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잘하는 히어로-185화 (185/411)

185. 수신호

1차전이 끝난 후에 나강인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살살 하면 되겠지?”

- 상대가 요원님을 째려보고 있습니다.

“저 사람 눈이 보여?”

- 삐딱한 자세를 보고 예측했습니다.

“넌 이젠 관심법도 하냐?”

- 상대가 손짓으로 수신호를 합니다.

“응?”

-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나강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동안 겪은 대형 사건이 워낙 많아서 좀 찜찜해졌다.

“혹시 저놈이 여기 폭탄이라도 설치하려는 거 아냐?”

- 상대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체 파악이 안 됩니다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신호를 누구에게 보낸 거야?”

이곳에는 거울처럼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조리도구가 제법 있다. AI 전지인이 그걸 이용해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후에, 그들의 모습을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띄웠다.

그중에 용의자가 있었다.

- 스태프 중 한 명이 반응했습니다.

“뭘 하는지 잘 감시해. 폭탄이나 무기를 꺼내면 바로 제압하자.”

- 용의자가 움직입니다. 구석에서 뭔가 꺼냈습니다.

나강인이 식칼이 놓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총이냐? 폭탄이냐?”

- 소스입니다.

나강인이 걸음을 멈췄다.

“응?”

- 제작진이 교체용으로 준비한 소스 중 하나를 용의자가 바꿔치기했습니다.

“무기가 아니라?”

- 아닙니다.

AI 전지인이 지목한 스태프가 소스 몇 개를 가지고 올라와 경기장에 있는 기존 소스들과 교체했다.

그 스태프가 무대에서 내려간 후에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평가단을 독살하려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경계하십시오.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나강인이 바뀐 조미료 병을 보며 인상을 썼다.

“2차전 요리를 망치려는 거겠지. 내가 많이 쓴 조미료를 바꿨잖아. 이 소스는 아마 정상이 아닐 거야.”

- 야전 전술 조리 스킬은 형편없는 소스도 최선의 사용법을 찾아냅니다.

“상대는 그걸 모르잖아.”

그가 구미호 셰프를 쳐다보았다.

“이게 3연승의 비결이었나?”

- 상대가 자기보다 강할 땐 이런 수작을 부려 이겼을 겁니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치?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2차전은 내가 이겨야겠지?”

- 물론입니다.

“우리가 1차전에서 진 이유는?”

- 이길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거 말고.”

- 요리 퍼포먼스와 비주얼에서 졌습니다. 맛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AI 전지인이 자부심을 보였다.

- 야전 전술 요리는 세계 최고의 셰프들이 지구연합군을 위해 개발했습니다. 맛에서는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럼 2차전에서는 우리도 퍼포먼스를 추가하자.

- 세계 최고의 셰프들이 전쟁터에서 빨리 맛있게 만드는 법만 연구했기 때문에, 보여줄 것이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셰프들이 그런 건 연구 안 했냐?”

- 치열한 전쟁터에서 소금을 머리 위에서 뿌리며 조리하면 미친놈 소리를 듣습니다.

“그럼 2082년식 퍼포먼스는 그만두고, 다른 걸 하자.”

- 구체적인 지시가 필요합니다.

“내가 그동안 본 요리 방송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거기서 본 걸 해야겠다.”

먹는 걸 좋아하는 AI 전지인은 자료를 수집하는 틈틈이 요리 동영상을 꽤 많이 보았다. 현재 시대의 문화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데 AI 전지인은 나강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당연히 나강인도 그 영상을 많이 보았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자료를 준비하겠습니다.

2차전이 시작됐다.

두 번째 주제는 해산물을 사용한 요리였다.

나강인은 그동안 방송에서 본 수많은 퍼포먼스를 하나씩 시도했다. 소금을 뿌릴 때는 꼭 머리 위에서 뿌렸다. 소금이 빗나가지 않게 손가락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건 AI 전지인이 맡았다.

소스를 뿌릴 때는 소스가 담긴 병을 등 뒤에서 공중으로 던졌다가 받으면서 뿌렸다. 손등과 팔 위를 유리병이 굴러가게 한 후에 뿌리기도 했다.

그런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는 AI 전지인이 촬영 모드의 홀로그램으로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주변에 어떤 재료와 도구가 있는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행자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아. 철인 셰프. 다소 밋밋했던 1차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화려하네요.”

“게다가 소스나 재료를 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집습니다. 마치 본인의 주방에 있는 것처럼 익숙한 모습입니다.”

오규철이 말했다.

“대신에 칼은 정확히 눈으로 보고 재료를 다듬는군요. 칼을 쓸 때는 저래야죠.”

