 동작 정도는 배우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조금씩 배웠다. 그는 나강인을 향해 칼을 연달아 날렸다.
공지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나강인을 크게 베는 데 집중했다.
둘 다 동작이 컸다. 칼날이 연달아 초승달을 그렸다.
그런데 김유찬이나 공지현 같은 검술 초보자 두 명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 격렬하게 공격하면, 서로의 무기에 다칠 수 있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방금 공지현의 칼이 김유찬을 벨 뻔했습니다.
나강인은 그럴 때마다 둘 사이에서 위험한 칼을 쳐내며 사고를 방지했다. 위험하지 않은 칼은 마음껏 휘두르게 두면서 칼로 막거나 몸을 움직여 피했다.
치열한 전투가 한참을 이어졌다. 칼날끼리 충돌하는 소리도 연속으로 수십 번이나 났다.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다음 단계.”
- 김유찬의 칼에 맞겠습니다.
김유찬이 나강인을 향해 칼을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나강인의 옷을 가르고 지나갔다.
“컥!”
나강인이 짧은 비명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에 쥔 칼은 지팡이처럼 땅을 짚었다.
공지현이 옆에서 그런 나강인의 목을 향해 칼을 날렸다.
나강인은 살짝 당황했다.
‘어? 얘가 날 너무 믿는 거 아냐?’
그는 지팡이 대신에 땅을 짚은 칼날을 위로 들어 공지현의 공격을 막았다.
그런데 그 틈에 김유찬이 다시 그를 향해 칼을 뻗었다.
‘이 인간들은 왜 적당히를 몰라!’
나강인이 공지현의 칼을 막은 후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몸을 슬쩍 비틀었다. 김유찬의 칼날이 그의 가슴을 다시 베었다.
나강인이 다시 칼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었다.
김유찬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멈추었다.
그가 나강인을 향해 칼을 겨누며 대사를 쳤다.
“복경산 장군. 은퇴한 당신이 왜 이번 일에 끼어든 건가? 제자가 그렇게 소중했나?”
나강인의 한쪽 무릎은 땅에 닿아 있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칼을 잡고 있었지만, 그 칼도 땅에 꽂혀 있었다.
그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소중하지. 그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내 손으로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나강인이 웃었다.
“내 딸이 그 녀석이 좋다잖아.”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쩌겠나. 나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
나강인의 목소리가 잦아들면서 그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였다.
오른손은 여전히 땅에 단단히 꽂힌 칼을 쥐고 있었다.
김유찬이 그 모습을 착잡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공지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셔야 합니다.”
김유찬이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싸웠던 사람이다.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잠시 예는 드리고 가자.”
김유찬과 공지현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나강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카메라가 그 모습을 계속 찍었다.
AI 전지인이 불평했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그러게?”
변형찬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오, 오케이!”
나강인이 굽혔던 한쪽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구경하던 배우가 그 모습을 보고 움찔했다.
“어우. 복경산 장군님이 부활하신 줄 알았네.”
“와. 오늘 포스가…. 와.”
“나 감독님이 무사 배역을 직접 연기하시니까 액션 몰입감이 장난 아니구나.”
공지현이 자랑했다.
“봤죠? 제가 우리 선생님이 연기 엄청 잘하신다 그랬잖아요.”
방금 그녀와 같이 연기한 주연배우 김유찬도 같은 생각이다.
“그러게. 저런 연기는 그냥 나올 수가 없는데 말이야.”
“연기자로 활동한 경력이 없으시다던데 신기하죠?”
“타고났겠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천재구나.”
“맞아. 나랑 같은 과야. 나도 타고났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
김유찬이 손가락 두 개를 턱에 대며 씩 웃었다.
“물론 내가 더 잘생겼지.”
신은하는 나강인과 김유찬, 공지현의 전투씬을 보고 감탄했다.
“장난 아니다.”
이보라도 맞장구쳤다.
“쩔어.”
“그런데 저런 연기력이 있으면서, 내가 주연을 따려고 연습할 때는 국어책 읽듯이 했단 말이야?”
“넌 같이 연습이라도 했지. 나는!”
“하긴. 같이 연습하니까 되게 좋더라.”
“야!”
나강인은 카메라 앞에 나와 분장팀 쪽으로 갔다. 가짜 수염이나 가발은 분장팀에 반납해야 한다.
그는 먼저 수염부터 떼려고 했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망가지지 않게 살살 떼십시오. 제가 보조하겠습니다.
“가짜 수염은 이것 말고도 많더라. 모자라면 새로 사겠지.”
- 지금 이 모습 이대로 다시 변장하려면, 모든 소도구를 그대로 살려서 잘 보관하는 게 좋습니다.
