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부작용
요리 방송 ‘가면 셰프’의 피디는 난감했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스테프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소스를 바꿔치기한 증거가 눈앞에 있다. 일반인 참관단이 조작할 수는 없으니 직원 중 누군가가 했다고 봐야 한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 있는 스태프가 제일 의심스럽다.
나강인이 피디에게 제안했다.
“바뀐 병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서 찾아보시죠. 나라면 이 사람이 움직인 동선부터 뒤져보겠습니다만.”
나강인은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말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요원님이 가면이 아니라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건 정체를 확실히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오 셰프님 말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야. 내 목소리 좀 들었다고 내가 누군지 알 수는 없어.”
나강인이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피디가 스태프를 족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규철 셰프가 나강인을 따라오며 물었다.
“조사 결과를 확인 안 하고 가셔도 됩니까?”
결과는 알고 있다. 증거를 제출할 수 없을 뿐 목격 정보는 영상으로 갖고 있다.
“어차피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닙니다. 저야 오늘 한 번 출연하고 끝이니까요.”
오규철은 당황했다.
“네? 한 번이라니요? 다음 경기에 나오셔야 하잖습니까?”
“네?”
“오늘 이기셨잖습니까? 1승.”
“어? 어? 아….”
그의 원래 계획은 우승 후보자와 적당히 요리 대결을 한 후에 적당히 탈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대회가 시작된 후에 상대가 수작을 부린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게 괘씸해서 진심으로 나섰다가 이겨버렸다.
“이게 아닌데….”
AI 전지인이 타박했다.
- 그러게 왜 이기셨습니까?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야. 너도 같이 이겼잖아.”
- 대책이 필요합니다.
“그냥 배 쨀까?”
- 째십시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나강인이 오규철에게 말했다.
“제가 좀 바빠서, 앞으로는 출연이 어렵습니다. 승패를 초기화하고 다음부터는 다른 분들을 모셔서 촬영하시죠.”
“아니, 그래도 3연승 한 상대를 물리치고 1승을 하셨는데….”
“그 3연승 중에 오늘과 같은 수작을 부린 경기가 더 있었을 텐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저는 오늘 처음 나왔으니까, 제가 빠져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겁니다.”
***
케이블방송 ‘가면 셰프’의 3관왕이 경쟁자를 떨어뜨리기 위해 스태프를 매수하고 승부를 조작한 사건은 결국 기사화됐다.
현장에서 나강인이 범인을 잡는 모습이나 피디가 스태프를 족치는 장면을 본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숨기기 어려웠다.
가면 셰프는 케이블방송 중에서는 시청률이 꽤 나오는 프로그램이다. 그 방송국은 그 프로그램을 이런 일로 접고 싶지 않았다.
긴급회의가 열리고 대응방안이 논의됐다.
“기사 올라온 걸 다 내리게 할까요?”
“우리가 내리란다고 모든 언론사가 내리겠냐? 우리가 무슨 공중파야?”
“공중파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면 더 못 내리죠. 사방에서 신나서 떠들 텐데요.”
“우리 사건으로도 이미 신났어. 우리가 힘은 없는데 시청률은 좀 나왔잖아.”
다른 대안도 나왔다.
“그거 다 오해라고 하고 덮을까요?”
“목격자가 몇인데 그게 덮이겠냐?”
국장이 박 피디를 노려보며 짜증을 냈다.
“하여간 박 피디 저 새끼는 그놈을 왜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잡아서 이 사단을 만들어?”
박 피디가 목을 움츠리며 변명했다.
“출연자가 현장에서 그놈이 저지른 짓을 잡아냈는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잘 말해서 조용히 시켰어야지!”
“목격자가 많았단 말입니다.”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잠깐. 그러면 그 출연자를 띄우는 건 어떨까요?”
국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이 사태도 환장하겠는데 일을 더 키우자고? 미쳤어?”
“그게 아니라요. 가면 셰프에서 암약하던 악당을 히어로가 난입해서 저격한 구도로 가자는 거죠.”
국장의 표정이 풀어졌다.
“어? 무슨 소리인지 자세히 말해봐.”
방송국의 발표가 나왔다. 그런데 발표 내용은 철인 셰프의 활약이 중심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올라왔다. 댓글이 줄줄이 붙었다.
- 그러니까 그 방송을 망치려는 구미호를 철인이 나타나서 무찔렀단 말이죠?
- 그렇다네요.
- 바꿔치기한 소스는 안 쓰고 요리를 만들어서 악당을 무찌르고요?
- 이거 딱 악당과 히어로 구도인데?
