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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하는 히어로-183화 (183/411)

183. 가면 셰프

나강인은 분장을 다 지우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런 후에 촬영장 한복판으로 돌아왔다.

배우들도 간단히 편집한 영상을 구경한 후에 각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변형찬이 나강인에게 달려왔다.

“강인 씨! 연기를 이렇게 잘하시면서 왜 안 하신다고….”

나강인이 변형찬의 말을 끊었다.

“안 합니다. 오늘은 영화 전체 스케줄이 꼬일까 봐 할 수 없이 한 거고요.”

“아니, 그래도 이런 실력이면 대사를 더 늘려서….”

“원래 계획대로 하세요. 괜히 저 때문에 스토리를 바꿨다가 명작이 평작 되는 수가 있습니다.”

“하하하. 명작은 무슨. 아직 그 정도는 아니죠.”

“나중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말뿐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능이면 배우를 하셔도 좋을 텐데…. 한다고 하시면 아마 손태민 감독님은 두 손 번쩍 들고 환영하실 겁니다.”

“그러다 제 얼굴을 알아보는 분이 많아지면 다른 일에 영향이 갑니다. 제가 하는 일이 좀 많아서요.”

“아. 배우가 꿈이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죠. 알겠습니다. 그래도…. 연기와 액션이 둘 다 이렇게 좋은데…. 아쉽습니다.”

세트장 위치는 남양주다. 집이 서울이나 경기도 동쪽인 사람들은 각자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집이 더 멀거나 시간을 아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숙소도 가까운 곳에 준비되어 있었다.

신은하는 회사 밴을 타고 왔다.

나강인은 그녀와 같은 동네에 살지만 오늘은 병원에서 직접 오느라 차를 몰고 왔다.

집으로 갈 때 그 밴은 신은하의 매니저인 박우섭 실장이 운전하기로 했다.

신은하가 물었다.

“우리 로드는?”

“아까 내 차 줘서 보냈다. 넌 내일은 서울 촬영이라 이 밴 필요 없다며.”

“그런데 실장 오빠는 진짜 왜 여기 왔는데?”

“오늘 소문이 자자한 여기 상황을 직접 보고 싶어서 들렀지. 오기를 진짜 잘했어. 강인 씨가 대사치는 연기를 직접 볼 줄은 몰랐거든.”

신은하가 자랑했다.

“하긴. 강인 오빠가 연기를 좀 하기는….”

그녀가 나강인의 팔을 주먹으로 때렸다.

“나랑 할 때는 국어책을 읽더니!”

나강인이 둘러댔다.

“그때는 널 강하게 키우려고 그랬다니까.”

박우섭이 나강인에게 제안했다.

“강인 씨. 저희랑 계약하시죠. 저희가 영화든 드라마든 조연 정도는 당장 꽂아드리겠습니다.”

나강인은 거절했다.

“하는 일이 많아서 안 됩니다.”

“아…. 하는 일. 그쵸. 많으시죠. 엄청 많으신 거 아는데….”

박우섭은 신은하가 휘말린 여러 사건에서 나강인이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겉핥기로라도 안다.

“아까워서 그럽니다. 그 액션에 그 연기력을 갖고 있으면서 배우를 안 하다니요.”

“배우는 유찬 씨처럼 잘생긴 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얼굴을 김유찬 씨하고 비교하면 어떻게 합니까? 현역 배우들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어쨌든 안 합니다. 총 든 놈들과 마주쳤는데 그놈들이 제가 누군지 얼굴만 보고 안다고 생각해 보시죠. 그러면 좋을 게 없습니다. 총알은 더 많이 날아올 테고요.”

“아니, 그런 일이 어디 흔… 자주 있었죠. 어휴. 진짜 안 되겠네요. 하지만!”

박우섭은 오늘 좋은 방법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다른 얼굴로 분장하고 연기하시면 되잖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2082년에도 병사들에게 추천되는 명작영화라서 출연했지만, 평소에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 일단 계약만 먼저….”

“안 한다니까요.”

***

나강인은 집으로 갔다가 이튿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네.”

- 어제 직접 연기한 흥분이 가시지 않아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셨습니다.

“아니야. 그냥 잠이 안 온 거야.”

- 제가 볼 땐….

“점심 뭐 먹을까?”

- 당연히 맛있는 것을 드십시오.

신은하는 오늘 서울에서 영화 촬영이 있지만 나강인은 일이 없다.

나강인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움직이기도 귀찮은데 배달을….”

손태민의 부재중 통화 표시가 떠 있었다. 아직 읽지 않은 톡도 많았다.

- 강인 씨. 어제 영화에 출연했다며? 진짜야?

- 왜 전화 안 받아?

- 자냐?

- 자냐?

“뭐지?”

나강인이 전화를 걸었다. 손태민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왜 그러는데요?”