“아! 빠릅니다. 손이 정말 빠릅니다. 칼도 빠릅니다. 역시 철인! 마치 기계처럼 빠릅니다!”

댓글도 난리가 났다.

- 아니, 저 속도는 뭐야?

- 칼질이 너무 빨라서 보이지 않아!

- 소드마스터인가!

- 주변에 있는 소스나 식재료를 보지도 않고 정확히 집고 있어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나?

- 모든 재료의 위치를 외운 거겠죠.

- 재료와 소스 몇 개의 위치는 1차전 때하고는 다르게 바뀌었는데요?

- 기억력 쩌네.

나강인은 손만 빠른 게 아니다. 조리도 빨랐다. 시간이 남아돌았다.

그는 상대 선수가 재료를 다듬는 데 집중한 사이에 스태프가 바꿔놓은 소스 병의 뚜껑을 슬쩍 열었다.

그는 소스의 냄새와 맛을 슬쩍 확인했다.

“네 말대로 평가단 전원을 독살하려는 걸지도 몰라.”

나강인이 지금 만드는 요리는 잠시 후면 스물다섯 명이 먹어야 한다. 만약 독이 들어있다면 대형사고가 생방송으로 터진다.

AI 전지인이 보고했다.

- 맛과 냄새로 구별이 가능한 독극물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독극물에 의한 신체 이상 반응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스는 독이 아닙니다.

“테러는 아니라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그럼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 병은 고급품이지만 담겨 있는 소스는 최하급입니다. 1차전과 같은 품질로 판단하고 사용했으면 요리 맛이 분명히 떨어졌을 겁니다.

“품질이 얼마나 차이 나는데?”

- 마요네즈로 비유해 설명하자면, 칼로리를 절반으로 줄인 마요네즈만큼 차이가 납니다.

“심각하네. 대책은?”

- 이 소스를 안 쓰면 됩니다.

“간단하네.”

나강인은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요리를 완성했다.

그는 남는 시간에 다섯 개가 아니라 스물다섯 개의 접시에 요리를 조금씩 담았다. 이번에는 모양도 좀 신경 썼다.

진행자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 철인 셰프. 스물다섯 개의 접시를 다 세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평가단이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주겠죠. 아주 영리합니다.”

“빨리 끝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대결은 서로 상대가 요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미호 셰프는 나강인의 퍼포먼스에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흔들리지는 않았다. 믿는 게 있어서였다.

‘바뀐 소스를 쓰면 맛은 당연히 떨어지겠지. 판정위원들은 저놈이 퍼포먼스에 너무 신경을 쓰다가 요리를 망쳤다고 생각하겠지. 이 승부도 내가 이겼다.’

구미호 셰프도 요리가 끝났다.

그는 다섯 개의 접시에 요리를 나눠 담으며 확신했다.

‘이제 나도 판정위원이다!’

새로 만들어진 요리를 대상으로 판정위원들과 진행자들의 대화가 오간 후에, 양쪽 요리가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진행자는 나강인이 만든 것을 맛본 후에 감탄했다.

“이야아. 철인 셰프. 퍼포먼스에 집중하느라 혹시 맛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우였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오규철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는 조리하는 모습만 보고도 맛있을 줄 알았습니다.”

“오규철 셰프님은 긴장하신 것 같았는데요?”

“기대한 겁니다. 기대.”

평가단도 음식을 먹으며 감탄했다.

“어머. 왜 이렇게 맛있지?”

“이번에도 장난 아니다.”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군침을 삼켰다.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평가단이 너무 맛있게 먹는 거 아닙니까?

- 와. 저거 맛이 진짜 궁금하다.

- 이러면 이번엔 누가 이기는 거야?

- 2차전은 보나 마나 같은데?

다섯 개의 접시에 담긴 요리의 모습은 구미호 셰프의 것이 더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과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나강인은 스물다섯 개의 접시에 요리를 직접 담아 제공했다.

평가단의 투표 점수가 전광판에 올라갔다.

2차전은 나강인의 완승이었다.

진행자가 흥분해서 말했다.

“자. 이제 마지막 3차전이 남았습니다. 구미호 셰프가 이 대결에서 이기면 우승 타이틀과 함께 새로운 판정위원으로 선정됩니다.”

“만약에 진다면 정말 아쉽겠네요.”

“그렇죠. 구미호 셰프의 입장에서는 꼭 이겨야만 하는 마지막 전투입니다.”

2차전이 끝났다. 광고가 나갔다.

광고가 나오는 동안은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구미호가 다시 째려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먼저 수작 부려놓고 왜 날 째려봐?”