- 누가 히어로죠?
- 설마 구미호겠습니까?
그 사건은 인터넷 뉴스에도 나왔다. 그런데 뉴스를 본 사람보다 그걸 해결한 방식을 인터넷을 통해 본 사람이 더 많았다.
그 이야기가 퍼지면서 그 방송을 찾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 방송 봤는데요. 생방송 대결로 요리하는 모습이 긴장감도 적당하고 상당히 재미있던데요.
- 제가 가면 셰프를 첫 방송부터 봤습니다. 구미호와 철인의 승부가 제일 꿀잼입니다.
방송에서 만든 요리를 시청자가 직접 맛볼 수는 없다. 그런데 마지막 승부였던 디저트는 먹지는 못해도 볼 수는 있었다.
- 이야아. 철인 셰프의 디저트는 디테일이 진짜 어마어마하네.
- 저게 20분 만에 만들 수 있는 수준인가?
- 장난감을 조립해도 저 디테일로 만들려면 저것보다 오래 걸리겠다.
그 디저트는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널리 퍼졌다. 그걸 본 사람들이 다시 방송을 찾아보곤 했다.
케이블방송의 재방송 시청률이 치솟았다.
‘가면 셰프’는 원래 다른 케이블채널에서 재방송을 자주 했는데, 그 재방송들도 시청률이 유의미하게 올라갔다.
시청자 반응이 박 피디를 흥분시켰다.
“이런 게 바로 전화위복이구나!”
방송국의 다른 간부들도 신이 났다.
“예산 팍팍 줄 테니까 앞으로 제대로 만들어봐! ‘가면 셰프’를 우리 방송국 대표 프로그램으로 만들자고!”
박 피디가 큰소리쳤다.
“저만 믿으십쇼. 다음 방송에서 진짜 제대로 보여주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국장이 활짝 웃었다.
“철인 셰프가 구미호 따위가 심사위원이 되는 사태도 막아주고 이렇게 방송도 띄워도 줬어. 그분이 아주 우리 프로그램의 은인이다.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국장이 지시했다.
“자리 한 번 만들어봐. 인사라도 해야지.”
박 피디가 멈칫했다.
“어…. 국장님. 선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섭외한 평가위원 한 명밖에 없습니다. 저도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 그렇지. 제작진도 선수가 우승하거나 탈락한 후에야 누군지 알 수 있지?”
“예. 그게 우리 요리 프로그램의 차별화된 콘셉트죠. 공정하고 공평한, 어떠한 비리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완전 실전 대결!”
“그런 좋은 프로그램을 비리로 망하게 할 뻔한 구미호 그 새끼. 아오.”
“그러게요.”
국장이 지시했다.
“그러면 담당 평가위원한테 이야기해서 철인 셰프를 잘 관리해달라고 해. 그 사람이 네 프로그램의 희망이고, 네 프로그램이 우리 방송국의 희망이야.”
박 피디가 다시 큰소리쳤다.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
오규철이 어색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박 피디님. 철인 셰프는 우리 방송을 그만둔다고….”
“예?”
나강인은 이미 오규철에게 ‘가면 셰프’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 피디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오 셰프님.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데, 물이 들어오자마자 배에서 내린다니요?”
오규철은 나강인이 왜 그만두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다만 그 이유가 일반적인 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보통 분은 아니니까, 이유도 보통은 아니겠지.’
오규철이 적당히 이유를 만들어서 둘러댔다.
“우리 프로그램이 공정한 줄 알고 나왔는데, 구미호 따위에게 휘둘리는 걸 보고 흥미를 잃었다고….”
“아, 안돼! 이 중요한 시기에 이러면 안 됩니다! 그분 누구십니까? 어느 레스토랑에서 일하십니까? 제가 만나서 설득하겠습니다!”
철인 셰프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섭외한 오규철밖에 없다.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아니, 출연해서 1승까지 따놓고 진짜 이러시기 있습니까? 이러면 신의가….”
“신의를 잃은 건 우리 쪽이 먼저라서요. 방송국 스태프가 매수된 거로 밝혀졌죠?”
“그, 그야 그렇지만….”
“그리고 우리 방송이 원래 리스크가 좀 있잖습니까? 정식 계약서를 안 쓰고 하니까요.”
“그건 중간에 출연이 거부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건데….”
요리 방송에 셰프가 출연하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다. 처음부터 안 한다면 모를까, 일단 방송에 출연한 사람이 이겨놓고 그만두는 사태는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 피디가 다급히 말했다.