손태민이 소리를 질렀다.

- 영화에 출연했다며!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들었어요?”

- 형찬이가 전화해서 자랑했다! 자기가 먼저 강인 씨를 출연시켰다고! 그놈이 스승을 이겨 먹었다고 얼마나 자랑했는지 알아?

“손 감독님 영화에 먼저 나갔잖아요.”

나강인은 손태민의 ‘햇살 좋은 날’에 액션 대역으로 참여했다.

- 그때는 마스크랑 선글라스를 쓰고 대역 연기만 했잖아.

“어제는 변장하고 나간 거라서 가면이나 복면 쓴 거랑 별 차이 없어요.”

- 어제는 대사도 쳤다며? 한두 마디 한 것도 아니고 아주 본격적으로.

“대사가 몇 줄밖에 안 됐어요.”

- 어제 되게 잘했다던데? 왜 형찬이만! 나도! 내 영화에도! 내가 진짜 좋은 배역 하나 줄게! 주연급 조연 자리가 마침 딱 비어 있네? 이런 우연이 있나! 이거 할래? 응?

나강인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손 감독님 영화에 참여할지는 아직 결정 안 했잖아요.”

- 어? 어? 아니, 강인 씨. 이러기야? 이 시나리오는 강인 씨가 안 도와주면 못 찍는다니까?

AI 전지인이 만류했다.

- 고전 명작영화는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손태민 감독의 영화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생얼을 노출하는 건 저는 반대입니다.

“어제는 상황이 급해서 잠깐 도와준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나강인이 전화를 끊은 후에 말했다.

“그치. 잠깐 나오는 거면 몰라도 손 감독님 영화에 주연급 조연은 아니지.”

그가 다시 배달앱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레스토랑 페넬로페의 대표 셰프 오규철이었다.

- 강인 씨. 슬슬 출연하셔야죠?

나강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 셰프님도 영화를 만드세요?”

- 예? 하하. 아뇨. 전 요리는 잘 만드는데 영화 만드는 재능은 없어서.

“출연하라면서요.”

- ‘가면 셰프’ 말인데요?

“아….”

‘가면 셰프’는 케이블방송에서 하는 요리 경쟁 프로그램이다.

오규철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 설마 잊고 계셨습니까?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날 그렇게 굳은 약속을 했는데! 그날 제가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줘서 강인 씨랑 신은하 씨가 오붓하게 식사도 하고!

“영업 끝날 때 잠깐 빌린 거고, 대신에 모든 직원분에게 밥을 해드렸는데요.”

- 밥과 함께 ‘가면 셰프’ 출연도 약속하셨죠.

“아, 예. 그것도 하려고 했습니다. 하면 되잖습니까?”

오규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살다니요?”

- 지금 챔피언이 3연승 중입니다. 이번이 네 번째 요리 전투죠. 이런 강자를 아무나 상대하게 하면 욕을 먹을 테니까, 도전자도 강해야 합니다.

“그렇겠네요.”

- 챔피언이 워낙 강해서 좋은 싸움이 될만한 선수가 흔치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음 출연자로 내정됐던 사람이 출연을 고사했습니다.

“이유는요?”

- 들러리가 되기 싫어서요. 다음 도전자도 평소라면 연승이 가능한 강자인데, 지금 셰프가 너무 강합니다. 지금 나가면 무조건 한 방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래서 지금 챔피언이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다음에 다시 도전한다?”

- 지금 챔피언은 이번에 이기면 4연승으로 왕관을 쓰고 새 심사위원이 됩니다. 그럼 다음 회차부터는 다시 첫 도전자부터 시작하니까 그때 들어오겠다는 거죠.

“배를 짼 출연자를 다시 받아준다고요?”

- 제가 누구를 섭외하려 했는지는 피디에게도 비밀이라서, 다른 판정위원이 모르고 섭외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실력 있는 셰프가 피할 정도로 지금 챔피언이 강하고요?”

- 예. 실력도 실력인데, 스타일이 ‘가면 셰프’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다들 프로그램 초반부터 끝판왕을 섭외했다고 후회하는 중입니다.

나강인이 머리를 굴렸다.

‘상대가 그렇게 잘하면, 난 나가서 약속만 지키고 똑 떨어지면 더 출연 안 해도 되겠네?’

“그거 마음에 드네요?”

- 역시 나강인 씨!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정면돌파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

그는 한 번만 출연하고 떨어질 생각이지 돌파할 생각이 아니다.

오규철은 나강인이 마음을 바꿀까 봐 얼른 말했다.

- 촬영은 오늘 밤입니다.

“갑자기 오늘 밤이요?”

- 생방송으로 요리 대결을 하는 프로그램이니까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밤에 찍어야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오늘이라고요?”

