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평범한 일상
나강인은 권수연이 입원한 병실을 찾아갔다. 그녀는 1인실에 혼자 입원해 있었다.
“어머. 강인아.”
권수연이 밝은 얼굴로 나강인을 맞았다.
그녀는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침대가 아니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노트북을 펼쳐놓고 일을 하는 중이다.
나강인이 물었다.
“너 지금 뭐 하냐?”
“연구 데이터 정리랑 앞으로의 연구 계획 짜는 중이야.”
“너 수술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일을 하냐?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팔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나 많이 나았어.”
“그래 보이긴 한다만.”
외과 과장 이정호는 권수연의 회복력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고 했다. 같은 병으로 수술한 이연지도 마찬가지로 회복이 빨랐었다.
“그래도 벌써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지인아. 혹시 이 상황에 대해 아는 거 있냐?”
- 초기 메모리에는 해당 질병에 관한 정보가 없습니다.
AI 전지인은 2082년식 신체삽입형 인공지능이지만, 생산될 때 저장된 것 외에는 그 시대의 정보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초기 메모리에 권수연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이라미드 태양전지 연구 계획을 보여달라고 하십시오. 요원님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면 가능한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나강인이 권수연에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좀 짰어?”
“응! 퇴원하면 이것부터 할 거야. 볼래?”
“봐야지.”
권수연이 노트북 모니터를 보여주었다.
나강인이 옆에 서서 모니터 속 문서를 확인했다. 한글과 영어, 수식과 기호 등이 섞여 있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봐도 모르겠습니다.
나강인도 마찬가지였다. 한글과 영어 단어를 읽을 수는 있는데,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는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좋은 계획이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그래도 쉬엄쉬엄 연구해라. 일단 건강부터 완전히 되찾아야지.”
“알아. 그래서 살살 하는 거야. 그런데 강인아.”
권수연이 나강인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날 수술실에는 왜 들어온 거야?”
권수연이 마취되기 직전에 나강인이 수술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때 그녀가 그의 얼굴을 잠깐 보았다.
나강인이 둘러댔다.
“어…. 이 과장님 수술을 도와주러?”
권수연은 나강인이 권동진처럼 심부름이라도 하러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걱정했다.
“내 수술이 불법이란 게 걸리면 수술실에 있던 사람은 모두 위험해지는데 왜 굳이 그랬어? 넌 밖에 있어도 됐잖아.”
AI 전지인이 말했다.
- 어차피 걸리면 무면허 수술 당사자인 요원님의 형량이 제일 클 겁니다.
“그냥.”
권수연이 활짝 웃었다.
“나 진짜 고마워하는 거 알지?”
- 더 고마워하라고 하십시오. 이라미드 태양전지 최초 개발자 권수연은 우리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대가는 꼭 페넬로페에서 받으십시오.
“고마우면 퇴원하고 나서 밥이나 사.”
“당연하지. 내가 잘 아는….”
“돈은 네가 내도 장소는 내가 정한다.”
“응?”
***
페넬로페 대표 셰프 오규철이 나강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설명했다.
- 박 피디가 제발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철인 셰프가 방송에서 빠지면 위에서 박 피디를 잡아먹을 거라더군요.
“그러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으니까 보따리도 내놓으란 거네요?”
- 하, 하하. 그게…. 그러게 말입니다. 박 피디도 위에서 하도 압박하니까 궁지에 몰린 거라서요.
“안됩니다. 이번 주 생방송 시간만 해도 그때 다른 스케줄이 있습니다.”
‘가면 셰프’는 생방송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그때는 영화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다.
- 그러시구나. 큰일 났네요. 상대 선수는 다른 평가위원이 섭외했는데, 철인 셰프가 빠지면 선수가 모자랍니다.
“출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텐데요?”
- 구미호를 데려온 평가위원은 추천권을 박탈당했습니다. 추천권이 문제가 아니라 자리도 위태롭죠. 또 다른 평가위원은 그걸 보더니 추천은 좀 더 검증해보고 하겠다고 합니다. 진짜 강인 씨밖에 없습니다.
나강인이 다른 걸 물었다.
“구미호가 경기를 조작해서 이긴 선수가 있습니까?”
- 있습니다. 매수된 스태프가 다 털어놨습니다. 구미호는 두 번째 방송에서도 재료에 수작을 부렸더군요.
“상대가 만만치 않았나 보군요.”
- 그렇죠. 구미호는 그날 경기 종목을 대충 예상하고 나왔는데도 첫 번째 요리 대결은 졌거든요. 조작한 후에는 연달아 이겼고요. 그때 떨어진 선수가 제 후배인데 참 아깝다고 생각했었죠.
“그럼 그 사람을 부활시켜서 선수로 쓰시죠.”