“다른 사람은 우리 방송을 거절해도 수습할 수 있습니다. 손이라도 다쳤다고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철인 셰프는 안 됩니다. 꼭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살고 우리 방송이 삽니다.”
오규철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설득은 해보겠습니다.”
***
‘가면 셰프’ 이야기가 인터넷에 유명해지면서 신은하도 마지막 디저트를 만드는 부분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녀가 그 영상을 보며 감탄했다.
“와. 실력 장난 아니다. 케이크로 진짜 산이랑 강을 만들었어.”
그녀가 감탄하며 영상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근데 저거 어디선가 본 장소 같은데?”
케이크가 묘사한 지형이 묘하게 익숙했다.
피시방 옆자리에서 이보라가 모니터를 넘겨보며 말했다.
“난 모르겠는데?”
나강인이 만든 건 ‘햇살 좋은 날’의 강원도 세트장 주변 산의 모습이다.
이보라는 그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산을 모른다.
신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어디서 본 곳 같은데, 어디더라….”
이보라가 옆에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강인 오빠도 요리 빨리 만드는 거 잘하는데.”
“그치?”
“근데 강인 오빠 디저트는 모양은 평범하잖아. 저 사람은 모양까지 멋있게 만드네.”
신은하가 나강인의 편을 들었다.
“그래도 맛은 강인 오빠 디저트가 더 맛있을 거야. 저건 모양만 신경 쓰느라 맛없을 거야.”
그녀는 철인 셰프가 나강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 디저트는 굉장히 화려한데 나강인이 평소에 만드는 디저트는 건빵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
손태민 감독이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인 씨. 그거 강인 씨지?”
- 뭐가요?
“철인 셰프 말이야. 강인 씨지?”
- 어…. 왜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방송에 나온 그 케이크의 산이 강원도 세트장에 있는 산이잖아. 거기 내가 잘 아는 곳이야. 세트장을 거기에 짓자고 한 것도 나야.”
- 산만 보고 구분할 줄은 몰랐는데요. 그럼 감독님만 알고 계세요.
“역시 맞구나?”
손태민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나도 그런 거 하나 만들어주나? 집에 가져가서 자랑하게.”
- 조만간 하나 만들어서 놀러 갈게요.
“흐흐흐. 고마워.”
손태민은 전화를 끊은 후에 준비 중인 영화의 시나리오를 펼쳤다.
“디저트 만드는 씬을 살짝 수정해야겠다. 맛은 최고지만 모양은 평범한 것에서, 모양까지 예술적인 것으로 바꿔야지.”
***
나강인이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을 찾아갔다.
권수연은 외삼촌인 손성현의 병원에서 비밀수술을 받고, 이튿날 이 종합병원 1인실로 옮겼다.
이 병원에도 VIP실은 있다. 권수연은 율명바이오 권동진 사장의 딸이라 그곳을 이용할 돈은 있었다.
그런데도 VIP실이 아니라 1인실을 쓰는 건 남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해서였다.
같은 이유로 2인실 이상을 쓸 수도 없었다. 병실을 다른 사람과 같이 쓰면 정보가 샐 위험이 있었다.
나강인은 외과 과장 이정호를 먼저 만났다.
이정호가 권수연의 상태를 설명했다. 나강인에게 환자의 정보를 알려주는 건 불법이지만, 이미 불법 수술까지 한 마당이라 그런 건 따지지 않았다.
“수술은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정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환자의 회복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벌써 꽤 많이 회복됐습니다.”
이정호의 딸 이연지도 같은 병을 앓다가 같은 수술을 받았다. 이연지도 수술 후 회복이 빨랐다.
나강인이 물었다.
“얼마나 빠릅니까?”
“정상적인 회복 속도가 아닙니다.”
“이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과거 경증 환자의 수술 데이터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이 병에 약하게 걸렸다가 수술을 받은 사람들도 회복이 빠른 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중증 환자의 수술에 성공한 건 이연지와 권수연 딱 두 명뿐이다.
“경증 환자의 수술 성공 케이스는 꽤 있습니다만, 그중 단 한 명도 이 정도로 회복이 빠르진 않았습니다.”
“이쯤 되면 회복력이 그 병의 고유 특성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요.”
“중증은 겨우 두 케이스 뿐이라 통계 데이터로 쓸 순 없습니다. 애당초 상식이 통하는 병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는 관계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연구하시겠군요.”
이정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딸자식을 상대로 연구하기는 좀….”
“아. 하긴.”
“CT와 MRI 자료, 수술할 때 챙긴 조직, 그리고 건강해진 후의 혈액 표본은 좀 보고 있습니다만.”
AI 전지인이 말했다.
- 할 건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