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요청
곽찬석과 곽유선은 나강인의 잡탕 과자 맛을 안다. 두 사람은 사양하지 않고 한 개씩 받아먹었다.
보컬 트레이너는 오늘 잡탕 과자를 처음 보았다.
프프걸스의 체중관리는 그녀의 업무가 아니라서, 선물받은 과자를 숨겨 나가는 걸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잡탕 과자를 하나 받아 먹어본 후에 깜짝 놀랐다.
“어머. 이거 진짜 맛있다.”
최지혜가 자랑했다.
“그쵸. 은하 언니가 그러는데 선생님 요리 솜씨가 진짜 쩐대요. 영화 촬영장에서 선생님이 가끔 밥차에 들어가면 다들 환성을 지르고 난리도 아니래요.”
보컬 트레이너는 나강인이 가수 댕댕이라는 것만 안다. 프프걸스가 자랑을 하도 해서 들은 이야기가 몇 개 더 있지만, 어차피 그녀들도 나강인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다.
보컬 트레이너가 잡탕 과자를 얻어먹으며 말했다.
“이거 먹으니까 그 방송 생각났다. 가면 셰프 봤어?”
최지혜가 얼른 손을 들었다.
“봤죠! 거기 나오는 요리들 진짜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그치?”
“특히 이번에 철인 셰프가 마지막으로 만든 그 디저트. 그건 정말 직접 눈으로 보고 맛도 보고 싶어요.”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해.”
“우리가 유명해져서 케이크값 많이 낼 수 있게 돼도 안 돼요?”
보컬 트레이너가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조사해봤는데 그 디저트는 파는 곳이 없대.”
최지혜는 축 처진 어깨로 울상을 지었다.
“성공하면 그거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에잇. 더 연습해서 성공해봤자 의미도 없으니까, 오늘은 이만 끝내죠?”
나강인이 말했다.
“지혜가 약 파는 기술은 어디서 배웠을까? 그런다고 연습이 끝나니?”
“앗. 들켰다.”
“근데 너 연기 좀 한다?”
“제가요? 흐흐. 나한테 그런 재능이? 그럼 어디 단역이라도 하나 꽂아주시나요?”
“아니. 네가 지금 다른 데 눈 돌릴 상황이냐? 노래 연습이나 열심히 해.”
“넹.”
***
나강인은 SAH 엔터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AI 전지인이 말했다.
- 이 식당은 맛도 좋고 공짜인 것도 좋습니다. 찾아오는 보람이 있습니다.
프프걸스도 같이 밥을 먹으러 왔다. 그녀들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다이어트 식단을 따로 받았다.
막내 최지혜가 닭가슴살과 샐러드를 먹으며 물었다.
“근데요. 선생님은 요리를 그렇게 잘하신다면서 왜 우리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드세요?”
“남이 만든 밥을 더 좋아하니까.”
AI 전지인은 직접 구운 스테이크보다 남이 끓여준 라면을 선호한다. 당연히 라면보다 맛있는 음식은 더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건 레스토랑 페넬로페에서 파는 요리다.
나강인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기왕이면 남이 만든 밥을 선호하는 건 마찬가지다.
신은하의 매니저 박우섭이 구내식당에서 밥을 타고 돌아섰다가 나강인을 발견했다.
“어? 강인 씨.”
박우섭이 나강인의 옆 테이블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오신 김에 계약서에 도장 찍으시죠.”
“안 한다니까요.”
최지혜가 나강인에게 물었다.
“선생님. 피처링 계약서에 아직 도장 안 찍었어요? 우리 피처링 해주시는 거 아녜요?”
박우섭이 설명했다.
“그거 말고. 강인 씨 연기력이 장난 아니거든. 저번에 남양주 촬영장에서 내가 그 연기를 보고 놀라서 당장 도장 찍자고 졸랐는데, 씨도 안 먹힌다.”
최지혜가 물개 박수를 쳤다.
“대박. 노래도 잘하고 메이크업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연기도 잘해.”
“그게 다가 아니…. 아니다.”
“왜요? 뭔데요?”
“알면 다쳐.”
박우섭이 말을 돌리려고 나강인에게 물었다.
“내일 촬영에 복경산 장군 씬도 있던데요.”
AI 전지인이 정정했다.
- 복경산 부장입니다.
“내일은 장군이 아니라 부장이죠. 남양주 세트장이 아니라 서울에서 찍으니까요.”
“아. 그렇죠. 그날 본 복경산 장군이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자꾸 그렇게 부르게 되네요. 하하하. 지혜야? 그거 내려놔.”
막내 최지혜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에 나강인의 식판에서 반찬을 빼돌리다가 딱 걸렸다.
“딱 한 입만 먹으면 안 돼요?”
“응. 안돼.”
“저 성장기거든요?”
“그거 다 고려해서 식단 짜주는 거야.”
“풀떼기랑 퍽퍽살만 더 많이 주잖아요.”
“과일도 주잖아.”