오규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저…. 혹시 오늘 밤에 다른 스케줄이 있으신지….

“그건 아닙니다만.”

- 강인 씨.

“예.”

- 살려주세요. 저희가 이 방송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됐어요. 지금 제가 섭외한 선수가 도망쳐서 망하게 생겼습니다.

***

나강인이 하겠다고 하자마자 오규철이 달려왔다.

“하하하.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놈들이 총질할 때도 살려주시고 오늘도 살려주시네요.”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요. 출연계약이 있을 텐데 그렇게 째는 게 가능합니까?”

“어…. 우리 방송의 출전선수는 계약서가 없습니다.”

“예?”

“계약서가 라인 타고 올라가면서 결재되면 선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많아지잖습니까? 그래서 섭외한 사람만 아는 콘셉트로 가는 거죠. 완전 실전 정면승부니까요.”

“아. 그래서 이렇게 빵꾸가 나기도 하는군요. 정말 야생 그대로의 생방송 진검 승부 요리 방송이네요?”

오규철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저희가 이 방송을 시작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아직 시행착오가 좀 있습니다.”

나강인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뭐, 그러시죠. 어차피 이번 한 번만 나갈 거니까.”

“아니. 왜 대결을 하기도 전에 질 생각부터 하십니까? 강인 씨 실력이면 좋은 승부가 될 텐데요.”

나강인이 말을 돌렸다.

“그래서 제가 준비할 건 뭐가 있습니까?”

“일단 가면을 쓰셔야 하는데, 제가 좋은 거로 몇 개 가져왔으니까 고르시죠.”

오규철이 가방에서 가면을 몇 개 꺼냈다. 나강인이 그걸 보며 물었다.

“어…. 뭡니까? 이게?”

“가면인데요?”

동물 가면도 있고 하얀색에 눈구멍만 뚫린 가면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작게 말했다.

“이러면 뒤통수는 확실히 노출되지?”

- 출연자와 가까운 사람이 방송을 보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방송이라서 그러나? 구멍이 참 많다.”

- 그러게 말입니다.

나강인이 오규철에게 제안했다.

“가면은 제가 가진 걸 쓰겠습니다.”

오규철은 나강인이 강남 자칼 사건 때 어떻게 활약했는지 직접 봤다.

“아. 가면도 있으시구나. 하긴. 그런 게 하나쯤은 있으실 줄은 알았습니다. 하하하.”

얼굴을 가렸는데 본명으로 방송을 출연할 수는 없다. 오규철이 물었다.

“그럼 그 가면에 어울리는 별명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음…. 철인?”

“철인 셰프. 좋군요. 그거로 하죠.”

오규철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나강인은 제작 거점으로 이동했다.

“이건 실전에서나 쓸 줄 알았는데.”

- 드래곤 헬멧을 방송에서 쓰실 생각이십니까?

“이게 뒤통수까지 완전히 가려주잖아.”

그의 앞에는 헬멧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모두 머리 전체를 감싸는 형태였다.

그렇다고 오토바이 헬멧처럼 크지는 않았다. 사용자의 두상 구조를 고려해 얇은 밀착형으로 만든 덕분이다.

- 어느 모델을 사용하실 겁니까?

나강인이 그중 하나를 골랐다.

“이거.”

- 그건 방어력이 낮아 폐기 예정인 제품입니다만?

나강인과 AI 전지인이 만든 헬멧은 드래곤 플레이트보다 두께가 두꺼웠다. 드래곤 플레이트와는 달리 표면을 다른 재질로 감싸 내부 구조는 볼 수 없게 했다.

그 외피를 만들 때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했는데, 지금 고른 건 얼굴 부분이 로봇처럼 생겼다.

나강인과 AI 전지인은 소총탄도 막을 수 있는 방어력을 가진 헬멧을 만들려고 했다. 최종 완성품은 실제로 그 정도 방어력을 가졌다.

그런데 그걸 한 번에 성공한 건 아니다. 초기에 만든 헬멧은 방어력이 너무 낮았다.

지금 나강인이 고른 로봇 머리 형태의 헬멧도 방어력이 낮아 폐기할 예정이다.

“버리려던 거니까 이걸 써야지. 방송에서 공개한 헬멧을 나중에 임무 수행 중에 쓸 수는 없잖아.”

-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내가 합리적이긴 하지.”

- 요원님이 조금만 더 합리적이었으면 그 방송에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지인아. 너도 페넬로페에서 밥 먹는 거 좋아하잖아. 오 셰프님이 거기 사장이다. 그동안 거기서 우리가 먹은 서비스 요리가 어디 한두 개야?”

- 열두 개입니다.

“오늘 배를 째면 앞으로 거길 어떻게 가겠냐?”

- 사람이 어떻게 합리적인 행동만 하겠습니까? 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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