- 악당의 특징입니다.

주방이 다시 청소되고 재료도 교체됐다. 그런데 교체되는 재료만 보고도 다음 대결 주제가 짐작이 갔다.

구미호가 가면 속에서 실실 웃었다.

‘디저트는 내 전문분야지.’

그는 1차전과 2차전 종목은 미리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디저트가 한 번은 나올 거라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그가 매수한 스태프가 어떤 재료가 준비될지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다.

‘나는 뭘 만들지 미리 결정하고 충분히 연습했으니까,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여주마. 내가 반드시 우승해서 평가위원이 될 테다.’

가면을 쓴 상태로는 아무리 연승을 해도 실제로 바뀌는 건 없다.

그런데 평가위원이 되면 얼굴을 공개한 상태로 이 방송에 앞으로도 계속 나올 수 있다. 그의 인맥으로 다른 도전자를 섭외해 올 수도 있다.

그가 오규철을 슬쩍 보았다.

‘나도 오규철처럼 방송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셰프가 될 테다. 그러려면 이번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해.’

다시 방송이 시작되고 사회자가 3차전 주제를 발표했다.

“3차전은 디저트입니다!”

이번에도 재료는 제한적으로 제공됐다.

AI 전지인이 물었다.

- 요원님. 3차전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런 놈이 평가위원이 되는 꼴은 못 보지.”

- 그럼 이겨야겠군요.

“당연히 이겨야지.”

그러려면 문제가 하나 있다. 잡탕 과자나 잡탕 케이크를 만들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사람이 너무 많다.

“지인아. 평소에 만들던 것 말고, 화려하게 생긴 디저트는 뭐가 있냐?”

- 없습니다.

“응? 왜 없어? 세계 최고의 파티시에들이 겨우 레시피 두 개만 만들었어?”

- 다른 야전 전술 디저트가 다양하게 있습니다만, 전장에서는 디저트의 모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맛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잡탕 과자는 건빵처럼 생겼다.

“디저트 레시피는 더 있는데 화려한 게 없구나?”

- 그렇습니다. 병사들을 위한 야전 전술 디저트 레시피는 모두 맛과 조리시간 단축을 목표로 개발되었습니다. 모양에 중점을 둔 디저트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왕이면 보기 좋은 디저트가 더 좋잖아.”

AI 전지인이 예를 들었다.

- 치열한 전장에서 모든 부대에 흰자만 익고 노른자는 살아있는 계란프라이를 제공하려면, 그 대가로 어떤 지원을 포기해야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보기도 좋고 맛도 있겠지만, 그건 무리지.”

- 같은 시간에 보기엔 평범하지만 맛있는 걸 더 많이 만들어 제공하는 게 낫습니다.

“왜 그런지 납득은 했는데 말이야.”

그들은 지금 요리를 무기로 싸우는 중이다. 1차전에서 밀렸던 이유 중에는 요리의 외형에 신경 쓰지 않은 것도 있었다.

2차전은 퍼포먼스를 추가해 상대를 눌렀지만, 3차전의 주제인 디저트는 요리의 겉모습이 굉장히 중요하다.

“디저트로 건빵을 만들면 지겠는데? 그렇다고 저놈이 이기게 둘 순 없잖아.”

-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방법이라…. 유명한 디저트 사진 가진 거 있냐? 참고 좀 하게.”

눈앞에 디저트 사진 수십 개가 떴다. 간단한 모양도 있지만 복잡한 사물을 묘사한 것도 있었다.

“우리도 저렇게 사물 형태로 만들어야겠다. 디저트의 모양을 성형할 수 있는 기술은?”

- 야전 장비 수리 및 제작 기술이 있습니다.

그동안 그 기술로 자동차도 수리하고 드래곤 플레이트도 만들었다. 지금 이 헬멧도 그 스킬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 스킬에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그 스킬은 맨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공구나 기계를 써야 하잖아. 다른 건?”

- 정찰용 지형지물 묘사 스킬로 디저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어. 그거 좋네. 그거 그림만 되냐? 조각이나 성형은?”

- 지형지물 모형을 제작할 필요가 있을 때는 조각이나 성형도 가능합니다.

“그럼 그걸 쓰자. 정자가 딸린 작은 정원을 만들까? 아니면 산을 만들까?”

- 해당 스킬은 사물보다는 지형 묘사에 강점이 있습니다.

“그럼 산과 강을 만들자.”

- 어느 지역을 묘사할까요?

나강인은 강원도 영화 촬영 세트장이 생각났다.

“강원도 세트장. 임시 주차장 있는 쪽 말고 반대쪽 지형. 거기가 참 멋있더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