“방울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래요!”
리더 소지혜가 최지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야. 그만해.”
“아니야. 언니. 이런 건 회사에 강하게 어필해야….”
“오늘은 날이 아니야. 알잖아.”
“아.”
프프걸스 네 사람은 나강인이 준 잡탕 과자를 회사 건물 밖으로 빼돌려야 한다.
최지혜는 박우섭에게 따지는 건 포기했다.
대신에 나강인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요리를 엄청 잘하신다면서요. 살 안 찌고 맛있는 요리도 만들 수 있어요?”
나강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지인아. 맛있는 다이어트 음식이 있냐?”
-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에게 낮은 열량의 음식을 제공할 리가 없잖습니까? 야전 전술 요리 스킬에 그런 건 없습니다.
“하긴.”
- 보급이 끊겼을 때, 식용 가능한 풀을 조리하는 레시피는 있습니다만.
“그거 샐러드로 딱이네.”
- 그런 경우는 생존이 우선이라 당연히 맛은 없습니다.
“어….”
나강인이 최지혜에게 말했다.
“그런 건 없으니까, 고생해라.”
***
이튿날 나강인은 ‘운명의 창’ 서울 시내 촬영장으로 갔다.
영화사 사무실은 세트장으로 쓸 수 없다. 영화사가 제공하는 건 인테리어가 잘 된 회의실 정도였다.
변형찬 감독은 종로에 있는 빈 사무실을 빌려 내부를 꾸미고 세트장으로 사용했다.
나강인은 지난번에는 복경산 장군 역을 맡아 주인공과 치열하게 싸우는 씬을 연기했다. 그때는 원래 복경산 역을 맡기로 한 배우가 교통사고로 다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했다.
그런데 일단 그 배역을 맡았으면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다른 씬 몇 개도 찍어야 한다.
“복경산은 출연장면이 많지 않고 씬도 짧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 출연을 많이 하면 요원님의 연기력이 들통났을 겁니다.
“내 연기는 네가 도와주잖아.”
- 제 보조는 전투 관련 상황일 때 효과가 큽니다. 평범한 일상 장면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도울 수 없는 부분은 직접 연기하셔야 합니다.
“그땐 국어책이라도 읽을까?”
주연배우 신은하가 다가왔다.
“어머. 강인 오빠. 정장이 진짜 잘 어울린다.”
“등장인물의 외모는 과거와 현재가 똑같다는 설정이니까.”
나강인이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헤어스타일과 수염만 빼고.”
현대의 부장급 회사원이 기다란 장발을 휘날리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나강인이 그 헤어스타일을 살리면, 다른 배우들도 과거 장면과 같은 스타일로 가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변형찬은 배우들의 현대 헤어스타일은 현대식으로 적용했다. 다들 수염도 매끈하게 깎았다.
나강인은 아직 얼굴을 변장하지는 않았다. 그건 유지 시간이 짧아서 촬영 직전에 하기로 했다.
신은하가 아쉬워했다.
“같이 연기하면 더 좋을 텐데.”
두 사람 다 오늘 촬영이 있지만, 같이 등장하는 씬은 없다.
“나랑 같이 찍으면 실망할 거다.”
“왜?”
“내 연기가 문제니까.”
“저번에 보니까 연기 엄청 잘하던데?”
“내가 싸울 때는 연기를 좀 하는데, 오늘은 그런 게 아니잖아. 내가 일상물에 약해.”
나강인의 출연분 촬영이 시작됐다.
공지현은 회사 건물 계단에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변장한 나강인이 계단을 올라오다가 공지현을 발견했다.
“어. 소연이구나?”
“앗. 복 부장님.”
복경산 부장은 소연이 소속된 팀의 바로 옆 팀 부장이다.
“내가 복부 장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하는 거 어떻게 알고 그렇게 불러?”
“예? 아니, 그게 아니라….”
“흐흐.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부장님은 왜 계단에….”
“운동하려고 걸어 올라오고 있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까 복부가 안 나오는 거야. 흐흐흐.”
“아, 네.”
“그런데 넌 왜 여기 이러고 있어? 아까 그 일 때문에 그래?”
“네. 제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AI 전지인이 경고했다.
- 전투와 상관없는 상황을 요원님이 직접 연기하고 계십니다. 부장급 개그가 요원님의 취향에 맞아 지금까지는 무난하게 넘기셨지만, 다음 대사는 직접 해결하셔야 합니다.
AI 전지인이 나강인이 하는 모든 행동을 지원할 수는 없다.
- 지금 제가 지원할 수 있는 건 정확한 발음과 표정 보정뿐입니다.
그의 눈앞에 대본이 떠 있었다. 나강인은 그걸 보고 읽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고 아무 감정 없이 그냥 읽으면 국어책 읽기가 된다.
그런데 다음 대사는 나강인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이다.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회사가 잘못한 거지.”
“네? 제가 맡은 일인데요?”