- 예? 아니,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을 어떻게 또 씁니까? 그건 이 방송 콘셉트와 안 맞습니다.
“어차피 가면 쓰고 나가는데 그 사람이 다시 나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 어?
“오 셰프님이 다시 섭외하시면, 평가단이든 평가위원이든 그 사람이 다시 나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 아! 저희가 이번 사태로 워낙 정신이 없어서,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요. 연승을 이어가든 일찍 탈락하든 언젠가는 얼굴을 공개할 시점이 오는데….
“이 사람이 그때 구미호에게 억울하게 당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알려주면 되죠.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시 출연시켰다고, 이 방송은 끝까지 책임진다고 하시죠.”
오규철이 엄청 좋아했다.
- 으하하하! 그거 진짜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밀어붙이겠습니다! 나중에 얼굴을 공개할 때, 우리 방송은 억울한 피해자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는다고 자랑하겠습니다.
“자.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됐죠? 그럼 전 이만.”
오규철이 다급히 불렀다.
- 자, 잠깐만요. 강인 씨. 그럼 나중에라도 우리 방송에 나오실 수 있습니까?
“나중이요? 이미 한 번 그 방송에 나갔다가 떠났는데,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다시 돌아가라고요?”
- 방법이 있습니다. 철인 셰프의 콘셉트를 전장 난입으로 잡는 겁니다. 이번처럼 방송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짜잔 하면서 나타나는 그런 캐릭터로요.
“그건 누구 생각입니까?”
- 박 피디 생각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는 히어로 느낌인 거죠. 원래는 이번에 히어로가 이겼으니까 기존 규칙대로 다음 방송에도 계속 나오는 거였는데, 이번에는 바빠서 안 하신다니까 나중에라도….
“연속 출연이 싫으면, 나중에라도 나와달라?”
- 그렇게라도 해야 박 피디도 방송국에서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음…. 그때 시간이 맞으면 고려는 해보겠습니다.”
오규철이 웃는 소리로 말했다.
- 고맙습니다! 박 피디에게 자랑할 말이 잔뜩 생겼습니다. 하하하.
전화를 끊은 후에 나강인이 말했다.
“고려한다고 했지, 꼭 출연한다고는 안 했으니까.”
- 하는 거 봐서 시간이 남을 때 들어주십시오. 대신에 조건으로 우리도 상대가 만든 걸 먹게 해달라고 조건을 추가하십시오.
“그거 괜찮네.”
***
나강인은 SAH 엔터 연습실로 찾아가 걸그룹 프프걸스를 만났다.
막내 최지혜가 나강인을 보자마자 우는소리를 했다.
“힘들어 죽을 거 같아요! 이 노래는 버전이 너무 많아요!”
작곡가 곽찬석은 OST 한 곡을 영화의 다양한 상황에 쓸 수 있도록 여러 장르로 편곡했다. 프프걸스는 모든 편곡 버전의 노래를 다 따로 연습해야 했다.
한 곡을 다양한 편곡 버전을 부르다 보니 헷갈려서 실수하는 일이 종종 생겼다. 가끔은 몇 가지 버전을 섞어서 부를 때도 있었다.
최지혜의 불평을 듣고 나강인이 가볍게 말했다.
“그래? 너무 힘들면 그만해야지.”
“앗! 진짜요? 아싸!”
“OST는 다른 팀에게 넘기고 넌 쉬자.”
“넹? 죽을 것 같다고 했지 죽었다고는 안 했거든요? 더 할 수 있습니다!”
본전도 못 차린 최지혜 대신에 리더 소지영이 물었다.
“피처링 때문에 오신 거예요?”
“응. 녹음하기 전에 나도 연습은 해야지.”
작곡가 곽찬석이 곽유선과 함께 연습실로 들어왔다.
곽유선은 나강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얼른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어머. 오늘 오실 줄은 몰랐는데요?”
나강인이 도로 물었다.
“곽 작곡가님하고 오늘 약속을 잡았는데, 못 들으셨나 봅니다?”
“그랬어요?”
곽유선이 곽찬석을 째려보았다.
“큰오빠. 이러기야?”
곽찬석이 머리를 긁었다.
“내가 말 안 했나?”
“안 했거든?”
잠시 후에 보컬 트레이너도 들어왔다.
그녀는 프프걸스가 곽찬석의 신곡을 부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가 나강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못 보던 분이 계시네요? 누구….”
나강인이 대답했다.
“피처링 때문에 왔습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앗! 혹시 댕댕님?”
“아, 예.”
“어머어. 얘들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얘들이 제 욕은 안 하던가요?”
“했죠.”
나강인이 프프걸스를 쓱 쳐다보았다.
리더 소지영이 얼른 변명했다.
“욕까지는 아니었어요! 자연 체조 2단계 연습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만 좀 한 거예요!”