“응? 왜 다시 변장해? 어차피 내 촬영은 끝났잖아.”
- 복경산 배역은 오늘이 첫 촬영이지만, 복경산이 출연하는 씬은 앞으로 몇 개 더 있습니다.
“방금 죽었는데?”
- 영화는 어차피 편집하잖습니까? 앞에 아직 찍지 않은 씬이 있고, 뒤에도 회상장면이 있습니다. 현대가 배경인 씬도 출연해야 합니다. 모든 촬영 스케줄이 뒤쪽에 있을 뿐입니다.
나강인은 이 배역이 또 나오는 줄은 몰랐다.
“어…. 그러니까 나보고 이걸 계속하라고?”
- 고전 명작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를 한 번에 끝내다니요. 당연히 계속 나오셔야죠. 어차피 오늘 한 변장은 다른 배우의 얼굴에는 못 합니다.
“지인아? 혹시 나 너한테 당한 거냐?”
- 대본을 다 외우셨다면서요.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대본은 네가 외웠지.”
그 촬영이 그날의 마지막 스케줄이었다.
그 씬은 원래는 더 일찍 찍었어야 했는데 복경산 배역을 맡은 배우와 연락이 되지 않는 바람에 마지막 순서로 미루어졌다.
스태프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배우들이 변형찬에게 다가왔다.
주연배우 김유찬이 대표로 제안했다.
“감독님. 그거 해보셔야죠. 그거.”
변형찬 감독이 물었다.
“그거요?”
“나 감독님이 복면 쓰고 직접 뛸 때마다 촬영 영상을 간단하게 편집해보던 거요. 오늘은 직접 연기까지 했으니까 결과가 더 궁금합니다.”
“어…. 그건 이따가 숙소에 가서 나 혼자 조용히 보려고….”
“에이. 저희도 궁금한데 같이 보시죠.”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봐요.”
나강인과 김유찬, 공지현이 싸운 씬은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었다. 고속 카메라 두 대도 배치했다. 카메라 위치는 나강인이 결정했다.
변형찬이 지금 하는 건 영상 파일을 이리저리 잘라 붙여서 잘 나왔는지만 보는 간단한 작업이다.
본격적으로 편집할 때는 지금 한 것과 비슷하게 갈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롭게 편집할 수도 있다.
변형찬이 노트북을 조작해 영상을 몇 군데만 잘라서 붙였다. 그는 오늘은 평소보다 더 간단하게 작업했다.
“그럼 맛만 보시죠.”
영상이 노트북 모니터에서 재생됐다. 배우들이 바짝 달라붙어서 그 영상을 보았다.
“와. 진짜 투우사처럼 말을 다루네. 승마 기술이 장난이 아니다.”
“어우. 점프 높이 좀 봐. 카메라로 보니까 더 높아 보여.”
“아주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와이어를 안 쓰니까 진짜 자연스럽고 느낌 쩐다.”
“캬아. 칼과 칼을 붙이고 힘겨루기할 때 김유찬 씨의 저 버티는 연기 봐라. 역시 주연배우다운 연기력이다.”
김유찬이 속으로 말했다.
‘저 때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필사적이었다고. 죽는 줄 알았네.’
영상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으로 넘어갔다.
변형찬은 이 부분은 고속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화면이 느리게 흘렀다.
영화를 찍을 때는 제대로 못 알아본 사람들도 지금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어? 김형찬 씨가 진짜 나 감독님 몸통을 베는데?”
“그걸 빗겨냈어?”
“공지현 씨는 진짜 찌르는데?”
“근데 피했어!”
“피할 자리를 남겨놓고 베는 게 아니라, 둘 다 진짜로 죽일 듯이 나 감독님을 공격했구나.”
“어쩐지 아까 보는데 내 몸이 다 움찔움찔하더라.”
“그렇게 막 싸우는데 용케 아무도 안 다쳤네.”
왜 안 다쳤는지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야아. 나 감독님이 저 칼을 안 막고 피했으면 공지현 씨가 맞았겠는데?”
“근데 막았잖아.”
“그치. 그래서 아무도 안 다쳤지.”
간단히 편집된 영상을 보면서 사람들이 부지런히 떠들었다. 공지현도 그사이에 끼어서 영상을 보며 실실 웃었다.
“나도 진짜 멋있게 나왔구나.”
나강인의 연기력을 보고 감탄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크으. 발음하고 목소리 좋은 것 좀 보소.”
“표정도 진짜…. 마지막에 웃는데 슬픔이 느껴진다.”
“이쯤 되면 신인의 연기력은 절대로 아니지?”
“신인이라니. 연기파 중견 배우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