“신입사원이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맡겨놓은 회사 잘못이라고. 1년차 신입사원한테 경력 5년차 업무 수행 능력을 원하면, 월급을 다는 못 줘도 최소한 3년차 정도는 챙겨주고 대우도 그렇게 해줬어야지. 근데 안 그러잖아? 괜찮아. 괜찮아. 그럼 네 잘못이 아니야.”
복경산 부장이 계단을 계속 올라가며 말했다.
“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이런 말 한 거 비밀이다? 윗분들이 다들 속이 좁아서 이런 소리 들으면 날 또 괴롭혀. 흐흐흐.”
복경산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에 혼자 남은 소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 부장님이 복 부장님의 여유로운 성격을 반이라도 닮았으면 좋겠다.”
나강인의 오늘 촬영은 거기까지였다.
변형찬이 나강인에게 다가오며 웃었다.
“이야아. 느낌 좋았습니다.”
“연기는 영 익숙해지지 않네요.”
“잘하셨는데요. 발성도 좋고, 표정도 좋고.”
그 두 가지는 AI 전지인이 도와주었다.
“느낌도 참 좋았습니다. 제가 원한 게 딱 이겁니다.”
“저는 오전 촬영이 끝났으니까 이만. 오후에 뵙죠.”
그는 변장을 지우지도 않고 세트장으로 사용하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거리로 나온 후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떻게든 넘겼다.”
- 촬영씬이 워낙 짧아서 요원님의 하찮은 연기력이 들통나지 않았습니다.
“내 연기가 그래도 하찮지는 않잖아?”
- 제가 발음과 표정 연기를 보정해 드렸습니다.
“감정 전달은 내가 했다고. 내가 너무 잘해서 감독님이 대사를 늘리면 어떻게 하지? 그러면 곤란한데.”
- 방금 변형찬과 계속 이야기했으면 오후 촬영분의 대사가 늘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역시 너도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는구나?”
- 제가 잘 도와드린 겁니다.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당장 할 일은 없다.
“어디서 시간 좀 보내다가 오후 촬영시간에 맞춰서 다시 돌아가자.”
-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때까지는 변형찬을 피해야 합니다.
“그럼 그동안 뭘 하지?”
AI 전지인이 제안했다.
- 먹는 게 남는 겁니다.
“밥은 점심때 은하하고 같이 먹어야지. 오늘은 같이 일하는데 나만 먼저 먹으면 삐진다.”
- 몰래 먹고 빨리 소화한 후에 또 먹으면 됩니다. 이 근처에 맛집이 있습니다.
“그렇게 빨리 소화가 되겠냐?”
- 요원님에게 적용된 군용 신체 강화 기술은 에너지가 급히 필요할 때는 소화흡수력이 크게 증가합니다.
“역시 지구연합 전략특수군의 최첨단 기술! 밥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어!”
-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맛집이 어디라고?”
- 안내하겠습니다.
나강인이 AI 전지인이 알려준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이 총권도 수강생인 경찰 요원 박순기였다.
“여보세요.”
박순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나 사범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혹시 서울에 계십니까?
“종로 쪽에 있습니다만?”
- 만세! 이렇게 가깝다니! 하늘이 도왔습니다!
“하늘이 뭘 도와요?”
- 차를 보낼 테니까, 일단 여기 오신 후에 이야기를 들이시면 안 되겠습니까? 전화로 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음…. 그러죠.”
나강인이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왜 날 이렇게 급하게 찾아?”
- 경찰이 이미 인지한 사건입니다. 화력이 필요하면 중무장한 경찰특공대를 투입하면 됩니다.
“그치? 그러면 나한테 자문이라도 얻을 게 있나?”
- 그럴 거라고 예상됩니다.
***
공지현은 오늘 회사원 옷을 입고 연기했다.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가시는 거 봤는데 어디 계시지?”
그녀는 과거에는 무사 소연 역을, 현대에는 회사원 소연 역을 맡았다. 둘 다 중요한 조연이긴 하지만 어쨌든 주연은 아니다. 출연장면이 주연급으로 많지도 않았다.
오늘 그녀의 촬영은 한 번 남았는데 그때까지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그 촬영도 나강인과 같이 찍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나강인을 따라가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다음 촬영 때까지 나강인과 몇 시간을 같이 보내면서 오후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어디 계시…. 아! 저기 있다.”
그녀가 도로변에 서 있는 나강인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도로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어? 어디 불이라도 났나?”
그녀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소방차가 아니라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왔다.
“사건 현장에 출동하나 보….”
그 차가 나강인의 바로 앞에서 정지했다. 차 문이 열리면서 정복 경찰이 내려 경례했다.
“어? 왜 경찰이 선생님한테 경례를….”
나강인은 뒷문을 열고 차에 탔다. 경찰차는 곧바로 그곳을 출발했다. 이번에는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멀어지는 경찰차를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생님은 무술감독이고 배우인데, 왜 경찰한테 경례를 받고 경찰차에 타셔?”