나강인의 시선이 최지혜를 향했다.
“너는 욕했을 것 같은데?”
“앗! 어떻게 알았지?”
“다음번 체조 연습 때 넌 특훈 코스로 가자.”
“잘못했어요!”
영화 ‘운명의 창’ OST도 이름은 똑같이 ‘운명의 창’이다.
영화에서는 원곡 외에도 다양한 장르로 편곡된 노래들이 사용된다. 프프걸스는 모든 장르의 노래를 불러야 해서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데 나강인의 피처링이 들어가는 건 그중에서 원곡 딱 하나다.
오늘은 가볍게 맞춰만 보는 날이다.
곽찬석이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나강인이 맡은 부분은 약 30초 분량이었다.
나강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노래했다. 음정과 박자의 오차, 발음 등은 AI 전지인이 보정해 듣기 좋게 만들었다.
나강인이 부른 30초 분량을 들은 후에 곽찬석이 말했다.
“어…. 정말 기계처럼 정확하게 부르셨네요?”
AI 전지인이 음정과 박자의 오차를 완벽하게 없앴으니 기계처럼 정확한 건 당연했다.
나강인이 설명했다.
“좀 차가운 느낌이죠? 처음이니까 일단 기준을 잡아야 해서 그렇게 불러봤습니다.”
옆에서 보컬 트레이너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렇게 하시면 제가 할 일이….”
“프프걸스 애들이 있잖습니까?”
“그렇죠. 그런데 제가 댕댕님도 도와드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확하게 부를 수 있는 분이면 제가 정말 할 일이 없네요.”
“아직 감정을 전달하는 게 서툴러서 갈 길이 멉니다.”
“지금이야 기준을 잡느라 그러신 거고, ‘오늘도 걷는다’를 들어보면 감정 전달도 쉽게 하실 것 같은데요. 저기, 그럼….”
보컬 트레이너가 슬쩍 제안했다.
“얘들 보컬 연습을 좀 도와주시는 건 어떠세요? 저랑 같이요.”
AI 전지인이 말했다.
- 방법을 모릅니다.
AI 전지인은 외부 독립 모듈을 이용해 드래곤 플레이트 설계에 필요한 계산을 한다. 음정과 박자를 보정할 때 필요한 계산도 마찬가지로 외부 모듈을 사용해 처리한다.
그런데 그 외부 모듈이 어떤 원리로 계산하는지는 AI 전지인도 모른다. 마치 계산기를 사용하듯이, 외부 모듈에 데이터를 입력하고 결과만 받기 때문이다.
- 설사 계산법을 안다고 해도, 가르치는 법을 모릅니다.
나강인도 그건 모른다. 그가 보컬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얘들은 전문가가 가르치셔야죠. 전 가르치는 건 좀 약해서요.”
“잘하실 것 같은데….”
“더 잘하실 겁니다.”
나강인은 곽찬석의 조언을 받으며 피처링할 부분을 좀 더 보완했다. 그렇게 몇 번 연습한 후에 프프걸스와 같이 원곡을 불러보았다.
곽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드 녹음 때도 느꼈지만, 강인 씨는 정말 빨리 좋아지는군요. 이 정도면 다음번에는 녹음실에서 만나도 되겠습니다.”
막내 최지혜가 옆에서 부러워했다.
“대박. 우리는 진짜 매일매일 연습 오래 하는데도 혼나는데, 선생님은 와서 잠깐 연습했는데 합격이야. 너무 불공평한 거 아녜요?”
“부러우면 지는 거야.”
“난 이미 졌어요. 그러니까 실컷 부러워해야지.”
나강인이 오늘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그는 가기 전에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서 종이로 만든 상자가 나왔다.
“과자 좀 만들어왔으니까, 군것질이 필요하면 먹어.”
최지혜가 달려와서 과자 상자를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이거 빨리 숨겨야 해요!”
“응?”
“걸리면 뺏겨요!”
같은 팀의 나머지 세 명도 얼른 다가왔다.
“일단 옷으로 가려놨다가 나갈 때 몰래 가져가자.”
“우리 숙소까지 안 들키고 옮겨야 하는데, 회사에서 나갈 때 걸리지 않을까?”
“그냥 여기서 다 먹어버리는 건 어때?”
“되겠니?”
나강인이 물었다.
“회사가 밥 굶기냐?”
리더 소지영이 대답했다.
“영화 개봉하고 신곡 발표하면 우리도 방송 나가야죠. 그래서 관리 들어갔어요.”
“벌써?”
“지금부터 관리하래요.”
“어…. 그런데 말이야. 지금 목격자가 좀 많은 것 같은데?”
막내 최지혜가 당황한 얼굴로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목격자를 공범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자를 살짝 열었다.
“맛이라도 좀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